64. 이 동네에서 니 허리가 제일 섹시해
2017.12.08.
“다 됐다.”
차분한 분홍색 립스틱을 덧바른 나봄이 마지막으로 거울을 확인했다.
소녀스러운 원피스와 한 시간 동안 공들인 머리, 그리고 아끼는 액세서리까지.
만반의 준비를 한 나봄은 오늘따라 더욱 생기가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태오와 정식으로 데이트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이번이 첫 데이트는 아니었다.
5년 전 연애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짧은 연애를 했을 때, 나봄과 태오는 첫 데이트를 가졌었다.
그러나 결과는 추억이라고 부를 만한 기억조차 건지지 못할 만큼 대실패였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그땐 뭐가 그렇게 어긋났었나 싶지만, 굳이 태오가 아니더라도 데이트는 망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5년 전의 나봄은 아직 지워지지 않은 첫사랑의 그림자 때문에 어느 누구와도 연애할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연인과 달콤할 시간을 보낼 준비도 의욕도, 차고 넘치도록 충분하니.
“좋아. 너무 들뜨지 말고, 긴장하지도 말고 평소처럼 하면 돼. 평소처럼!”
혼잣말로 심기를 다진 나봄은 미리 골라 두었던 핸드백을 들었다. 그러고는 침대 위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을 들었는데.
“아, 배터리 없다.”
배터리 용량이 십 퍼센트대로 진입한 휴대폰이 그녀를 힘 빠지게 만들었다.
지난밤 분명 충전해 놓고 잔 것 같은데 단자를 덜 꼽았었나?
“카페 같은 데 가서 충전해야겠다.”
나봄은 비실비실한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침대 옆에 꽂아 두었던 휴대폰 충전기까지 잊지 않고 챙겼다.
그러고 나서야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빠져나오니.
“한나봄 팀장! 한나봄 팀장!”
한 사장이 다급히 나봄의 이름을 불렀다. 총총 계단을 내려간 나봄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네네. 무슨 일이세요?”
“한 팀장! 비상사태야! 금성 호텔에 납품하기로 한 도어락 디자인 말이야! 완전 마음에 든다고 말해 놓고선 갑자기 바꿔 달라고 하네!”
“네?! 월요일 날 금형 작업 들어가잖아요!”
“그러니까 말이다! 미치고 팔짝 뛰겠네! 그래서 말인데 오늘 중에 다시 디자인 시안 수정 좀 해 줘야겠다!”
한나봄 팀장이라고 부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봄은 갑작스럽게 떨어진 업무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사안이 급하다는 건 알겠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의 부탁을 순순히 따를 수 없었다.
일주일 동안 애타게 기다렸던 데이트란 말이야. 태오한테 미안해서라도 일단은 나가야 해.
“저, 저기 아빠. 지금은 안 되는데…….”
“왜! 어디 나가?! 급한 일이야?!”
“급한 일이라기보단 중요한…….”
바로 그 순간.
♩♪♬♩♪♬―
가방 안에 들어 있던 나봄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그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태오일 게 뻔했다. 지금 대문 앞에서 들려오는 웅장한 엔진 소리만 봐도 알겠다.
“미안해요! 이따 저녁 때 사무실 가서 밤새 할게요!”
마음이 급해진 나봄은 일방적으로 한 사장의 부탁을 미뤄 두고 서둘러 구두를 신었다.
“야! 한나봄! 한나봄!”
현관문을 벗어나는 동안 따라붙은 한 사장의 외침은 매우 절박했다.
그러나 그에게 미안해지는 마음이 들수록 나봄은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붙잡히면 데이트고 뭐고 어쩔 수 없이 사무실까지 끌려가고 말 테니.
끼익―! 쿵!
요란하게 대문을 열고 닫은 나봄은 바로 앞에 서 있는 익숙한 까만 차에 몸을 실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나봄 때문에 초조해하고 있던 태오는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 한나봄?”
“안녕! 태오야! 일단 출발해 줄래?!”
나봄은 휘둥그레진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오는 당황한 와중에도 그녀의 말에 따라 순순히 브레이크를 풀었고, 내비게이션에 미리 입력해 둔 레스토랑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봄의 집 대문이 소란스레 열리는가 싶더니.
“한나봄! 너 거기 안 서!”
한 사장의 고함이 골목을 쩌렁쩌렁하게 메웠다. 그 불호령에 어깨를 잔뜩 움츠리는 나봄은 수상해도 너무 수상했다.
“뭐, 뭐야. 장인어른 왜 저렇게 화나셨어?”
태오는 주행 속도를 더욱 빨리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자랑스러운 일이라도 벌인 양 곧바로 터져 나온 나봄의 말은 뜻밖이었다.
“응! 당장 해야 할 업무가 생겼는데 그냥 도망쳐 버렸거든!”
“도망? 왜?”
“너 보고 싶어서!”
두근―
일을 미뤄 두고 무턱대고 사랑을 택한 여자 친구를 나무라야 하는데, 어째서 심장은 주책맞게 요동쳐 버리는 건지.
순식간에 귓불까지 열이 달아오른 태오는 괜히 인상을 썼다.
“왜, 왜 그랬어. 집에 가서 장인어른한테 엄청 혼나면 어쩌려고.”
그러고선 좋아 죽겠는 심정을 조금이라도 가려 보려 마음에도 없는 싫은 소리를 하니, 나봄은 그를 더욱 빤히 바라보며 묻는다.
“그럼 다시 들어갈까?”
“뭐?”
“데이트 일주일 더 미뤄도 되겠어?”
그녀는 태오의 마음을 캐물을 때 한층 더 사랑스러워진다.
동그란 눈동자, 귀엽게 올라간 말꼬리, 그리고 장난기 어린 눈웃음까지. 확 덮치고 싶어 미쳐 버릴 지경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약해진 태오는 무리해서 좁히고 있던 미간을 스르륵 풀었다.
“아니, 일주일 더 미루면 나 애간장 녹아서 죽어.”
그리고 흘려보내는 목소리에는 나봄 앞에서만 보여 주는 귀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눈가에 무심히 어린 눈웃음도 어쩌면 이리 소년 같은지, 운전하는 중만 아니라면 볼을 꼬집어 주고도 남았을 거다.
역시 도망쳐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나봄은 태오를 따라 배시시 웃어 보였다.
급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충분히 달콤한 데이트의 시작.
이제 막 시작된 그와의 하루는 벌써부터 나봄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지금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뭘 하며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오늘이 태오의 기억 속에도 가장 성공적인 데이트로 남을 거라는 사실이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 * *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번잡한 삼청동 길목.
교통난을 뚫고 가까스로 주차에 성공한 태오가 시동을 끄며 말했다.
“여기가 어디야?”
그에게 목적지에 대한 정보를 듣지 못했던 나봄은 뒤늦게 물었다. 그러자 태오는 자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미슐랭 별 세 개짜리 레스토랑.”
“미슐랭?”
“응, 예약하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와, 나 이런 데 처음 와 봐.”
“기대치 충족시킬 만큼 괜찮아야 할 텐데. 주차 공간 없어서 10분 늦긴 했는데, 괜찮겠지?”
차에서 내리는 태오는 몹시 신이 나 보였다. 그런 태오 덕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나봄은 그를 따라 차에서 몸을 빼냈다.
“자.”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에게 손부터 내미는 태오의 얼굴은 차에서 봤을 때보다 햇살 아래 있을 때 더욱 빛이 났다.
이제 보니 긴 코트에 회색 셔츠, 그리고 까만 슬랙스를 세련되게 차려입은 그는 오늘따라 더욱 섹시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 그에게 반하기에도 지친 나봄은 손을 잡는 대신 가슴을 딱 붙여 팔짱을 꼈다.
“내가 좋아 죽겠냐.”
샘솟는 나봄의 애정을 눈치챘는지, 태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더 이상 내숭 부릴 생각도 없는 나봄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태오의 얼굴은 순식간에 귀까지 붉어진다. 그가 수줍어하는 순간을 가장 즐기는 나봄은 조금 더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너는?”
“뭐가.”
“너는 내가 얼마나 좋아?”
나봄의 질문은 대답해 주기 곤란한 건 아니었지만, 태오는 어쩐지 목구멍이 간지러워 입도 뻥끗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눈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는 거 되게 귀여운데. 혹시 알고서 이러는 건가?
“늦었어. 얼른 들어가기나 하자.”
태오는 애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다른 때는 더 닭살스러운 말도 잘하면서 왜 멍석을 깔아 주면 부끄러움이 열 배로 상승하는지 모르겠다.
“치, 튕기기는.”
이젠 그런 태오의 속마음쯤이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나봄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해실해실 웃었다.
어느 틈에 태오의 매력에 푹 빠져든 나봄은 야성미 폭발하는 늑대 버전의 태오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사춘기 소년처럼 구는 모습도 충분히 좋아하고 있다.
어느새 남부럽지 않은 다정한 연인이 된 두 사람은 조경이 아름다운 레스토랑 정원을 지나 고급스러운 입구로 들어섰다.
대리석으로 꾸며진 레스토랑 내부는 미슐랭 쓰리 스타의 위엄을 드러내듯 으리으리했다.
“와, 도어락이 조각품처럼 생겼네. 되게 예쁘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고급스러운 정문 장식에 마음을 빼앗긴 나봄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초입부터 만족스러워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뿌듯해진 태오는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 카운터로 향했다.
정갈한 와이셔츠 차림을 한 직원은 다가오는 두 사람을 친절한 미소로 반겼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주말입니다. 예약은 하셨습니까?”
“네. 예약했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단태오입니다.”
태오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직원에게 제 이름을 말했다. 그걸 들은 직원은 곧바로 예약 기록을 확인했고.
“아, 단태오 님…….”
돌연 난처한 기색을 띠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태오는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저…… 죄송하지만 주말엔 손님께서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이 10분 이상 도착하지 않으시면 자동으로 예약 취소 처리하고 있습니다.”
“네?”
“죄송하지만 다음 기회에 저희가 더 제대로 모시……”
“아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멀쩡한 예약을 갑자기 왜 취소해요?”
예상치 못한 소식에 태오의 심기가 날카로워졌다. 도착은 10분 전에 했으나 주차 공간이 마땅찮아서 빙빙 돌아가 늦은 건데, 이런 식으로 허망하게 예약이 취소되는 건 너무나도 억울한 처사였다.
“10분 조금 넘겼습니다. 그것도 주차장에서 20분 허비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구요.”
태오는 살벌한 눈빛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직원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남은 자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단호한 직원은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하긴 꽉 차 있는 테이블을 보니, 봐주려고 해도 봐줄 수는 없었겠지만.
“그럼 애초부터 차를 가져오지 말라고 하든가…….”
욱한 태오의 언성에 슬슬 분노가 서리기 시작했다.
이런 날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나봄은 급히 태오의 손을 붙잡았다.
“태오야! 우리 다른 데서 먹자!”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나 사실 오늘 한식이 더 끌렸어.”
나봄은 태오를 어르고 달래며 방금 들어왔던 정문 쪽으로 이끌었다.
그녀를 뿌리치지 못한 태오는 순순히 레스토랑 밖으로 끌려 나와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함이 가시질 않았다.
진짜 예약 시간보다 먼저 도착했는데. 주차 때문에 늦어진 건데. 게다가 10분 지나면 예약 취소라는 말은 하지도 않았었다고.
진짜 너무……
“……미안해.”
열 받아.
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괜히 나봄이 겁을 먹을까 싶어, 태오는 잘못을 빌 것도 없는 사과만 건넸다.
나봄은 동그란 눈으로 그런 태오를 빤히 쳐다보았고, 이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뭘?”
“어?”
“니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사과를 해.”
다행히도 나봄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첫 번째 코스를 이렇게 망쳐 버렸는데도 그녀의 기분은 괜찮은 모양이다.
그제야 안도한 태오는 급히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내가 다른 레스토랑도 알아볼……”
하지만 인터넷을 제대로 열기도 전에 나봄은 그의 휴대폰을 가로채 갔다. 그러고는 그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저기 가자!”
“어디?”
태오는 그녀의 손끝이 향한 곳을 확인했다. 그러자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건 레스토랑 건너편에 위치한 백반집이었다.
첫 데이트의 점심을 함께할 공간치고는 너무나도 소박한 외관은 태오의 눈에 영 못 미더웠다.
“저걸로…… 되겠어?”
두 번 다시 데이트를 망치고 싶진 않았던 태오는 탐탁찮은 눈빛을 띠고 물었다.
나봄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이 동네 주차하기도 힘들잖아. 멀리 찾아서 가지 말고 이 근처에서 후딱 밥 먹고 오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지만 태오의 불안한 마음은 어쩐지 가시질 않았다. 아직까지 분위기가 좋은데도 자꾸 눈치를 보게 되고, 막 시작한 데이트가 벌써부터 걱정스러워진다.
“나 배고파. 얼른 밥 먹으러 가자!”
그런 태오의 허리를 단단히 휘어잡은 나봄은 건널목을 향해 씩씩한 걸음을 이끌었다.
태오는 그때까지도 심란함을 달래지 못하고 있었으나.
“저긴 이 레스토랑보다 조용해서 니 목소리도 더 잘 들릴 것 같아서 좋아.”
나봄의 너스레 한 번에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하여간, 요즘 따라 더 적극적으로 군다니까.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던 초반의 한나봄은 어디로 갔는지 몰라.
“은근히 내 허리 만지지 마. 간지럽단 말이야.”
나봄의 애정 표현에 불안감이 사르르 녹아 버린 태오는 튕기듯 말했다.
그러면서도 정말 그녀가 제 허리에서 떨어져 버릴까 싶어,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아 놓는 그는 오늘 수줍음 많은 사춘기 소년으로 콘셉트를 정한 모양이다.
‘그럼 마음껏 귀여워해 주는 수밖에!’
나봄은 레스토랑에서의 분노를 겨우 잊어버리고 다시금 신이 난 태오를 한껏 띄워 주기로 했다.
“태오야, 너 그거 알아?”
“뭘 알아.”
“지금 이 동네에서 니 허리가 제일 섹시해.”
속삭이는 목소리로 엉큼한 칭찬을 건네니, 태오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졌다.
“그만해. 얼굴 빨개져.”
나는 지금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매끄럽게 올라가는 검붉은 입술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럽다.
아마 그 어떤 귀여운 존재도 너의 사랑스러움을 따라가진 못할 거야.
그건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내가 자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