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나는 당신에게 특별하지 않아요
2017.12.04.
한봄 도어락 공장 근처, 낡은 벤치.
바람마저 멎은 탓에 고요하기만 한 그곳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차준과 거리를 두고 앉은 나봄은 그 침묵을 감당하기 어려워, 괜히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두의 연락을 피해 잠적했다는 차준이 내게 찾아온 거라면 분명 무슨 용건이 있을 텐데, 왜 그는 입술조차 떼어 내질 않는 건지.
나봄은 굳게 말문을 닫은 그가 걱정스럽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나쁜 생각이 가득 차 있을 것 같아서 자꾸 불안하기만 하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망설이던 나봄이 먼저 첫 마디를 꺼냈다. 그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는 나봄의 목소리는 다소 무거웠다.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봄의 얼굴을 바라본 차준은 흐린 숨과 함께 지친 음성을 흘려보냈다.
“마지막으로 니 얼굴 보러.”
마지막으로, 라는 말은 나봄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런 그가 더욱 불안해진 나봄은 차준에게로 몸을 틀었다.
“마지막이라니…… 왜 떠나는 사람처럼 말해요.”
“떠나면 안 돼?”
“네?”
“어차피 내가 사라져 버린다고 해서 아쉬워할 사람도 없는데.”
그리 말하는 차준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무색할 만큼 그의 눈빛은 공허했다. 세상으로부터 숨은 그에게는 분명 수많은 감정들이 가라앉아 있을 텐데도.
“본부장님…….”
나봄의 얼굴에 어려 있던 걱정이 보다 짙어졌다. 그걸 본 차준은 평소처럼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농담이야.”
농담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차준은 이런 우울한 소리를 농담으로라도 꺼낸 적이 없었으니까.
더 이상 그의 사정에 대해 모른 척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봄은 얼마 전 들은 차준의 과거사를 떠올리며 민감한 주제를 조심스레 풀어 놓기로 결심했다.
“본부장님 힘들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동안 다 괜찮은 척 웃고 있어도 많이 외로웠을 거라 생각해요.”
“…….”
“물론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꼭 이겨 냈으면 좋겠어요. 지나간 과거보다 지금의 삶이 더 중요하니까.”
차준은 그녀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 게 분명했다.
아직 그의 입가에 어려 있는 미소는 여전히 솔직한 감정들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이럴 때 필요한 건, 그가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태준 씨도…… 많이 걱정하잖아요.”
아니나 다를까.
기어이 흘러나온 그 사람의 이름에 차준의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나봄은 급속도로 차가워진 그의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본부장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아요. 그럴 땐 누군가에게 의지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마음을 조금만 열고…….”
그때.
“니가 있어 주면 되잖아.”
차준이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다시 바라본 그의 눈빛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본부장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어. 나도 누군가한테 의지하고 싶어. 그러니까 니가 나를 받아 줬으면 좋겠어.”
“…….”
“니가 없으면 정말 죽을 것만 같아.”
더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겠는지, 차준은 애절한 손을 뻗어 나봄을 붙잡았다. 그의 온도는 열병이라도 오른 것처럼 뜨거웠다.
나봄은 그 손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차준은 그럴수록 더욱 손끝에 힘을 주었다.
“나봄아…….”
애닳는 음성으로 그가 그녀를 불렀다.
“제발…… 너만은 날 버리지 마.”
그리고 애원했다. 애초부터 그녀는 가진 적도 없었던 사람이었건만.
“너도 알잖아. 나는 너의 곁에 있어야 해.”
“…….”
“내가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시절은 너와 함께했을 때였어. 그땐 아파도 아픈 줄 모르고 살았으니까.”
“…….”
“그런데 지금은 니가 없어서 너무 힘들어. 하루하루 버티는 게 정말 지옥같이 힘들어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아.”
솟구치는 감정을 미처 추스르지 못한 차준의 목소리가 점차 젖어 들었다. 어느새 축축해진 그의 눈가는 차마 바라보기도 힘들 만큼 안쓰러웠다.
아이같이 웃고 있어도 누구보다 어른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순간의 그는 전혀 어른스럽지 않다.
오히려 처음 무너졌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자라지 못한 사람처럼,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마음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
나봄은 그런 차준을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지친 어깨. 황폐한 눈동자. 차가운 숨.
이제야 그녀의 눈에 담기기 시작하는 것들은 그가 완벽하다 믿고 있던 과거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래서 뒤늦게라도 그의 아픔을 달래 주고 싶지만. 붙잡을 곳이 없어 이미 떠난 나를 붙잡으려 하는 그를 꽉 안아 주고 싶지만.
‘그럴 순 없어. 나는 그를 사랑해 주지도 않을 거니까.’
마음을 다잡은 나봄은 차준이 간절히 붙잡고 있던 손을 빼냈다. 그리고 애원하는 그의 눈빛과 상반된, 흔들림 없이 차분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했다.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그녀를 바라보는 차준의 표정엔 불안함과 초조함이 질척하게 뒤섞여 있었다.
나봄은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떼어 내 물었다.
“정말 내가 없어서 힘들어요?”
차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그녀는 연달아 질문을 던진다.
“내가 곁에 있으면 더 이상 아플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다시 예전처럼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
“정말…… 그럴까요?”
딱히 대답을 바라지 않는 것 같은 나봄의 태도에 차준은 잠시 미동조차 않고 굳어 버렸다.
나봄은 긴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오빠는 우리가 사랑했던 그때가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말하지만 내 기억은 조금 달라요. 오빤 내 곁에서 항상 웃고 있었지만 그건 누구에게나 그랬어요. 나라고 해서 특별하진 않았어요.”
“아니야…….”
“아니요, 오빠가 정말 행복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나는 너무 잘 알아요. 그래서 똑똑히 구별할 수 있어요.”
“…….”
“오빠는 주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지내다가…… 가끔씩 들려오는 형의 소식에 진심으로 행복해했어요.”
그 말을 하며 나봄은 그가 정말 마지막으로 행복하게 웃었던 때를 떠올렸다.
헤어지기 얼마 전인가. 차준은 미국에서 유학 중인 형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한동안 불안해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토록 걱정했던 형에게서 편지 한 통이 도착했었을 때. 차준이 얼마나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었는지.
‘형한테 편지는 처음 받아 봐. 맨날 전화만 했었는데…….’
‘글씨는 여전히 잘 쓴다.’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얘기만 가득 적혀 있어. 아직도 내가 어린애처럼 보이나. 하하.’
그건 그동안 지어 보였던 버릇 같은 미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봄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차준은 다시 그녀와 재회한 이후에도 진심으로 행복했던 그때로 돌아가진 못했다는걸.
나봄은 보다 단호한 표정으로 입술을 떼어 냈다.
“차준 오빠가 정말로 행복했던 시절은 마음껏 태준 씨를 동경했던 그 시절이었어요.”
“…….”
“나는 그 순간을 함께 나눴던 사람에 지나지 않아.”
마지막 나봄의 한 마디는 차준의 앞에 그어 둔 뚜렷한 선과 같았다.
당신이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은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으니, 제발 그에게로 돌아가라는.
그러고 싶지 않았던 차준은 고개를 저었다. 나봄을 향한 그의 눈빛은 애원보다는 거친 저항에 가까웠다.
“아니야…….”
“…….”
“그렇지 않아…….”
차준은 고집을 부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거칠어진 그의 호흡은 격하게 요동치는 감정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차준은 한동안 입술을 꽉 물었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참아 냈다.
“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리고 뱉어 내는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의 그런 모습을 처음 봤던 나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려 왔다.
“우린…… 아무것도 아니었어.”
차준이 한 번 더 힘주어 꺼내 놓은 말은 스스로를 위한 말이었다. 그가 말하는 ‘우리’가 누굴 뜻하는지 알고 있는 나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었어.”
“…….”
“그래……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리 몇 번을 얘기하고 나서야 붉어지려 했던 차준의 눈동자는 차츰 잦아들었다.
아마 차준은 오늘도 스스로가 만들어 낸 깊은 어둠 속에 묻혀 버릴 생각인가 보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행복했던 그 시절, 그에게 전부였던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차준 오빠…….”
나봄은 안타까움이 가득 실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발걸음을 떼는 그의 뒷모습은 한없이 외로워 보였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를 만큼 깊어진 상처.
기어이 한 걸음 더 뒷걸음질 치고 만 그는 하염없는 어둠으로 추락하기 직전인데.
눈앞에 있는 그 사람의 손을 어째서 거부하려고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득히 멀어지는 차준에게서는 분노보다 두려움이 더 짙게 느껴져서, 나봄의 마음은 몹시 혼란스럽기만 하다.
* * *
가로등 불빛만이 길을 밝혀 주는 좁은 골목길.
나봄은 평소보다 느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원래 집 앞까지 도착하는 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골목인데, 왜 오늘은 이리도 멀게 느껴지는 건지.
아무래도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서인 것 같다.
나봄은 차준이 다녀간 뒤로 심란해진 감정을 좀처럼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나봄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런 상태로 들어가면 괜히 한 사장만 걱정시킬 게 뻔한데…….
어디 가서 표정이라도 정리하고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그때.
“저기요, 아가씨.”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던 골목에서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놀란 나봄이 고개를 들자, 열 발자국쯤 앞 가로등에 서 있는 검은 실루엣이 한 번 더 살갑게 말을 걸었다.
“너무 늦은 시간에 다녀서 남자 친구가 걱정 많이 하겠어요.”
“…….”
“들리는 소문으로는 아가씨 남자 친구가 엄청 잘생겼다고 하던데, 그런 미남을 걱정하게 만들면 쓰나.”
“태오……?”
나봄은 뒤늦게 알아차린 사람의 이름을 흐리게 불렀다.
그러자 태오는 정답을 맞힌 그녀에게 손을 휘휘 흔들어 보였고, 나봄이 서 있는 곳까지 성큼성큼 걸어왔다.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그러운 미소가 얹혀 있는 상태였다.
“오늘 좋은 일 있었어?”
“아니.”
“그럼 왜 자꾸 웃어.”
“니 앞이니까.”
만나자마자 달콤한 멘트를 꺼내 놓는 태오는 나봄의 우울한 감정이 잠시 물러가게 만들었다.
나를 보는 눈빛마저도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예전에 맹수처럼 사납던 단태오의 이미지는 어디로 갔나 싶다.
“오늘 많이 바빴냐.”
“아니, 별로 안 바빴는데 왜?”
“오늘따라 지쳐 보여서 무리했나 했지.”
태오는 평소보다 힘이 없어 보이는 나봄에게 말했다. 나봄은 괜히 태오까지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녁이라서 그래. 별로 힘들진 않아.”
“정말?”
“응, 정말.”
그리 대답하는 목소리마저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태오는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사실 지금 그의 손에는 그녀의 피로를 단번에 물러가게 할 마법 같은 선물이 들려 있으니.
“자, 선물.”
태오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그가 뭘 들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던 나봄은 그의 손으로 눈동자를 내려 두었다.
그제야 시야에 들어오는 건 이 근처 베이커리에서 파는 예쁜 딸기 무스 케이크였다.
“이게 뭐야?”
나봄의 두 눈이 반짝이며 물었다. 태오는 그녀의 품에 케이크 박스를 넘겨주며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너한테 뭐 물어보러 오는 김에 생각나서 샀다.”
“응?”
“아, 혹시 단 거 안 좋아하나.”
이미 신이 나서 선물해 놓고 뒤늦게 걱정할 건 또 뭐람.
중요한 순간에 어리숙한 태오가 귀여웠던 나봄은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가끔은 색기가 자르르 흐르는 늑대였다가, 또 가끔은 모성애 제대로 자극하는 순진한 꼬마였다가.
극과 극을 달리는 그의 매력 때문에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뭔데?”
나봄은 퐁퐁 샘솟는 애정을 들키는 게 부끄러워,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물었다.
그러자 얼굴에서 걱정을 싹 지워 낸 태오가 꺼낸 질문은 의외였다.
“주말에 뭐해?”
“주말?”
“어, 시간 있으면 나랑 데이트나 하자.”
하긴, 사귀고 나서 제대로 데이트한 적은 없었나.
라고 생각할 때쯤 태오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붙잡았다. 수줍음 가득한 나봄의 눈동자가 또렷이 태오를 마주했다.
태오는 시선이 맞닿은 눈가를 곱게 휘어 웃었고, 이내 나직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오빠가 좋은 데 데려가 줄게.”
들뜬 그의 목소리에선 품에 안긴 케이크만큼이나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그 향기에 취한 나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루 종일 그녀를 따라다녔던 근심 걱정 따윈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쁜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