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남친이 내게 반했다-62화 (62/104)

62. 한 걸음 뒤 낭떠러지

2017.12.01.

[본부장님, 저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오피스 가구 파트장 허유리입니다. 급한 일로 뵙고 싶은데 통 연락이 되질 않으시네요. 무슨 일 생기신 건 아니죠?]

이게 벌써 몇 번째 보낸 메시지인지. 확실한 건 되돌려 받은 회신이 단 한 통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던 유리는 답답한 마음에 인상을 잔뜩 구겼다.

요즘 들어 콧노래까지 흥얼거릴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이는 태오는 나봄과 제대로 된 연애 전선에 들어간 게 분명한데, 이 위기의 순간에 선우차준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아마 메시지를 못 보진 않았을 거다. 업무 때문에라도 휴대폰을 몇 번 들여다보긴 했겠지.

하지만 답신을 주지 않는다는 건 유리의 도움 요청을 무시해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그의 태도가 너무도 속 터졌던 유리는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대로 한나봄을 단태오한테 넘기겠다는 거야, 뭐야. 만에 하나라도 그러면 안 되는데.”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던 유리는 그에게 닿을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생각했다.

메시지도 계속 무시하는 와중에 전화는 당연히 받지 않을 테고. 무작정 본사로 찾아가자니 워낙 바쁜 사람이라 마주치기도 힘들 것 같고.

“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유리의 뇌리에 적절한 인맥 하나가 떠올랐다.

평소 친분이 있던 비서과 직원. 그녀라면 선우차준의 스케줄을 꿰고 있을 테고, 그가 적절히 쉴 수 있는 시간도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역시 두루두루 다니면서 인맥 관리 해 두길 잘 했어. 이럴 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잖아.

드디어 차준에게 닿을 방법을 모색해 낸 유리는 의욕적인 눈빛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언니,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해?]

혹시나 바쁠까 싶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 놓자, 전송 버튼을 누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유리는 엉망진창인 기분을 감쪽같이 숨기고, 밝은 인사를 건넸다.

“언니! 오랜만이야! 마침 통화 가능했나 보네?”

―응, 커피 타임인 거 어떻게 알고 연락을 했대?

“나야, 언니에 대해 모르는 게 없지. 하하.”

―넉살은 여전하네. 그래, 무슨 일로 다급하게 날 찾으시나?

간만의 연락이었지만 분위기는 어색한 기운 하나 없이 그저 살가웠다. 지금이라면 본론을 꺼내 놓아도 된다고 생각한 유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차준의 이름을 언급했다.

“선우차준 이사님 말이야. 오늘 사무실에 계시나?”

―이사님? 이사님은 갑자기 왜?

“아, 정말 급하게 드려야 할 보고가 있어서. 그런데 통 연락이 닿질 않네.”

회사 차원의 연락인 척 하는 건 혹시나 생길지 모를 구설수를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곧이어 터져 나온 비서과 직원의 반응은 정말 의외였다.

―그렇지? 이사님이랑 연락이 안 되지?

“응?”

―우리도 그거 때문에 아주 비상이야. 금요일부터 지금까지 연락이 두절되어 버려서 중요 스케줄이 전부 캔슬 됐다니까.

선우차준 본부장이 연락 두절?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들은 유리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하지만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 그녀는 금시초문인 티를 내지 않고 적당히 맞장구쳤다.

“그, 그러네. 언니 쪽이 난리 났겠다. 이사님은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거래?”

―모르긴 몰라도 정황상 잠적이 아닐까 싶어. 정말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거든.

“아아…… 혹시 안 좋은 낌새는 없었지? 최근에 무슨 일로 충격 받아서 우울하다든가, 의욕을 잃었다든가.”

―나야 기본적인 스케줄 관리만 하니까 이사님 상태에 대해선 잘 모르지. 그런데 느낌이 아주 쎄한 게, 끔찍한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 걱정스럽다니까.

그를 향한 염려를 드러내는 비서과 직원은 더 이상의 정황에 대해선 모르는 듯했다.

그러나 유리에게는 얼핏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창립 기념회 연회장에서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던 한나봄과 단태오.

어쩌면 그들은 같이 사라졌을 테고, 차준은 유리보다 앞서 둘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굳이 유리가 나서서 둘의 관계를 알려 주려고 애쓸 필요는 없을 터였다.

‘이제 뭐 알아서 나서 주겠네. 그래, 지금도 칼을 갈고 있느라 잠적 중인지도 몰라.’

혹시나 하는 기대감은 유리의 답답한 마음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주었다. 어차피 욕망을 현실로 만드는 건 모든 걸 가진 그에겐 쉬운 일이게 분명했다.

“그래, 일단은 알았어. 만약 이사님이랑 다시 연락되면 나한테 꼭 말해 줘.”

유리는 한결 가뿐한 표정으로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내려놓기 전, 이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동요할 사람에게 문자 한 통을 보내 놓았다.

비록 그녀는 이제 막 피어난 사랑에 취해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지만,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아니, 적어도 사람의 탈을 쓰고 있다면 벼랑 끝까지 몰린 그 사람을 외면하진 못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는 또 버려지게 될 테지만…….

너무 상심하지는 마. 그녀는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간 것뿐이니까.

어차피 너는 그녀 곁에 있을 때보다, 차라리 홀로 외로이 남겨져 있을 때가 더 가치 있었어.

* * *

똑똑―

서 대표의 집무실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오후까지 확인해야 할 사업 제안서를 훑어보고 있던 서 대표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들어와.”

그러자마자 들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비서실장이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은 평소 침착하던 그와 달리 다소 급했다.

“무슨 일이야?”

긴박한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서 대표는 고개를 그에게로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김 실장은 긴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선우차준 이사님이 지난 금요일부터 벌써 며칠째 잠적 중이십니다.”

그건 꽤나 중요한 안건이긴 했으나 서 대표로서는 관심도 없는 화젯거리였다.

원래부터 감정에 휘둘려 왔던 그 녀석은 아마 창립 기념회 행사에서 있었던 소란 때문에 지금까지 청승을 떨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서 대표는 별일 아니라는 듯 귀찮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야? 전부터 회사에서 트러블이 생길 때마다 제집에 틀어박혀서 출근 거부하곤 했었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땐 적어도 연락은 닿았었습니다. 본인 스케줄에 차질이 생기는 잠적은 하지도 않으셨구요. 하지만 현재는 모든 스케줄을 무시한 채 연락 두절된 상태입니다.”

“집에는 찾아가 봤어?”

“네, 벌써 몇 차례나 찾아가 봤지만 안에서는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찰에 도움 요청을 해 볼까 합니다만…….”

그리 대답하는 김 실장의 음성은 긴박했다. 그러나 서 대표는 가당찮은 그의 얘기에 눈썹을 잔뜩 구겼다.

“회장님 귀에 들어가면 나한테 불똥 튀는 거 몰라? 경찰까지 개입시켜서 일 키우지 마.”

“그래도…….”

“어차피 허튼짓을 하진 않았을 거야. 그 애는 이승과 연을 끊어 버릴 정도로 모질지는 못하거든. 또 어김없이 제 한 몸 의지할 데를 찾아 헤매고 있겠지. 예를 들면…….”

딱 거기까지 얘기한 순간, 서 대표의 머릿속에 어떤 얼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지난 창립 기념회 행사 때, 차준의 곁에 서서 제법 맹랑한 소리를 해 댔던 나봄이었다.

‘이런 식의 감정싸움으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럴수록 비참해지는 건 폐가 될까 봐 여기 오지도 못한 그 사람뿐이잖아요…….’

그날 그녀가 서 대표에게 내뱉었던 말은 그들의 집안 사정을 알지 못하고서는 하지 못했을 얘기들이었다.

“……한나봄.”

서 대표는 이쯤 되면 무시하지 못할 그녀를 입에 담았다.

“한나봄 뒷조사 좀 해 봐. 특히 우리 태준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지.”

뒤이어 꺼내지는 명령은 별다를 게 없었다.

태준이 나봄에게 찾아가겠다고 했을 때부터, 태준의 모든 걸 꿰고 있는 서 대표가 나봄에게 흥미를 가질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

“선우차준이랑 대체 무슨 관계였는지도 제대로 조사해.”

하지만 이어지는 두 번째 명령은 의외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신경 쓰려고 하지 않았던 그녀였으니.

한 번쯤은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으나, 김 실장은 굳이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 집안에 깊이 관여해 봤자 위험해지는 건 본인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김 실장은 평소대로 차분히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세워 한 번 더 가벼운 묵례를 건넸다.

서 대표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나.

끼익―

탁.

“하아…….”

김 실장이 사무실을 떠나고 나서야 입술 새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안에 묻어 있는 씁쓸함은 어느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었다.

처음부터 새장 안에 갇힌 새와 다름없었던 운명.

그걸 벗어나려 했던 대가는 예상보다 가혹했다. 다시는 헛된 꿈을 꾸지 못하도록 날개를 잘렸고, 발버둥조차 치지 못하도록 처참히 짓밟혔다.

그런 내게 딱 하나 남은 희망은 그 사람이 남겨 주고 간 우리의 아이뿐.

그 아이가 상처를 입지 않도록 두 번째 모정은 처음부터 만들지도 않았다. 그 아이가 가려지지 않도록 두 번째로 틔운 싹은 아예 잘라 버렸다.

그러나 결국 상처 입은 사람도, 잘려져 나간 사람도 전부 그 아이였다.

어떻게든 노력해 보려고 하면 할수록 비참해지는 건 오직 소중한 내 아이뿐이었다. 당돌했던 그녀의 말처럼.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니.”

지친 서 대표는 흐린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에 대한 정답은 오래도록 찾아 헤매고 있었으나 한 번도 눈에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 나봄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걸 조금이라도 알고 계시다면 사람들 앞에서만큼은 감정싸움을 자제해 주세요. 더 이상 엄한 사람 꼴만 우스워지지 않게…….’

서 대표가 그날 어떤 심정으로 연회장을 찾아갔는지 조금도 몰랐기에 늘어놓을 수 있었던 헛소리.

하지만 그 말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는 순전히 태준을 위한 조언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홀로 싸워 온 서 대표에게는 그 정도의 형식적인 걱정을 건네주는 사람도 없었다.

외로운 사투에 짓눌린 서 대표는 다시 동요해 버리려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온 신경이 아릿한 고통에 집중되자 가슴의 쓰라림은 한층 옅어졌다.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 상처를 다스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감정을 절제해 달라는 그녀의 부탁과 달리, 조만간 나조차도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감정이 터져 버릴까 걱정이다.

* * *

“이게 무슨…….”

스케줄에 치이고 있던 월요일 낮.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나봄의 눈동자가 옅게 떨려 왔다. 분주하지만 평온했던 그녀의 하루를 혼란으로 물들인 건 다름 아닌 유리가 보낸 문자 한 통이었다.

[나봄 씨, 그 소식 들었어? 창립 기념일 행사 이후로 본부장님이 잠적했대. 어느 누구와도 연락이 안 돼서 혹시 안 좋은 선택을 한 건 아니신지 다들 걱정하고 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봄 씨는 알아?]

그녀가 전한 소식은 나봄을 본능적으로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난 창립 기념일 행사에서 차준을 매정히 떠나왔던 그녀는 서럽도록 아팠던 그의 손길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본부장님……?’

‘놔, 놔주세요. 아파요.’

아프도록 그녀를 붙잡았던 마지막 손길은 지금 떠올려보니 다 무너져 가는 사람의 애원과 비슷했다.

그걸 외면했던 나봄은 차준의 잠적이 큰 비보로 이어질까 봐 무섭다. 그런 끔찍한 생각은 밀어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나쁜 생각이 든다.

“설마…….”

순간 눈앞이 하얘져 버린 나봄은 그만 휴대폰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숨통은 호흡까지 막아 버릴 것처럼 조여 오고.

그러나 나봄은 불안한 와중에도 이성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지금 자신이 어떻게 처신하는지가 후사에 영향을 미칠 거라는 사실을 그녀는 잘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나봄은 떨어진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초조한 눈빛으로 차준의 번호를 찾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그녀의 손끝은 옅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야, 아무 일 없을 거야. 그 사람은 언제나 강인했었잖아.’

하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은 나봄은 가만히 숨죽인 채 차준의 통화연결음을 들었다.

받아 줘. 받아 줘. 제발 받아 줘.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올 그의 목소리를 간절히 바라며.

그때.

“여보세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봄의 가슴은 안도하기는커녕, 다른 의미로 더욱 불안해져 왔다.

“차준 오빠…….”

혹시나 끊어져 버렸을까 걱정했던 그의 숨소리는.

“응, 나봄아.”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나봄은 속눈썹을 가늘게 떨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찬찬히 눈에 담기는 얼굴은 분명 차준의 것이었다. 평소처럼 웃고는 있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보기 힘들 만큼 괴로워 보이는.

“날 걱정하고 있었어?”

“…….”

“기쁘다…….”

머지않아 흘러나오는 차준의 음성은 하염없이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이 무색할 정도로 위태로웠다.

“나 아직까지는…… 없어지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

한 발짝만 더 뒷걸음질 치면 그대로 떨어져 버릴 낭떠러지에 서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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