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그녀의 두 번째 연애 상대
2017.11.27.
“으으…….”
지끈거리는 두통에 절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미간을 찡그린 채 끙끙거리던 태오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슬슬 느껴지기 시작하는 건 눈을 찌르는 듯한 아침 햇살. 손끝에 만져지는 포근한 이불의 촉감.
그리고 신경이 곤두설 정도로 타는 듯한 갈증.
“아, 목말라…….”
태오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선 천근만근 무거워진 눈꺼풀을 가까스로 치켜 올리자.
“……어?”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장소가 그를 반겼다.
분홍색 벽지, 책장에 진열되어 있는 아기자기한 인형, 제 것은 아닌 게 확실한 옷가지들.
여러 가지 물건들로 추리해 보건대, 이곳은 분명 여자의 침실이었다.
“뭐야, 여기가 어디야.”
그제야 이성이 돌아온 태오는 자신의 기억이 이상한 지점에서 끊겨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밤, 나봄의 집에서 한 사장과 술을 마셨던 그는.
‘……선생님을 장인어른으로 맞이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나, 날?’
‘장인어른이 되어 주십시오!’
그에게 거침없는 구애를 펼쳤고.
‘결혼 얘길 이런 식으로 꺼내는 건 또 처음 봤구만! 처음엔 아주 뻣뻣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주 유머러스하네!’
‘좋아, 기분이다! 나봄아, 고기만 먹기 심심하니까 요 바로 앞 횟집에서 모둠회 좀 떠 와라!’
기분이 좋아진 한 사장은 흔쾌히 지갑을 꺼내, 회를 사 주겠다고 나섰고.
‘좋아, 단 서방! 그거 아는가!’
‘아니요, 모릅니다.’
‘내가 이래 봬도 전국 노래 자랑 예선 합격 출신이라네! 내가 한 곡조 뽑아 볼 테니까 귀 기울여 잘 들어 봐!’
나봄이 횟집에 다녀오는 동안 한 곡조를 뽑겠다고 했고.
‘언제나 찾아오는 부두의 이별이 아쉬워 두 손을 꼭 잡았나!’
가사가 아주 구슬픈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절절한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아, 이별 노래는 안 되는데…….’
‘눈앞에 바다를 핑계로 헤어지나.’
‘그, 그만!’
제 술버릇이 도질 것 같은 느낌에, 태오는 황급히 그의 노래를 막으려 했지만 하필 그 시점에 노래는 클라이맥스에 다다라서.
‘아아― 아아―! 이별의 눈물 보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안 돼…….’
‘남자는 다 그래!’
‘으으…….’
결국엔 눈물보가 터져 버렸던 것 같다. 그것도 서글프게 뚝뚝.
‘아니, 자네! 왜 울고 그래! 내 노래가 그렇게 와 닿았나?’
축축이 젖은 눈가를 본 한 사장은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차마 술버릇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태오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으며 대답했다.
‘네…….’
바로 그 대답이 가수로 데뷔하지 못한 게 한이었던 한 사장의 마음을 제대로 움직였다.
그 꿈의 근처라도 가 보기 위해 전국 노래 자랑에 나갔건만, 본선에서는 초반부터 음 이탈이 나는 바람에 사람들의 차디찬 시선만 받고 내려와야 했던 그였다.
‘자네…… 내 노래에 이렇게나 감동을 받다니.’
먹먹한 눈빛으로 태오를 바라보던 한 사장은 이내 두 팔을 벌려 그를 꼭 감싸 안아 주었다.
서로의 마음을 전혀 읽지 못했지만 어쨌든 무척이나 친밀해진 두 사람의 사이.
순식간에 모든 긴장감이 풀려 버린 태오의 몸에 그제야 취기가 확 돌았다. 기억은 바로 그 뒤 거짓말처럼 끊겨 버렸고, 눈을 떠 보니 그는 익숙한 살결의 향기가 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상황이다.
“여기…… 한나봄 방인가.”
드디어 자신이 잠들었던 장소를 알아챈 태오는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나봄의 집에 입성한 것도 모자라 침대까지 진입하다니. 진짜 사위가 된 것 같잖아, 이거.
“태오야, 아직도 자?”
그때, 양반은 못 되는 나봄이 방문 앞에서 그를 불렀다.
태오는 옷을 다 갖춰 입었으면서도 괜히 이불을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 일어났는데 왜.”
“너 출근 시간 다 된 것 같아서. 회사에 전화 안 해 봐도 괜찮겠어?”
“아…… 오늘 금요일이었지.”
“응, 일단 나 잠깐만 좀 들어갈게!”
머지않아 문이 열리고 나봄이 방실방실 웃는 낯으로 들어섰다.
필름이 끊긴 채로 그녀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는 사실이 몹시도 창피했던 태오는 그녀와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속내를 전혀 몰랐던 나봄은 그저 해맑은 얼굴로 어제의 얘기를 꺼내 놓았다.
“어제 회 잔뜩 사 가지고 돌아왔더니 우리 아빠 품에 안겨서 곤히 자고 있더라.”
“그, 그랬냐.”
“기억은 나? 필름 끊긴 것 같던데.”
“아, 아니야. 생각할 게 있어서 잠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치, 생각은 무슨. 그런 것치고는 내 침대까지 옮겨 놓는 동안 눈 한 번을 안 뜨던데?”
역시 나봄은 맹해 보여도 쉽게 속아 주진 않는 사람이었다.
허무맹랑한 변명을 내뱉었다가 더욱 민망해져 버린 태오는 차라리 말을 돌리기로 했다.
“지금 몇 시지? 나 적어도 열 시 반까지는 출근해야 하는데.”
사실 오늘의 스케줄은 반차를 내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태오는 최대한 빨리 낯부끄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아직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술에 떡이 되었던 몰골도 엉망진창일 게 뻔하다.
나봄은 그런 태오에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아홉 시야. 그런데 반차라도 내는 게 낫지 않겠어? 어제 너무 과음했잖아.”
“반차 내기가 그렇게 쉽나. 숙취가 심하진 않아서 갈 만해.”
“그래? 그럼 아침 같이 못 먹고 가겠네. 거의 준비됐는데.”
하지만 미련 없이 떠나려던 태오의 마음에 탁 걸려 들어오는 한 마디.
그녀가 준비한 아침.
이제 보니 열린 방문 틈새로 구수한 냄새가 전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저번에는 요리에 영 재능이 없다고 하더니, 향기로 봐서는 해장국 맛집 뺨을 칠 수준이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한 사장의 솜씨였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태오는 그녀와의 로맨틱한 아침 식사를 놓치고 싶지 않아, 급히 태세를 전환하기로 했다.
“아…… 아아! 나 어제 반차 냈었다.”
“응? 어제?”
“어어, 늦게까지 술 마실 줄 알고 미리 반차 냈었다, 참.”
그래서 급조된 거짓말을 내뱉으니, 나봄은 다행히도 순순히 믿어 주었다.
“와, 잘됐네. 그럼 얼른 씻고 내려와.”
기뻐하는 그녀의 얼굴은 눈으로만 보긴 아까울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특히 방긋 웃을 때마다 예쁘게 휘어지는 눈꼬리는 언제 봐도 심장이 녹아내릴 만큼 귀여워 죽겠다.
이젠 예비 사위 수준으로 인정도 받았겠다, 태오는 그런 그녀를 조금 더 욕심내 보기로 했다.
“한나봄.”
태오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고, 그녀의 가는 손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제 쪽으로 끌어당겨 쪽― 가벼운 입맞춤을 건넸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촉촉한 감촉에 놀란 나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그시 누르고 있었을까.
태오는 자극적인 소리와 함께 맞부딪혔던 입술을 떼어 냈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색하게 굳어 있던 입꼬리는 어느새 보기 좋게 들려 올라간 상태였다.
“이건 애피타이저.”
나른한 음성을 흘려보내는 그의 입술은 요망하리만큼 섹시했다.
어제 한 사장 앞에서 어리숙하게 굴던 순진한 단태오는 어디로 갔는지.
깊은 잠에서 깨어난 그는 어느새 저돌적인 남자가 되어 있다.
자꾸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면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다, 정말.
* * *
띵동― 띵동―
소라가 나봄의 집 초인종을 다급히 눌렀다.
오전 중에 중요한 미팅이 있는 오늘, 멀쩡한 블라우스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아직 나봄이 출근하기 전이었지만 위기가 위기인 만큼 초조한 마음은 감출 길이 없었다.
어디 가진 않았겠지.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어디 가서 새 블라우스를 사야 하나.
그렇게 나봄이 나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그때.
끼이이익―
드디어 현관문이 열리고 치릭치릭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의 주인이 나봄이라 확신한 소라는 대문을 두드리며 그녀를 재촉했다.
“한나봄! 큰일 났어! 너 단정한 블라우스 많지! 나 하나만 빌려줘!”
하지만 나봄은 그녀의 다급한 ‘SOS’를 들었으면서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원래 같았으면 제 일처럼 호들갑을 떨었을 텐데 오늘따라 굉장히 조용하네, 하며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벌컥!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열리고.
“시끄러워. 아침부터 대문 부술 일 있냐.”
나봄과는 정반대되는 사나운 이목구비가 소라의 눈에 들어왔다.
아침 댓바람부터 부은 눈으로 걸어 나온 사람이 다름 아닌 태오라는 걸 확인한 소라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야! 귀염둥이! 너 왜 여기 있어!”
“미쳤냐, 누구보고 귀염둥이래.”
“설마 여기서 잤냐!”
“그렇게 소리 지르면 목 안 아파?”
태오는 방방 뛰는 그녀에게 짜증 섞인 대꾸만 내뱉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스러워진 소라는 입을 벌린 채 한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한나…… 한나봄! 한나봄! 세상에나!”
이 엄청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나봄을 찾아 뛰어 들어갔다. 때마침 한 사장이 끓여 놓고 간 콩나물국을 옮기고 있던 나봄이 집 안으로 우당탕탕 들이닥치는 소리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아, 소라야.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 너야말로 무슨 일이야? 저 새침한 귀염둥이가 왜 아침 댓바람부터 너희 집에서 나와?”
“귀염둥이? 아아, 태오. 어제 술 마시고 우리 집에서 잤어.”
딱히 부끄러운 짓을 하진 않았던 나봄은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태도가 경악스러웠던 소라는 더욱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어제 아저씨 집에 안 계셨어?!”
“계셨지. 지금은 일찍 일 나가셨지만.”
“그런데 단태오가 여기서 잤다고?”
“응, 어제 아빠한테 태오 소개시켜 드렸거든. 둘이 술을 마셨는데 태오가 한순간에 취해 버린 거 있지.”
나봄의 설명은 들어도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태오를 한 사장에게 소개시키는 이유도, 단태오와 한 사장이 함께 술을 마신 상황도, 소라로서는 영문 모를 전개일 뿐이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지도, 알아채지도 못하던 답답이들이었는데, 오늘 이 모습은 마치…….
“한나봄, 도와줄 거 없어?”
의아해하던 소라 곁으로 태오가 다시 돌아왔다. 그를 본 나봄은 잔뜩 얼어붙어 있던 예전과 다르게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다른 건 다 됐고, 수저 좀 놔줄래?”
“수저통 어디 있는데?”
“싱크대 옆에.”
그녀의 말을 들은 태오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한걸음에 싱크대 옆으로 걸어갔다.
거기까지는 둘이 많이 친해졌구나, 라고만 생각했지만.
“저 시끄러운 애 내보내 줘.”
“심술궂게 굴지 마.”
나봄이 소라를 흘겨보며 얄밉게 구는 태오의 볼을 살짝 꼬집는 순간. 태오가 그 손을 붙잡고 언제 으르렁거렸었냐는 듯 배시시 웃어 보이는 순간.
곧바로 깨달아 버렸다. 심상찮게 발전한 둘의 관계를.
“뭐야, 너희 사귀어?!”
어느새 이곳에 온 다급한 목적도 잊어버린 소라는 삿대질을 하며 물었다.
새삼 부끄러워진 나봄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아, 어…… 하하.”
그러자 소라의 마음에 휘몰아치는 건 그녀를 향한 엄청난 배신감이었다.
지금껏 아주 사소한 일도 시시콜콜 자신과 나누었던 나봄은 연애라는 엄청난 이슈를 여태까지 잘도 숨겨 왔다.
“왜 나한테 바로 말 안 해! 언제부터!”
성난 소라가 버럭 소리치자 나봄은 당황한 듯 손사래를 쳤다.
“고작 이틀 됐어. 말할 기회도 없었다고.”
“거짓말! 이틀밖에 안 된 사이인데 부모님한테 소개까지 시켜드려?!”
“진짠데…….”
“와, 그럼 진도는 첫째 날에 다 뺐겠다? 아주?”
그건 당치도 않는 변명을 하는 나봄을 비꼬기 위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즉시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나봄의 동공은 아무래도 수상했다.
“설마, 설마 너…….”
“아…….”
“첫날에 진도 다 뺐냐!”
천둥처럼 쩌렁쩌렁하게 울린 소라의 목소리.
그 격한 반응에 나봄보다 당황한 태오가 사납게 대꾸했다.
“니가 그게 무슨 상관인데!”
“이놈 새끼! 순진한 나봄이를 잡아먹다니!”
“내가 육식동물이냐! 누굴 잡아먹고 말고 하게!”
“아무리 욕정이 펄펄 끓어도 그렇지! 어떻게 사귄 지 하루 만에!”
“그런 거 안 끓거든!”
흥분한 소라는 태오에게 달려들어 그의 등짝을 철썩철썩 내리쳤다. 연애에 관해선 소극적인 나봄은 두 사람의 스킨십 주도권이 태오에게 있다고 확신하는 중이었다.
나봄은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럼! 그럼 우리 나봄이가 진도 한 번 빼 보려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너를 붙잡고 매달렸다 이거냐!”
소라가 심히 마음에 찔리는 한 마디를 내뱉자 괜히 고개를 돌렸다.
연애를 시작하기로 한 첫날 밤, 중간에 관두려고 했던 순진한 태오에게 엉큼하게 매달렸던 자신을 떠올리며.
“수, 수저가 어디 있더라…….”
“……뭐야, 잠깐만 한나봄. 거기 스톱.”
그걸 놓치지 않고 본 소라가 태오를 쪼아 대다 말고 나봄을 불렀다.
아까 태오에겐 잘도 알려 줬던 수저의 위치를 새삼스레 찾아 헤매는 나봄은 무척이나 수상한 낌새를 띠고 있었다.
게다가 저 빨개진 귀와 꽉 깨문 입술 좀 봐. 꼭 아무도 의심 안 했는데 괜히 제 발 저리는 도둑 같잖아.
의심에 확고한 힘을 실은 소라는 진지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니가 잡아먹었구나.”
그 말에 더욱 뜨끔해진 나봄은 바람 앞 촛불처럼 눈동자를 일렁였다. 그러자 소라는 한 사장처럼 두 눈을 번쩍이며 그녀를 불렀다.
“너 이 기지배…….”
저벅저벅 다가오는 소라의 발걸음.
태오는 그걸 막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나봄의 코앞까지 다가온 소라는 두 팔을 넓게 벌리더니, 이내 온 힘을 다해 꼬옥 나봄을 끌어안아 주었다.
“우리 나봄이 진짜 연애하는구나.”
이윽고 꺼내지는 한 마디는 감동에 푹 젖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소라와 나봄이 절친으로 함께 해 온 시간은 자그마치 13년.
그동안 나봄은 딱 한 번 연애를 했고, 그것도 10년 전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이별에 힘겨워하던 나봄은 지금껏 이성 관계에 관해서는 커다란 철벽을 세우고 살았었다.
그런 모습이 걱정스러웠지만 괜히 엄한 사람 소개시켜 줬다가 더 상처받을까 봐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못했었던 나봄의 친구, 채소라.
그녀는 지금 나봄이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고, 적극적으로 진도까지 빼는 모습이 그저 감격스럽기만 하다.
짚신도 다 짝이 있다더니. 나봄에게도 딱 알맞은 짝이 있었던 모양이다.
“목 조르는 거 아니지. 이제 내 여자니까 조심조심 대해라.”
물론 까칠하기 그지없는 단태오는 순한 양 같은 나봄과 전혀 안 어울리는 짚신이긴 하지만.
“마침 콩나물국 있는데 시간 있으면 먹고 가.”
태오를 진정시킨 나봄이 소라 몫의 밥그릇을 하나 더 꺼내 들며 말했다.
한창 기분이 좋아진 소라는 순순히 식탁에 앉으면서도, 누가 사 왔는지 뻔한 한우 세트를 가리키며 괜히 장난을 걸었다.
“콩나물국 말고 비싼 고기 구워 먹으면 안 돼?”
“안 돼. 넌 손도 대지 마.”
아니나 다를까 태오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역시 인상은 어려워 보여도, 놀리기는 참 쉬운 녀석이었다.
“그럼 입을 갖다 댈게. 나 손 안 대고 잘 먹을 수 있어.”
“생각만 해도 흉하다.”
“태오야, 말 좀 이쁘게 해!”
나봄은 소라의 너스레를 정색하고 받아치는 태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러자 태오의 눈썹은 시무룩해지나 싶더니 이내 그녀에게 투덜투덜하기 시작했다.
“쟤가 말하면 놀리는 것 같단 말이야.”
“소라가 왜 널 놀리겠어. 원래 장난기가 있어.”
“그래도…… 왜 너는 내 편 안 들어?”
“어? 아니야, 난 니 편이지!”
“나랑 쟤랑 물에 빠지면 누구 구할 건데.”
“아, 아…… 그게…… 두, 둘 다! 둘 다 구해 줄게! 걱정 마!”
“치…… 넌 물에 들어오면 안 돼. 내가 쟤까지 구해서 밖으로 나갈 테니까 넌 안전한 데 있어.”
투닥거리다가도 금세 달콤해져 버리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소라는 안 어울리는 짚신이라는 생각을 고이 접어 두었다.
그렇게나 낯을 가리는 나봄이 저리도 편하게 그를 대하다니, 이건 그의 모난 부분이 나봄에겐 딱 들어맞다는 증거였다.
그런 게 바로 천생연분이지, 뭐.
소라는 흐뭇한 표정으로 나봄의 새로운 짝을 바라보았다.
인상이 사납고, 연애에 서툴고, 거친 구석이 있는 그는 어쩌면 나봄의 이전 연애 상대보다 부족한 사람일지 몰랐다. 사실 그 남자는 외모, 성격, 스펙 이 삼박자가 완벽에 가까웠었으니까.
하지만 모두에게나 다정했던 그 남자와 달리 새로운 사람은 제 여자에게만 집중할 줄 알았고, 여러모로 부족한 만큼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할 줄 알았다.
게다가 웃고 있어도 늘 불안했던 그 남자와 달리 단태오는 오만상을 쓰고 있어도 그저 태평해 보이니…….
그런 사람이라면 나봄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녀의 미련한 첫사랑이 하루빨리 마무리되기를 바라 왔던 소라에게는 오늘 오래도록 지니고 있었던 소원이 이루어진 것과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