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그럼 죽여, 니 손으로.
2017.11.17.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도 다들 수고하세요.”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에 싱그러운 아침 인사가 터져 나왔다.
목소리의 주인을 용케 알아챈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정문 쪽을 향했다. 그러자 마주치는 시선들을 가벼운 고갯짓으로 화답해 주는 건 믿기지 않게도 태오였다.
천하의 단태오 팀장이 저렇게 친근하게 군 적이 있었던가.
장담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딱딱하고 형식적인 인사만 억지로 건네곤 했던 그는 친해지기 위해 다가가는 직원들에게조차 보이지 않는 벽을 치곤 했었다.
그런 그가 산뜻한 모닝 인사를 건네다니.
이 변화를 가장 의아하게 여긴 사람은 유리였다.
분명 김 대리가 말하길, 연회장에서의 태오는 지금까지 보아 왔던 모습들 중에서 가장 저기압이라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해탈을 한 건지, 아니면 미쳐 버린 건지. 입사 이래로 제일 기분이 좋아 보인다.
‘한나봄이랑 본부장님 관계 때문에 잔뜩 풀이 죽은 줄 알았는데.’
단태오의 컨디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나봄이라는 걸 알고 있는 유리는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연회장 앞에서 나봄을 감싸 주던 차준을 생각해 보면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지금의 태오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막 연애를 시작한 순애보와 비슷했다.
‘설마…… 에이, 아닐 거야. 절대 그럴 리 없어.’
유리는 불안한 마음을 그리 다잡으며 태오가 있는 쪽으로 다가섰다.
그러고는 이제 막 제 사무실 앞에 멈춰 선 태오의 뒤에 가만히 서 있다가, 그가 잠금장치를 풀고 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뒤따라 몸을 이끌었다.
“아, 깜짝이야. 뭐야.”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인기척에 놀란 태오가 돌연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힘주어 사무실 문을 닫아 버린 유리는 불안감을 숨긴 채 물었다.
“너 기분 되게 좋아 보인다?”
“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봐.”
“난 좋은 일도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물어본다?”
그러나 둔해도 되는 타이밍마다 쓸데없이 눈치가 빠른 태오는 삐딱한 말투로 대답했다.
유리는 순간 돋아나려는 가시를 가까스로 참아 내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냥 뭔가 싶어서. 어제 김 대리는 분명히 너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최악의 상태라고 했거든.”
“그랬나.”
“응, 그래서 나는 한나봄 씨랑 본부장님 때문에 그러는 건가 싶었지.”
은근히 흘려 낸 나봄의 얘기는 태오를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혹시 그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면 유리는 어제 한나봄의 백마 탄 왕자님이었던 본부장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털어놓을 예정이다.
그러나 메고 온 백팩을 책상 위에 던져 놓고 오늘 살펴볼 자료를 꺼내는 태오는 콧노래만 흥얼거릴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의 그런 태도에 답답해진 유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확실히 오늘의 단태오는 평소와 달리 이유 모를 여유를 띠고 있다.
비참한 현실을 알고 싶지 않아 피하려는 건가.
유리는 그의 반응이 없더라도 창립 기념회에서의 일을 고해 버리려 했다.
“있잖아, 어제 말이야. 본부장님이 나봄 씨한테……”
그래서 단단히 마음을 먹고 말문을 떼어 내자.
“그래, 내 여자 친구가 본부장이랑 뭐.”
단태오의 목소리가 말을 가로막았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여자 친구’라는 호칭은 유리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 한나봄 씨가 왜 니 여자 친구야?”
유리는 노골적으로 구겨진 미간을 수습하지 못한 채 뾰족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곧바로 꺼내진 태오의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해서 힘이 빠졌다.
“어제부로 내 여자 친구가 됐으니까 여자 친구라고 부르지.”
“뭐……?”
“어쨌든 앞으로는 본부장이랑 쓸데없는 걸로 엮지 마. 괜한 헛소문 도는 거 기분 나빠.”
태오는 그녀에 대한 구설수를 가장 적극적으로 전하는 유리에게 엄포를 놓듯 말했다.
유리는 그 말에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건 수긍해서라기보다는 둘의 관계를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제 본부장과 그렇게 다정한 광경을 연출해 놓고서 단태오랑 연애를 시작하다니.
‘이거 진짜 난 년이잖아……?’
유리는 남몰래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뒤틀리다 못해 문드러질 지경인 가슴은 끓어오르는 분노로 터져 버릴 것만 같다.
유리의 두 주먹이 꽉 쥐어진 채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걸 확인한 태오는 자료를 추스르다 말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문제 있어?”
문제가 있냐고?
너와 한나봄의 관계는 하나부터 열까지 문제 삼을 점투성이다.
너희 둘은 어울리지도 않고, 니가 그 여자한테 휘둘리는 것도 꼴 보기 싫고, 게다가 넌 이 연애에서 절대 사랑받지 못할 거야.
어제 두 사람의 분위기를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니까 감히 장담할 수 있어.
이런 말은 쏟아 내 봤자 내 손해였다. 태오는 예전부터 한나봄에 대해서라면 어떤 얘기를 해 줘도 들어 먹질 않았다. 그냥 무슨 상관이냐고 회피하기만 할 뿐.
하지만 이대로는 속이 타서 미칠 지경이었던 유리는 결국 백 마디 말 대신 한 마디 욕설을 택했다.
“등신 새끼.”
“뭐?”
태오는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대뜸 인상부터 썼다. 그러나 유리는 그런 태오에게서 매정히 등을 돌려 버리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쾅―!
직원들의 이목도 집중될 만큼 요란하게 닫아 버린 문.
“파트장님, 무슨 일 있어요?”
유리와 친분이 있던 직원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물었다.
평소에는 쿨한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라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겠지만, 오늘은 도저히 연기를 할 상태가 아니었다.
“저리 비켜.”
유리는 그녀를 걱정해 주는 직원을 밀쳐 내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건 꽤나 과격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전에 미처 감추지 못한 유리의 붉은 눈가를 먼저 확인한 직원은 심히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 어머…… 파트장님 왜 우는 거지? 단 팀장님은 또 무슨 말을 하신 거야.”
그녀의 말은 안 그래도 가득 차 있었던 유리의 서러움을 기어이 터트려 놓았다.
우리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전부 무심한 단태오의 탓이라는 걸,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데 본인만 모른다. 대놓고 서운함을 드러내도 무시해 버리는 그에게 혼자서만 열 내는 것도 지쳤다.
그간 쌓여 왔던 감정이 모두 폭발해 버린 유리는 제 자리에 성질껏 앉았다.
주변 자리의 사람들은 살벌한 그녀의 분위기에 제대로 말도 걸지 못했다.
그렇게 격한 호흡을 몰아쉬고 있는 그녀의 눈에 보이는 누군가의 명함 한 장.
명함에 적힌 이름 넉 자는 뜻밖의 구세주처럼 다가왔다.
오늘 자초지종을 듣는다면 그 남자는 기꺼이 나의 아군이 되어, 허튼 꿈을 꾸는 단태오를 단념시켜 줄 수 있을 거다.
그제야 그는 한나봄을 경계했던 내 진심을 헤아려 주려나.
굳은 결심을 한 유리는 휴대폰을 들었다. 그녀가 남겨 놓을 메시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구구절절한 사연도 알릴 필요 없이, 마법의 주문과도 같은 그 여자의 이름만 넣는다면 그의 마음을 흔들릴 터.
메시지를 입력하는 유리의 손이 빨라졌다.
빛나는 그녀의 눈빛이 병적인 집착과 다름없다는 건, 그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직원들이 절대 알아채지 못할 사실이었다.
* * *
청담동 우드레일 본가.
벌컥 열린 저택의 정문으로 차준이 걸어 들어왔다. 평소보다 흥분한 모습의 그는 저택을 지키는 경호원들조차 섣불리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가장 긴장한 경호실장은 차준의 곁에 따라붙으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선우차준 이사님. 본가에 들리신다는 연락은 못 받았습니다. 무슨 일이신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나 차준은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우태준 어디 있어.”
적어도 예의는 차렸던 평소와 달리 잔뜩 날이 서 있는 모습이었다.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평소 머무시는 방에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경호실장은 그런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러자 더욱 빨라진 차준의 걸음은 곧 불어닥칠 폭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분노한 모습은 경호실장으로 근무한 이래로 처음이었다.
“이사님, 무슨 일이신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경호실장은 어떻게든 소란을 막아 보기 위해 예의를 차려 물었다.
하지만 대꾸는커녕 시선도 주지 않고 저택에 들어서 버린 차준은 분노 이상의 살기를 띠고 있었다. 얼마나 이성을 잃은 상태인지, 구두도 벗지 않은 채였다.
그가 향하고 있는 가장 어두운 복도, 제일 구석진 방에는 다름 아닌 태준이 숨어 있었다.
최근 서재균 회장의 퇴원으로 인해 집 안에서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게 된 태준의 처지.
그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어쩐지 두렵다. 하지만 고장 난 두 다리로는 도망치지도 못해서, 숨통을 조여 오는 공포를 오롯이 맞이할 수밖에 없다.
덜컥―!
방 문고리를 힘주어 잡는 누군가의 손길에선 강렬한 적의가 느껴졌다.
방문이 거칠게 열릴 때쯤 철렁하고 내려앉아 버린 태준의 가슴.
호흡마저 약해진 그의 눈에 그리운 얼굴 하나가 들어왔다.
예상했던 대로 분노와 악감정에 뒤덮여 있지만 그럴수록 안쓰럽게만 보이는 그의 하나뿐인 동생, 차준이었다.
“차준아…….”
예상치도 못했던 차준의 방문에 놀란 태준은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대신 휠체어 팔걸이를 단단히 붙잡은 차준은 벽 쪽으로 휠체어를 밀어붙였다.
쾅―!
이윽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딪혀 버린 휠체어는 태준의 등허리로 충격을 고스란히 전했다.
“윽……!”
태준은 갑작스럽게 터진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냈다. 그러자 고통 어린 그의 표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준은 서슬 퍼런 입술을 떼어 냈다.
“어디까지 얘기했어.”
“……뭐?”
“한나봄 만났잖아. 대체 그 애한테 어디까지 지껄였냐고.”
파르르 떨리는 차준의 음성은 그가 얼마나 격분했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은 전보다 더 위태롭게 느껴질 지경이다.
태준은 차준의 눈을 더는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해…….”
그런 뒤 흐리게 이어 내는 목소리는 차준을 더욱 흥분시켰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감정은 나약한 그의 숨통을 끊어 놓고 싶다는 충동까지 불러일으킨다.
결국 격양되는 감정을 참아 내지 못한 차준은 태준의 멱살을 있는 힘껏 붙잡아 올렸다.
억지로 딸려 올라간 태준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손에 붙잡힌 그는 전보다 더 나약하고 형편없는 모습을 하고 있어서, 차준은 차라리 그를 부숴 버리고 싶어졌다. 이런 꼴은 흔적으로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무슨 개수작이야…….”
“차준아, 난…….”
“대체 내 인생을 어디까지 망쳐 놓고 싶은 건데!”
차준은 핏대가 설 정도로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질렀다. 그 목소리에 다시 시선을 들어 올린 태준은 이내 지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망쳐 놓고 싶지 않아…….”
“하.”
“어떻게든 너를 지켜 주고 싶었어…….”
그 말은 차준에게 구차한 변명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날, 전의조차 상실할 정도로 차준을 몰아넣은 사람은 다름 아닌 태준이었으니까.
“나를 지켜 주고 싶어서 그 애 앞에 나타났다고?”
“차준아…….”
“개소리 하지 마! 니가 무슨 자격으로! 니가 무슨 자격으로 그 애한테 가서 내 얘길 지껄여!”
분을 이겨 내지 못한 차준은 붙잡고 있던 태준의 몸뚱이를 옆으로 내동댕이쳤다.
하체가 마비된 태준은 버텨 보지도 못하고 휠체어와 함께 그대로 넘어져 버렸다.
“아…….”
“괜찮으십니까!”
그 소란에 놀란 경호실장이 한달음에 달려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분을 삭이지 못한 차준은 오로지 태준을 상처 주기 위한 말들을 거침없이 퍼부었다.
“양심이 있으면 죽은 사람처럼 골방에 틀어박혀 살아! 멀쩡한 사람 너 때문에 불쌍하고 비참해 보이게 만들지 말고!”
“…….”
“그 꼴을 하고서 누구 형 노릇을 하려고 들어!”
그건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한때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주던 사이었는데, 이제는 고통을 주고 그걸 일방적으로 받아 내는 게 더 익숙해져 버렸다.
크게 숨을 들이쉰 차준은 마지막으로 날카로운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나는…….”
“…….”
“진심으로 니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이것으로 쌓아 둔 감정들은 모두 토해 냈다. 이제 남은 일은 다시 이 지옥 같은 저택에서 벗어나는 것뿐.
하지만 막 발길을 돌리려던 그때.
“그럼 죽여. 니 손으로.”
태준의 입술 새로 흘러나온 말이 차준을 붙잡았다.
“……뭐?”
얼핏 날을 세운 것처럼 들리는 그 말에, 차준의 눈동자 속에는 다시금 적대감이 맺혔다.
* * *
지이이잉― 지이이잉―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업무로 인해 바쁜 오후를 보내고 있던 태오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켜 둔 채 휴대폰을 붙잡았다.
하지만 흘깃 눈동자를 옮겨 휴대폰 액정을 살핀 그는 더 이상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헤어진 지 겨우 6시간밖에 안 지났는데도 무척이나 보고 싶은 그녀는 나의 온 신경을 단번에 앗아 가는 존재니까.
“응, 나봄아.”
태오는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본인이 이렇게 달콤한 성격인 줄은 연애 전엔 몰랐던 사실이었다.
“아! 태, 태오야! 바빠?”
나봄도 그런 태오에게 놀란 건지, 살짝 경직된 목소리로 물었다. 태오는 그럴수록 더 친절하고 상세한 대답을 꺼내 놓았다.
“지금 당장은 바쁘지만 한 시간 안에 끝날 거야. 그때까진 끝내야 하는 일이라서.”
“아아, 그렇구나. 그럼 오늘 저녁엔 별다른 스케줄 없어?”
그 질문은 데이트 신청의 전조와 비슷했다.
태오는 짧은 시간 내에 그녀와 갈 만한 식당부터 최근 평이 좋은 영화까지 쫙 떠올리며 신이 난 목소리를 내뱉었다.
“스케줄 없어. 비워 둘까? 너 퇴근 시간 맞춰서 데리러 갈게.”
“응. 안 그래도 그거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하지만 수락하는 것에 비해 묘하게 불안해 보인다 싶었던 나봄은.
“오, 오늘 우리 아빠랑 저녁 같이 먹을래?!”
이내 엄청난 제안 하나를 턱 꺼내 놓았다.
“어……?”
예상치도 못했던 장인어른과의 만남에, 태오의 심장이 벌써부터 바짝 쪼그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