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내 허리 만질래?
2017.11.13.
포근한 침대 위. 불긋하게 부어오른 입술. 내 가슴 아래 누워 있는 그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태오의 이성을 앗아 가기에 충분했다.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새하얘져 버리는 게, 정수리에 번개라도 내리꽂힌 기분이다.
마음 같아선 날뛰는 본능을 폭발시켜 버리고 싶지만 원래 달콤한 것일수록 천천히 음미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녀를 원하는 만큼 조심스럽게 다가가기로 한 태오는 떨어트리려던 가슴을 다시 나봄에게 밀착시켰다. 그러고는 침대 위에 늘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히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파르르 떨려 오는 속눈썹은 미치도록 사랑스러워서, 그는 아까보다 뜨거워진 입술을 가져다 댈 수밖에 없었다.
“하아…….”
촉촉한 감촉은 나봄의 숨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온몸이 예민해진 그녀는 저도 모르게 태오의 허리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손길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태오는 조금 더 입술을 끌어 내렸다. 머지않아 마주 닿은 그녀의 입술에선 다디단 향기가 났다.
태오는 조금 더 깊은 호흡을 건네기 위해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그러자 그 틈새를 먼저 파고들어 가는 건 다름 아닌 나봄의 혀끝이었다. 움츠러든 몸이 무색할 만큼, 그녀는 품에 안긴 남자를 온 마음 다해 탐하고 있다.
‘그녀도 나를 원해.’
찰나에 느껴진 나봄의 진심은 태오를 더욱 과감해지게 만들었다.
그는 나봄이 건네는 호흡을 한껏 받아들이며 그녀의 옷자락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결 좋은 피부. 매끈한 허리선. 숨을 고를 때마다 움직이는 그녀의 갈비뼈.
나의 본능을 예민하게 일깨워 주는 너의 달콤한 향기.
인내심은 이제 끝났다. 너와 내가 지금 같은 마음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태오는 잠시 떨어진 입술을 그녀의 귓가로 옮겼다.
“……나봄아.”
그러고서 흘려보내는 이름은 애가 닳도록 간절했다. 이내 귓불을 머금어 버리는 혀끝은 집요하게 묻고 있다.
나, 오늘 밤 너의 품속을 파고들어도 되겠느냐고.
떠나려는 그를 붙잡았을 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끝내 두었던 나봄은 그의 티셔츠를 끌어 올리는 것으로 화답했다.
거치적거리던 옷감이 걷힌 자리에는 잔근육 잡힌 태오의 등허리가 달빛 아래 훤히 드러났다.
매끈한 피부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나봄은 본능이 이끄는 대로 불룩 튀어나온 그의 척추를 하나하나 매만졌다.
“아…….”
순간 못 참겠다는 듯 새어 나온 태오의 달뜬 신음은 그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나봄은 그를 더 힘주어 끌어안았고, 가쁜 숨과 뒤섞인 나른한 목소리를 속삭였다.
“단태오…….”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항상 내게서 멀어지기만 했던 그녀가, 아무리 불러도 닿지 않았던 그녀가, 드디어 나를 품에 안은 채 내 이름을 불렀다.
태오는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담아 다시 그녀에게 깊은 키스를 건넸다.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두 사람의 온도는 이 순간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 위로 스며드는 달빛은 오늘따라 어찌나 아름다운지.
모든 것은 황홀한 꿈이라 여겨질 만큼 완벽했다.
붉은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숨결, 은밀한 욕망을 탐하는 손끝, 심지어는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굵은 땀방울까지도.
점점 더 농밀해지는 입맞춤을 따라 새어 나오는 호흡도 가빠졌다.
두근거리다 못해 날뛰는 심장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당신이라면 오늘 밤, 날 숨 막히게 만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미 더 이상 원할 수도 없을 만큼 당신을 원하고 있으니.
.
.
.
“흐음…….”
긴 아침 햇살이 나봄의 눈을 간질였다.
잠시 깊은 숨을 내쉰 나봄은 감았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마자 바로 눈에 들어온 건 까맣고 둥그런 단태오의 눈동자.
하지만 마주치기가 무섭게 곧바로 감겨 버리는 그 눈은 은밀한 시선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 그가 귀여웠던 나봄은 가벼운 미소를 흘려보냈다.
“태오야.”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으음…… 일어났어?”
태오는 막 깨어난 척 대답했다. 예전부터 느껴 온 사실이지만 연기 하나는 정말 못한다.
“나 쳐다보고 있었던 거 다 알아, 바보야.”
나봄은 태오에게 핀잔을 주며 그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그러자 태오는 그녀를 따라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들켰으면 미안. 잘 잤어?”
“응. 잘 잤어.”
“나 잠버릇이 고약하진 않았지?”
“글쎄, 얌전했던 것 같아.”
“다행이네. 나 피곤하면 잠꼬대 심하게 한다고 하던데.”
태오는 안도한 표정으로 그녀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잠시 미간을 좁혀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던 나봄은 이내 다가오는 그의 손을 붙잡아 버렸다.
그러고는 마음에 콕 박혀 버린 한 마디에 대해 진지하게 되물었다.
“누가 잠꼬대하는 걸 들었나 봐?”
“어?”
“아니, 그런 건 이렇게 같이 자 보지 않고서야 모르는 부분일 텐데.”
단태오 나이 스물아홉.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그에게 과거가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고백할 땐 자그마치 9년이나 그녀를 짝사랑해 왔다고 말했으니, 중간에 연애사가 있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나봄은 태오의 잠꼬대를 그녀보다 먼저 들어 봤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이불 속으로 쏙 얼굴을 숨겼다.
“너랑 말 안 해.”
토라진 듯 말했지만 반쯤은 장난이었다. 나봄은 태오가 당황할 때마다 보이는 반응이 항상 재미있다.
그러나 그녀가 숨어 버려도 한동안 가만히 있던 태오는.
“와.”
별안간 외마디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고는 나봄을 이불째 와락 끌어안았다.
두 팔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나봄은 그 안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뭐야, 이거 놔!”
“와, 한나봄이 나 질투해 줬어.”
“으, 응?”
“진짜 미쳤다. 진짜 태어나길 잘했다.”
뭐가 그리 감격스러운지 감탄사만 연일 내뱉던 태오는 그녀를 감싼 이불을 내렸다. 다시 마주한 그의 얼굴엔 꽃처럼 활짝 피어난 미소가 만개해 있었다.
“뭐, 뭐가 그렇게 좋아?”
그런 태오 때문에 살짝 당황해 버린 건 오히려 나봄이었다. 그녀는 심히 반짝이고 있는 그의 두 눈이 어째서 이리도 신이 났는지, 도무지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나봄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읽은 태오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얼마나 나봄을 좋아하는지, 고백해 버릴까 했다.
하지만 벅차오르는 감정과 품에 안긴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나타낼 표현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이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운 단어를 갖다 붙인다고 해도 지금 내 마음을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을 보여 주기로 한 태오는 나봄의 몸 위로 순식간에 덮쳐 올랐다.
“엄마야!”
갑작스럽게 드러난 태오의 맨몸에 당황한 나봄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은 가리고 있으면서도 손가락 사이로 그의 단단한 가슴을 훑어보는 중이었다.
태오는 그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내 허리 만질래?”
그리고 꺼내 놓는 질문은 굉장히 도발적이었다.
“내 허리 예쁘다고 했잖아.”
예전에 나봄이 저도 모르게 꺼내 놓았던 칭찬을 용케 기억해 낸 태오는 실웃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입술을 그녀의 목덜미 쪽으로 끌어 내린다.
무엇을 원할 때 여기다 입을 맞추는지는 하룻밤 사이 착실하게도 배웠다.
어제 이 짐승 같은 남자는 내 목덜미를 몇 번이나 깨물었더라.
나봄은 끝날 듯 끝나지 않고 이어졌던 지난밤을 떠올리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제 막 풋풋하게 시작한 연애. 마음껏 사랑받고 사랑해 주는 건 그녀도 몇 번이든 오케이였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뜨거워진 태오의 입술을 받아들이기 직전.
♩♪♬♩♪♬―
침대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나봄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분위기를 깨는 전화가 달갑지 않았던 태오는 벨소리를 듣지 못한 척, 그녀의 윗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즈, 즘끈! 잠깐만!”
그러나 나봄은 달려드는 그를 억지로 떼어 내고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사실 어제 어마어마한 일을 감행했던 그녀는 짐작 가는 발신인이 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태오는 돌연 긴장한 그녀에게 물었다.
“흠…….”
파르르 떨리는 시선으로 휴대폰 액정만 가만히 쳐다보던 나봄은 짐작했던 그분이 맞았음을 확인하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나 우리 집에 남자 친구 있다고 말해도 돼?”
의미심장한 질문 하나를 날렸다.
그때까지도 나봄의 입술을 다시 머금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태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어, 어?”
“아무래도 솔직하게 실토하는 것 말고는 이 위기를 헤쳐 나갈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
“아…….”
“결심했어. 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할게.”
남자 친구. 아직 나도 미처 실감하지 못한 그 호칭, 남자 친구.
아무래도 오늘 그녀는 집에다가 나에 대해 말할 예정인가 보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녀의 남자 친구라고 소개되는 첫 순간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순간 태오의 얼굴은 방금 전 깨물었던 그녀의 목덜미보다도 붉어졌다.
“나 이력서에 붙였던 증명사진 있는데…….”
“…….”
“그거 한 장 가져갈래? 되게 건실하게 나왔는데.”
머지않아 흘려보내는 수줍은 목소리는 단태오답게 엉뚱했다.
그 와중에 진지한 그의 표정은 후사를 걱정하는 나봄도 웃게 만들 만큼 귀엽게 느껴진다.
“하하, 바보야. 증명사진을 왜 가져가.”
“혹시 내 얼굴 보고 싶어 하실지도 모르잖아.”
“저번에 한 번 봤잖아. 우리 회사 현장 점검 왔을 때.”
“아, 그랬다. 그때 분위기 내가 망쳤었는데 어쩌냐.”
심각해진 태오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은근히 소심한 그의 괜한 걱정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나봄은 그의 미간을 톡 건드리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다시 만나 보면 좋아하실 거야.”
“그래?”
“응, 너는 볼수록 매력 있는 타입이잖아.”
나봄의 칭찬 한 번은 구겨진 태오의 눈썹을 춤추게 했다. 마음이 풍선처럼 두둥실 들떠 버린 태오는 평소 이미지도 내려놓은 채 그녀의 품에 안겨 들었다.
“그럼 자꾸 봐라. 자꾸 매력 있어지게.”
이럴 때마다 태오는 꼭 사랑을 보채는 어린아이 같다. 그래서 두 팔로 포근하게 끌어안고 하염없이 예뻐해 주고 싶어진다.
나봄은 간밤 새 더욱 사랑스러워진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늘은 무리야. 여기서 더 보면 내가 감당하기 힘들어.”
그러고는 나직이 간질거리는 마음을 속삭이자, 태오의 입술 새로 숨결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더할 나위 없이 기뻐 보이는 모습이라 나봄도 함께 흐뭇해지고 말았다.
무단 외박으로 인해 뒤따라올 문제들을 나봄이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만들 만큼.
* * *
끼이이익―
이른 아침. 화곡동 조그마한 단독주택의 낡은 대문이 열렸다.
그 안으로 조심히 발을 들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나봄이었다.
출근하는 길에 나봄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던 태오는 한동안 대문 앞에서 같이 따라 들어와서 해명해 주겠다며 떼를 썼었다.
하지만 수습은 제 몫이라고 생각한 나봄은 걱정하는 그를 억지로 등 떠밀어 보낸 참이었다.
왜냐하면 이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엎질러 놓은 물이었고, 거짓말에 젬병인데다가 당황하면 패닉까지 되어 버리는 태오가 무슨 해명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도 없었으니까.
“큼큼!”
괜한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알린 나봄은 조심스레 현관문 도어락을 열었다.
삑삑삑삑―
네 자리 숫자를 입력하자 잠금장치가 기계음을 내며 열리는 걸 보니, 그는 다행히도 집 비밀번호를 바꿀 만큼 화가 나진 않은 모양이다.
그랬으면 정말 눈앞이 깜깜해졌을 텐데.
최대한 숨죽여 현관문을 열어젖힌 나봄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몸을 들였다.
지금 시간이라면 한 사장은 출근 준비가 한창일 텐데 이상하게도 집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벌써 나가셨나?”
그리 생각한 나봄은 당장의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에 안도하며 움츠렸던 어깨를 늘어트렸다.
바로 그때.
“아이고, 공주마마. 이제 들어오십니까.”
익숙한 한 사장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놀란 나봄이 토끼처럼 휘둥그레진 두 눈을 돌리자, 곧바로 시야에 들어차는 사람은 저승사자와 같은 포스를 풍기며 소파에 앉아 있는 한 사장이었다.
“아, 아빠…….”
그의 주변을 감도는 공기가 싸늘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봄은 저도 모르게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한 사장은 그런 그녀를 서슬 퍼런 눈빛으로 노려보았고, 이내 분노를 꾹꾹 우겨 담아 놓은 음성으로 물었다.
“어디 있었냐.”
“네, 네?”
“금방 달려올 것처럼 대답해 놓고 대체 어디서 자고 온 거냐고.”
“아…….”
순간 솔직하게 대답하기 겁이 난 나봄은 다른 변명을 찾아볼까 했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는 도무지 괜찮은 거짓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 맞아. 생각해 보면 나도 단태오만큼이나 거짓말에 서툴렀지.
“그, 그게요. 아빠…….”
나봄은 그냥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 죄책감 가득 담긴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본론이 시작되기도 전에 꺼내진 한 사장의 명령은 그녀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데리고 와라.”
“네, 네?”
“누군지는 니가 가장 잘 알 거다. 그 녀석을 당장 데리고 와라. 빠른 시일 내로.”
누군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긴 한데…… 사귄 지 24시간도 안 지난 남자 친구를 이런 식으로 소개시켜 줘도 되려나?
“대답!”
“아, 아! 네!”
고민하던 도중에 버럭 내질러진 한 사장의 고함은 나봄을 순순해지게 만들었다.
이로써 얼떨결에 성사되어 버린 태오와 한 사장의 정식 만남은 벌써부터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째서 단태오와는 이리도 진도가 빠른 건지.
이 속도라면 내일쯤 결혼식을 치를지도 모르겠다. 서두르는 사람은 없지만 일사천리인 우리의 연애는 아마 그러고도 남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