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나 여기서 자고 갈까
2017.11.10.
“옷이 되게 크네.”
태오의 옷을 빌려 입은 나봄이 드레스 룸에서 걸어 나왔다.
지금 막 완성된 김치찌개를 식탁 위에 옮겨 놓은 태오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머릿속엔 과연 이 찌개가 나봄의 입맛에 맞을까에 대한 고민밖에 없었으나.
“너, 너…….”
제 옷을 입고 나온 그녀를 보자 먹통이라도 된 듯 태오의 얼굴이 새하얘지고 말았다. 그는 분명 바지까지 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봄이 검은색 박스티만 원피스처럼 걸치고 나왔으니.
“바, 바지는 어디다가 두고 왔냐.”
태오는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나봄은 이미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오는 티셔츠를 억지로 끌어 내리며 대답했다.
“아, 너무 커서 자꾸만 흘러내리길래…….”
“…….”
“너무 짧아?”
사실 너무 짧은 길이는 아니었으나 그가 평소 티셔츠로만 입던 걸 그녀가 바지 없이 걸치고 있으니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그걸 티내자니 음흉한 생각을 한다고 오해받을까 싶어, 태오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아니, 그냥 옷 입은 건데 뭐.”
“그래?”
“별로 안 짧아. 하나도 안 야해 보이고.”
“아아.”
“정말 조금도. 진짜 개뿔도 안 야하니까 걱정 마.”
“……응?”
찔리는 마음에 강조가 너무 지나쳤다.
한편, 그가 섹시하지 않은 자신을 놀리는 거라고 생각한 나봄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그녀의 샐쭉해진 얼굴을 발견한 태오는 뒤늦게 제 실수를 깨달았고, 어떻게든 해명해 보려고 했다.
“아, 니가 매력 없다는 게 아니라…….”
“그럼 밋밋하다는 뜻이야?”
“아니, 그것도 아니고…….”
친구도 못 되는 사이에서 연인으로 거듭난 지 30분째.
연애 초보 단태오에게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아니라고 고개까지 젓고는 있지만 뾰로통하게 튀어나온 그녀의 입술은 도통 들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태오는 또 다른 헛소리가 나오기 전에 서둘러 날뛰는 심장부터 진정시켰다.
그리고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뒤따라 내뱉어진 한 마디는 아까보다 짧고 간결했다.
“예쁘다고.”
“…….”
“이 말을 왜 그렇게 돌려 말했나 모르겠지만…… 어쨌든.”
수줍게 흘러나온 태오의 말에 나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태오는 순간 이렇게 구구절절 변명하는 게 더 이상해 보이진 않을까 걱정했으나, 이내 그녀의 입가에 맞히는 건 흐뭇한 미소였다.
“뭐야, 너도 참.”
조금 딱딱해졌던 목소리가 도로 달콤해진 걸 보니 진심대로 말하길 잘한 것 같다.
역시 거짓말에 영 서툰 나는 앞으로 뭘 꾸미거나 숨길 생각을 하질 말아야겠다.
“앉아, 밥 다 됐어.”
머쓱해진 태오는 나봄을 위해 식탁 의자 하나를 빼 주며 말했다.
“와, 찌개 냄새 진짜 좋다.”
그러자 언제 토라졌었냐는 듯 싱그럽게 웃으며 순순히 자리에 앉는 나봄은 어쩐지 전보다 더 사랑스러웠다.
우리 집에서 내 옷을 입고 내가 차려 놓은 밥상 앞에 앉아 있어서 그런가.
꼭 결혼이라도 한 기분이다.
나 혼자 들떠서 김칫국을 사발째 들이켜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 * *
달그락달그락―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간지럽게 들려왔다.
소박하지만 다정했던 저녁 식사를 끝낸 지금.
식탁에 앉은 태오는 벌써 15분째 설거지하는 나봄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대충 씻어도 되는데 뭐 그리 오랫동안 매달리고 있는지.
애초부터 손에 물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했건만, 계속 얻어먹기만 할 수 없다며 싱크대 앞에 선 그녀는 참 고집스러웠다.
“한나봄, 아직 덜 끝났어?”
짧은 기다림도 버거웠던 태오는 툴툴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나봄은 어린 아이들 달래듯 느긋한 말투로 대답했다.
“거의 다 했어. 큰 쟁반만 닦으면 돼.”
“그건 오늘 쓴 것도 아닌데 그냥 내버려 둬.”
“에이, 이왕 설거지하는 거 다 해치워 버리는 게 좋지.”
난 지금 당장 얼굴을 마주 보고 싶은 건데.
태오의 마음도 모르는 나봄은 그저 느긋하기만 했다. 하지만 더 보챘다가는 징징거리는 것처럼 보일까 싶어서, 그는 더 매달리지 못하고 억지로 기다림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또 몇 분이 지났을까.
“설거지 끝!”
마지막으로 남은 큰 쟁반을 물기 하나 없이 닦아 낸 나봄이 드디어 빙글 몸을 돌렸다.
태오는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강아지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반짝이는 두 눈으로 물었다.
“손 안 시려? 핸드크림 줄까? 혹시 옷에 물 튀겼으면 갈아입을래?”
갑자기 쏟아진 질문은 어떤 것부터 대답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우선 호들갑스러운 그를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한 나봄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그렇게까지 챙겨 줄 필요 없어. 겨우 설거지한 건데, 뭐.”
“설거지가 제일 어려운 거야. 배불러서 잠깐 쉬고 싶은 마음 무릅쓰고 뒤치다꺼리하는 거잖아.”
태오는 진지하게 눈썹까지 구긴 채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나봄의 입가에 어린 미소는 한층 더 밝아졌다.
“그럼 난 제일 어려운 일을 도와준 거네?”
“…….”
“설거지하길 잘했다!”
아, 내 심장.
해맑은 나봄의 얼굴에 치인 태오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았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내 여자 친구라니.
그 사실은 다시 생각해 봐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서, 아직까지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태오가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던 그때.
♩♪♬♩♪♬―
식탁에 놓여 있던 나봄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한달음에 그 앞으로 다가가 휴대폰을 집어 든 나봄은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아빠. 무슨 일이세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아빠’라는 호칭에 태오는 돌연 숨을 멈추었다. 왜 그러는지는 본인도 잘 알지 못했다.
“네네.”
그런 태오를 흘깃 바라보며 통화를 이어 나가던 나봄의 표정에 살짝 난처함이 어렸다.
그게 뭔가 불안하다 싶더니.
“네, 지금 가서 확인해 볼게요.”
이윽고 나봄의 입에선 작별의 인사와 다름없는 말이 나온다. 그걸 들은 태오의 어깨에 쭉 힘이 빠졌다.
나봄은 곧 전화를 끊었고, 태오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어쩌지? 나 회사에 가 봐야 할 것 같아.”
그러고서 꺼내 놓는 말은 역시나 작별이었다. 충분히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들으니 섭섭한 마음은 감출 길이 없다.
“중요한 파일 하나가 안 보인다고 하시네. 얼마 전에 내가 수정했던 건데 혹시 휴지통이나 다른 USB로 들어갔나 싶어서…….”
이렇게 집에 가는 게 아쉽기는 매한가지였던 나봄은 구구절절한 이유를 덧붙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태오는 한 번쯤 매달려 볼 생각을 접어야 할 수밖에 없었다.
5년 전, 제 마음만 욕심껏 밀어붙였다가 2주 만에 이별을 통보받았던 그는 두 번째 연애에서만큼은 절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아…….”
“…….”
“그래. 그럼 가 봐야지, 뭐.”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태오는 턱 끝으로 제 방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드레스는 내 방 가방 고리에 펼쳐 놨어. 옷 사이에 끼워 놓으면 치렁치렁한 장식 다 짓눌릴 것 같아서.”
“아, 응.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나봄은 그가 알려 준 방향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이제 저 방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예쁜 드레스 차림으로 나와서 내 마음만 잔뜩 흔들어 놓고 홀연히 사라지겠지. 언제나 그랬듯이.
체념은 한 상태였으나 어쩐지 억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짝사랑에 허덕이던 그때의 불쌍한 처지가 아닌데, 남자 친구로서 아쉬운 마음 정도는 달래도 되지 않을까.
붙잡는 것도 아니고, 매달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예전에 해 봤던 거 한 번만 하고 보내도 되잖아. 안 그래?
‘그래, 그 정도는 되고말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스스로에게 대답한 태오는 방문을 닫으려는 나봄을 멈춰 세웠다.
“한나봄, 잠깐만.”
그러고는 거침없는 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아직 불을 켜지 않은 그의 방은 어두컴컴했지만 바로 앞에 있는 나봄의 어깨는 똑바로 붙잡을 수 있었다.
“……응?”
갑작스럽게 다가온 그의 손길이 어리둥절했던 나봄은 그의 실루엣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려 하는데, 깊은 숨을 들이마시는가 싶던 태오는 이내.
쪼옥―
그녀의 이마 위로 촉촉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전에도 한 번 맞닿아 본 적 있던 익숙한 감촉은 그때보다 부드러웠다.
“단, 단태오……?”
나봄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숨결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만 입술을 떼어 낸 태오는 낮게 속삭였다.
“나 혼자 두고 가는 여자 친구한테 이 정도는 허락 안 받고 해도 될 것 같아서.”
그 달콤한 말 안에는 귀여운 투정도 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자신을 순순히 보내 주긴 하지만서도 못내 아쉬운가 보다.
그런 그가 설레면서도 귀엽게 느껴졌던 나봄은 긴장했던 어깨를 풀며 웃어 버렸다.
“하하, 갑자기 뭐야. 놀랐잖아.”
그러자 그녀를 따라 피식 웃음을 흘려보낸 태오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러고서 꺼내 놓는 질문은 은근히 야릇했다.
“조금 더 놀라게 해도 돼?”
“조금 더?”
나봄의 되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오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끌어 내렸다.
머지않아 그녀의 입술에 맞부딪혀 오는 건 뜨겁게 달구어진 그의 입술이었다. 미처 입맞춤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던 나봄의 두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얼마간 그녀와 온기를 나누고 있던 태오는, 이윽고 부딪혔던 속도보다 아주 천천히 그녀와 닿아 있던 입술을 떼어 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도 돼?”
그런 뒤 흘려보내는 질문은 아까보다 자극적이었다.
이번엔 그가 무엇을 할지 제대로 알아챈 나봄은 대답 대신 가는 숨만 내보냈다.
태오는 그런 그녀를 더욱 힘주어 붙잡았고, 이내 한 번 더 입술을 맞부딪혔다.
두 번째 키스는 아까처럼 가볍지 않았다. 한동안 나봄의 윗입술을 야릇하게 머금고 있던 그는 이내 틈을 벌려 다디단 혀끝을 밀어 넣는다.
“음…….”
나봄은 나른한 신음과 함께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태오의 숨결은 그 손길에 이끌리듯 더욱 깊이 나봄을 파고들었고, 이내 한 발자국씩 그녀를 떠밀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뒷걸음질을 치던 나봄이 도달한 곳은 다름 아닌 그의 침대였다.
“태, 태오야…….”
폭신한 감촉을 느낀 나봄은 서둘러 입술을 떼어 내고 태오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더욱 달아오른 태오는 가쁜 숨을 내쉬었고, 끓어넘치는 본능만큼 애타게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곳…… 한 번만 물어 봐도 돼?”
“…….”
“나봄아, 그래도 돼?”
“…….”
“응? 해도 돼……?”
그렇게 야릇한 걸 아이처럼 보채듯이 자꾸 물어보면 한 번 튕겨 볼 수도 없잖아.
태오가 있는 대로 흔들어 놓은 나봄의 이성은 결국 그녀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어 놓았다.
어느덧 왜 그를 떠나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린 나봄은 붙잡고 싶은 만큼 힘주어 그의 허리를 껴안았고, 까치발을 들어 먼저 그에게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 수줍은 키스가 어떠한 대답보다도 마음에 들었던 태오는 조금 더 힘을 들여 나봄을 밀어붙였다.
털썩―
결국 침대 위로 안착한 두 사람의 몸. 그걸 신호탄 삼아 더욱 깊숙이 얽혀 드는 호흡.
끊임없이 파고드는 태오의 혀끝은 나봄으로 하여금 숨 쉴 틈도 주지 않았다. 입술을 떼어 놓나 싶으면 다시 집어삼키고, 떼어 놓다 싶으면 다시 집어삼켜서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맞부딪히고 있는 가슴은 왜 이렇게 터질 것처럼 요동을 치는지.
이대로라면 그도 알아차릴 거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나의 온도를.
사실은 그래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야 너도 조금 더 과감하게 나를 안을 수 있잖아.
나봄의 은밀한 욕심을 읽은 것처럼, 태오의 두 손이 그녀의 골반을 감싸 쥐었다. 머지않아 조금씩 올라오는 손은 그녀만큼이나 달떠 있다.
나봄은 허락 대신 있는 힘껏 그를 껴안아 주었다.
그러고선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의 숨결을 받아들이려던 그때.
“아…… 미안.”
돌연 태오의 입술이 뚝 떨어졌다. 마음의 준비를 다 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멈춰 놓은 키스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으, 응?”
“아, 진짜 미안. 놀랐지.”
“별로…….”
안 놀랐다고 말하고 싶었건만, 난처함 가득한 태오의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미쳤나 봐. 키스만 하면 왜 자꾸 손이 나가는지.”
“…….”
“다음엔 키스하기 전에 수갑이라도 채워 놓는다, 내가.”
그는 지금 괜한 자책을 하느라 정말 괜찮아 보이는 나봄의 표정도 살피지 못하고 있다.
순간 나봄의 마음엔 떠나간 손길의 아쉬움부터 채워지지 못한 기대감이 주는 허무함, 그리고 무책임하게 떠나려는 태오에 대한 얄미움까지, 갖가지 감정들이 폭풍우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감정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말은 단 한 가지.
나는 김칫국 마시듯 열어 놓은 마음이 아까워서라도 이대로는 못 가겠다.
생애 처음으로 도발적인 결론을 내린 나봄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이내 긴장감 가득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나…….”
“…….”
“여기서 자고 갈까.”
미묘하게 떨리고는 있으나 망설임은 없는 그녀의 파격적인 질문.
태오는 지금 본인이 무슨 얘길 들은 건지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타들어 가는 목 너머로 마른침만 꿀꺽 삼켜 넘기고 있으니, 나봄이 떨어지려 했던 그의 허리를 꼭 붙잡았다. 태오 못지않게 달아오른 두 손으로.
“한나봄…….”
이제야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은 태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봄은 그 목소리에 반응하듯 가만히 눈을 감았다.
포근한 침대 위. 불긋하게 부어오른 입술. 내 가슴 아래 누워 있는 그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태오의 이성을 앗아 가기에 충분했다.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새하얘져 버리는 게, 정수리에 번개라도 내리꽂힌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