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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남친이 내게 반했다-55화 (55/104)

55. 오늘부로 짝사랑 청산합니다

2017.11.06.

“들어와.”

목동역 근처 태오의 아파트.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한 태오가 현관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나봄은 아무도 없는 주변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그 순간 코끝을 스치는 익숙한 향기는 이따금 태오에게서 나던 것과 비슷했다.

그걸 깨닫자마자 왜 이렇게 심장이 크게 뛰는 건지. 누가 보면 이 집에 처음 와 본 건 줄 알겠다.

“마실 거 줄까?”

어느 새 부엌으로 걸음을 옮긴 태오가 나봄에게 말했다. 나봄은 구두를 벗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태오는 냉장고를 열어 한참을 부스럭거리는가 싶더니.

“사과즙 먹을래? 본가에서 보내 줬는데.”

보물단지 꺼내듯 소중히 사과즙 팩 하나를 꺼내 들고는 물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던 나봄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얹혔다.

“내가 먹어도 상관없으면 줘.”

“니 입에 들어가는데 뭐가 아깝겠냐.”

장난스러운 나봄의 말을 달콤하게 받아친 태오는 가위로 팩 귀퉁이를 잘랐다. 그러고는 준비해 놓은 빨대를 꽂아 나봄에게로 가져왔다.

그건 꼭 아침마다 비타민을 챙겨 주는 한 사장 같아서 나봄은 왠지 정감 있게 느껴졌다.

“고마워.”

나봄은 태오가 내민 사과즙을 얌전히 받아 들며 말했다. 그러자 태오는 괜히 멋쩍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뭐든 말하면 해 주는 거야?”

“없는 재료는 사 와서라도 해 준다, 내가.”

“글쎄, 일단…….”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태오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내 옆에 앉아 있어 줘. 지금은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아.”

갑작스러운 그녀의 요구는 태오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비록 그녀를 집으로 데려오긴 했으나 절대 흑심은 품지 않으려 했건만.

이런 식이라면 애써 묶어 놓은 본능이 지 혼자 날뛰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순진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나봄은 이 마음을 알려나 모르겠다.

태오는 손끝까지 간지럽게 만든 감정들을 애써 무시한 채 순순히 그녀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 나니 괜시리 부끄러워지는 마음에 애먼 곳만 바라보고 있자.

“하아…….”

나른한 숨을 내쉬며 나봄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준비하지 못한 스킨십에 놀란 태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나봄은 갑작스레 경직된 태오의 몸을 느꼈으면서도 지그시 두 눈을 내리감았다.

아무 말 없는 그녀로 인해 찾아온 정적은 태오의 심장 소리를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쿵쾅쿵쾅 요란하게 날뛰는 꼴을 보니 이러다 혈압이 높아져서 기절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 나 진짜 힘들었어.”

그때 나봄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태오는 그녀가 힘든 것이 어쩐지 제 탓인 것만 같아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이어진 나봄의 이야기는 보다 진솔했다.

“사람들은 날 이상하게 쳐다보고, 가끔 나는 모르는 나에 관한 소문들도 들려오고…….”

“…….”

“게다가 드레스는 너무 예뻐서 안 어울리더라. 가방도 마찬가지고.”

다른 건 다 공감하겠지만 마지막은 너의 오해라고 꼭 말해 주고 싶다.

지금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너의 모습이 얼마나 천사처럼 아름다운지, 아마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이상 상상도 못 할 거다.

태오는 지친 그녀를 위해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까, 진심으로 깊이 고민했다.

그러나 손을 뻗어 보기도 전에 들려온 그녀의 한 마디는 태오를 멈춰 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너만 계속 찾아다녔어.”

“…….”

“니가 있으면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 말은 즉, 오늘 그녀에겐 태오가 간절히 필요했다는 뜻이었다.

사실 오늘뿐만은 아닐 것이다. 요즘 들어 그녀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태오의 곁에 머물러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하고 있다.

그런 마음에 대해선 차준의 부탁을 받아들이기 전부터 짐작하고 있던 태오였지만…….

왜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걸까. 내가 그녀를 지킬 수 있다는 것에.

왜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지켜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그녀가 원하는 건 오직 나뿐이었는데.

“미안해.”

이제야 왜 그녀를 위한 선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무거워졌는지를 깨달은 태오는 흐린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니가 왜 사과를 해.”

나봄은 웃으며 대답했으나 태오의 먹먹한 눈빛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홀로 외롭게 내버려 두려 한 것에 짙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전부 내 잘못이야.”

“…….”

“난 너한테 별 도움이 못 된다고, 그러니까 오늘은 나서면 안 된다고 멋대로 결론지어 버렸으니까.”

이윽고 태오가 흘려보낸 말은 흡사 자격지심과 비슷했다. 나봄은 그에게 기대어 있던 고개를 떼어 내고 태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태오는 그녀 쪽으로 살짝 몸을 틀었고, 애타는 목소리를 이어 붙였다.

“사실 오늘 일부러 피해 있었던 거 맞아.”

“…….”

“그래서…… 내가 미안해.”

마주한 태오의 눈동자가 흐리게 일렁였다.

그 안엔 미안하다는 말 말고도 그가 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가장 눈에 선명히 보이는 너의 마음은.

‘난 지금 불안해.’

……쯤 되려나.

나봄은 절대 부러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던 그가 한순간에 흐트러지는 때를 알고 있다.

처음엔 그저 감정 기복이 심한 건 줄 알았지만, 요즘 들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 너는 태양처럼 뜨겁게 타오르다가도 일정한 구간에서 먹구름처럼 흐려져 버린다.

바로, 내가 너에게로 한 발짝 다가서려 할 때.

너는 나를 반가워하다가도 살짝 겁을 낸다.

무엇이 그렇게 무서운지, 무엇이 그렇게 걱정스러운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마다 너의 머릿속에는 수천 가지 고민이 떠오르는 게 분명하다.

그런 너를 위해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

“니가 사과할 일은 아닌데, 일부러 피해 다녔다니까 괘씸하긴 하네.”

나봄은 토라진 척 대답하면서도 그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그 미소의 의미를 알지 못했던 태오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봄은 그런 태오를 똑바로 마주했고, 다시 복숭앗빛 입술을 움직였다.

“태오야.”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또렷했다. 태오의 말초신경을 제대로 집중시킬 만큼.

그렇게 모든 감각을 그녀에게 가져다 놓았을 무렵.

“내 남자친구 할래?”

뒤따라온 질문은 그의 숨을 멎게 만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태오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 * *

오직 햇빛에 닿은 곳만이 따스한 방.

태준은 벌써 몇 번이나 읽었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책이었고, 신파적인 결말이라 그리 마음에 드는 책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걸 고른 이유는 그저 이 책이 가장 두껍기 때문이었다. 이 책이라면 불안한 시간으로부터 가장 오랫동안 벗어나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드레일 창립 기념회가 열리는 오늘.

태준은 서 대표가 기어이 행사장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달 받았다. 그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으나, 막상 벌어지고 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이 해결되는 대로 연락을 해 달라 김 실장에게 부탁해 놓은 지가 벌써 네 시간 전.

시계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지만 시간은 좀처럼 흐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실감할 때마다 가슴은 타들어 가다 못해 새까만 재가 되어 버릴 것만 같다.

그때.

♩♪♬― ♩♪♬―

바로 옆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이 드디어 전화벨 소리를 토해 냈다. 수신인이 상황 전달을 맡은 김 실장이라는 걸 확인한 태준는 서둘러 손을 뻗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김 실장님. 어떻게 됐나요.”

곧바로 터져 나온 태준의 목소리는 기다렸던 만큼 다급했다.

그러나 김 실장은 그런 태준과 상관없이 느리고 차분한 보고를 시작했다.

―지금 막 모든 행사 일정이 끝났습니다. 아직 만찬이 진행 중이긴 하지만 1시간 내에는 파할 것 같군요.

“별일은 없었나요?”

―별일이라면…….

“어머님과 차준이요. 두 사람,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그리 묻는 태준은 사실 알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을 리가 만무하다는 걸.

―그럴 리 있겠습니까. VVIP들 앞에서 제대로 맞붙으셨는걸요. 욕설은 물론이고, 대표님께서 선우차준 이사님의 뺨까지 내리치셨을 만큼 감정싸움이 격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온 김 실장의 대답은 가히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뒷얘기는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래도 결론적으로는 잘 해결되었으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 소란이 일어났는데 잘 해결되다니요.”

손찌검까지 오고 간 갈등은 아무리 생각해도 둘 중 하나를 망가트려 놓았을 터였다. 최악의 경우, 둘 다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져 버렸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하지만 김 실장은 방금 전의 대답에 대해 번복하는 대신 뜻밖의 이름을 꺼내 놓았다.

―한나봄 팀장 덕에 더 큰 분란은 막았습니다.

“한나봄…… 팀장님이요?”

―예, 그분이 집안 사정에 대해 꽤나 자세히 알고 계시던데…… 혹시 찾아가셨을 때 개인적인 얘기까지 다 털어놓으셨던 겁니까?

김 실장이 그런 질문을 던지는 걸 보면, 나봄은 태준의 부탁을 그만큼 잘 수행해 주었나 보다.

고통스럽게 꺼낸 이야기가 무색해지지 않게, 그녀는 두 사람의 마음을 알맞게 파고든 모양이다.

“하아…….”

그제야 한결 마음을 놓은 태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혹시나 나봄에게 해코지가 갈까 싶어, 단호한 어조로 김 실장에게 대답했다.

“나봄 씨에 대해서 불필요한 염려는 삼가 주세요. 이럴 때를 대비해서 적당한 멘트들을 알려 줬던 것뿐입니다.”

―하지만…….

“이 이상 집안에 개입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괜한 오해가 커지지 않도록 어머님께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아…… 예, 알겠습니다.

태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걱정스러운 점은 있었다.

하지만 김 실장은 굳이 드러내 놓지 않고 순순히 그가 원하는 대답을 꺼내 놓았다. 이런 문제에 깊이 개입해선 안 되는 건 김 실장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자택에서 뵙겠습니다.

중요한 보고를 모두 끝마친 김 실장은 통화를 끝마치려 했다. 하지만 태준에게는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럼…… 차준이는 지금 괜찮나요?”

이리 물어 봤자.

―글쎄요, 행사 내내 멀쩡히 자리는 지키고 계셨지만 워낙 남 앞에선 내색을 안 하시는 분이니.

들려올 대답은 이렇게나 뻔하지만.

그래도 듣고 싶었다.

오늘도 너는 무사히 괜찮은 척을 해냈던 건지. 오늘의 너에게 그럴 힘이 남아 있었는지.

‘다행히도 아직까진 버틸 수 있나 보구나…….’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차준의 상태를 확인한 태준은 그제야 별로 읽고 싶지도 않았던 두꺼운 책을 덮어 두었다.

그리고 겨우 안도한 듯 흐린 숨을 골랐다. 가늘게 떨려 오는 속눈썹은 그가 얼마나 불안에 짓눌려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더 여쭤 보실 건 없으십니까.

짧은 침묵 끝에, 김 실장이 건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확인하고자 하는 걸 모두 전해 들은 태준은 그제야 순순히 통화를 마무리 짓기로 했다.

“네, 잘 해결됐다니 다행이군요. 보고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자택에서 뵙겠습니다.

김 실장은 짧은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고, 태준은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을 드디어 끝마쳤다.

무사히 넘어갔다고 할 수는 없지만 큰 참사는 피하게 된 오늘.

안도감 뒤에 따라오는 건 뿌리 깊은 고독이었다.

지옥 같은 하루를 보냈을 그 아이에게 수고했다는 한 마디도 건넬 수 없는 태준은 문득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 견딜 수가 없다.

모든 건, 나약한 나로 인해 태어난 비극인데도 불구하고.

이래서 너는 날 그토록 끔찍이 싫어하나 보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뻔뻔하고 형편없는 인간이다.

* * *

“내 남자친구 할래?”

내 귀가 잘못되진 않았을 텐데, 지금 뭐라고…….

파르르 떨리는 태오의 속눈썹은 요동치는 마음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나봄은 긴장한 와중에도 차분히 고백을 이어 나갔다.

“니가 내 남자친구가 되면 당연히 내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거잖아. 오늘 같은 때 피해 다닐 걱정할 필요도 없고.”

“…….”

“그러니까 우리 차라리 연애를 하면 어떨까 싶은데…….”

“…….”

“넌 어떻게 생각해?”

……내 생각은 어떠냐고? 그걸 올해로 짝사랑만 9년 차인 나한테 묻는 거야?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대답하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 더 격하게 베란다 창을 열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동네 사람들아! 나 드디어 짝사랑 청산한다!

하지만 왜 이 중요한 순간에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 건지, 태오는 도무지 스스로를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입술뿐만이 아니었다. 누가 석고라도 부어 놓은 듯 온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버렸다.

“태오야……?”

가만히 굳어 있는 그의 어깨를 나봄이 살짝 흔들었다.

그제야 퍼뜩 돌아온 온몸의 신경세포는 지나치게 놀란 나머지 그를 자리에서 벌떡―! 일으켜 세우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란 나봄의 눈이 태오만큼이나 휘둥그레졌다.

“태, 태오야?”

“아, 아…….”

“…….”

“나 화, 화장실 좀……!”

태오는 무턱대고 대답을 미뤄 놓은 채 서둘러 등을 돌렸다.

이 상태로 계속 나봄과 눈 맞추고 있다가는 심장이 터져 죽어 버릴 것 같아서였다.

‘심호흡할 공간이 필요해. 심호흡할 공간이…….’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대는 걸음으로 사라지는 그를 나봄은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화장실을 간다고 했던 그가 사라진 곳은 가장 구석진 방, 홀로 사는 그의 드레스 룸이었다. 참 어리둥절하게도.

“저기 화장실 아니지 않나…….”

나봄은 그가 문을 열었다 닫기 전 똑똑히 보였던 옷장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때.

“와아!”

방문을 뚫고 온 그의 목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그건 얼핏 괴성처럼 들렸으나, 끝이 하염없이 올라간 걸 보니 환호성임이 분명했다.

쿠당탕!

뒤이어 들려오는 소리는 참 난리법석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그의 흥분이 가라앉길 기다리고 있었을까.

끼이이익―

드디어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날뛰던 태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마주한 그의 얼굴은 모든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온 줄도 모르는지, 차분하고 평온했다.

“그래.”

“…….”

“니 남자친구 하지, 뭐.”

태오의 검붉은 입술 사이로 수락의 뜻을 담은 말이 떨어졌다. 애써 멀쩡한 척하는 그는 꼭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귀엽게 느껴졌다.

그런 그를 보는 게 즐거웠던 나봄은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터트렸다.

“하하, 넌 진짜 귀여운 타입이구나.”

갑작스러운 칭찬은 태오를 낯간지럽게 만들었으나, 굳이 말리지 않는 않기로 했다. 여기서 싫은 척하면 두 번 다신 안 해 줄까 싶어서.

“가, 갈아입을 옷 줄게. 잠깐만 기다려.”

태오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다시 드레스 룸 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로 이어지는 나봄의 웃음소리는 오늘의 불안했던 모습이 기억도 안 날 만큼 마냥 즐거워 보였다.

태오는 그녀를 따라 남몰래 미소를 흘려보냈고, 옷장에서 가장 향기가 좋은 티셔츠를 골라 꺼냈다.

어쩐지 그녀를 챙겨 주는 일은 전보다 더 기쁘게 느껴졌다.

이제 내가 챙겨 주고 싶은 만큼 챙겨 줘도 되고, 사랑해 주고 싶은 만큼 사랑해 줘도 되는 나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거다.

앞으로는 어디 가서 ‘안녕하세요, 한나봄 남자친구입니다.’라고 소개할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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