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우리 집 갈래?
2017.11.03.
“하아…….”
긴 한숨을 내뱉은 태오가 김밥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최대한 우물우물거려 보고는 있지만 내가 지금 특급 호텔 음식을 먹고 있는 건지, 길바닥 모래알을 씹고 있는 건지 분간도 가지 않는 이 순간.
그는 깊은 절망감에 가라앉아 있다.
아무리 이성을 다잡아 보려 해도 한 번 무너져 내린 마음은 좀처럼 원상 복구 될 줄을 모른다.
김 대리에게서 빼앗아 온 접시는 벌써 반이나 비워졌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혼자 청승 떨어 봤자 누가 알아준다고 이러는 건지.
태오는 이런 자신이 싫었지만 스스로를 나무라기에도 지친 상태였다.
지금 와서 무언가를 후회해 봤자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다.
그런 그가 화풀이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애꿎은 김밥뿐이었다. 태오는 한 번에 김밥 세 개를 동시에 집어 입 안에 억지로 우겨 넣었다.
그렇게 온갖 청승은 도맡아 떨고 있던 그때.
또각 또각 또각―
규칙적인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그 인기척은 꽤나 가깝게 다가왔으나 이미 넋이 나가 버린 태오는 인기척 따위 신경도 않고 음식물로 가득 찬 입만 우물거렸다.
하지만 그의 바로 앞에 우뚝 멈춰 버린 걸음은 그를 더 이상 외면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뭐야…….”
태오는 사나운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천천히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예민하게 구겨져 있던 미간은 금세 맥없이 풀어져 버리고 만다.
“여기 있었구나.”
“…….”
“이런 데 있었으니까 못 찾지.”
“……한나봄?”
나봄과 마주한 태오의 눈빛이 가늘게 떨려 왔다.
이 순간 그에게 한나봄은 반갑다 못해 애달프게 그리운 존재였지만, 태오는 오늘 하루 그녀의 앞에 나타나선 안 되는 처지였다.
“니가 왜 여기…….”
그래서 부질없는 질문만 흐리게 꺼내 놓으려 하니, 나봄은 들리지 않다는 듯 걸음을 마저 옮겼다. 그러고는 태오의 옆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아 버렸다.
“하아…… 이제야 숨이 쉬어지네.”
힘없는 한숨 소리와 함께 흘러나온 그녀의 혼잣말.
그건 꼭 그녀가 그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는 것처럼 들려서 가슴이 옥죄어 들었다. 하지만 태오는 동요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실은 나를 찾아온 그녀를 있는 힘껏 와락 끌어안고 싶지만.
‘모든 건 단태오 팀장님한테 달려 있어요.’
‘내가 어떻게든 나봄이를 지켜보려고 해도 단 팀장님이 훼방 놓는 순간 끝장나는 거니까.’
‘그러니까 이번만, 이번 한 번만 나봄이 곁에 다가오지 마요.’
욕심이 들 때마다 차준이 했던 말이 족쇄처럼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감히 손을 뻗어도 될지, 이러다 내가 그녀를 망쳐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만이 앞선다.
그렇게 침묵만 유지하고 있는 동안.
“밥을 왜 여기서 먹어?”
지친 듯한 표정을 애써 떨쳐 낸 나봄이 태오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계속 찾아도 안 보이던데…… 여기서 이러고 있었던 거야?”
“…….”
하지만 태오는 재차 들리는 그녀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담담한 목소리를 꺼내기엔 목이 너무 메어 있어서였다.
나봄은 침묵하는 그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았고,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흘려보내는 목소리는 애써 차분했다.
“그렇게 말을 안 하고 있으니까 꼭 나 피해서 숨어 있었던 사람 같잖아…….”
그 한 마디에 철렁 내려앉아 버리는 태오의 가슴.
규칙적으로 새어 나오던 태오의 숨소리가 일순 고요히 멎었다.
그건 그녀의 짐작이 맞는 얘기라고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지만, 거짓말에 서툰 그는 무너지는 마음을 노련하게 숨기지도 못했다.
“……브리핑 곧 시작하겠다. 들어가자.”
그런 태오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었으면서도 듣지 못한 척, 고개까지 돌리고 있는 나봄은 자리에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게 고집을 부리는 그 모습은 태오의 마음을 약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뒷일이고 뭐고 욕심대로 일을 저질러 버릴 것 같아.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오직 나봄만을 생각하고 싶었던 태오는 솟구치는 욕심을 억누른 채 그녀를 재촉했다.
“밖에 오래 나와 있으면 안 돼.”
그러자 그녀는 잠시 아랫입술을 꾸욱 깨무는가 싶더니.
“꼭…… 가야 돼?”
곧이어 애원과 비슷한 질문을 흘려보냈다. 그녀를 바라보는 태오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일렁였다.
“뭐……?”
“여기 있으면 안 될까.”
“…….”
“들어가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흐린 음성을 흘려보낸 나봄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애타는 그녀의 손끝이 간절히 붙잡는 건 축 늘어져 있던 태오의 소매 끝자락이었다.
태오는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듯 흐려진 눈동자로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심상치 않은 흔적.
얼마나 세게 부여잡힌 건지 그녀의 하얀 팔목 위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다.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그 흔적은 누가 만든 것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뻔했다.
“이거…… 왜 이렇게 됐냐.”
그리 묻는 태오의 음성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나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은 감출 수 없는 불안감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다.
그 순간, 태오는 깨달았다.
지금 너의 곁에는 누가 서 있어야 하는지.
비록 나는 너에게로 겨누어진 화살을 멈출 힘도 없고, 적의 가득한 이들과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만큼 강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거 하나는 그 새끼보다 잘할 자신이 있다.
‘적어도 나는 널 아프게 만들진 않아. 절대.’
몇 날 며칠 동안 불안정하던 마음은 결정을 바꾸고 나서야 마치 이것이 정답이라는 듯 진정되었다.
태오는 그녀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려 두었고,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가자.”
그러고선 짧은 한 마디와 함께 힘주어 떼어 냈다. 놀란 나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 채 흔들렸다.
하지만 일말의 걱정도 잠시.
“그냥 나가자, 우리 둘이서.”
이어지는 태오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따듯했다. 나봄의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도 말끔히 사라지게 만들 만큼.
“태오야…….”
“괜찮아, 뒷일은 내가 책임질게.”
“…….”
“이제부턴 나만 믿고 따라와. 내가 널 지킬 거야.”
책임져 주겠다는 말. 믿고 따라와 달라는 말. 지켜 주겠다는 말.
그가 건넨 모든 말들은 하나같이 불안한 나봄에게 위로가 되었다.
돌덩이라도 내려앉은 듯 무거웠던 가슴은 그제서야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옥죄던 심장박동도 평온을 되찾는다.
“다시 손잡을래?”
태오는 손자국이 나 있지 않은 나봄의 팔 앞으로 다정한 손길을 건넸다.
답답한 현실에서 구원해 줄 것만 같은 당신이라는 동아줄.
그걸 뿌리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응. 잡을래.”
그를 붙잡기로 한 나봄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
자격지심에 젖어 헛된 선택을 했던 지난 시간들이 정말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손을 힘주어 맞잡은 태오는 출구를 향해 서슴없는 발걸음을 떼어 냈다.
어쩌면 이건 위험에 가까워지는 길일지도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걱정되거나 겁이 나지는 않았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그녀가 온전히 무사한 것.
태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그런 그녀를 상처 입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옳은 선택이다. 장담하건대, 내 곁에 있는 이상 넌 절대 아파할 일이 없을 테니.
* * *
“지금부터 ‘Lily’ 프로젝트 소개 및 계획안 브리핑, 간담회가 있겠습니다. 행사에 참석해 주신 귀빈 여러분들께선 자리에 착석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멀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김 대리가 단상 위에 섰다.
그가 말하기 한참 전부터 이미 힘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차준은 연회장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도망치듯 사라진 지가 얼마나 됐더라.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으면서 연락도 않은 지는 또 얼마나 흘렀더라.
불길한 생각은 이미 그의 머릿속을 집어삼킨 후였지만, 그는 애써 현실을 외면하는 중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멀쩡한 정신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할 것 같으니.
“그 자리……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구나.”
그때, 차준의 앞에 앉은 서 회장이 비어 있는 차준의 옆자리를 보며 말했다.
차준은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듯 했지만,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대답했다.
“잠시 쉬러 갔습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긴장했던 모양이에요.”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 누구라도 단번에 파악해 낼 수 있었다.
지금 차준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어느 때보다 억지스러웠으니까.
“……하긴,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그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대외적인 시선들 앞에선 그리 두는 편이 백번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 미묘하게 무거워진 공기.
지잉―
서늘한 침묵을 뚫고 차준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기다리고 있는 연락이 있었던 차준은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러자 머지않아 눈에 들어온 내용은 차준의 가식적인 미소조차 지워 버리게 만들었다.
[니가 보디가드 노릇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아서 나도 니 대타 노릇 때려치웁니다. 각자 일은 각자 알아서 합시다.]
“단태오…….”
차준은 또렷이 적혀 있는 발신자의 이름을 싸늘히 읊조렸다.
그리고 있는 힘껏 휴대폰을 쥐어 잡았다. 하얀 손등에 제대로 핏줄이 서도록.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모양이구나.”
갑작스럽게 바뀐 그의 분위기를 읽어 낸 서 회장이 말했다.
하지만 이미 반쯤 이성을 잃어버린 차준은 노골적으로 구겨진 미간을 좀처럼 수습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선 이곳을 박차고 나가 그들을 막아서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묶여 있어야 하는 현실이 그를 더 분노시킨다. 이 순간,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를 탓하다 못해 증오하게 만든다.
사적인 감정에 휘둘려 노련하게 굴지 못하는 건 서재균 회장이 가장 싫어하는 모습이었다.
“선우차준 이사.”
아니나 다를까. 서 회장이 보다 싸늘해진 음성으로 차준의 이름을 불렀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차준의 눈빛이 천천히 서 회장에게로 향했다.
“뜻깊은 행사 자리인데 좀 웃지 그러니.”
이어지는 서 회장의 말은 지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감히 거역하기가 두려울 만큼 위압적인.
바로 지금, 누가 내 머리에 총알이라도 박아 넣어 준다면 좋을 텐데. 차라리 그 꼴이 나을 텐데.
불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고개를 떨구어 버리기로 한 차준은 깊은 어둠에 잡아먹히는 중이다.
숨이 점차 막혀 오지만 발버둥은 치지 못했다.
아니, 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항해 가면서까지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 * *
호텔 정문 앞.
무사히 연회장에서 벗어난 태오가 돌연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방금 전 나봄의 손을 붙잡고 야심차게 빠져나올 때까지만 해도 의식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오늘은 차를 집에 놔두고 온 참이었다.
호텔의 바로 근처에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이 있긴 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엔 나봄의 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따라 새삼 반해 버릴 만큼 예쁜 나봄은 화려한 파티용 미니드레스 차림이었으니.
“왜? 무슨 문제 있어?”
태오의 안색을 읽은 나봄이 토끼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태오는 이내 미안함 가득한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어쩌지, 차를 두고 왔는데…….”
“아아.”
“너도 안 가져왔어?”
“응, 돌아오는 길에 막힐까 봐.”
그러자 태오의 눈빛엔 당황스러움이 더욱 짙어졌다.
선우차준에게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메시지까지 보내 놓은 이상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할 텐데…….
“일단 급한 대로 콜택시 부를게.”
태오는 휴대폰을 꺼내 콜택시 어플리케이션을 켰다.
하지만 금세 다시 난처해져 버렸다. 화려하고 불편한 옷차림의 나봄을 데리고 갈 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그거 입고 시내 돌아다니기는 조금 그렇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태오는 나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곧바로 내뱉어진 나봄의 대답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아…… 생각해 보니까 창피하긴 하네.”
그럼 이제부터 어쩐담.
짧은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그렇게 생각했다.
계획에도 없던 일탈을 감행한 지금, 어딜 가야 할지 무얼 해야 할지 뭐 하나 쉽게 정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꼬르르륵―
그녀의 배꼽시계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하필 조용할 때 터진지라 소리는 쓸데없이 청아하기도 했다.
당황한 나봄은 태오에게도 들렸을까 싶어 휘둥그레진 눈동자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피식, 웃음을 흘리는 그는 나봄의 밥 달라는 신호음을 들어 버린 것이 분명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살짝 굳어 있던 눈동자는 어느 새 장난기를 가득 머금고 있다.
“배고파?”
아니나 다를까. 태오가 나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민망해진 나봄은 대답 대신 괜히 시선을 피했다.
“한나봄.”
태오는 그런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고, 이내 수줍음 가득한 목소리를 이어 보냈다.
“밥해 줄까.”
“…….”
“우리 집에서.”
로맨틱한 데이트 신청도 아닌데 왠지 가슴이 떨렸다.
왜 그의 집이라는 단어 뒤에 은밀한 기대감이 드는 건지.
나봄도 도통 제 감정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고개만 끄덕거릴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