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파티
2017.10.30.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최 실장님. 잘 지내셨죠?”
“항상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하하.”
연회가 시작되고 차준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을 맞이하는 차준은 회사에서 보아 왔던 그 모습처럼 여유롭고 노련했다.
하지만 나봄은 좀처럼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웃고 있어 보려고 해도 입꼬리가 굳고, 자연스럽게 굴어 보려고 해도 어깨부터 딱딱하게 경직되어 버린다.
그건 나봄이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 탓도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차준이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
“아, 한봄 도어락 한나봄 팀장입니다. 제가 각별히 아끼는 사람이죠.”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스스럼없이 꺼내지는 대답.
나봄은 그와 함께 건네지는 부드러운 시선이 난처하다. 이렇게 나서서 사람들에게 소개를 시켜 주는 차준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의미심장하게 비칠 것만 같다.
이번에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있을 순 없다고 생각한 나봄은 직접 나서서 협력업체 실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우드레일과 ‘Lily’프로젝트 도어락 부분 협업을 진행하게 된 한봄 도어락 팀장 한나봄이라고 합니다.”
떨리는 마음을 숨긴 채 담담히 꺼내 놓는 소개는 그녀의 프로페셔널한 면모를 더욱 드러내 주었다.
그제야 나봄에게도 시선을 준 실장은 반갑다는 듯 악수를 청해 왔다.
“아아! 한나봄 팀장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아, 그런가요?”
“최근 들어 한봄 도어락 문제가 이 업계 쪽에서 아주 뜨거운 이슈잖아요! 물론 먹고살려면 때로 지저분해지기도 해야겠지만…….”
그러나 머지않아 실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부정적인 표현들은 당황스러웠다.
차준이 경고했던 분위기가 바로 이런 것일까. 처음 만난 그는 묘한 경계심을 띠고 있는 것 같다.
나봄은 처음 겪어 보는 견제를 능숙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잠시 얼어붙었다. 차준은 그런 그녀를 대신해 실장의 말을 단호하게 받아쳤다.
“난처할 걸 알면 말씀을 조심하시지.”
“……네, 네?”
“아, 혹시 나 들으라고 말하신 건가. 분위기 파악 못 하셔서.”
그런 뒤에 보란 듯이 나봄의 허리를 감싸는 차준은 몹시 거침없었다.
나봄은 그 노골적인 손길에 당황했으나 실장의 얼굴은 그녀보다 더 아연실색이 되었다.
“아아! 저, 저는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런 헛소문이 돌아서 신경 쓰이시겠다는 의미로……!”
손까지 휘저으며 방금 전 일에 대해 해명하는 그는 몹시도 필사적이었다.
차준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검지 손가락을 입술 위로 가져다 댔다. 눈가에 어린 웃음기는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쉿, 그만하세요. 또 말실수하실라.”
“보, 본부장님.”
“그럼 저희는 이만 다른 귀빈들과도 인사 나누러 가 보겠습니다.”
차준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실장을 두고 나봄을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이 모든 상황이 의아했던 나봄은 순순히 그를 따르면서도 조용히 물어보았다.
“저…… 본부장님. 저희 회사에 대해서 대체 무슨 의혹이 돌고 있는 건가요?”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하지만 차준이 곧바로 건네준 대답은 왠지 석연찮았다.
자세히 알려 주지도 않고 달래기만 하는 걸 보니, 그는 그녀가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신경을 꺼 두기엔 자신과 너무나도 관련된 일이었다. 이대로 한봄 도어락을 둘러싼 문제를 외면해 버리고 싶지 않았던 나봄은 한 번 더 캐묻기로 했다.
“한봄 도어락 문제라면 제게 말씀해 주셔야…….”
하지만 그 말이 다 꺼내지기도 전에.
“중대한 행사를 너무 사적인 자리로 이용하는 거 아니니?”
바로 뒤편에서부터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나봄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차준의 두 발은 단번에 제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등골부터 스며 들어오는 소름끼치는 한기.
두려움과 상실감이 깊어지다 못해 생겨난 혐오감.
정신을 똑바로 붙잡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넘어올 것만 같은 역겨움.
차준은 일순 싸늘해진 눈빛을 띠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고 그래. 꼭 못 볼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아니나 다를까, 그를 조소 섞인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분명 이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을 서미란 대표였다.
* * *
이미 한참 전에 행사가 시작된 연회장.
모던한 올블랙 정장을 세련되게 차려입은 태오가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 뷔페에서 음식을 가득 담아 가져오던 김 대리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버럭 소리를 쳤다.
“단태오 팀장님! 왜 지금 오십니까! 브리핑 최종 점검은 한참 전에 끝냈는데!”
두 시간 전부터 애타게 연락을 해도 감감무소식이던 단태오는 현장팀 최대의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그 속상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오는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무기력한 대답을 꺼내 놓았다.
“……끝냈다니 다행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늘은 차준의 부탁대로 나봄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 날.
혹시나 성질대로 욱할까 봐 밤새 마음을 다잡고 왔거늘,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어딘가에 있을 그녀가 벌써부터 신경 쓰여 죽겠다.
그녀의 곁엔 차준이 당연하다는 듯 서 있을 걸 생각하니 그저 절망스럽기만 한 심정이다.
그의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김 대리는 정리한 브리핑 자료를 내밀며 말했다.
“발표 순서가 조금 바뀌었어요. 기획팀 준비한 자료에 설명이 부족해서. 어차피 진행은 제가 하지만 알고는 계셔야 할 것 같네요.”
“…….”
“단 팀장님?”
“네?”
“브리핑 자료 받아 주세요. 팔 떨어지겠어요.”
“아…… 예.”
반쯤 넋이 나가 있던 태오는 뒤늦게 김 대리의 자료를 건네받았다. 그러자 김 대리는 평소와는 다른 느낌으로 저기압인 태오에게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오늘 어디 아프세요?”
“아니요.”
“그런데 안색이 되게 안 좋아 보이시네요.”
선우차준이랑 한나봄 때문에 속을 끓이고 있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태오는 거짓말을 했다.
“배고파서 그럽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김 대리는 친절히 뷔페가 준비된 코너 쪽으로 고개를 까딱여 주며 말했다.
“저쪽에 맛있는 거 많아요. 본격적으로 행사 시작하면 못 움직이니까 미리미리 가서 쟁여 오세요.”
사실 입맛도 없었던 태오는 대꾸도 하지 않고 몸을 틀었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떼어 내기 전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바로 절대 마주쳐서는 안 될 사람의 현재 위치.
“선우차준 본부장님은 어디 있습니까.”
마음 같아선 나봄에 대해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을 들을 자신이 없어서 일부러 선우차준만 언급했다.
“저기 VVIP 좌석 근처에 계세요. 한나봄 팀장님이랑 같이.”
그러나 눈치 없는 김 대리는 피하고 싶었던 이름까지 굳이 덧붙여 주었다.
태오의 눈빛이 돌연 까칠해졌다. 두 사람의 행방을 듣고 나니 상처가 될 게 뻔한 호기심만 잔뜩 자라난다.
“같이 뭐하는데요.”
“글쎄요. 본부장님이 한 팀장님 인사 시키는 것 같던데.”
“…….”
“둘이 분위기 장난 아니에요. 꼭 약혼자 소개시켜 주는 것 같더라니까요?”
이럴 줄 알았어. 물어보지 말걸.
어느새 태오의 눈동자는 삐딱함을 넘어 분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급속도로 차가워진 숨은 경고성이 짙었지만 김 대리는 한 번 터진 입을 멈추지 못하고 쓸데없는 말을 계속 내뱉었다.
“그래도 본부장님이 그렇게 내 여자 건드리지 말라는 오오라 풍기고 다니니까, 사람들도 한봄 도어락 가지고 어쩌네 저쩌네 소리 못 하더라구요.”
“…….”
“하긴 본부장님은 우드레일 회장님 손주분이시니까. 하하.”
아, 더 이상 못 들어 주겠다. 뭐 재밌는 얘기라고 저리 신이 났는지.
태오는 반쯤 틀었던 몸을 다시 김 대리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는 한동안 성난 숨만 내쉬며 그를 노려보고 있다가.
“어엇!”
이내 심술 난 아이처럼 김 대리의 음식 접시를 빼앗아 버렸다. 그런 뒤 홱 뒤를 돌아 멀어지는 모습은 굉장히 분통 터져 보였다.
“제, 제 접시 들고 어디 가세요!”
“밥 먹으러 갑니다.”
“예?! 아니, 테이블은 저쪽인데…… 단 팀장님!”
김 대리는 들어온 입구를 그대로 빠져나가 버리는 태오를 목 놓아 불렀으나, 그럴수록 그의 걸음은 더욱 빨라질 뿐이었다.
“참내, 왜 또 저렇게 혼자 열이 받은 건지…….”
아무리 눈치가 빨라도 태오의 속내만큼은 꿰뚫어보지 못하는 김 대리가 볼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대로 가면 절대 안 돌아올 기세이긴 한데, 차마 따라가서 붙잡는 건 겁이 나서 못 하겠다.
방금 전 단태오가 쏘아 낸 마지막 눈빛은 여차하면 잡아먹겠다고 엄포를 놓는 호랑이 같았으니까.
* * *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대표님.”
차준은 서 대표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어 주며 인사를 건넸다.
그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아는 서 대표의 눈빛에 날이 섰다. 그 안엔 벌써부터 폭발 직전인 분노가 용솟음치고 있었으나 그녀는 속내를 숨기고 여유롭게 대꾸했다.
“이 회사의 대표인 내가 창립 기념회 행사에 빠져서야 되겠니.”
“…….”
“그나저나 너는 자격도 없는 계집애를 잘만 끼고 돌아다니는구나.”
자격도 없는 계집애.
차준의 곁에 있다는 죄로 처참하게 깎아내려진 나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회생활을 하며 여러 가지 무례한 상황을 겪어 보긴 했으나, 이렇게 멸시와 악의가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어떻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서 대표는 계속해서 독기 서린 말을 이어 나갔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제 여자는 지키고 싶나 보지?”
“…….”
“니 형은 어찌되든 도와줄 생각조차도 안 했으면서. 아주 뻔뻔하기 짝이 없구나.”
차준을 향해 퍼부어지는 공격 속에 섞여 들어간 ‘형’이라는 존재에 대해선 나봄도 얼핏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지 않아도 분란의 씨앗이 되어 버린 선우태준은 나봄에게 찾아와 서 대표가 증오해 마지않는 제 동생을 제발 도와 달라고 애원했었다.
‘나봄 씨가…… 우리 차준이를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제발 우리 차준이 곁에 있어 주세요.’
‘그 사람들이 그 애를 더 비참하게 무너트리지 못하도록…… 나봄 씨가 지켜 주세요.’
그리 부탁하던 태준의 눈빛은 다시 떠올려 봐도 안쓰러울 만큼 고통스러워 보였다. 아마 그가 예견했던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었나 보다.
“왜 저한테 도움을 바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봄이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그때, 차준이 마른 모래처럼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서 대표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분노가 더욱 짙어졌다. 그걸 똑똑히 보고 있으면서도 차준은 제대로 맞부딪쳐 볼 생각인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어머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 새끼 인생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거.”
“그 입…… 닥치지 못해?”
“몸뚱이가 박살 나서 사람 구실도 못 하는 새끼를 대체 어떻게 구제해 보겠다고…….”
짜악―
순간 말릴 새도 없이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제야 그들에게로 향했지만, 옆으로 돌아간 차준의 고개와 붉게 물든 뺨으로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층 더 웅성대기 시작한 주변은 나봄을 보다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이쯤에서 멈춰야 할 것 같은데. 감정싸움을 벌이기엔 장소도 상황도 결코 좋지 않은데.
서 대표는 이런 분위기 따윈 아랑곳 않고 울분을 억누른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넌 짐승보다 못해…….”
“…….”
“피도 눈물도 없는 개새끼 같으니.”
“하…….”
차준의 입술 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건 얼핏 분을 삭이는 것처럼 보였으나 바로 곁에 있는 나봄은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경련하고 있는 그의 눈동자엔 분노보다 서러움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무언가 잘못됐다, 라고 느끼기 시작한 건 그때쯤이었다.
이대로라면 금세 망가져 버릴 것 같은 두 사람은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방어하고 있는 것 같다.
대체 무엇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는 걸까. 그들은 무엇을 이토록 두려워하는 걸까.
멈출 수 없이 솟구치는 의문은 나봄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선 이미 태준으로부터 들었으나, 그것으로 그들의 모든 심정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순간, 피가 나도록 꽉 깨물린 차준의 입술이 나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른침을 삼키는 그는 분명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또 한 번 칼을 빼어 들 게 뻔했다.
이 이상 두 사람의 전쟁이 극으로 치닫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던 나봄은 움츠러든 목소리를 냈다.
“자, 잠깐만요…… 두 분 모두 진정하세요.”
처참하게 무너진 차준의 시선과 더욱 살벌해진 서 대표의 시선이 그녀에게 와 닿았다. 눈빛의 온도는 달랐으나 그들은 하나같이 나봄이 끼어들 상황이 아니라고 경고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새, 태준에게 애절한 부탁까지 건네받은 나봄은 손 놓고 방관할 수 있는 제삼자가 아니었다.
이미 살벌한 상황이 펼쳐지긴 했지만 여기서 더 하극상이 되어 버린다면, 나봄은 불편한 몸으로 직접 찾아와 매달렸던 태준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말 거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은 나봄은 조용한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이런 식의 감정싸움으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
“이럴수록 비참해지는 건 폐가 될까 봐 여기 오지도 못한 그 사람뿐이잖아요…….”
“뭐……?”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그녀가 누굴 말하는지 알아챈 서 대표가 매서운 눈빛을 띠었다.
나봄과 태준에게 접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못하고 있던 차준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나봄은 그럴수록 담담하게 제 할 말을 꺼내 놓았다.
“그걸 조금이라도 알고 계시다면 사람들 앞에서만큼은 감정싸움을 자제해 주세요. 더 이상 엄한 사람 꼴만 우스워지지 않게…….”
“나봄아…….”
차준은 표정 관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녀의 이름만 힘없이 불렀다. 가장 고통스러운 존재가 가장 의지하고 있는 존재의 입에서 거론되는 기분은 생각보다 끔찍했다.
태준에 대한 얘기에 혼란스러워지는 건 서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제 형을 철저히 외면하는 차준은 절대 그에 대한 동정심을 드러내지 않았을 텐데. 혹시 태준이가…….
“니가 그 애를 어떻게…….”
서 대표가 사정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물어보려던 그때.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가 주시죠.”
서 회장이 보낸 경호실장이 서 대표의 팔을 붙잡았다. 아직 당황감을 정리하지도 못한 서 대표는 그를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손아귀에 힘을 싣는 경호실장을 그녀가 이길 방도는 없었다.
서 대표는 그제야 제 주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놀람과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은 뒤늦게 의식한 만큼 꼴도 보기 싫었다.
“이거 놔, 내가 내 발로 나갈 거야.”
결국 일단은 물러나기로 결심한 서 대표는 저항을 관두고 어깨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스스로 연회장에서 벗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나봄을 내려다보았다.
“……넌 나중에 보자.”
그녀가 작별 인사 대신 내뱉은 한 마디는 몹시도 차가웠다. 그 나중을 생각하기도 싫었던 나봄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차례 거친 폭풍이 지나가고 나서야 또각또각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멀어지는 구두 소리.
서 대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나봄의 다리가 힘없이 풀렸다.
사람 앞에 나서는 것도 못할 만큼 여린 성격의 나봄은 방금 전 어떤 정신으로 그 엄청난 말들을 꺼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그런 나봄의 곁에서 흐린 숨만 내쉬고 있던 차준은 천천히 고갤 돌렸고, 절망이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만신창이가 된 그 눈동자 안엔 수많은 의문들이 담겨 있었으나 그는 끝내 물어보지 않았다. 대답을 피하려는 사람처럼.
덕분에 더욱 무거워져 버린 그의 옆자리. 상황이 종료되어도 쉽사리 흩어지지 않는 사람들의 이목.
그 모든 것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나봄은 주저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지친 목소리로 차준에게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머리가 아파서.”
나봄이 몸을 트는 순간까지도 차준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발자국을 움직이는 순간, 그의 단단한 손아귀가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놀란 나봄의 눈동자가 다시 차준에게로 고정되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게 닿은 지금.
가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데.
혼자 남겨진다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으니, 어디에도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붙잡아야 하는데.
“본부장님……?”
입술을 떼어 낼 수가 없었다.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나올 것 같아서.
차준은 그녀가 간절한 만큼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점점 옥죄어져 오는 팔목이 당황스러웠던 나봄은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놔, 놔주세요. 아파요.”
결국 그에게서 떠나 버린 그녀의 온기.
차준의 흔들리는 시선이 다시 나봄을 향했다. 그러나 잠시 붉어진 손목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이내 연회장 밖으로 향해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멀어지는 그 모습은 마치 도망치는 것처럼 보여서 차준은 본능적인 불안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런 그녀의 뒤에 서슬 퍼런 시선이 따라붙었다.
천륜마저 저버릴 기세로 격돌했던 두 사람보다 더 매서운 한기를 띠고 있는 그는 살얼음판 같은 연회의 개최자, 서재균 회장이었다.
“……재미있는 친구네.”
그리 말하는 서 회장 입가엔 조소가 어려 있었다.
서 회장의 곁에 있는 고위 인사들은 방금 전 사태로 서 회장이 분노하지 않은 것에 안도했으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지금 그가 짓고 있는 미소가 분노보다 더욱 소름 끼치는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