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남친이 내게 반했다-52화 (52/104)

52. 당신은 날 초라하게 만든다

2017.10.27.

손때 묻은 물건들로 가득한 좁은 방. 이곳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값비싼 드레스.

차준이 강제로 건네주고 간 선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봄의 입술 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구겨질까 싶어서 차마 옷장에 넣어 두지 못하고 가방고리에 걸어 두었던 이 드레스는 왜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는지.

나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받을 수가 없다.

이것은 단 한 번의 호의가 아니라 미처 정리하지 못한 감정의 연장선인 것만 같다.

“그래, 전화해서 다시 말하자. 도움은 필요 없다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나봄은 이제야 결정을 내렸다.

사실 차준이 경고했던 창립 기념회 행사가 두렵긴 하지만 어차피 혼자 짊어질 짐이었다.

난 일개 도어락 협력 업체 사람인데 관심을 줘 봤자 얼마나 주겠어. 나 같은 건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도 않을걸.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사이.

똑똑―

“나봄아.”

한 사장이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나봄은 얼굴에서 심란함을 모두 지워 내고 스스럼없이 문을 열었다.

“네, 아빠. 무슨 일이에요?”

“손톱깎이 니가 가져갔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네.”

“아…… 글쎄요. 한번 찾아볼게요. 방으로 가지고 들어온 기억은 없는데.”

나봄은 곧바로 몸을 돌려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따라 그녀의 방에 들어온 한 사장은 그녀의 침대에 걸터앉았고, 머지않아 가방 고리에 걸린 드레스를 발견했다.

“와아, 이거 뭐야. 샀냐?”

한 사장의 입에서 예상했던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드레스 때문에 속이 말이 아닌 나봄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선물 받았는데 돌려주려구요.”

“아, 본부장이 줬구나? 우드레일 파티 때 입으라고.”

“네, 뭐…….”

나봄은 더 이상의 설명을 아꼈다. 하지만 그가 준 선물의 의미까지 단번에 파악해 버린 한 사장은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야, 우리 나봄이 기 죽을까 봐 신경 써 줬나 보다!”

“아…….”

“하긴, 우드레일 파티엔 업계 사람들도 다 모일 텐데. 돌아다니면서 인사라도 하려면 때깔 좋게 하고 가는 게 좋지.”

한 사장은 그리 말했으나, 나봄은 이 드레스를 입고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미 그래선 안 될 것 같다고 마음을 정리해 놓은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드레스를 포장해 놓은 비닐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며, 한 사장이 꺼내 놓은 말은 조금 마음에 걸렸다.

“본부장 덕분에 한시름 걱정이 덜었어.”

“네?”

“가면 으리으리한 사람들이 바글바글할 텐데 어떻게 차려입혀서 보내야 하나, 걱정했거든. 우리 딸이야 뭘 입든 얼굴이 예쁘니까 괜찮겠지만, 하하.”

한 사장은 서글서글한 미소를 덧붙였지만 그 안에서도 씁쓸함이 배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모습이 안타까웠던 나봄은 애써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이, 옷이 중요한가? 괜히 기죽지만 않으면 되지.”

“…….”

“걱정하지 마세요. 저 가서 잘하고 올게요.”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좀처럼 눈빛을 풀지 못하던 한 사장은 이내 꽤 오랜 시간 묵혀 둔 죄책감을 꺼내 놓았다.

“우리 회사가 이름값이라도 하면 거적때기를 입고 가도 상관없겠지. 근데 회사에 힘이 없어서 그동안 우리 한나봄 팀장 결과물이 번번이 거절당했잖아. 업체 미팅까지는 가 보지도 못했었고.”

“아빠도 참…… 제가 부족해서 그런 건데요, 뭐.”

“아니, 우드레일에서도 인정한 실력이야. 아무리 본부장님의 입김이 있었다고 해도 제품이 영 시원찮으면 협업 결정이 나지도 않았을걸?”

사업이 생각처럼 번창하지 못해 고민하던 한 사장의 마음은 나봄이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있었다.

그래서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이니, 한 사장은 그녀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본부장도 니가 가진 실력만큼 니가 대접받고 인정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좋은 옷까지 선물해 줬나 보다.”

그러고서 이어 가는 얘기는 차준을 향한 고마움이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마주한 한 사장의 미소엔, 그가 현실적으로 해 주지 못하는 일들을 차준이 대신 도와준 것에 대한 안도감도 함께 담겨 있었다.

“어쨌든 브리핑 준비도 있을 텐데 마무리 잘하고, 그날도 누구보다 당당하게 잘 있다 와. 알았지?”

나봄은 겨우 걱정을 덜어 낸 한 사장을 다시 착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일단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사실 이렇게 마무리 짓기엔 머릿속이 복잡해서 터져 버릴 것 같지만.

“아, 손톱깎이 여기 있네. 하여간 쓰고 나면 제자리에 두라니깐 그러네.”

우연찮게 나봄의 침대 머리맡 선반에서 손톱깎이를 발견한 한 사장이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핀잔을 주었다.

용건을 끝마친 그는 침대에서 일어섰고, 방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기 직전, 조심스럽게 드레스를 매만져 보는 그의 얼굴은 진심으로 흐뭇해 보였다.

무엇을 걱정했는지, 이 드레스를 보고 무엇을 안도했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나봄이었다. 그래서 아까 내린 결정을 확고하게 밀고 나갈 자신이 없다.

자존심을 내세워 고집을 부리는 것조차 주제넘는 일 같아서.

* * *

“총각 좋은 데 가는 것 같아서 내가 신경 좀 썼다. 자, 완전히 새 옷이지?”

태오의 집 근처 세탁소.

태오가 맡겨 두었던 까만 정장을 건네며 세탁소 사장이 말했다. 비닐에 싸인 옷을 받아 든 태오는 고갯짓과 함께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깨끗하네요.”

그런 뒤 곧바로 돌아서려 하자, 사장은 그런 태오에게 부러움을 드러냈다.

“정말 좋겠다. 파티라니. 나는 파티라면 우리 애 돌잔치가 전부야. 이래서 좋은 회사를 다녀야 하나.”

그럼 사장님이 대신 가 주시든가요.

태오는 불쑥 튀어나올 뻔한 대꾸를 가까스로 삼켜 냈다.

창립 기념행사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컨디션은 나날이 저하되지만, 그걸 굳이 생판 상관없는 타인에게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수고하세요.”

짧은 인사로 사장과의 잡담을 마무리 지은 태오는 서둘러 발걸음을 움직였다. 더 이상 쓸데없는 것에 기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오늘은 주중의 피로를 풀어야 하는 한가로운 주말.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나봄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도 남았을 날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마음이 심란해진 태오는 데이트는커녕 그녀에게 연락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하루가 성큼성큼 지나, 어느덧 돌아오는 수요일에 치러질 우드레일 창립 기념회 행사.

그날 나봄을 차준에게 빼앗기게 생긴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감정에 이끌려 무턱대고 거부하자니 차준만이 처리할 수 있는 그녀의 문제가 걱정되고, 그래서 그의 뜻을 순순히 따르자니 겨우 붙잡은 그녀와의 인연이 끊어질까 두렵고.

이쪽도 저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있는 태오는 그냥 나봄만 무사하길 바라고 있다. 제 자신은 어떤 꼴이 되어도 상관없으니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다.

‘차라리 물어볼까. 내가 널 위해 무엇을 해 줬으면 좋겠는지.’

태오는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관두었다. 마음이 여린 나봄은 이런 고민을 하는 태오를 떠밀고 싶어도 떠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근심만 더욱 쌓여 버린 태오는 깨끗이 드라이클리닝 된 정장을 되는 대로 한쪽 어깨에 걸쳐 놓고 발걸음을 떼어 냈다.

바로 그때.

지이이잉― 지이이잉―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어 댔다. 태오는 별생각 없이 휴대폰을 꺼내 들고 발신인을 확인했다.

“선우차준……?”

하지만 달가운 사람은 아니었던지라 태오의 미간이 대뜸 좁아졌다.

오늘은 사람 심기 안 건드리고 넘어가나 했더니만 기어이 들쑤셔 놔야 속이 시원한가 보다.

태오는 오만상을 쓴 채 통화 버튼을 눌렀고, 삐딱한 목소리를 냈다.

“네,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연락하셨습니까.”

―지금 뭐해요?

이윽고 들리는 차준의 질문은 매우 뜬금없었다. 자신이 그와 안부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한 태오는 성질껏 받아쳤다.

“알아서 뭐하시게요.”

―나봄이랑 같이 있어요?

“뭐요? 한나봄이 어디 있는지를 굳이 나한테 물어봐야 직성이 풀립니까?”

―반응 보니까 아닌가 보네. 개념 정도는 있나 봐요.

아니나 다를까.

차준은 또 태오의 심기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이젠 받아칠 힘도 없는 태오는 건조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직장 상사치고는 사생활 간섭이 너무 심하네요.”

그러자 차준은 조소 비슷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불쾌하셨다면 미안해요. 곧 행사는 다가오는데 아직까지 비협조적이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마음에도 없는 사과 하지 마시죠. 기분 나아질 거 없으니까.”

―들켰다면 그것도 미안.

이 여우 같은 새끼를 진짜.

태오는 울분이 치밀어 오르는 만큼 이를 꽉 물었다. 그러고는 더 해 봤자 성질만 버릴 통화를 이쯤에서 끝내 버리려 하는데.

―사실은 한 가지 확인하려고 전화했어요.

차준이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 놓았다. 뭐든 빨리 대답하고 집어치워 버릴 참이었던 태오는 가만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날…… 내가 부탁드렸던 대로 따라 줄 거죠?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차준의 질문에는 잠시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건 수천 번쯤 고민해 봤으나 아직까지 정하지 못한 문제였다.

태오는 대답 대신 마른침을 삼켜 넘겼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파악하는 데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던 차준은 가라앉은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모든 건 단태오 팀장님한테 달려 있어요. 내가 어떻게든 나봄이를 지켜보려고 해도 단 팀장님이 훼방 놓는 순간 끝장나는 거니까.

모든 건 본인이 쥐고 있으면서 전부 나에게로 책임을 돌린다. 그래서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살펴보지도 못하게 만든다.

더는 저항조차 할 수 없게 된 태오는 입술만 꽉 깨물었다.

그렇게 괜한 오기만 부리고 있으니.

―도와주세요.

한결 낮아진 그의 음성이 고요하게 흘러나왔다. 두 번째로 건네진 부탁은 처음처럼 무례하지도, 강압적이지도 않았다.

―나는 나봄이를 지키고 싶을 뿐이에요. 그 애가 상처 입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뒤이어 꺼내진 말은 이 순간 태오의 진심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나도 그 사람을 지키고 싶어. 나도 그 사람이 상처 입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대신 다쳐야 한다고 해도.

―그러니까 이번만, 이번 한번만 나봄이 곁에 다가오지 마요.

그래, 내가 대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너져 내려야 한다고 해도.

―도와줄 거죠?

태오는 이번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으려 했으나, 차준은 이대로 넘어갈 수 없다는 듯 한 번 더 물었다.

―그래 줄 수…… 있죠?

여기서 한 번 더 침묵한다고 해도 어차피 거부 의사로는 비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이왕 억지로 수긍해 버릴 거, 꼴사나워지지라도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태오는 힘겹게 입술을 떼어 냈다.

“……알아들었습니다.”

차준이 바라는 대답을 무기력하게 꺼내 놓은 태오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는데 그는 그걸 알아챘을까.

―제 얘길 이해해 줄 줄 알았어요. 정말 고마워요.

다행히 그리 말하는 차준은 동정이나 미안한 기색 없이 그저 기뻐 보이기만 했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제 욕심을 들키기 전에 차준과의 통화를 종료해야겠다고 생각한 태오는 깊은 심호흡을 내쉬었고.

“먼저 끊겠습니다.”

짧은 마무리 인사와 함께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끝이 도망치는 것처럼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스스로 내려 버린 결정.

뭐라도 선택하고 나면 속이 시원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가슴이 답답하게 막혀 왔다.

아무리 숨을 쉬어도 나아지지 않고, 이유도 없이 불안해진다.

마치 잘못된 길에 접어들었을 때처럼.

* * *

“내가 어딜 온 건지…….”

우드레일 창립 기념회 행사장에 들어선 나봄이 감탄 섞인 탄식을 흘려보냈다.

하얗게 깔린 대리석. 고풍스러운 장식품. 화려하게 내리쬐는 조명.

너무나도 으리으리해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곳은 서울 5성급 호텔의 연회장이었다.

여기 오기 전, 차준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었다.

‘나봄아, 내가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나봄은 그가 어떤 마음에서 그리 제안하는지는 알겠으나 더 이상의 호의는 받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래서 한사코 거절하자 차준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고집을 부렸다.

‘너한테 줄 게 있어.’

‘드레스로도 충분해요.’

‘같이 들어가는 게 더 나을 거야.’

‘아니요, 여기서 더 도움을 받는 건 불편해서 그래요.’

‘…….’

‘호의가 아니라…… 동정처럼 느껴지잖아요.’

더는 그런 그를 받아 줄 수가 없어 단호하게 내뱉었던 말.

그 안에 뼈가 있음을 알아차린 차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는 숨소리로만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것을 알릴 뿐.

‘……알았어, 이따 보자.’

그래도 짧은 인사를 건네던 그의 목소리는 애써 밝았다.

나봄은 그가 진심을 감추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이런 태도는 스스로 돌이켜 봐도 차갑고 매정하기 그지없지만 무책임하게 다정한 것보다는 낫겠지, 하며.

그렇게 홀로 도착한 연회장.

지금껏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자신을 다독이던 나봄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보기 좋게 얼어 버렸다.

입구에서부터 이러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는데, 자꾸만 움츠러드는 어깨는 좀처럼 협조해 줄 생각을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봄과 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뉴스에서 보아 왔던 대기업 대표들부터 우드레일 가구의 광고 모델들까지, 그녀가 실물을 볼 거라 상상해 본 적도 없는 VIP 인사들이었으니까.

‘여기 어디 단태오가 있을 텐데…….’

연회장에 흐르는 위압감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나봄은 그녀가 편히 기댈 수 있는 태오를 찾았다. 분명 이 시간쯤이면 도착했을 텐데 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왔나…….”

나봄은 그에게 연락이라도 해 보려 제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때.

“어머, 나봄 씨! 도착해 있었네!”

저 멀리서 타이트한 블랙 미니 드레스를 우아하게 차려입은 유리가 밝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그녀의 옆에는 평소 친분이 있던 퍼니쳐팩토리 직원들도 함께였다.

“아, 안녕하세요.”

나봄은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특유의 시원시원한 미소로 화답한 유리는 그녀의 드레스를 보곤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드레스 너무 예쁘다. 이거 패션쇼 화보집에서 봤던 것 같은데.”

“아…….”

“동대문 어느 매장에서 구했어?”

어쩐 일로 칭찬을 하나 했건만, 역시나 오늘도 유리는 거침없이 나봄을 깎아내렸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욱 노골적인 걸 보니, 얼마 전 태오를 사이에 두고 벌인 신경전의 앙금이 아직까지 안 풀린 모양이었다.

이런 반응쯤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나봄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을 돌려 보기로 했다.

“여긴 언제 도착하셨어요?”

하지만 그녀가 꺼낸 주제는 못 들은 체 넘겨 버린 유리는 보다 요란한 웃음을 터트렸다.

“잠깐! 하하, 이 가방은 또 뭐야! 이왕 짭으로 맞출 거 다 브랜드로 맞추지!”

“…….”

“이럴 줄 알았으면 나 안 쓰는 에르메 가방 빌려줄걸 그랬네! 유행이 좀 지나긴 했지만 그렇게 구 모델은 아니거든!”

아무래도 오늘 허유리는 작정하고 이곳에 왔는가 보다. 옆 사람도 난처해할 만큼 대책 없이 가시를 돋우고 있는 걸 보면.

집요한 그녀가 당황스러웠던 나봄은 눈동자를 열심히 움직여 태오를 찾았다. 허유리 때문에 더욱 더 불편해진 이 공간에서 그녀가 의지할 데라곤 단태오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디서나 눈에 띄는 그의 모습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아서 애만 태우고 있던 그 순간.

“나봄이 먼저 들어와 있었네?”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따스한 손길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코끝을 스치는 향기로 단번에 그 사람을 알아본 나봄은 일렁이는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화려한 연회장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시야를 꽉 메우는 사람은.

“주차하는 동안 조금만 기다려 주지 그랬어.”

매끈하게 휘어지는 입꼬리. 여유로운 눈웃음. 그걸 따라 야릇하게 움직이는 눈물점.

“본부장님…….”

“모르는 사람 투성이라서 겁먹었구나. 괜찮아, 내가 왔잖아.”

위기에서 구해 줄 누군가를 간절히 찾고 있던 나봄의 앞에 나타난, 극적인 흑기사 선우차준.

“아, 아,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너무 놀란 나머지 굳어 버린 나봄을 대신해 유리가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유리에게로 시선을 옮긴 차준은 입가의 미소를 더욱 짙게 퍼트렸다.

“회장님께 우리 나봄이 소개시켜 주려고 제가 엄선해서 고른 드레스인데…… 이게 그렇게 싸구려처럼 보였나 봐요?”

하지만 뒤이어 흘러나온 목소리는 묘하게 차가웠다. 그 배짱 좋은 유리조차 대꾸할 말을 잃고 얼어붙어 버릴 만큼.

허유리가 가시라면 선우차준은 날이 잘 갈린 검이다. 그런 그가 밀고 들어온 자리의 공기는 날카롭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하다.

그런 차준에게 남보다 더 먼 거리감이 느껴졌던 나봄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봄아. 자, 여기.”

이내 차준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차에 가방 놔두고 갔더라.”

그녀의 손에 억지로 들려지는 토드백은 빛나는 로고조차 예쁘고 고급스러워서, 나봄은 숨고 싶을 만큼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