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내가 널 빛나게 해 줄게
2017.10.23.
“으으.”
밀린 업무 일지를 열심히 작성하던 나봄이 쭈욱 기지개를 켰다.
별로 오래 걸리지도 않는 거 그때그때 해 뒀으면 좋았을 텐데. 요 며칠 신경 쓸 일이 많아서 미뤄 뒀더니 이렇게 성가신 일이 되어 버렸다.
“휴우, 이날은 뭐했는지 기억도 안 나네…….”
스트레칭을 마친 나봄은 다시 밝은 모니터 화면에 두 눈동자를 박아 두었다.
그렇게 스케줄러와 달력을 살피며 일지를 채워 가고 있던 그때.
“한나봄 팀장.”
한 사장이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나봄을 찾았다. 나봄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이내 한 사장의 입에서 튀어나온 방문객은 그녀를 난처해지게 만들었다.
“본부장님 오셨다.”
“네? 본부장님이 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서 나가 봐.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차준으로부터 그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던 나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 사장은 그런 그녀를 더 이상 상관 않고 사무실 문을 열어 둔 채 발걸음을 옮겼다.
“아아, 이쪽 기계는 새로운 모델이었나 보네요. 어쩐지.”
“네, 그렇습니다. 훨씬 속도도 빠르고 불량품도 적어요.”
“사장님 투자 많이 하셨겠다, 하하.”
그 틈새로 보이는 건 확실히 작업장을 둘러보고 있는 차준의 모습이었다.
월간 회의라면 얼마 전 본사에서 완벽하게 마무리했을 텐데, 어째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도저히 모를 일이었다.
조심스럽게 업무 책상에서 몸을 일으킨 나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사무실을 나섰다. 그에게로 향하는 두 발에 망설임은 없었지만 거리감이 좁혀질수록 가슴은 불안하게 옥죄어 왔다.
큰 결심을 하고 이별을 고한 게 겨우 며칠 전.
아직 그때의 미안함과 불편함을 정리하지 못한 나봄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우리의 대화는 나름대로 깔끔하게 끝이 났으나, 떠나던 차준의 표정은 체념보다는 혼란스러움에 가까웠다.
그래도 전하고 싶은 말은 제대로 다 전했으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자 결심하고 있던 그때.
“어? 나봄아.”
먼저 그녀를 발견한 차준이 평소와 다름없는 눈인사와 함께 아는 체를 했다.
“일 열심히 하고 있었어? 점심은 먹었고?”
그러고 나서 건네는 인사는 유난히도 밝고 서글서글했다. 꼭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네, 먹었어요.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살짝 경직된 표정으로 그의 인사에 대답한 나봄은 곧바로 물었다.
차준은 보다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띠웠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쇼핑하러 가려고.”
“쇼핑…… 이요?”
“응, 2주 뒤에 창립 기념회 행사 열리잖아. 그때 입을 드레스 맞춰야 하지 않겠어?”
2주 뒤에 열릴 행사라면 나봄도 공지를 받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드레스를 입을 생각이 없었던 그녀는 차준의 쇼핑 얘기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저 그때 입을 만한 옷은 있어요. 맞춘 지 얼마 안 된 세미 정장.”
나봄은 조곤조곤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명백한 거절의 표시였으나 차준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 사람처럼 다정히 말했다.
“세미 정장 가지고 되겠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냥 참석만 하는 정도라면 별 상관없겠지. 하지만 그날 넌 수많은 고위 관계자들을 상대해야 할 거야.”
“제, 제가요?”
차준의 말을 들은 나봄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저 프로젝트 협력 업체 중 하나로 참석하는 거라 생각했던 그녀는 행사 자체에 큰 부담감을 못 느끼고 있었다.
차준은 그런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고, 그녀의 팔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시간 없으니까 일단 출발하자. 괜찮은 드레스 숍 예약해 놨어.”
강제적인 손길은 아니었지만 그 안엔 은근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와 이럴 사이는 아니라고 여긴 나봄은 손이라도 어떻게 떼어 놓아 보려 했다.
“자, 잠깐만요. 본부장님.”
하지만 그런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자연스레 한 팔로 감싸 넣은 차준은 작업실 밖으로 걸음을 이끌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버님.”
마감 작업에 정신이 없던 한 사장에게 차준이 건넨 인사는 천연덕스러웠다. 조금의 이질감도 없이.
그걸 들은 나봄은 그제야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며칠 전 힘겹게 꺼내 놓았던 자신의 진심은 애초부터 없던 얘기가 되어 버렸다는 걸.
“차준 오빠…….”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의도적으로 정면만 바라보고 있는 차준에게선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 * *
브리핑 진행 사항과 관련된 본사 회의.
마지못해 참석한 태오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총 책임자랍시고 안내받은 정 중앙에 앉긴 했으나, 뭘 알아야 끼어들어 고나리 질이라도 하지.
지금으로썬 각 팀에서 준비한 내용들을 전달받는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김 대리의 보고서와 미묘하게 달라서, 태오는 지금 영락없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다.
“이상으로 홍보팀 진행 상황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단 팀장님.”
“아니요, 뭐.”
“그럼 회의는 여기서…….”
“네, 마쳐도 될 것 같네요.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태오는 억지로 떠맡았다는 게 티 날까 싶어 서둘러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펼쳐 놓은 자료들을 추스르는 그의 손길은 무척이나 재빨랐다.
그렇게 가죽 가방에 되는 대로 제 물건들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브리핑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한봄 도어락 리베이트 의혹에 대한 해명은 준비되었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태영 부장이 뱀 같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나봄의 이름에 반응한 태오의 시선이 곧바로 그에게 고정되었다.
“케이 도어락과의 긴밀한 관계까지 깨트려 가면서 진행된 계약입니다. 본사 내부에서도 의혹이 계속 제기되는 걸 보면 분명 말이 나오고도 남을 겁니다.”
“…….”
“한나봄 팀장이 제대로 대답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마 상어 떼로 휩쓸려 들어간 물고기처럼 처참하게 뜯어 먹히지 않을지…….”
염려하는 것처럼 말하고는 있으나 최태영 부장의 표정은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의 시꺼먼 속내를 눈치챈 태오의 눈빛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런 태오쯤이야 눈에 거슬리지도 않았던 최 부장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단태오 대리, 그쪽이 총책임자니까 언지라도 주는 게 어떻겠어요?”
“…….”
“아…… 그러면 계약이고 뭐고 도망가 버리려나?”
최 부장이 농담이었던 것처럼 조소를 터트렸다. 그 옆에 있던 직원들은 분위기에 휩쓸려 그를 따라 비웃음을 흘렸다.
그 불편한 공간에서 차갑게 식어 버리는 건 오직 태오뿐이었다.
분노가 휘몰아치고는 있는데 이걸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간 나봄의 입장만 더 난처해질 것 같다. 하지만 뒤틀린 감정은 숨겨 보겠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다.
태오는 가방끈을 꽉 비틀어 잡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주먹을 발견한 최 부장의 입꼬리가 보다 들어 올려졌다.
만일 그가 여기서 태오를 건드린다면 인내심이 폭발한 태오도 가만있지는 못할 일촉즉발의 타이밍.
“한나봄 팀장이 선우차준 이사님의 약혼녀 아니었습니까? 저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영업부 성 대리가 뜬소문으로 들었던 얘길 꺼내 놓았다.
그 말이 기가 찼던 최 부장은 태오에게서 두 눈을 떼어 내고 성 대리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런 헛소문을 누가 믿나 했는데 성 대리가 믿고 있었어?”
“이미 본사 직원들은 그렇게 알고 있던데요? 이사님하고 한나봄 팀장이 심상찮은 분위기였다는 증언도 꽤 되고.”
“…….”
태오는 나설까 하다가 관두었다. 자신이 그러기도 전에 가당찮다는 반응을 내비치는 최 부장 때문이었다.
“그럴 리가. 며칠 전에 서 대표님과 오찬을 가졌는데, 선우차준 이사님 정략결혼 얘길 하셨어. 메이스 호텔 쪽이 유력하다고 그러시던데.”
“와아, 메이스 호텔.”
“현실에 신데렐라가 있을 리 있나. 다 끼리끼리 만나는 거지.”
평소에도 종종 서미란 대표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최 부장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설득당한 직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태오는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다. 차준은 나봄에게 질척한 감정이 남아 있고, 그걸 겉으로 드러내서 그녀에 대한 구설수를 잠재우고자 한다.
태오는 차준에게서 그 얘길 들었을 때부터 계속 생각했다.
다 개수작이라고. 마음을 얻지 못한 사람의 부질없는 발버둥이라고.
널 지키는 건 나도 할 수 있고, 내가 지켜야만 하고, 다른 누가 아닌 내가 지키고 싶다고.
“그럼 약혼자는 아닌가 보네. 그냥 사귀기만 하나?”
“어허, 사귈 사이도 아니라니까 그러네.”
“회의 때 분위기로 봐선 진짜 연인 사이 같았는데…….”
“뭐, 차라리 그런 쪽이라면 다행이지. 아무리 불만이 있다 한들 이사장 여자를 누가 건드릴 수 있겠어.”
그러나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는 그런 태오의 고집을 자꾸만 작아지게 만든다.
“하하, 그렇긴 하죠. 그거라면 리베이트 의혹도 싹 가라앉아 버릴 텐데 말입니다.”
“싹 가라앉기만 하겠어? 그러다 결혼이라도 하는 날엔 한봄 도어락 입지 수직 상승 하는 거지.”
사람들의 반응은 차준이 예상했던 그대로라서, 자꾸만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는 그날 행사장에서 나봄이를 계속 내 곁에 둘 거고, 다른 사람들이 감히 하대하지 못할 존재로 만들 겁니다.’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밖에 없어요. 그 부분에 대해선 단 팀장님도 인정하고 있겠죠.’
나 혼자 남아서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는 건…….
‘그러니까 단 팀장님은 방해하지 마시고 내 역할이나 대신하세요.’
정말 죽기보다 싫은데.
“하지만 다 현실성 없는 망상이야. 리베이트가 분명하다니까?”
그때, 최 부장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더 이상 들어 줄 수 없었던 태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버리고 말았다.
드륵―
요란한 의자 소리에 최 부장은 물론, 실컷 떠들던 이들의 시선까지 전부 모여들었다.
그러자 태오는 더 이상 참지 못한 울분을 차분한 음성으로 꺼내 놓았다.
“최 부장님, 리베이트 건을 이렇게 파고들어도 괜찮겠습니까.”
“하하, 안 될 거 있나.”
“있지도 않은 한봄 도어락 비리 뒤지다가 엄한 지뢰 터지면 어쩌려고.”
“뭐……?”
태오의 말은 다른 이들은 흘려들을 수 있을지 몰라도 최 부장은 아니었다.
케이 도어락으로부터 이미 몇 차례 리베이트를 받은 적이 있던 최 부장은 섣부른 대답 대신 날 선 눈빛으로 태오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태오는 그 기세에 조금도 억눌리지 않고 제 할 말을 끝까지 이어 나갔다.
“팩트도 아닌 가십거리에 휘둘릴 시간 있으면 다들 밀린 업무나 부지런히 하세요. 야근 수당 그깟 거 얼마나 된다고 퇴근도 못 하고 회사에 붙잡혀 있습니까.”
뼈가 있는 태오의 말에 직원들은 눈치를 보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최 부장만큼은 더욱 살벌한 기운을 띤 채 태오를 쏘아붙였다.
“지금 저한테 하는 말입니까? 단태오 대리 대형 프로젝트 팀장 맡더니, 상사고 뭐고 눈에 보이지도 않나 보네요.”
그러자 태오의 입가엔 여유로운 미소가 맺힌다.
“아, 최 부장님께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누구보다 안팎으로 바쁘신 거 제가 가장 잘 아는걸요.”
“단태오 대리.”
“뭐…… 케이 도어락이 물러난 이후로 한가해지셨을지도 모르지만.”
감정이 폭발할수록 이성적으로 상대하는 방법은 차준에게서 배웠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최 부장의 입을 닫게 만든 걸 보니, 성깔을 드러낼 때보다 효과는 좋았다.
속 시원히 할 말을 끝낸 태오는 그대로 미련 없는 발걸음을 돌렸고, 흔들리는 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꿋꿋이 두 발을 옮겨 회의실을 나섰다.
‘나는 정말 선우차준보다 나은 게 없는 걸까.’
회의실 문을 닫으며 스친 생각은 여러 가지로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깊이 빠지지는 않기로 했다. 비교했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테니.
그 남자가 잘난 건 세상 모두가 알고 있다. 나도 그걸 모르고 덤벼든 건 아니다. 그러니까 전부 다 게임이 안 된다 하더라도 새삼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그 남자가 잘났다고 해서 내가 못나지는 건 아닐 거다.
자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 * *
“이 디자인은 파리 패션쇼에서도 주목 받았던 작품이에요. 셀럽들도 못 구해서 안달이니까요?”
나봄으로서는 한 번도 온 적 없던 청담동 드레스 숍.
유명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걸려 있는 그곳에서 나봄은 두 눈만 끔뻑이며 서 있었다.
그녀의 옆엔 점장이 직접 따라붙어 잘나가는 드레스를 소개해 주고 있었으나, 나봄은 쉽사리 어떤 대답도 꺼내 놓지 못했다.
점장이 추천한 드레스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었다.
“이 드레스는 얼마죠?”
“렌탈을 원하시나요, 구입을 원하시나요?”
“구입이요. 처음으로 선물해 주는 드레스인데 빌려 입히고 싶진 않네요.”
“가격은 삼백이십만 원으로 책정되어 있습니다. 퀄리티에 비해서 아주 괜찮게 나왔어요.”
“그러네요. 결국엔 나봄이 마음에 들어야겠지만.”
다만, 그녀는 지금 드레스 태그에 적힌 가격과 그걸 아무렇지 않게 사 주려는 차준의 태도가 불편하다. 오고 가는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나봄은 점점 더 난처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었는데, 차준은 계속 웃음으로 때워 넘겼다.
그래서 더 이상 말리지도 못하고 마음만 복잡스러워하던 그때.
“나봄아, 가서 입어 볼래?”
차준이 프릴이 화려하게 잡힌 하얀 드레스를 나봄에게 건네며 물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눈동자가 옅게 떨려 왔다.
“네? 아, 아니요. 저는…….”
“괜찮으니까 마음에 들면 입어 봐.”
“아니에요. 사고 싶지 않아요.”
“마음에 안 들어?”
“그게 아니라…….”
나봄은 대답을 하려다 말고 점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에게 할 말이 있음을 깨달은 차준은 점장을 향해 조금만 멀어지라는 손짓을 했다.
“아, 네! 두 분이서 찬찬히 보시고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그렇게 단둘만 남고 나자, 나봄의 눈동자는 조금 더 불안한 빛을 띠었다. 그러더니 이내 조심스레 흘려보내는 목소리는 제법 단호했다.
“이러지 말아 주세요.”
“내가…… 왜?”
“제가 본부장님한테 이런 선물을 받을 이유가 없잖아요. 어떤 마음으로 주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정중히 거절할게요.”
말을 마친 나봄은 헤매던 시선을 차준에게로 고정시켰다. 흔들림 없는 그녀의 눈빛은 차준이 붙잡아 볼 여지도 없었다.
차준은 그런 그녀의 앞에 흐린 한숨을 꺼내 놓고는 가라앉은 대답을 내뱉었다.
“이건 내 호의가 아니라 의무야.”
“네……?”
“너를 이곳으로 데려온 건 나니까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거야.”
나봄은 차준의 말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선만 가만히 마주치고 있으니, 차준은 절대 흘려들을 수 없는 뒷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창립 기념회 행사 때 회장님이 널 뵙고 싶어 하셔.”
“회장님이요?”
“회장님뿐만이 아니야. 우리 쪽 임원들은 물론이고, 외부 업체 고위 인사들까지도 너한테 관심이 많아.”
“대체 왜…….”
“쟁쟁한 중소기업들을 전부 뚫고 협약을 맺은 소규모 업체잖아. 오만 가지 의혹에 휩싸이는 건 예상했던 일이지.”
그건 매정하게 들리지만 차마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봄도 우드레일과의 계약서를 직접 받아 보기 전까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정도니까.
순간 다가올 창립 기념회 행사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아 버린 나봄은 겁이 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나약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모습은 차준이 걱정하던 그대로였다.
바로 이 모습을 감춰 주고 싶었다.
순진하고 여린 너는 짐승 같은 그들 앞에서 제대로 어깨조차 펴지 못할 테니까.
내가 기꺼이 너의 날개가 되어 주고 싶었다. 내가 가장 바라는 건 지금도 그 하나이다.
차준은 끓어오르는 진심을 담아 애틋한 음성으로 흘려보냈다.
“아마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가 펼쳐질 거야.”
그러고선 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잎 같은 그녀에게 간절히 속삭였다.
“그러니까 날 따라와. 내가 널 그 자리에서 제일 빛나게 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