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내 사람으로 만들 겁니다
2017.10.20.
텅 빈 타워팰리스. 넓어서 더욱 외로운 공간.
차준은 홀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라고 해 봤자 식탁 위에 차려진 건 몇 숟가락밖에 안 되어 보이는 찬밥과 물 한잔이 전부였지만, 그것도 차준에게는 과한 밥상이었다.
냉장고엔 가정 관리사가 구비해 둔 음식들이 가득 차 있었으나, 어떤 음식도 넘어가지 않아 손도 대지 않았다.
보통 집에 있을 땐 끼니를 거르기가 다반사인 그는 순전히 살기 위해 밥알을 씹어 삼키는 중이다.
어차피 지금 끝내 버린다 해도 별 상관없는 인생, 억지로 붙들고 있는 이유는 오직 단 한 가지였다.
‘차준아…….’
‘도와줘…….’
‘제발…… 도와줘, 차준아.’
그는 죽음에 실패한 사람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새장에 갇힌 새에겐 애초부터 죽을 자유도 없었던 거다.
그러니 지옥 같은 현실에서 하루를 더 보내기 위해 기계적으로 음식을 집어넣고, 이렇게 또 버텨 나갈 수밖에.
차준은 힘없이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물 한 잔으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눈앞이 핑 돌 만큼의 허기가 고작 이것으로 가라앉았다. 살아남는 게 죽을 만큼 힘든 것에 비해 살아가는 건 이렇게나 쉬웠다.
이것으로 형편없는 식사를 마친 차준은 식탁에서 일어섰다.
출근 준비를 하려면 분주히 움직여야 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럴 기력도 없었다.
그래서 하염없이 느린 걸음을 드레스룸 쪽으로 떼어 내던 그때.
지이이잉― 지이이잉―
카디건 주머니에 되는 대로 넣어 두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제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진 차준은 빈껍데기 같은 눈빛으로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이사님.
머지않아 들려오는 건 서 대표의 최측근이자 비서실장의 목소리였다.
그에게만은 흔들리는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차준은 마른침을 삼키는 것으로 목소리를 정돈했고, 이내 사무적인 대답을 뱉어 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전화하신 겁니까. 김 실장님.”
―우드레일 창립 기념파티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2주 뒤로 잡혀 있는 파티는 서 회장님의 건강과 상관없이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거, 알고 계신지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날 한봄 도어락 한나봄 팀장님이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
―한봄 도어락을 둘러싼 의혹에 대한 해명이요.
김 실장의 의미심장한 말에 차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의 싸늘한 기운은 새어 나오는 숨소리에서도 분명히 느껴졌으나, 김 실장은 특유의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전부터 한봄 도어락의 협업업체 선정에 대해선 내부에서 말이 많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우드레일은 케이 도어락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요.”
―아무래도 계속 내부적인 불만이 들려오는 걸 보니 회장님께서도 심기에 거슬리셨나 봅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해명의 시간이라도 가져 볼까 합니다.
김 실장이 그리 말할 때쯤, 차준은 서 회장의 말을 떠올렸다.
‘오랜 시간 협업해 온 케이 도어락 대신 영세한 업체를 고집한 이유가 뭐지?’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차준을 불러낸 서 회장은 차준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체결한 한봄 도어락에 대해 탐탁지 않은 반응을 내비쳤었다.
그에 대해 차준은 호언장담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문제 삼으신 한봄 도어락과 협약을 맺는 것이 옳은 판단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혼자만의 판단이지 않나.’
‘혼자만의 판단을 모두의 수긍으로 만드는 것이 이제부터 제가 해내야 할 역할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소름 끼칠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서 회장이 꺼낸 말은.
‘좋아, 나까지 수긍시킬 수 있나 기대해 보도록 하지.’
‘내 몸의 회복 상태와 상관없이 창립 기념회는 계획대로 진행할 예정이다. ‘Lily’ 프로젝트 런칭 발표 역시 그 자리에서 이뤄질 거야.’
‘그때, 날 실망시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건 언뜻 엄포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할 시, 계약이고 뭐고 한봄 도어락을 잘라 내 버리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2주 뒤 열릴 창립 기념회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시험대인 셈.
―브리핑이 끝나면 고위 관계자분들이 한봄 도어락의 한나봄 팀장을 불러낼 것입니다. 그때 쏟아질 질문들은 도어락 파트가 아닌 청탁 의혹에 대해서겠죠.
“…….”
―물론 분위기는 살벌하겠지만 한봄 도어락은 청탁이 아닌 정정당당한 심사로 선정된 업체이니 별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 실장은 그리 말했으나, 순전히 빈말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애초부터 정말 아무 일이 없을 거였다면 이리 예고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닥쳐올 불행을 짐작하고 있다 해도, 서 회장의 시험대 위에 올려진 이상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하아…….”
차준은 긴 한숨을 내쉬었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자신도 두려워하고 있는 자리에서 그녀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우리의 행복했던 과거는…… 전부 추억으로만 남겨 놔요.’
하지만 차준의 뇌리에 떠오르는 건 이별을 말하던 그녀의 얼굴뿐이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그녀는 마음을 거두어 갈 때만큼은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지금은 남아 있는 마음이 없어요. 그러니까 지나간 인연은 이대로 가슴에 묻어 두고…….’
‘앞으로 나아가요, 우리.’
스스로 납득하기도 전에 수긍해 버린 이별.
그건 아직까지도 되돌리고 싶다는 마음만 간절하다. 다시 너를 가질 수만 있다면 난 무엇이든 할 텐데.
‘다시 니가 나를 필요로 해 줬으면 좋겠어.’
그녀를 구하겠다는 다짐이 변질되어 갈 때쯤, 차준은 본인조차도 속일 수 있을 만한 변명거리를 억지로 찾아 붙였다.
‘그날 포식자들의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너에겐 내가 필요해.’
그리 머릿속을 정리하고 나니 불안하던 눈빛이 냉정하리만큼 차분해졌다.
마른침을 삼키는 것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차준은 이내 김 실장을 향해 확신에 찬 말을 흘려보냈다.
“아무 문제없을 겁니다. 한나봄 팀장이 단순히 한봄 도어락 측근으로 나타났다면 모두가 달려들어 물고 뜯겠지만, 제 사람으로서 나타난 거라면 취급이 달라지겠죠.”
―…….
“나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감히 그 사람에게 손을 뻗지 못할 겁니다.”
그 말을 하며 차준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자신만만하던 그 표정은 다시 떠올려도 심기에 거슬렸다.
차준은 머릿속으로 권총을 장전했고, 그를 향해 총구를 겨냥했다.
그러고서 꺼내 놓는 한 마디엔 어느새 걱정보다 오기가 더욱 짙게 섞여 있었다.
“아아…… 그날 이목을 돌릴 만한 다른 사냥감을 풀어 주면 좋겠네요.”
이로써 방아쇠를 당길 준비는 끝이 났다.
남은 건 호흡까지 멈춘 채 기회를 잡는 일뿐.
차준의 입가에 드디어 옅은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가 궁지에 몰리는 동안 조금의 피해도 입지 않고 노련하게 그녀를 구출해 낼 작정인 차준은 곧 있으면 뒤바뀌게 될 현실이 너무나도 기대된다.
등골에 기분 좋은 소름이 오싹하게 돋아날 정도로.
* * *
“그게 무슨 개소리입니까. 내가 뭘 책임져요?”
안 그래도 분주하게 대패질을 하고 있던 태오가 버럭 성질을 냈다.
팀원들과의 가위바위보에 져서 단태오에게 비보를 알리는 독박을 쓰게 된 신입 사원은 덜덜 떨며 위에서부터 내려온 공문을 전했다.
“윗선에서는 창립 기념회 행사 때 진행될 ‘Lily’ 라인 브리핑을 단 팀장님이 책임져 주셨으면 합니다.”
“윗선 누구요.”
“그냥 본사에서 내려온 지시라 어떤 분이 지시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창립 기념회 행사는 고작 2주 남았습니다.”
“하, 미치겠네. 사람 엿 먹이는 거야 뭐야.”
그에게 브리핑을 맡긴 차준의 의도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몰랐던 태오는 이해가 안 가는 만큼 짜증난 손으로 공문서를 받아 들었다.
“제 24회 창립 기념회 행사 안내. 우드레일 퍼니처 프로젝트 ‘Lily’ 총 책임자 단태오…… 하, 이것들은 가능하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남의 이름을 막 갖다 박았네.”
다시 읽어 봐도 내용은 터무니없이 무리수였다.
자신은 현장팀인지라 프로젝트 브리핑이 어떻게 준비되고 있는지 상세히 전해 듣지도 못했는데. 뜬금없이 여기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건 너무나도 의도가 수상하게 느껴졌다.
미간을 잔뜩 구긴 태오는 공문서를 사납게 접어 들고 단호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저 이거 안 맡습니다. 그렇게 전하세요.”
“네? 하지만 본사에서……”
“본사고 뭐고 내가 진행하고 있는 일도 아닌데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윗선 누가 지시했는지 알 게 뭐야.”
업무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 정확하고 냉정한 태오는 좀처럼 뜻을 굽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난처해지는 건 여기에 대해 아무 권한도 없는 신입 사원뿐.
그런 신입이 가여웠던 김 대리가 넉살 좋게 다가와 말했다.
“단 팀장님, 제가 본사에서 브리핑 진행 상황 살펴보고 왔습니다. 준비는 착착 잘되고 있던데요, 뭐.”
그러나 태오의 표정은 좀처럼 풀어질 줄을 몰랐다.
타깃을 김 대리로 바꾼 그는 뾰족하게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잘되고 있는 브리핑을 갑자기 이쪽으로 떠넘기는 이유가 뭡니까.”
“글쎄요. 그것까진 잘 모르겠지만 설마 별 뜻 있겠습니까?”
“혹시 압니까. 이 기회에 나한테 엿이라도 먹이려는 건지.”
그 말을 하며 태오는 차준을 떠올렸다.
얼마 전, 자신과 제대로 부딪혔던 그가 이 지시를 내렸다면 이 안엔 분명 사적인 감정이 섞여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사연을 알 리 없는 김 대리는 서글서글한 미소와 함께 태오를 달랬다.
“브리핑은 잘 진행되고 있으니까 책임자 감투 쓴다고 해서 엿 먹을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래도…….”
“프레젠테이션에는 완전 소질 없는 단 팀장님한테 브리핑을 진행하라고 시켰으면 모를까, 그냥 본사 팀에서 다 완성해 놓으면 확인해 보고 승인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물론 그렇게 들으면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김 대리의 설득에 계속 어깃장만 놓기도 어려웠던 태오는 괜히 신입 사원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잔뜩 얼어붙어 있던 신입 사원은 일순 허리를 똑바로 펴고, 김 대리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진정시켜도 불안이 가라앉지 않았던 태오는긴 한숨만 내쉬었다.
딱 바로 그 타이밍에.
“본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여긴 어쩐 일로!”
작업장 입구 쪽에서 우렁찬 인사가 들려왔다.
난데없는 직책의 등장에, 김 대리와 신입 사원은 물론 태오의 시선까지 그들에게로 틀어졌다.
그러자 한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아니나 다를까, 평소와 같이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띤 차준이었다.
“단태오 팀장님을 만나러 왔어요.”
그가 말했다. 단태오를 보러 왔노라고.
“공문은 잘 받으셨나 해서요.”
뒤이어 부드러운 음성으로 꺼내 놓는 말은 태오가 한창 의문스러워하던 바로 그 공문에 대한 것이었다.
불안한 직감이 한 번에 들어맞았음을 깨달은 태오는 아까보다 더 살벌한 눈빛으로 차준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런 태오를 어렵지 않게 발견한 차준은 더욱 더 짙은 눈웃음을 띠며 말을 건넸다.
“아, 저기 계셨네. 한창 작업 중이었나 봐요?”
“…….”
“잠깐 시간 내서 데이트나 하죠.”
아무런 악의 없이 그저 장난스러워 보이기만 하는 차준의 태도.
“두 분 많이 친하시네요! 이렇게 데이트 신청까지 하러 오시고!”
“하하, 사실은 공문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실 것 같아서요.”
“안 그래도 한창 그 얘기 중이었습니다! 본부장님이 직접 전달해 주신다면 우리 단 팀장도 더 이해하기 수월할 것 같네요! 그렇죠?”
거기에 속은 김 대리는 마냥 기뻐했으나, 태오의 안색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저 껍데기 안엔 어떤 시꺼먼 속이 있을지, 아예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라서 온몸에 서늘한 한기가 감돈다.
마치 꼴사나운 개싸움을 앞두고 있다는 듯이.
.
.
.
북극보다 더 쌀쌀한 단태오의 사무실.
“어떻게 된 건지 말씀하십쇼.”
태오가 성질껏 구겨 버린 공문을 테이블 위에 턱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러자 차준은 가벼운 웃음을 흘려보냈고, 의자 하나를 당겨 앉았다.
“상사가 찾아왔는데 커피 한 잔도 안 타 줘요?”
그러고서 꺼내 놓는 목소리는 한없이 느긋했다. 그런 태도가 거슬린 태오는 까칠한 반응을 내비쳤다.
“딱히 대화가 길어지지도 않을 것 같은데 빨리 끝내 버리죠.”
“왜요, 난 할 말 많은데.”
“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본사에서 내려온 지시는 따르지 않을 생각이니까요.”
태오는 단호히 말했지만 차준은 가벼운 비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그건 단 팀장님이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냥 안 해 버리면 됩니다. 아님 회사를 때려치워 버리든가.”
“아니요, 그러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도 안 되구요.”
“…….”
“이건…… 나봄이 문제이기도 하니까.”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이름에 태오의 눈동자가 돌연 살벌해졌다. 그 분위기를 단번에 눈치챈 차준은 그에게로 상체를 가까이 붙였다.
그러고서 꺼내 놓는 내용은 본격적이었다.
“2주 뒤 수요일이 우드레일 창립 기념회 행사라는 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회장님은 물론 대주주, 협력업체 임원들까지 전부 참석하겠죠.”
“…….”
“그 자리에서 이번 ‘Lily’ 프로젝트 브리핑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는 더 이상 설명 안 드려도 아시겠죠?”
차준이 한 이야기들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만한 사실들이었다.
그걸로는 불편한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던 태오는 날 선 말투로 물었다.
“그게 한나봄이랑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순간 차준의 웃음기가 살짝 가라앉았다. 이내 차갑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지나치리만큼 솔직했다.
“그때 케이 도어락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임원들이 한봄 도어락을 추궁할 거예요. 회사 규모부터 저와의 친분까지 모든 걸 시빗거리로 걸고넘어지겠죠.”
“…….”
“난 그 꼴 나기 전에 나봄이를 데리고 행사장을 빠져나갈 겁니다. 그러니까 본부장인 나 대신 단 팀장님이 총 책임자로 서 주세요.”
거기까지 들은 태오의 입가에 헛웃음이 맺혔다. 하지만 차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결코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날 미끼로 세워 두고 나서 한나봄 데리고 내빼겠다는 거네.”
“이해력 빠르네요.”
“한나봄을 피신시키는 건 찬성합니다. 하지만 그쪽이랑 내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나봄을 향한 차준의 질척한 감정을 알고 있는 태오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다시 인위적으로 입꼬리를 들어 올린 차준은 비웃음 어린 말투로 되물었다.
“그럼 그 애 혼자 내보내서 의혹만 더 짙어지게 만들까요?”
“…….”
“아니면 본사에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단 팀장님이 꼴사납게 데리고 나갈래요?”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질문.
순간 흔들려 버린 태오의 눈빛을 본 차준은 정곡을 찌르는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그날 행사장에서 나봄이를 계속 내 곁에 둘 거고, 다른 사람들이 감히 하대하지 못할 존재로 만들 겁니다.”
“…….”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밖에 없어요. 그 부분에 대해선 단 팀장님도 인정하고 있겠죠.”
그래도.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고 해도.
태오는 순순히 차준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는 혹시나 끄덕임으로 보일까 싶어 작은 미동조차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 그에게 차준은 매정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단 팀장님은 방해하지 마시고 내 역할이나 대신하세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는 그는 태오의 대답 따위 애초부터 필요하지도 않았다는 태도였다.
분에 찬 태오는 일방적인 얘기만 마치고 떠나려는 그를 붙잡으려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독기를 머금은 입술을 떼어 내기도 전에, 차준은 그에게 눈길도 두지 않고 마지막 엄포를 내려 놓았다.
“아, 혹시나 착각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
“이건 명령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흘러나오는 음성은 부드럽지만 싸늘했다.
그가 나봄을 구하려는 건지, 아니면 인질로 잡고 있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저 근본적인 불안감만 감돌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