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사랑 받지 못한 내 잘못이야
2017.10.16.
아니라고 여러 차례 말해도 계속 오해 쌓일 말만 해 대던 유리에게 살짝 화가 났던 것 같기는 한데.
어떤 정신으로 무슨 말을 쏟아 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쌓인 분노를 전부 쏟아 내고 나자, 유리의 눈빛은 급속도로 차가워졌고, 태오의 눈빛은 하염없이 흔들렸다는 것이었다.
하도 두 사람의 반응이 상반돼서 그리 쏘아붙인 게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너희 회사까지 데려다줄까?”
일단 태오의 불안이 가신 건 분명했다. 아직 붉은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물어보는 태오는 어쩐지 평소보다 텐션이 높다.
나봄은 그런 태오에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준 걸로도 고마워.”
“그래도 버스보다는 자가용이 편하지.”
“괜찮다니까. 너도 이제 들어가서 일해야지.”
태오는 부드럽게 타이르는 나봄을 애타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실은 이렇게 헤어지고 싶지가 않은 건데, 이 눈치 없는 여자는 그 마음을 조금도 몰라준다.
어떻게든 조금 더 오래 있어 보려 해도 웃는 낯으로 거절해 버리니, 눈치 없이 커져 가는 건 미련뿐이었다.
‘무턱대고 잡아 볼까.’
태오는 잠시 생각했지만 역시 그건 무리였다.
아직은 공식적인 연인 관계도 아닌 상태에서 너무 부담스럽게 굴었다간 겁 많은 나봄이 도망갈까 싶어서였다.
사실 요즘의 태오는 그녀와 하고 싶은 일이 부쩍 늘었다.
처음엔 그저 눈앞에 있는 걸로도 만족했었고, 우연찮게 대화라도 나누는 날엔 감격해서 어쩔 줄을 몰랐었는데.
이제는 그녀가 태오를 먼저 찾아와 줘도 아쉽고, 같이 데이트를 해도 아쉽고, 아까처럼 갑작스레 호감을 표현해 줘도 뭔가가 아쉽다.
이제는 어지간한 걸로는 성에 차지도 않으니, 태오는 조금 더 이런저런 은밀한 시간들을 그녀와 나누고 싶다.
만나자마자 자연스럽게 손부터 맞잡기. 시도 때도 없이 입을 맞추기. 숨도 못 쉴 만큼 꽈악 끌어안아 주기. 혀가 닳아 없어지도록 사랑을 고백하기.
그리고 그 누구도 갖지 못할 은밀한 시간에, 나만 볼 수 있는 표정을 지켜보기.
욕심이 거기까지 닿자 태오는 끓어넘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뜨거워진 온몸은 본능까지도 아찔하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지금 확 연애나 하자고 말해 버릴까. 한나봄도 아까 그러고 싶다고 했었잖아.’
성질 급한 태오는 찰나의 시간 동안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고민했다.
아무래도 성공할 것 같은 지금, 무턱대고 미뤄 놓는 건 왠지 부질없게 느껴졌다.
결심이 선 태오는 정류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연 멈추었고, 나봄에게로 몸을 돌렸다.
“한나봄.”
그러고선 잔뜩 분위기 잡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니, 나봄이 동그란 눈동자를 그에게로 가져다 두었다.
“응?”
“우리…….”
“우리?”
“그러니까 우리…….”
하지만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입술은 그의 양심을 건드리고 있다.
이미 5년 전, 변변찮게 고백했다가 변변찮은 일로 차였었는데.
이번에도 이렇게 분위기에 휩쓸려서 사귀자고 해 버리면 그녀는 또다시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래서 머지않은 훗날 아주 사소한 일로 이별을 고하진 않을까 문득 두려워진다.
“우리 뭐?”
“아니, 이건 지금 이런 분위기에서 할 얘긴 아니고.”
더 이상 그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던 태오는 거의 꺼내 놓았던 질문을 되가져 갔다.
하지만 이대로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도 성에 안 차는 일인지라, 그는 어떤 대답도 필요 없는 일방적인 고백을 흘려보내기로 했다.
“나 너한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특별한 사람?”
“남자 친구…… 라든가.”
마음의 준비는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태오는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마른침을 삼켜 넘겼고, 한 번 더 설렘 가득한 고백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조만간 각 잡고 고백하려고.”
“…….”
“난 참을성이 없어서 생각할 시간 같은 거 못 줘. 그러니까 지금부터 결정해 놔.”
“무슨 결정을…….”
“나랑 또 한 번 연애할 건지, 말 건지.”
그 말에 두 볼에 홍조가 피어나는 건 나봄 역시 마찬가지였다.
똑바로 닿은 태오의 시선은 어느 때보다 진지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대답을 해 버릴 뻔했다.
연애라면 지금도 하고 있는 기분인데 무슨 소리냐고.
“난 분명 선전포고 했다.”
태오가 다시 한 번 비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봄은 쿵쾅대는 심장을 감추기 위해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러자 정수리 위쪽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건 태오의 기쁜 실웃음이었다.
나봄은 이 순간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예쁘게 웃고 있는지.
“한나봄.”
그가 나긋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조심스레 뜨거운 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예상대로 예쁜 미소를 짓고 있는 태오의 달콤한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너 진짜 많이 좋아한다고.”
벌써 몇 번을 깨닫는 건지 모를 그의 마음은 오늘도 어김없이 따듯하고 애틋했다.
그래서 나봄은 오늘도 어김없이 동요해 버리고 만다.
이쯤 되면 이 녀석을 좋아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인정해버릴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같이 있는 이 시간이, 그가 사랑을 말해 주는 이 순간이 지나가는 게 이토록 아쉬울 리 없잖아.
나봄은 대답 대신 그를 따라 배시시 웃어보였다.
태오가 그 미소를 수줍은 눈빛으로 받아주니, 온 세상이 거짓말처럼 달콤해졌다.
마치 그의 주변에 예쁜 봄꽃이라도 피어나고 있는 것처럼.
* * *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의 오후 업무 시간.
유리는 억지로 쳐다보고 있던 자료에 도저히 집중하지 못하고 책상 위로 내팽개쳐 버렸다.
그 살벌한 기운에 팀원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지만, 그녀는 딱히 숨길 생각도 없는지 분에 찬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쿨한 이미지 관리보다도 더 신경 쓰고 있는 건 감히 주제도 모르고 도발을 한 한나봄이었다.
‘전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 드렸어요.’
‘본부장님은 개인적으로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만났고, 유리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즐거운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유리는 그리 말하던 나봄의 또렷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태오는 제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전 연애하고 싶은 사람한테 이렇게 대하거든요.’
그때 유리는 예상치도 못한 나봄의 반격에 당황한 나머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고, 그건 고스란히 울화통으로 남아 버렸다.
태오의 마음을 이미 가진 것처럼 구는 그 태도는 도저히 참고 봐주지를 못하겠다.
“한나봄, 이 여우 같은 년을…….”
나봄을 향해 이를 갈고는 있지만 사실 그녀에게 직접적인 상처를 준 건 따로 있었다.
한나봄이 제 절친한 친구에게 사나운 말을 퍼붓는 동안, 얼빠진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던 단태오.
그 일렁이는 눈빛은 유리를 미칠 듯한 불안감으로 몰아넣었다.
물론 그 꼴을 오늘만 엿본 건 아니었으나 문제는 그 꼴이 예전처럼 가엾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다 진짜 둘이 사귄다고 나오는 거 아니야?’
유리는 미간을 사정없이 좁힌 채 잠시 생각했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깔끔히 지워 버렸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으니 그녀는 상상으로조차 그 둘을 이어 주지 않을 참이다.
그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했던가.
“안녕하십니까, 단 팀장님.”
“팀장님, 식사는 잘 하고 오셨어요?”
나봄을 따라 사라졌던 태오가 회사로 돌아왔다.
팀원들은 그가 들어서자마자 저마다 고개를 숙여 인사했으나 유리는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라 시선을 피했다.
그걸 본 태오는 잠시 유리에게 눈길을 두는가 싶더니, 늘 그렇듯 짧은 대꾸만을 남겨 두었다.
“아, 네. 남은 업무도 수고하세요.”
그러고 나서 떨어지는 발걸음엔 미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 속은 새까맣게 태워 놓은 주제에, 싸늘한 이쪽의 분위기가 신경 쓰이지도 않나 보다.
그런 반응이 허탈하게 느껴졌던 유리는 피했던 고개를 들어 태오의 뒷모습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그는 나에게.
오늘도 어김없이 멀어지기만 하는 그는 나와의 인연은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태도다.
혼자 불안해하기도 이골이 난 유리는 가라앉은 한숨을 내뱉었다.
차라리 나도 관심을 꺼 버린다면 좀 나을까.
차마 실천으로 옮기지도 못할 생각만 하고 있던 그 순간.
지잉―
그녀의 휴대폰이 짧은 진동음을 울렸다. 곧바로 옮겨 간 눈동자에 들어온 메시지는 다름 아닌 태오가 보낸 것이었다.
[잠깐 흡연실에서 보자.]
본론은 들어 있지도 않았지만 그가 무슨 얘길 꺼내려는지에 대해선 충분히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여자에 대해서라면 나도 할 말이 많지.’
독기를 되찾은 유리는 답신을 보내는 대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표정은 온도만 낮을 뿐 다소 태연한 편이었으나, 담배를 챙기는 손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잔뜩 퍼부으러 가는 와중에도 우리 사이가 틀어질까 걱정하는 나는 아무래도 구제불능인가 보다, 라는 생각과 함께.
.
.
.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야외 흡연부스.
“뭐야, 나올 거면 나온다고 대답을 하지.”
조금 늦게 도착한 태오가 부스에 들어서며 핀잔을 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 말을 장난스럽게 받아쳤을 유리였지만, 오늘은 그저 딱딱하기만 한 목소리로 짧은 되물음만 던졌다.
“그래서, 무슨 얘길 하려고?”
유난히 쌀쌀한 그녀의 분위기를 확인한 태오는 옅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유리의 눈을 물끄러미 마주하며 말했다.
“너 한나봄한테 악감정 있냐.”
아, 역시 이 얘기일 줄 알았어. 하긴 그 정도로 기 싸움을 했는데 아무리 바보라도 이상한 낌새는 알아차렸겠지.
그 문제에 대해선 발뺌하고 싶지도 않았던 유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 난 걔 비호감이야.”
“그러냐.”
“그래. 넌 제대로 대답한 적도 없지만 다 알고 있어. 그 여자, 너한테 트라우마나 다름없는 그 첫사랑이잖아.”
또렷하게 터져 나온 그녀의 음성에, 태오는 부인할 생각도 없는지 잠자코 입술을 닫고 있었다.
그럴수록 속만 들끓었던 유리는 조금 더 날을 세운 채 그를 쏘아붙였다.
“그걸 알고 있는데 내가 걜 어떻게 곱게 봐. 난 니가 너무 휘둘리는 것 같아서 걱정스러워.”
그래, 걱정스러워서 그러는 거야.
그 말을 내뱉을 쯤 유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유리는 생각했다.
태오도 이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아마 그녀를 탓하진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를 다그치는 게 떳떳하게까지 느껴지던 그때. 굳게 닫혀 있던 태오의 입술이 낮은 목소리를 내보냈다.
“잘 모르겠어.”
“뭘 모르겠는데?”
“그걸 왜 걱정하고 있는지.”
표정을 보아하니 태오는 유리가 왜 화를 내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게 답답해진 유리는 신경질 난 손길로 짧은 머리를 흩뜨렸고, 보다 언성을 높여 말했다.
“당연히 걱정되지, 왜 안 돼. 휘둘리기만 하다 또 내버려질 게 뻔하잖아. 오늘 아침에도 봤지만, 선우차준 본부장님이랑 한나봄 제대로 정리도 안 된 상태라고.”
“아니라잖아.”
“너는 그 말을 믿니? 그러니까 항상 그런 애한테 당하기만 하는 거 아니야.”
바보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날카로운 말.
그걸 가만히 듣고 있는 태오의 표정은 어떤 감정인지 쉽사리 파악할 수 없었다. 시원시원하게 대꾸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그는 그저 물끄러미 유리를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태오에게 유리는 한 번 더 정곡을 찔렀다.
“순진한 척하는 거, 어지간한 사람 눈엔 다 보여.”
“…….”
“그러니까 구질구질하게 청승 떨지 말고 제발 좀 정신 똑바로 차려. 친구로서 해 주는 조언이야.”
마지막 한 마디는 일부러 더 힘주어 말했다.
그건 태오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했으나, 이때가 아니면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을 기회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듣고도 태오의 눈빛은 딱히 화난 기색을 띠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차분하게 가라앉기만 할 뿐.
“아직도 내 말이 이해가 안 돼?”
유리는 그런 그에게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태오는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벌려 긴 한숨을 흘려보냈고.
“어, 이해 안 돼.”
여전히 마뜩잖은 대답만 꺼내 놓았다.
순간 유리의 얼굴엔 짜증이 잔뜩 배어들었지만 태오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한나봄이 나한테 상처 줬던 사람인 건 알아. 그래서 내가 한동안 힘들어했던 것도 기억해.”
“그래, 알면서 왜…….”
“그런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뭐?”
“나도 지금 신경 안 쓰는 지난 일을 왜 니가 걱정까지 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어.”
이제 보니 태오의 눈동자는 화난 기색은 없어도 매정하리만큼 단호했다.
뒤늦게 태오의 본론을 알아챈 유리는 일순 머릿속이 새하얘져 버렸다. 그가 지금 꺼낸 말은 모질게 반박하는 것보다 잔인해서, 그녀는 호흡마저 멈춰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태오는 더욱 더 냉정하게 끊어졌던 말을 이어 나갔다.
“내 말이 서운하게 들릴 거 알아. 친구니까 그런다는 말도 어느 정도 이해해.”
“…….”
“하지만 선을 넘는다는 느낌은 안 들었으면 좋겠다.”
“단태오…….”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사적인 일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을 끝으로 태오는 맞은편 벤치에서 일어섰다. 떠나는 발걸음에 미련조차 없는 걸 보면 할 얘기는 정말 그게 전부인 듯했다.
유리는 그런 그를 떨리는 눈동자로 지켜보며 남몰래 이를 꽉 물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가져온 애꿎은 담뱃갑만 잔뜩 구겨 놓고 있었다.
“아, 맞다. 허유리.”
흡연부스를 빠져나가기 직전, 그가 유리를 불렀다.
계속 태오를 향해 있던 유리가 대답 대신 미간을 좁히자, 그는 마지막까지도 그녀의 가슴을 후벼파는 부탁을 건넸다.
“내가 내버려졌던 건, 나한테 마음을 안 준 한나봄 잘못이 아니라 사랑받지 못한 내 잘못이야.”
“…….”
“나 이번엔 실수 없이 사랑 좀 얻어 보려니까, 한나봄 미워할 시간에 나 응원이나 해 줘라.”
“…….”
“친구로서.”
마음 같아서는 거절하다 못해 화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그러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린 건, 순전히 단태오 때문이었다.
사랑해 주지 않은 사람에겐 잘못이 없다. 모든 건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의 잘못이다.
그 말은 꼭 너와 나 사이에도 해당되는 것 같아서.
나는 너에게 잘못을 빌어야 하는 처지인 건가 진심으로 고민스러워진다.
아직까지 내 마음속엔 질투와 분노만이 뒤엉켜 있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