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남친이 내게 반했다-48화 (48/104)

48.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2017.10.13.

태오의 사무실 한구석에 앉아 있는 나봄은 일에 열중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심각하게 구겨진 눈썹, 쓰던 문장을 중얼거리는 낮은 목소리, 그리고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리는 긴 손가락을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다.

단태오의 얼굴을 본 세월이 한두 해는 아닌데 요즘 따라 왜 이렇게 새롭게 다가오는 건지.

항상 사납게만 보이던 눈매는 긴 속눈썹 때문에 분위기 있어 보이고, 살벌한 이미지를 더하던 눈썹의 흉터는 어쩐지 섹시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양 옆으로 쭉 뻗은 어깨.

저건 원래 저렇게 넓었었나. 목선으로부터 이어지는 골격이 참 예술이다.

그것 말고도 새롭게 발견되는 그의 매력은 무궁무진해서, 나봄은 쉽사리 시선을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아, 겨우 끝냈네.”

그때, 드디어 보고서를 끝마친 태오가 고개를 들었다.

나봄은 은밀한 감상이 들통날까 싶어 재빨리 애먼 곳으로 눈길을 옮겼다.

“다, 다 했어? 수고 많았어! 이제 밥 먹으러 가자!”

그리고는 수상쩍을 만큼 허둥지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태오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때문에 정신 사나운 거 억지로 참고 끝냈다.”

“내가 왜?”

“내 얼굴을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태오의 검붉은 입술이 피식 비틀려 올라갔다.

다 들켜 버린 와중에도 그 모습은 충분히 매력적이어서 나봄은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져 버리고 말았다.

“내, 내가 언제…….”

“언제긴. 들어와서부터 계속 그랬지.”

“아…….”

“아, 어디 구멍 안 났나 몰라.”

발뺌을 하려 했으나 그럴수록 빈정대는 태오는 오늘 나봄을 놀리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눈도 잘 못 마주치던 녀석이었는데, 키스 후에 자신감이 붙었는지 과감한 멘트나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왠지 그에게는 혼자만 당하고 싶지 않았던 나봄은 실실 웃는 태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태오의 약점이라면 알고 있다. 사춘기 소년처럼 수줍음이 많은 그는 달콤한 돌직구를 날릴 때 무기력해진다.

“니가 섹시하게 생겨서 그래.”

나봄은 오직 전세를 역정하고 싶다는 일념만으로 소심함마저 무릅쓰고 말했다.

“……뭐?”

그 한 마디에 태오의 눈이 바람 앞 촛불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귀까지 빨갛게 물들여 버리는 그는 나봄보다 더 당황한 눈치다.

“아, 너무 잘생겼다.”

“그, 그만해라.”

“단태오 씨는 누구 닮아서 그렇게 잘생기셨나.”

“그만하라니까! 진짜!”

부끄러움을 참다못한 태오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순간 나봄은 토끼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 싫어?”

“…….”

“영원히 칭찬하지 말까?”

한나봄이 이렇게 능글맞은 성격이었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

태오는 떨림을 진정시키기 위해 마른침을 꿀꺽 삼켜 넘겼다.

그런 뒤 수줍게 시선을 피하며 꺼내 놓는 대답은 자신이 생각해도 참 모양 빠졌다.

“누가 영원히 하지 말랬나…….”

“…….”

“아, 뭐. 정 못 참겠으면 하루에 한 번씩 하든가.”

일렁이는 눈빛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툴툴대며 흘려보내는 목소리.

그래도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다 드러나 버리는 그는 꼭 청정 구역 같다. 덕분에 그의 곁에선 나봄의 마음도 순수해지는 기분이다.

나봄은 다시 배시시 웃는 얼굴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방을 챙겨 들며 기분 좋게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오늘은 내가 불쑥 찾아온 거니까 내가 살게.”

그러자 태오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톡 건드렸다.

“벼룩의 간을 빼먹지.”

두근―

순간 왜 가슴이 멋대로 요동치는 건지.

애써 진정시켜 놓았던 심장박동이 미친 듯이 빨라진다.

자꾸 이런 식이라면 머지않아 빵! 하고 터져 버릴지도 모르겠다.

* * *

서 회장이 머물고 있는 VVIP 개인 병실 앞.

“무슨 소리야! 내가 못 들어간다니!”

경호원들에게 면회를 제지당한 서 대표가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곳에 오기 전, 이미 서 회장으로부터 제지 명령을 받은 경호원들은 완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회장님께서 대표님 뵙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 뭐?”

“아직은 심신을 안정시키셔야 할 상태이니, 이만 돌아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들이 감히…….”

서 대표는 들고 온 과일 바구니를 거칠게 집어 던졌다.

의식을 되찾은 서재균 회장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을 때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면전에서 거부당하니 분노를 감출 길이 없었다.

그 늙은이, 아예 천륜마저 끊어 낼 생각인 건가.

거친 숨을 몰아쉬던 서 대표는 짧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는 병실 안에 서 회장에게도 똑똑히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엄포를 놓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나도 가만히 못 있어! 선우차준이 태준이를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아?!”

“…….”

“천만에! 하도 무능하고 미련해서, 멀쩡한 몸뚱이 가지고도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 놈이야! 본인의 감정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서 빌빌거리기나 하지!”

“대표님, 언성을…….”

경호원들은 점점 격해지는 서 대표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모든 손길을 거칠게 뿌리친 그녀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뒷말을 이어 나갔다.

“다시 인정하게 될 거야. 우리 태준이를.”

“…….”

“내 아들은 당신들이 앉혀 놓은 꼭두각시랑 근본부터가 달라.”

조용한 병실의 복도를 메우는 그녀의 서슬 퍼런 목소리. 그래서 더욱 잦아들 수밖에 없는 숨소리.

“아마…… 금방 드러날걸?”

누굴 노리고 던진 칼날인가는 전혀 상관없이.

“진짜 약해 빠진 쓰레기가 누군지.”

단 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숨도 못 쉴 만큼 강렬한 고통.

폭언을 마음껏 쏟아 낸 서 대표는 그대로 등을 돌려 성급한 걸음을 옮겼다.

규칙적인 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멀어지자, 병실을 지키던 경호원들은 그제야 숨을 돌렸다.

그러나 병실 안, 서 회장의 곁을 지키고 있던 그는 오히려 질식해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차준아, 신문 좀 이리 가져다주거라.”

서 회장이 아무 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태연히 명령했다.

표정을 감추기 위해 제 손끝만 바라보고 있던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렸고, 다시 양 입꼬리 끝을 낚싯줄에 꿰맸다.

“……네, 회장님.”

그렇게 완성된 미소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했다.

스스로가 어떤 모습인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 * *

“니가 왜 그 집을 좋아하는지 알겠어. 내가 먹어 본 크림 스파게티 중에 제일 맛있더라.”

화기애애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잔뜩 신이 난 표정의 나봄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점심을 대접한 것으로 만족한 태오는 가벼운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나중엔 더 분위기 좋은 데로 데려가 줄게.”

“좋은 식당은 쫙 꿰고 있나 봐?”

“원래 요리 좀 하는 사람들이 그래.”

“하하, 그럼 엄청 기대하고 있어야겠다.”

이제 다음 약속 잡는 일쯤이야 자연스러워진 두 사람의 관계.

이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벼운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던 사이었는데, 우린 언제 이렇게나 가까워진 걸까.

태오는 그 시작이 노래방에서의 눈물 섞인 첫 키스부터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확실히 우리의 온도는 그때를 기점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태오야.”

“…….”

“단태오.”

“어?”

그때 나봄이 태오의 이름을 불렀다.

잠시 딴생각에 잠겨 있던 태오의 시선이 곧바로 그녀를 향했다.

그러자 그녀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전하는 얘기는 조금 섭섭했다.

“나 이제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아서.”

“벌써?”

“벌써라니. 점심시간도 다 끝났잖아.”

태오는 그녀의 말에 서둘러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뭘 했다고 시간은 벌써 업무 복귀 10분 전.

보고서 쓰고 점심 먹느라 충분히 얘기를 나눠 보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그녀를 보내 버리게 생겼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태오는 일단 그녀를 붙잡아 보기로 했다.

“커피라도 마시고 가. 나 오후에는 좀 한가해.”

하지만 나봄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짧은 만남이 아쉬운 건 나봄도 마찬가지였지만 오늘 그녀의 스케줄은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바빠질 예정이었다.

“오늘 월말 회의가 있어. 적어도 세 시까지는 회사로 복귀해야 돼.”

“아…… 그러냐?”

“대신 나중에 또 놀러 올게. 아, 다음 주쯤에 어차피 이쪽으로 출근해야 되잖아!”

나봄은 다행이라는 듯 말했지만, 다음 주는 태오에게 너무나도 먼 시간이었다.

그래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던 태오는 그가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간을 꺼내 보기로 했다.

더 미룰 것도 없이, 바로 오늘 밤.

“한나봄. 혹시 퇴근하고……”

태오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입술을 떼어 냈다. 하지만 그의 본론을 막아서는 건 뒤편에서 터져 나온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이! 단태오!”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군지는 나봄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태오와 함께 뒤를 돌아보니, 빠르게 다가오다가 나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잠시 멈춰 버리는 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잠깐 마주친 시선이 곱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걸 파악할 새도 없이, 유리는 다시 쿨한 미소로 본심을 뒤덮었다.

“누구랑 걸어가고 있나 했더니 나봄 씨였구나.”

“아, 안녕하세요. 유리 씨.”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잠깐 시간이 나서 그냥…….”

그리 대답하는 나봄은 유리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

예전에 태오에게 줄 편지를 제대로 전해 주지 못했던 것도 그렇고, 얼마 전에 강제로 술을 먹여서 그녀를 차준의 편에 보내 버렸던 것도 그렇고.

유리를 편히 생각하기엔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나봄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유리 씨도 점심 먹고 돌아오는 길이에요?”

“아니요, 회의가 있어서 본사 갔다 왔어요. 태오랑 점심 먹으려고 빨리 들어왔는데 이미 둘이 먹고 왔나 보네.”

아쉬움이 잔뜩 묻어 나오는 유리의 말은 나봄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으니, 그걸 눈치챈 태오는 중간에서 대화를 가로막았다.

“점심 같이 먹자는 말도 없었잖아.”

“너 휴대폰이 꺼져 있는데 어떻게 말해.”

“아직 안 켰었나?”

“그래. 방금 전까지도 꺼져 있더라. 하여간 정신 빼놓고 다니기는.”

유리는 핀잔과 함께 태오의 머리를 흩트렸다.

“아, 미쳤나.”

태오는 그 손길을 질색하며 뿌리쳤으나, 나봄의 눈엔 그저 두 사람이 친근하게 비쳐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원래 오래 알고 지냈던 사이였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말자, 그렇게 애써 마음을 달래고 있던 그때.

“그런데…… 나봄 씨는 오전에 본부장님이랑 데이트하고 있지 않았나?”

갑자기 꺼내진 유리의 질문이 나봄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차준과의 일은 그다지 밝히고 싶지 않았던 나봄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데이트라니요!”

“에이, 본사 근처 카페 지나가다가 본부장님이랑 사이좋게 마주 앉아 있는 거 다 봤는데 뭘.”

“아…….”

“사귀는 거 맞죠? 그 분위기는 아무리 봐도 연인 사이던데?”

그…… 분위기?

유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차준과 가슴 아프도록 무거운 시간을 보냈던 나봄은 한 번 더 완강히 부인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나 곧바로 뒤따라온 유리의 말엔 은근한 뼈가 있었다.

“그런 게 아니면 더 이상해져요. 어장관리 하는 것도 아니고.”

“네?”

“본부장님이랑 썸은 워크숍 때부터 쭉 타고 있었잖아요. 게다가 전에 술 엄청 취했을 땐 본부장님 차 타고 같이 사라졌고.”

“아…….”

“앤조이 아니라면 거기까진 너무 심하지.”

유리가 그리 말했을 때쯤, 나봄은 저도 모르게 태오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멋대로 풀어놓고 있는 망상들도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가장 이상하게 들리는 건 술 취한 나봄이 차준과 함께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나봄은 오해를 풀기 위해 한 번 더 확실히 부인하려 했다. 그러나 유리는 그럴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뒷말을 덧붙였다.

“그런 걸 연애라고 하는 거예요. 나봄 씨는, 태오를 이성적으로 대한 적 단 한 번도 없잖아.”

“…….”

그제야 눈치 없는 나봄의 눈에도 그녀의 의도가 훤히 보인다.

태오와 차준을 멋대로 구분 짓고 있는 그녀는 지금 나봄이 아닌 태오를 상대로 얘기하는 중이다.

절대 착각하지 말라고.

“딱 한 사람…… 본부장님 앞에서만 여자가 되는 거지.”

너는 절대로 선우차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고.

“……허유리, 그 입 좀 다물어라.”

태오는 유리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아까보다 굳어 있는 눈빛은 동요한 심정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이미 다 들어 버린 말은 애써 외면한다고 해서 털어 내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바로 그런 반응을 원했던 유리는 돌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나는 그냥 누가 연애하는 거 보면 부러워서. 아, 그나저나 점심시간 다 끝났다! 단태오 얼른 들어가자!”

“…….”

“그럼 나중에 봐요, 나봄 씨!”

그리고는 저 혼자만 후련한 표정으로 서둘러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나봄보다 더욱 가까이 태오에게 다가서는 그녀에게선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는 오기까지 느껴졌다.

이 모든 상황이 갑작스러웠던 나봄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말았다.

이게 뭐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화를 내야 할 상황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태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것조차 제대로 짐작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확실히 알고 있는 것 하나는.

“…….”

흔들리는 눈빛을 추스르지 못하는 태오를 위해, 지금 당장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진심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얼어붙어 있는 건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만 줄 뿐이니.

“유리 씨.”

말해야 한다. 아무리 싸우고 싶지 않아도.

“전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 드렸어요.”

확실히 밝혀내야 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으, 응?”

“본부장님은 개인적으로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만났고, 유리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즐거운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그리 말하는 나봄은 처음으로 단호했다. 마주한 눈빛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적어도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급변한 그녀의 분위기를 단번에 읽어 낸 유리는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대화를 끝마쳐 보려 했다.

“정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지, 뭐.”

키워 놓은 오해에 비해서 가볍디가벼운 대꾸.

그 순간, 가슴 속에서 화악 불이 일었다.

덕분에 자신의 소심한 성격마저 모두 불태워 버린 나봄은 본능적으로 태오의 손을 붙들었고, 제 쪽으로 힘주어 끌어당겼다.

그런 뒤 내뱉는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그리고 태오는 제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

“전 연애하고 싶은 사람한테 이렇게 대하거든요.”

유리의 입가에서 미소가 싸악 사라졌다.

이로써 나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선명한 적대감을 띠게 되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나봄에게는 아무 상관없게 느껴졌다.

“한나봄…….”

오직, 나로 인해 상처받았던 너의 마음만 괜찮아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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