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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남친이 내게 반했다-47화 (47/104)

47. 제발 나를 떠나지 마

2017.10.09.

“아, 겨우 도착했네…….”

우드레일 본사 앞.

불만 가득한 표정의 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즘 들어 업무가 부쩍 늘어난 그녀는 현장과 본사를 오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왕 여기 올 거 태오의 본사 스케줄이랑 겹치면 좋으련만.

운은 지지리도 따라 주지 않아서 늘 그와는 따로 놀았다.

게다가 본사 스케줄은 하루의 대부분을 통째로 잡아먹는 경우가 많아서, 이곳에 오는 날은 보통 태오의 얼굴을 구경조차 하지 못하는 날이 되기 일쑤였다.

“그래도 오늘은 어떻게든 빨리 해치워 버려야지.”

유리는 어깨에 멘 가방을 고쳐 들며 그의 퇴근 시간 전까진 어떻게든 현장으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고는 야무진 발걸음을 떼어 내려던 그때.

“……어?”

아주 익숙한 얼굴이 그녀의 시선에 걸려 들어왔다.

조금 먼발치에서부터 바삐 걸어오고 있는 그는 다름 아닌 선우차준이었다.

최근 들어 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유리는 반가움 어린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어차피 이 길로 쭉 오다 보면 그와 정면으로 마주칠 테니, 유리는 그 기회를 빌어 나봄과의 진척도를 물어볼 생각이다.

하지만 그대로 가까워지나 싶었던 차준은 한 블록 떨어진 카페 앞에서 우뚝 발길을 멈춰 세웠고, 이내 무거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김이 확 샌 유리는 의식적으로 짓고 있던 미소를 풀어내며 중얼거렸다.

“커피 드시려나 보네. 시간도 남았는데 나도 가 볼까?”

잠시 고민하던 유리는 곧 차준이 들어간 카페로 거침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태오의 체념을 앞당기기 위해선 차준과 나봄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문 앞에 다다르기도 전, 카페 통유리에 비친 얼굴은 그녀를 제자리에 잠시 멈춰 서게 만들었다.

“한나봄……?”

지금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막 들어선 차준을 반기는 나봄의 모습.

차준은 그런 그녀에게 유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수줍은 듯 눈을 피하는 나봄은 영락없이 갓 시작된 연인을 대하는 태도였다.

두 사람의 밀회를 멀찌감치 지켜보는 유리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오늘 태오에게 이 장면을 그대로 전한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일말의 미련마저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이다.

유리는 곧 한나봄이라면 학을 떼게 될 그가 벌써부터 기대되어 미칠 지경이다.

* * *

우드레일 본사 근처 카페.

“오래 기다렸어?”

나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차준이 물었다.

오늘따라 더욱 다정한 그의 시선을 애써 피하고 있던 나봄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린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별로 안 기다렸어요.”

그러자 차준은 그런 그녀를 보며 씨익 웃어 보이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를 톡톡 건드렸다.

“카페라떼네.”

“네, 카페라떼 좋아하셨던 것 같아서…….”

“응. 제일 좋아해.”

사실 그건 10년 전의 얘기였다.

요즘은 쓰디쓴 핸드드립 커피를 가장 즐겨 마시는 차준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카페라떼를 가장 좋아해 볼 생각이다. 난 그녀의 기억대로 남아 있어 줄 거니까.

차준은 부드러운 카페라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밤에 갑자기 연락이 와서 깜짝 놀랐어. 무슨 얘길 하려고 그래?”

그런 뒤 꺼내 놓는 질문은 하염없이 밝았다. 마치 어떤 얘기가 나올지 전혀 짐작도 못 하는 사람처럼.

그럴수록 초조해지는 건 나봄이었다.

눈치 빠른 그라면 어느 정도 예상은 할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차준의 태도는 그녀를 더욱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라면 어제 밤새도록 다잡고 다잡았으니, 그녀는 준비해 둔 매정한 얘기를 지체 없이 꺼내 놓기로 했다.

“우리…… 다시 시작하는 건 안 될 것 같아요.”

잔뜩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에 비해 담담한 눈빛.

차준의 눈꼬리가 잠시 굳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웃음기를 되찾은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이유라면 간단하다. 차준에게는 좀 더 아픈 진실이겠지만.

“제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아요.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자신도 없구요.”

“…….”

“오랜 시간 고민해 보고 내린 결정이에요.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쿵―

그녀가 내뱉은 그 한 마디는 차준의 심장을 밑바닥까지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 고통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차준은 호흡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채,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잘할게.”

구차한 매달림이었다. 차준을 바라보는 나봄의 눈동자가 옅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본부장님…….”

“그때로 돌아갈 수 있게 내가 너한테 최선을 다할게.”

“…….”

“니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10년 전처럼 널 두고 떠나는 일은 없을 거야.”

“…….”

“날 믿어 줘, 제발.”

차준은 믿어 달라 말했으나 이건 신뢰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매달릴수록 마음만 무거워지는 나봄은 그를 향한 감정이 확실히 사랑은 아님을 실감하는 중이다.

나봄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고, 이내 단호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전 지금 뭘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대답해드리는 거예요.”

“나봄아…….”

“본부장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거.”

과거, 과거…… 그 빌어먹을 놈의 과거.

“우리의 행복했던 과거는…… 전부 추억으로만 남겨 놔요.”

나는 그곳에서 아직까지 떠나질 못하고 있는데. 나에게는 여전히 그때가 전부인데.

왜 자꾸 다들 떠나보내야 한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돌아갈 현실이 없는 차준은 그 말이 미치도록 서럽다.

더 이상 그녀가 주는 고통을 견딜 수 없었던 차준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아 버리기로 했다.

“너무 조급하게…….”

하지만 한 마디를 제대로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이어 낸 말은 거부할 수 없이 달콤했다.

“본부장님은 제가 절대 잊지 못할 첫사랑이었어요. 저는 그때 본부장님을 정말 제 모든 걸 다 바쳐 사랑했어요.”

그건 그녀의 사랑을 받은 차준이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가 마음만 열어 준다면 다시 예전처럼 사랑하는 사이가 될 자신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란 단어에 비해 무척이나 쓸쓸한 눈빛을 띠고 있던 나봄은 이내 아픈 고백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남아 있는 마음이 없어요. 그러니까 지나간 인연은 이대로 가슴에 묻어 두고…….”

“…….”

“앞으로 나아가요, 우리.”

제발.

나를 떠나겠다는 말만큼은 제발…….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녀를 향해 들어 올려진 차준의 시선은 폐허처럼 황폐했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나봄의 눈동자는 미안한 기색만 가득할 뿐, 조금도 흔들리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붙잡아 보고 싶어도 그녀에게선 그럴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차준은 입술 새로 흐리디흐린 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의 혀끝에 맺힌 말은 마음 약한 그녀를 흔들 수 있을 법한 애원이었다.

그녀는 사랑보단 동정심을 따르는 사람이니까.

내가 그 남자보다 더 불쌍해지면 돼. 그럼 다시 나를 바라봐 줄 거야.

마음을 정한 차준은 오늘 이 시간 그녀의 앞에서 마음껏 무너져 내리기로 했다.

타인의 앞에서 나약함을 드러내는 건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으나, 이곳이 스스로를 가둬 놓은 캄캄한 방이라고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차준은 떨리는 시선을 들어 올렸고, 똑바로 나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엾은 목소리를 흘려보내려던 그때.

“본부장님…….”

이미 동정이 가득한 그녀의 눈빛이 먼저 그에게로 와 닿았다.

그걸 알아채 버린 그 순간, 어째서 숨이 턱 막히고 오기가 생겨나는 건지.

“아…….”

“…….”

“그러니까, 나봄아…….”

무너진 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는커녕, 어떻게든 그녀가 발견하지 못하도록 숨겨 버리고만 싶다. 건네줬던 동정심마저 거두어 갈 만큼 겉으로라도 완벽해 보이고 싶다.

그래야 나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망가져 버렸는지 내보이지 않아도 되잖아.

한동안 멈춰 있던 차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너의 마음은 잘 알았어.”

그런 뒤 꺼내 놓는 대답은 그의 진심과 딱 반대되는 말이었다.

그건 스스로를 갉아먹는 거짓말이었으나 차준은 뒤따르는 고통조차 무시한 채 계속 부드러운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내가 일방적으로 고백해서 정말 많이 난처했겠다. 넌 아쉬운 소리도 잘 못하는 성격인데…….”

“…….”

“솔직하게 대답해 줘서 고마워. 쉽진 않겠지만 나도 내 마음을 정리해 볼게.”

그 말을 끝으로.

웃어, 라고 스스로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웃는 법을 잊어버려서, 차준은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보려 했다.

그런데도 미소는 지어지지 않았다. 새까만 절망이 벌써부터 낯빛에 스며든 모양이다.

차준은 하는 수 없이 낚시 바늘에 입술 끝이 꿰어지는 상상을 했다.

그 상태로 누가 잡아당긴다고 생각하니 웃는 얼굴과 비슷한 표정이 완성되었다.

“정말…… 괜찮아요?”

그리 되묻는 그녀의 눈엔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차준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렇게 멀쩡한 척 연기를 하자 이번엔 꽉 조여드는 숨통이 말썽이었다.

그는 혹시나 상상 속 낚싯줄이 끊어져 버릴까 싶어, 먼저 자리를 뜨기로 했다.

“난 병문안을 가 봐야 돼서 먼저 일어나 볼게.”

물론 그 약속은 아직 몇 시간이나 남았지만.

”스케줄이 하도 빠듯해서 점심 식사도 같이 못 하네. 그래도 본사는 또 올 거니까, 그렇지?”

“아, 네…….”

“그때는 여유롭게 밥이나 먹자. 연인이 아니더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평소처럼 너스레를 떠는 그는 나봄의 눈에 정말 멀쩡해 보였다. 덕분에 한결 마음을 놓은 나봄은 그를 따라 가벼운 미소를 지어냈다.

“그래요, 본부장님.”

그녀의 대답을 들은 차준이 한 번 더 깊은 눈웃음을 건넸다.

이내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은 평소처럼 여유롭고 태연했다. 그가 그녀의 얘길 받아들일 수나 있을까 걱정했던 지난밤이 부질없게 느껴질 만큼.

“하아…….”

나봄은 차준이 온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짧은 한숨을 흘려보냈다.

미뤄 왔던 어려운 숙제를 겨우 끝낸 것 같은 지금, 속 시원하다고 하기엔 마음이 무거웠고 안타깝다고 하기엔 후련했다.

그래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할지 혼란스러운 이 순간.

‘쉬고 싶어.’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불현듯 떠오르는 건 태오의 얼굴이었다.

입가에 어린 미소와 달리 불안하게 떨리던 차준의 눈빛이 걱정스러워진 그녀는, 사나운 이목구비가 무색할 정도로 순수한 태오의 미소가 문득 보고 싶어졌다.

* * *

[빅뉴스! 이따 술 먹으면서 얘기해 줄게! 물론 너한테는 좋은 소식이 아니겠지만 꼭 알아야 할 것 같아서!]

횡설수설거리는 유리의 문자에 태오가 미간을 좁혔다.

업무 중에 쓸데없는 일로 귀찮게 하는 걸 제일 싫어하는 태오는 답장으로 유리에게 짜증 섞인 대꾸를 보낼까 하다가 관두었다.

“또 무슨 쓸데없는 가십거리 하나 물어 왔나 보네.”

오늘따라 일이 잔뜩 밀려 있는 태오는 그냥 유리를 무시해 버리기로 했다. 수다스러운 그녀는 바쁘면 바쁠수록 피해가야 하는 상대였다.

태오는 휴대폰을 멀찍이 떨어트려 놓고 다시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내가 어디까지 했더라…….”

살짝 흐트러진 정신을 끌어모으기가 무섭게 긴 진동이 울렸다.

유리의 전화일 거라 여긴 태오는 진동음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보고서를 소리 내어 읽었다.

“내구성은 기존 제품보다 강화되었으며 디자인 역시 전 연령을 아우르도록……”

지이이잉― 지이이잉―

“아우르도록……”

지이이잉― 지이이잉―

“아, 이게 진짜.”

쉽게 끊길 줄 모르는 전화는 태오의 신경을 제대로 건드렸다.

결국 성질이 제대로 난 태오는,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에 고정시킨 채 손만 뻗어 휴대폰을 꺼 버렸다.

이로써 업무에 관한 연락까지 못 받게 생겼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 이 보고서 한 시간 만에 다 끝내고 보내 줘야 한단 말이야.

“내구성은 기존 제품보다 강화되었으며, 디자인 역시 전 연령을 아우르도록 개선되었다.”

태오는 머리를 쥐어 싸맨 채 쓰고 있던 문장을 또 한 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자꾸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문장은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선점은 조금 더 세련된 문장으로 표현하고 싶은데…….

“개선되었다 말고 다른 단어 뭐 없나.”

작문에 취약한 머리를 힘겹게 굴리며 고민하고 있던 그때.

똑똑똑―

이번엔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재차 두드렸다.

방문객이 본사로 간 유리일 리는 없었지만 계속되는 방해 자체가 짜증났던 태오는 성질껏 대답했다.

“아, 또 누굽니까. 바빠 죽겠는데.”

그러자 잠깐 조용해지나 싶던 문은 머지않아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미안해. 점심시간인 줄 알고 왔는데 바빴구나!”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을 사무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한나…… 봄?”

어떤 스케줄도 없이 찾아온 그녀를 본 태오의 눈동자가 기분 좋게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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