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우리는 여전히 과거에 갇혀 있다
2017.10.06.
“이제 내가 말할 차례인데…….”
“…….”
“니가 먼저 말 깠으니까 나도 깐다. 불만 있어도 닥치고 들어.”
태오의 선전포고가 거침없이 이어졌다.
서슬 퍼런 그의 독기를 받은 차준은 노골적으로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그보다 더 사나운 눈빛을 띤 채, 태오는 웃음기 가신 입술을 떼어 냈다.
“예전에 그랬었지. 싫다는 사람 붙잡고 매달리지 말라고.”
“…….”
“말이 좋아 짝사랑이지, 질병 수준의 망상이라며.”
그 얘길 했던 때는 차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나봄의 눈에 띄기 위해 온갖 발악을 서슴지 않던 태오에게 분명 단호한 말투로 그리 말했었다.
“그때 그렇게나 퍼부어 놓고서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 불편해하는 사람한테 매달리는 거, 충분히 민폐란 생각 안 들어?”
그렇다고 해서 태오의 다그침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 애는 나를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 사이에 생겨난 오랜 공백을 의식해 예전처럼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차준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태오를 마주한 채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너랑 나를 동급 취급 하지 마. 난 너처럼 아무 의미도 되지 못한 하찮은 존재가 아니야.”
“하찮은 존재?”
“그래, 하찮은 존재. 오늘 이 시간부로 갑자기 끊어진다 해도 전혀 상관없을 그저 그런 인연.”
그리 단언하는 차준에게 태오는 헛웃음을 쳤다.
예전 같았으면 충분히 휘둘리고도 남았을 말이었으나 오늘만큼은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이 순간 그의 여린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 주는 건 요즘 들어 그녀가 곧잘 지어 보이는 밝은 미소였다.
한때 나봄의 불편한 상대였던 태오는 그녀가 도망치고 싶을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입꼬리는 딱딱하게 굳고, 마주한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진심을 숨기지 못하는 나봄은 그를 불편해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밝게 웃어 준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 애가 다른 누구한테 너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어?”
아니, 한 번도 없었지. 얼마 전 만났던 그녀의 친구도 나에 대해 처음 듣는 눈치였으니까.
“널 전 남자친구라고 인정한 적이라도 있어?”
그건 가당치도 않은 바람이야. 꼴랑 2주 만에 차여 버린 난 연애 상대로 치지도 않았을걸.
“전혀 없잖아.”
“…….”
“넌 딱 그 정도 의미밖에 안 됐던 거야.”
맞아. 난 딱 그 정도 의미밖에 안 됐어.
그런 나이기에…….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이 난다고 하던데, 너 때문에 큰일이야.’
늘 닫혀 있던 그 사람의 마음이 처음으로 열렸던 순간을 알아.
‘어차피 다 늦었다면서 왜 말하는 거야?’
‘내가 지금 뭐라고 대답해 주길 바라는 건데?’
이젠 더 이상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 사람의 진심을 알아.
“선우차준.”
차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태오가 낮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순간 차준의 눈에 어린 한기는 한층 더 거세졌다.
태오는 그럴수록 눈빛을 강렬하게 불태우며 단호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넌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지.”
“…….”
“난 지금 현실을 나아가기에도 바빠.”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내뱉어지는 그의 말은 차준의 정곡을 찔렀다. 단번에 그의 의도를 파악한 차준은 적의를 띤 채 태오를 노려보았다.
“그 입 당장……”
“니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든,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였든 그게 과거형인 이상 나한테는 개뿔 아무 상관도 없어.”
“뭐?”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을 봐.”
“…….”
“정말 주제 파악 똑바로 하고 꺼져 줘야 할 사람이 누군지, 니 눈에도 똑똑히 보일걸.”
말을 마친 태오는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을 움켜쥐었다. 그러고선 단숨에 머리가 찡해지도록 꿀꺽꿀꺽 들이켜기 시작했다.
커피는 써디썼지만 가슴 속은 시원해진다. 꽉 막혀 있던 숨통이 이제야 뻥 뚫리는 느낌이다.
쾅―!
머지않아 다 비운 잔을 요란스레 내려놓은 태오는 소매 끝으로 입가를 쓰윽 닦아 냈다.
“계급장은 내일부터 붙일 거니까 오늘은 어지간해선 건드리지 마라.”
살벌한 인사를 끝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버리는 태오의 표정은 하염없이 후련했다. 곧이어 떨어지는 발걸음엔 지금껏 보여 왔던 서러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
그런 그를 바라보는 차준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확신을 가진 자만이 내비칠 수 있는 자신감. 그건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준이 쥐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이 모두 그만의 헛된 망상이었던 듯, 나봄을 향한 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새까만 불안만이 그를 집어삼킨다.
오늘 차준을 정말 비참하게 만들었던 건 나봄의 불안한 시선도, 태오의 무례한 언행도 아니었다.
애 닳도록 품고 있던 과거가 한낱 쓰레기로 치부되어 버리던 순간.
차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뻔했고, 그건 본인에게 고스란히 상처로 남았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진실이 강제로 머릿속에 구겨 넣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기분 더럽게도.
* * *
한봄 도어락 근처 해장국 집.
“죄송해요. 모실 곳이 이런 데밖에 없어서…….”
태준과 마주 보고 앉은 나봄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제 앞에 놓인 순댓국에 간을 맞추고 있던 태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 한식을 제일 좋아해요.”
“그래도…….”
“게다가 원래 휠체어가 편히 들어갈 만한 가게는 거의 없어요. 이렇게 널찍하고 계단 없는 곳 찾느라 고생 많았어요, 나봄 씨.”
말이 끝날 때마다 살가운 눈웃음을 덧붙이는 건 차준도 가지고 있는 버릇이었다.
태준의 얼굴은 차준보다 성숙한 느낌이지만 웃을 때 장난스럽게 휘어지는 눈꼬리는 둘이 형제라는 걸 증명해 주듯 꼭 닮아 있다. 그래서 나봄은 그가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다.
“본부장님이랑 정말 많이 닮으셨어요.”
나봄은 웃음기 어린 얼굴로 태준을 바라보며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태준의 눈꼬리는 한층 더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래 보여요?”
“네, 지나가다가 우연히 만나도 본부장님 형이라는 걸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예요.”
“그것참 다행이네요. 차준이 정말 잘생겼잖아요.”
그리 말하는 태준은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아무래도 그는 차준을 몹시 아끼는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한 번도 말해 준 적 없던 차준도 형에 대해서만큼은 종종 얘기해 주곤 했었지.
물론 10년도 더 된 일이긴 하지만.
“그런데 저한테는 무슨 일로…….”
나봄은 조심스레 본론을 물었다.
그러자 태준은 물 한 모금을 들이켜더니 이미 예상하고 있던 대답을 꺼내 놓았다.
“차준이 일로 찾아왔어요.”
“아, 그건 알고 있어요.”
“나봄 씨가…… 우리 차준이를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뒤에 이어진 간절한 한 마디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나봄은 오늘까지만 해도 멀쩡해 보였던 차준을 떠올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본부장님한테 무슨 일이 생기셨나요?”
“무슨 일이 생긴 지는 좀 오래됐어요. 차준이는 보기보다 상처가 많은 녀석이거든요.”
“…….”
“나봄 씨한테 그걸 드러냈는지 잘 숨기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그 애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운 상태예요. 그래서 저는 나봄 씨가 차준이를 꼭 붙잡아 줬으면 좋겠어요.”
절절한 태준의 눈빛은 이 부탁이 얼마나 진심인지를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도움이 필요한 건지 짐작할 수도 없었던 나봄은 그저 불안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그래서 조금 더 자세히 물으니, 태준은 거절하기 힘든 동의를 구했다.
“들어 줄 수 있겠어요?”
“…….”
“조금 무거운 얘기인데…….”
나봄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태준은 흔들리는 눈빛을 정돈하고,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던 비밀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사실…… 제 원래 이름은 강태준이에요. 차준이랑은 아버지가 다르죠.”
“아버지가 다르다니요?”
“제 친아버지는 어머니가 살면서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제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그 뒤에 회장님의 성화를 못 이기고 곧바로 재혼하셨구요.”
“…….”
“그때부터 제 이름은 선우태준이 됐어요. 회장님이 새아버지 성을 따라야지만 저를 호적에 넣어 주신다고 하셨거든요.”
“아…….”
그의 말을 들은 나봄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나봄은 이런 은밀한 가정사를 자신이 들어도 되나 싶었으나, 태준은 난처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알아챘으면서도 고집스럽게 뒷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어머니께선 선우라는 성이 싫으셨나 봐요.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절 부르실 때 성을 붙이신 적이 없어요.”
“…….”
“그땐 그저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철이 들 무렵부터 깨달았어요. 어머니는 저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고 있는 거라는걸.”
“…….”
“여기까지가 지금도 강태준으로서 사랑받고 있는 저의 이야기.”
그리 말하는 태준의 표정은 무척이나 씁쓸했다.
그에 비해 처연한 목소리는 그가 얼마나 오래토록 인고의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케 할 뿐이었다.
하지만 슬픔을 애써 미소로 덮어 낸 그는 부드러운 음성을 이어 나갔다.
“차준이는 새아버지하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에요. 처음 그 애가 생긴 걸 아셨을 때, 어머니는 한동안 식음까지 전폐하셨어요.”
“아이를 가졌는데 왜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잊지도 못한 상태에서 강제적으로 진행된 결혼이었고, 무리하게 가진 아이었으니까요. 그 애에게 모성애를 느끼기엔 주변 상황들이 좋지 않았어요.”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에, 나봄은 차마 그녀를 탓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뒤따라온 태준의 고백은 그보다 더 잔혹하고 끔찍했다.
“심지어는 뱃속의 아이를 유산시키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계단에서 굴러떨어지신 적도 있어요. 하지만 차준이는 씩씩하게 이 세상에 태어났고…….”
“…….”
“어머니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방긋 웃는 그 아이를 내내 증오했어요. 그럴 이유가 없다는 걸 본인도 잘 알면서.”
그동안의 차준에게선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비극.
그걸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던 나봄은 언제나 웃는 얼굴만을 고집하던 차준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사람처럼 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견뎌 내야 했을지. 지금의 그녀로서는 감히 헤아릴 수도 없다.
“이런 얘기 듣기 힘드시죠?”
심란하게 가라앉은 나봄의 표정을 살핀 태준이 미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나봄은 그런 그를 향해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고,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놀라긴 했어요. 생각지도 못한 얘기라…….”
“남과 다름없는 우리 사이에 행복하지도 않은 가정사를 털어놓는 게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알아요.”
“…….”
“하지만 차준이는 분명 이런 얘길 하지 않았을 테니까…… 혼자 견디기만 하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스러워요.”
태준의 얼굴이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이제 보니 모두 차준을 향하고 있었다.
그제야 지금까지 들었던 모든 비극이 차준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깨달은 나봄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어머님과 차준 오빠의 관계는 아직도 좋진 않겠네요?”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어머니는 그 애를 거의 투명인간처럼 취급하셨죠.”
“아…….”
“처음엔 어머니한테만 외면당했던 차준이는 머지않아 회장님께 외면당하고, 그 다음엔 친아버지에게 외면당하고…… 결국 모두에게 버려지는 데까지는 채 10년도 걸리지 않았어요.”
“……네?”
뒤이어 흘러나온 대답은 나봄으로서는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차준의 어머니인 서 대표야 심신이 불안정해서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강압적으로 결혼을 밀어붙인 서 회장과 그의 친부는 차준을 외면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가족들은 왜 외면한 거예요?”
나봄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떨리는 눈빛을 정리한 태준은 이내 씁쓸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전부 저 때문이에요.”
“태준 씨 때문이요?”
“제가 그 애를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못할 밑바닥으로 떨어트렸으니까.”
그의 고개가 다시 들어 올려졌다. 일그러진 그의 시선은 쓰라린 고통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답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없었던 나봄은 숨죽인 채 덧붙여질 설명을 기다렸다.
“그 애한테는 제가 가장 나쁜 사람이었어요.”
“…….”
“그 애도 이걸 알고 있는 이상…… 저는 용서받지 못할 거예요. 절대로.”
그러나 재차 이어지는 고해성사는 여전히도 추상적이었다.
분명 그의 눈빛은 짐작하지도 못할 깊은 얘기를 담고 있는데, 꾹 닫혀 버리는 그의 입술은 아직 털어놓을 용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태준의 속내를 강제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나봄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들을 전부 묻어 두었다.
“차준 오빠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거예요.”
그런 뒤 그녀가 꺼내 놓는 위로는 과거의 차준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지친 기색 가득한 태준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그녀에게로 들어 올려졌다.
“……네?”
“제 기억 속 차준 오빠는 태준 씨를 참 좋아했거든요. 다른 식구들 얘기는 한 번도 안 했지만 형 자랑은 정말 많이 했어요.”
그리 말하는 나봄은 10년 전의 차준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섯 살 차이 나는 형이 있어.’
‘지금은 미국에서 유학 중인데, 이번 방학에 한국 놀러 오면 너한테도 소개시켜 줄게.’
태준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다 지어 보였던 미소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그가 얼마나 형을 아끼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집안 상황이 어떻든 간에, 태준 씨는 그 사람 곁에 있어 줬던 거죠?”
나봄은 확신 어린 질문을 흘려보냈다.
태준은 순간 두 눈동자를 일렁이는가 싶더니, 이내 테이블 위로 시선을 떨어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죠…….”
“…….”
“누가 뭐래도 내 동생이었으니까요.”
확실히, 그는 그 아이의 곁에 있었다. 동정할 수밖에 없는 그 아이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었다.
그 애틋함이 커지면 커질수록 솟구치는 자기혐오감에 짓눌려서, 결국엔 그 아이의 손마저 놓아 버리고 말았지만.
‘차준아. 무서워하지 마.’
‘형이 지켜 줄게.’
그래도 한때 그는 차준의 곁에 영원히 머무를 것처럼 남아 있었다.
“……나봄 씨.”
한동안 말이 없던 태준은 나봄의 이름을 힘주어 불렀다. 그런 뒤 그가 이어 내는 말은 처음 꺼내 놓았을 때보다 간절했다.
“제발 우리 차준이 곁에 있어 주세요.”
“…….”
“그 사람들이 그 애를 더 비참하게 무너트리지 못하도록…… 나봄 씨가 지켜 주세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뜨겁게 타들어 가는 그의 음성.
애타는 부탁을 건네받은 나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려 왔다.
그가 꺼내는 한 마디 한 마디는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무거워서, 어깨가 내려앉아 버릴 지경이었다.
나봄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고, 흐린 한숨을 내뱉었다.
“나봄 씨…….”
다시 한 번 와 닿은 태준의 눈동자는 절망을 닮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버릇처럼 입술만 꾹 깨물고 있을 뿐.
* * *
얼마 뒤에 열릴 창립 기념회.
태준은 그날이 걱정스럽다고 했다. 그는 참석하지 못할 곳에서 차준이 얼마나 난도질당하게 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날…… 나봄 씨가 곁에서 그 애를 붙잡아 줘요.’
태준은 좀 더 노골적으로 그녀에게 매달렸지만 나봄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건 순전히 대답하기도 전에 이어진 뒷말 때문이었다.
‘저는 차준이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람과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이제부터라도…… 제발…….’
그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람.
나는 그에게 그런 존재가 될 자신이 없었으니까.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달은 지는 꽤 오래됐다.
차준이 다시 시작해 보자고 제안했을 때에도, 애달픈 진심을 고백했을 때에도, 그녀의 심장은 예전처럼 기분 좋게 두근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질식할 것처럼 옥죄기만 했을 뿐.
하지만 그걸 순순히 인정해 버리기엔 그리워한 세월이 너무 아쉬워서, 확실히 밀어내지도 못하고 있던 지금까지의 나날들.
그동안 차준은 나로 인해 상처를 입었을까.
외면 받는 느낌이라면 누구보다 예민하게 알아차렸을 텐데, 받아 주지도 않을 거면서 거절도 못하는 나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었을까.
나봄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었던 이유를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그에게 반드시 해야 할 대답도 오늘에서야 결정 내릴 수 있었다.
“후우.”
짧은 한숨으로 심란한 마음을 정리한 나봄은 휴대폰을 들었다.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움직여 적어 낸 문장은 담담하고도 비장했다.
[차준 오빠.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어요. 이번 주 중으로 괜찮은 시간 알려 주세요.]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들기 시작했다.
낮에 태준에게 들었던 모든 얘기들이 비수처럼 박혀, 모질어지려는 그녀를 막아서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의 삶을 동정하는 만큼 단호하게, 위로해 주고 싶은 만큼 냉정하게.
나봄은 차준을 밀어낼 생각이다.
그래야 그에게 건네는 도움의 손길이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