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너를 위해 불쌍해질 수 있어
2017.09.29.
우드레일 본사 로비.
풀세트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차준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섰다.
그를 알아보는 직원들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하는 차준의 표정은 오늘따라 건조했다.
그런 그의 시선 끝에 한 사람이 걸려 들어왔다.
“프로젝트 총 회의 16층 세미나실에서 열리는 거 맞나요?”
“네, 맞습니다. 이쪽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주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프로젝트 총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본사에 찾아온 나봄이었다.
길지 않은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몸집에 비해 큰 가방을 어깨에 걸친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차준은 그녀를 단번에 알아봤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다가가지 못한 채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도 모자라 나봄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을 때까지 숨죽이고 있는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그림자가 되어 버렸다.
차마 그녀의 앞에 나타지 못하고 어두운 구석에 숨어 홀로 무너져 내렸던 그날 밤처럼.
생각해 보면 난 항상 그녀의 눈앞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었다.
잠시 등을 보이고 있던 순간에도 그녀의 시선은 내게서 떠나지를 않았고, 다시 찾아왔을 때에도 두 눈동자는 분명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너의 시선이 옮겨가 버린 건.
어째서 그 남자였을까.
분명 그는 너의 눈에 띄어 보려고 아무리 발악을 해도 관심조차 받을 수 없던 비참한 존재였잖아.
‘그럼 이제부터 누가 썸 언제부터 탔냐고 물어보면 오늘부터 탔다고 해.’
‘아…….’
‘안 그러면 나 삐진다.’
문득 그녀의 눈빛을 일렁이게 만들었던 그 남자가 떠올랐다.
그녀의 그런 표정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던 차준은 제 자리를 빼앗겨 버린 것 같은 기분에 참을 수 없이 절망스러워졌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나를 봐 달라고, 그 사람이 아닌 나를 사랑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은데. 마음이 약해서 너라면 끝내 뿌리치지 못할 것도 잘 아는데.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이유는…….
니가 사랑했던 나는 언제나 밝고 따듯하고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너의 첫사랑은 지금의 나로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던 완벽한 선우차준이었다.
아직 나봄에게 부서진 제 삶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차준은 서둘러 폐허가 되어 버린 마음을 정리했다.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 이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번 기획서 흥미롭게 봤어요. 앞으로도 수고해요.”
그리고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마다 기꺼이 상대해 주며, 완벽해 보이는 미소를 필사적으로 연습했다.
사람들의 시선에 평소와 같은 동경이 어려 있는 걸 보니, 무리해서 들어 올린 입꼬리는 다행히 보기에 어색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이대로라면 나봄도 그의 가슴에 깊이 팬 균열을 눈치채지 못할 터.
이제 남은 일은 그녀의 눈앞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선우차준이 되어 마음을 되가져 오는 것뿐이다.
“안녕하세요, 단 팀장님!”
“네, 오랜만입니다.”
“총 회의 때문에 오셨나요?”
“그렇죠, 뭐.”
때마침, 익숙하지만 불편한 음성이 들려왔다.
덕분에 차준의 근처에 있던 직원들의 시선은 그 남자에게로 옮겨 갔으나.
“……그럼 전 이만.”
차준은 끝내 돌아보지 않고 두 발을 재촉했다.
겨우 붙잡아 놓은 세계가 다시 위태롭게 흔들릴세라, 발목이 뻐근해질 만큼 무리해서 힘을 준 발걸음이었다.
* * *
우드레일 본사에서 이뤄지는 ‘Lily’ 프로젝트 총 회의 전.
낯선 이들 틈에서 잔뜩 긴장한 그녀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회의라고 해 봤자 그녀가 할 일은 가만히 내용을 듣는 것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본사에서 이뤄지는 회의는 언제나 중압감이 컸다.
“시작하려면 몇 분 남았는데 커피나 뽑아 올까…….”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기 전, 잠깐 밖에서 숨이라도 돌리고 올까 싶던 그때.
“나봄 씨, 일찍 오셨네요.”
부드럽고도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성의 주인공을 단번에 알아차린 나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옆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앞에서 예쁘게 웃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선우차준이었다.
요즘 따라 잘못한 것도 없이 미안해지고, 그래서 웃는 얼굴로 마주하기 어려운 사람.
“아…… 본부장님.”
나봄은 얼어붙은 와중에도 겨우 그에게 아는 체를 했다.
그러자 차준은 입가에 미소를 더욱 퍼트리며 밝은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주말엔 잘 쉬었어요?”
“네, 본부장님은요?”
“나도 뭐 그럭저럭. 주말에 나봄 씨한테 데이트 신청이나 할까, 하다가 참았어요.”
데이트 신청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 놓는 차준은 오늘도 여전히 천진난만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은 나봄의 눈빛은 잔뜩 움츠러든 채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근처 직원들이 이런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눈치채 버렸을까 싶어서였다.
다행히 이쪽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는 걸 확인한 나봄은 어색한 웃음으로 대화를 수습해 보려 했다.
“하하, 농담도 참…….”
그녀가 그어 두는 선은 차준의 눈에도 또렷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목소리를 한 톤 더 높여 또렷하게 대답했다.
“농담이 아닌 건 니가 제일 잘 알잖아.”
“네, 네?”
“회사라고 해서 굳이 숨길 필요 있어?”
원래 회사에서는 조금 더 공적으로 대하던 사람 아니었나.
그런 의문이 나봄의 뇌리를 스쳐 지나갈 때쯤.
드륵―
나봄의 바로 옆자리에서 의자 빼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기척에 놀란 고개를 돌리니, 가죽 백팩부터 의자에 척 내려놓은 태오가 나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난히 딱딱하게 굳은 입꼬리와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
아무래도 그는 차준의 말을 다 들어 버린 모양이다. 가방끈을 꽉 쥐고 있는 그의 손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 태오에게 차준은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단 팀장님. 우리 되게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안녕하십니까.”
그 인사에 억지로 화답하는 태오의 목소리는 한없이 건조했다.
차준은 그럴수록 더욱 여유로운 눈웃음을 지어 보였고, 이내 태오를 자극해 보려는 의도가 분명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단 팀장님은 끼어드는 걸 참 좋아하시나 봐요.”
“…….”
“내가 나봄 씨랑 얘기하는 게 아니꼬운 거예요? 아니면 불안한 거예요?”
그 말에 더욱 난처해지는 건 나봄이었다.
본의 아니게 기 싸움의 화근이 되어 버린 지금, 그녀가 가장 걱정하고 있는 건 태오의 인내심이었다. 이미 심기가 불편할 대로 불편해진 태오는 이쯤에서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도 남을 테니.
그걸 아는 나봄은 어떻게든 상황을 진정시켜 보려 애를 썼다.
“그나저나 오늘 날씨가……”
하지만 다른 화제를 꺼내 놓기가 무섭게.
“둘 다입니다.”
담담한 태오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자극했다.
“태, 태오야…….”
뜻밖의 솔직한 대답을 들은 나봄은 곧바로 태오에게 눈길을 두었다.
하지만 그 순간, 차준의 시선은 태오가 아닌 나봄을 향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에게서 돌아서 버린 눈빛. 다른 사람으로 인해 요동치는 심장박동.
그 모든 걸 한 번 더 확인사살 당하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가슴엔 욱신거리는 통증이 일고, 새까만 절망이 다시 그를 집어삼킨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지금 막 발견된 새로운 희망 덕분이었다.
“그래서 자꾸 눈치 없는 새끼처럼 끼어드는 거니까…….”
“…….”
“앞으로도 계속 양해 부탁드립니다.”
니가 한 마디 한 마디 이어 나갈 때마다 일렁이는 그녀의 눈빛은 설렘이 아니다.
한때 그녀의 모든 것이었던 내가 똑똑히 기억하건대, 지금 그녀가 너에게 느끼는 감정은 나를 향했던 감정과 확실히 다르다.
아아, 이제 알겠다. 그녀가 왜 너에게 휘둘리는지.
어떤 존재감도 없었던 니가 어떻게 그녀의 머릿속을 휘저어 놓았는지.
‘그런 식이라면…… 나도 자신 있어.’
차준은 굳어 버릴 뻔했던 입꼬리를 다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을 이었다.
“나봄이랑 중요하게 할 말이 있었는데…… 그건 나중에 날 잡아서 해야겠네요. 단 팀장님이 못 끼어드실 때.”
그 한 마디에 휘둘리는 태오의 눈빛은 차준에게도, 나봄에게도 또렷이 보였다.
하지만 시선을 내리깔지는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는 자신의 나약한 감정이 밖으로 다 새어 나와 버린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가지고 있는 무기는 오직 동정심뿐인 주제에.
차준은 그런 그에게 마지막으로 보내는 눈웃음만을 남겨 두고, 이내 차분한 걸음을 떼어 냈다. 돌아서는 뒷모습엔 씁쓸함이 배어 있었지만 일부러 수습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지친 걸음으로 쓰린 숨을 내쉬며, 차준은 그녀의 시선을 자극한다.
이렇게 해야 눈길을 주는 그녀라는 걸 깨달아 버린 이상, 더는 완벽한 모습만 고집하진 않을 생각이다.
물론 산산이 부서진 나의 삶은 나를 나약하게 만들고, 나는 그들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게 죽기보다 싫지만…….
하지만 설렘보다 너를 더 흔들리게 하는 것이 동정이라면, 여기서 더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져도 좋아.
나는 너를 위해 얼마든지 더 불쌍해질 수 있어.
* * *
‘그 꼴로 살고 싶냐.’
‘차라리 뒤져 버리지 그랬어.’
그가 내뱉은 말들이 마음에 서러운 상처를 낸다.
‘……나중에 형이 꼭 놀러 갈게.’
간절히 매달려 봐도 돌아오는 건 끝내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벌써 몇 년이나 반복된 고통의 굴레.
그 아이는 내게 무리해서 상처를 내고 나는 무리해서 그 상처를 모두 받는다. 이제 더 이상 형제라고 부를 수도 없는 우리 관계는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할지도 모를 만큼 뒤틀려 있다.
‘형! 언제 돌아온 거야? 연락은 왜 안 했어!’
‘귀국하자마자 바로 너희 집부터 들렀다.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어?’
‘하하, 당연하지. 이제 내 키가 형 뛰어넘으려고 하잖아.’
분명 우리에게도 행복한 시절쯤은 있었는데…….
“후우…….”
차준을 떠올리자, 태준에게서는 버릇처럼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가 던진 모진 말들보다, 그가 건넨 매정한 눈길보다, 태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든 건 전보다 더 불안정해 보이는 차준의 상태였다.
지금은 눈만 마주쳐도 피하려 들지만, 사실 처음부터 이 정도로 적대감이 심했던 건 아니었다.
‘사실…… 스스로 떨어진 거야.’
‘스스로 떨어지다니? 뭐가?’
‘7년 전 그날…… 사고가 아니라 전부 끝내 버리고 싶어서 떨어진 거였다고. 죽을 생각으로.’
추락 사고의 진실을 알았을 때.
‘그럼…… 왜 그때 말하지 않았어?’
차준은 혼란 가득한 눈빛으로 대답할 면목조차 없는 질문을 꺼내 놓더니.
‘그렇게 많이 힘들면…… 나한테 기대지 그랬어.’
결국 애써 씁쓸하게 웃으며 다정한 대답을 흘려보냈다.
이내 고개를 떨구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 아이는 어떻게든 버텨 내려 했다. 그 뒤로 한동안은 무리해서 예전처럼 대해 보려고도 노력했었다.
그러다 더는 웃는 낯으로 버티기가 힘들었는지, 점차 웃음기를 잃어 가는가 싶더니.
‘차준아, 감기 걸렸었다면서. 아픈 건 좀 어때?’
‘…….’
‘아직도 열이 많이 나?’
‘…….’
‘약은 제대로 먹었던 거야?’
‘…….’
어느 날부터는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었다.
몇 번이나 같은 안부를 물어봐도 아주 한참 머뭇거리고 나서야 겨우.
‘……응. 괜찮아. 걱정 마, 형.’
그뿐이었다.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녀석이 무리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눈을 감고 귀를 닫고, 그렇게 서로의 상처가 곪아 가도록 방치해 둔 게 몇 년.
“차준아…….”
태준은 몇 번을 불러도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는 그 이름을 한 번 더 힘주어 내뱉었다.
그러고서 긴 눈꺼풀을 내리감으니, 앳된 얼굴의 동생이 티 없이 해맑은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형! 왜 이제야 왔어!’
이젠 이렇게밖에 볼 수 없는 동생의 환한 모습.
그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며 애써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던 그때.
똑똑―
깊어지는 고민에 잡아먹히기 직전,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태준은 착잡한 눈빛을 정돈하고 나직이 대답했다.
“네, 들어오세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비서실장이었다. 사무적인 표정의 그는 태준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추었고, 이내 달갑지만은 않은 소식 하나를 전달했다.
“회장님께서 완전히 의식을 되찾으셨습니다.”
“네, 그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리고 회장님께선 돌아오는 창립 기념행사 때, 본가 사람들 중에서 오직 선우차준 이사님만 참석하기를 원하십니다.”
“저를 거부하시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어머니까지도요?”
“네.”
김 실장의 사무적인 보고에, 태준은 드러내 놓고 비참해질 수도 없었다.
어차피 그런 자리야 이 몸을 이끌고 참석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문제는 서재균 회장의 거센 적대감이었다.
의식을 찾았으니 기본적인 재활 치료가 끝나는 대로 이 숨 막히는 저택에 돌아오겠구나.
그런 뒤에 그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나를 이 골방에서조차 끌어내는 것이겠지.
태준은 흔들리던 시선을 애써 다잡았다. 그리고 흐린 목소리로 물었다.
“차준이 반응은 어때요?”
“어떤 반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안에서 그 애가 제정신으로 버텨 줄 것 같나요?”
그 말에 김 실장은 얼마 전 경호실장으로부터 보고 받았던 내용을 떠올렸다.
본가에 오자마자 태준을 보고는 곧바로 뒤돌아 나가 버렸다는 소식은 그에게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심리적인 문제가 있음을 뜻했다.
상황이 이렇기에 비서실장은 더욱 확신해서 대답할 수 있었다.
“만일 창립 기념행사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분도 노련하게 잘 감당해 내실 겁니다.”
“…….”
“하지만 서 대표님 성격으로 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리 없지요. 서 대표님은 분명 행사장을 찾아가실 거고, 그때 분명 도련님의 얘기를 꺼내실 겁니다.”
“…….”
“그 순간에 선우차준 이사님은 또 다시 무너지시겠죠. 도련님은 선우차준 이사님의 약점이니까요.”
매정하지만 모든 상황을 알고 있기에 정확하게 내릴 수 있는 판단.
“하아…….”
그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태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들어 더욱 불안정해진 차준의 상태로는 자신의 존재로 그를 흔들려는 서 대표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아아, 선우차준이 수작을 부려 놓은 모양이네.’
‘이유야 뻔하지 않겠어? 한나봄 때문이겠지.’
이런 상황에서 떠오르는 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단 한 사람이었다.
비록 한 번밖에 마주친 적이 없지만, 차준과 어떤 관계인지도 정확치 않지만.
‘……10년 전 첫사랑에 목매달고 있는 꼴도 한심스럽기 그지없어.’
그래도 당신밖에는 없다. 그 애가 살기 위해 붙잡고 있는 끈은.
“김 실장님.”
잠시 고민하던 태준은 다시 고개를 들어 김 실장을 불렀다. 그리고 이어 내는 말은 김 실장조차 짐작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한봄 도어락에 찾아가야겠어요.”
“한봄…… 도어락 말씀이십니까?”
“네, 물론 서 대표님께는 말씀 드리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려요.”
그 부탁은 서 대표의 밑에서 일하는 김 실장으로서는 무리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태준의 고집 또한 만만치 않다는 걸 알고 있는 김 실장은 일단 고개부터 끄덕이며 대답했다.
“며칠 내로 데려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수락을 들은 태준은 곧바로 드레스룸 쪽으로 휠체어를 움직이며 재촉했다.
“아니요, 지금 당장요.”
그리 말하는 태준의 눈빛은 오랜만에 선명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저 숨이 붙어 있기에 사는 듯했던 그에게 꼭 하고 싶은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