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남친이 내게 반했다-43화 (43/104)

43. 오늘부터 썸 탔다고 해.

2017.09.25.

“단태오라고 했겠다…….”

태오의 이름을 입에 담은 소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선우차준 이후로 남자와는 담 쌓은 것처럼 살던 한나봄.

그런 그녀 곁에 나타난 의문에 남자 단태오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봄을 바라보는 눈빛이 어찌나 애절하던지. 그의 순애보를 먼저 눈치채 버린 소라는 온몸이 간지러워 죽을 뻔했다.

나봄의 반응을 보면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동안 나에게는 말 한 마디 안 했던 걸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두 사람을 노래방에 놔두고 먼저 나와 버린 소라는 뒷얘기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봄 성격상 며칠 내에 알아서 결과 보고를 해 주겠지만, 그 며칠도 참기 힘들었던 소라는 곧바로 휴대폰을 찾아들었다.

“한나봄 이 기지배, 나한테 비밀이나 만들고 말이야.”

소라는 툴툴거리면서도 흥미 가득한 눈으로 나봄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응, 소라야!

유난히 상기되어 있는 나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라는 반가움 가득한 첫 마디를 씩씩하게 내뱉었다.

“야! 이 언니가 눈치껏 자리를 피해 줬으면 이렇다 할 경과보고가 있어야지!”

―으, 응?

“단태오한테 고백 받았지! 그치! 사귀기로 했어? 응?”

―소, 소라야. 목소리를 조금만……

“썸은 대체 언제부터 탄 거야!”

―그, 그런 거 아니야!

나봄은 당황한 듯 보였으나 소라는 쉽사리 흥분기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제 단태오가 니 남자친구야?!”

그래서 좀 더 소리를 높여 우렁차게 외쳐 버린 질문.

뚝―

그와 동시에 나봄과의 전화는 맥없이 끊겨 버렸다.

처음엔 실수로 끊어진 거라 생각하고 다시 전화를 걸어 봤지만 이번엔 아예 받지조차 않았다.

“엥? 뭐야, 대체.”

소라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나봄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청 당황하는 걸 보면 분명 뭔 일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 알아내려다 보니 상상의 나래만 자꾸 커진다. 이리 수상쩍게 구는 걸 보니 순순히 말하기 부끄러운 짓이라도 저지른 것 같다.

[뭐야! 이따 전화해서 제대로 상황보고 해 줘! 궁금해 죽겠으니까!]

나봄에게 호기심 가득한 메시지를 보내 놓은 소라는 제 방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에휴, 나만 빼고 다 연애모드구만.”

한숨과 함께 신세 한탄을 하면서도 싱글벙글한 소라의 표정.

사실 그녀는 지금 첫 남자에서 벗어난 나봄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중이다.

아무리 선우차준이 완벽한 벤츠남이었다고는 해도, 딱 한 번뿐인 인생에 한 남자만 보고 사는 건 재미없잖아.

.

.

.

한편, 통화 소리가 다 들릴 만큼 고요한 태오의 차 안.

“아…… 저기…….”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고 있던 나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쉽사리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푹 숙이니.

“나……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태오가 나봄의 쪽으로 시선도 두지 못한 채 차마 그녀가 묻지도 못했던 질문에 대해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는 소라와의 통화 내용을 다 들어 버린 모양이다.

“그, 그랬구나.”

“…….”

“…….”

“좀 춥네…….”

어떡해! 단태오가 엄청 어색해하고 있어!

나봄은 아주 조심스러운 눈길로 운전석에 앉아 있는 태오를 훔쳐봤다. 차량 에어컨을 조절하는 그의 얼굴은 한눈에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 모습에 반응하기 시작하는 건 나봄의 심장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태오를 의식하기 시작하자마자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 소리는 그의 귀에도 들어갈 것 같아 걱정스럽다.

그래서 괜히 손끝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그때.

“있잖아, 한나봄.”

고요하게 흘러나온 태오의 목소리가 나봄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잠시 끊어진 그의 뒷말을 기다리며 조금 더 그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아니다.”

하지만 태오는 잠시 인상을 찡그리는가 싶더니 이내 하려던 말 자체를 멈춰 버렸다. 꾹 다문 입술은 금세 다시 열릴 것 같지도 않았다.

‘이렇게 대화가 끊어진다면 분위기만 더 어색해질 것 같은데…….’

나봄은 무슨 말이라도 해 보기 위해 괜찮은 대화거리를 생각해 내려 애썼다.

머리를 한참 굴려 본 결과, 그가 흥미로워할 만한 주제는 딱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걸 찾아낸 나봄은 한결 편안해진 미소와 함께 말문을 열었다.

“저기, 태오야. ‘Lily’ 라인에 추가된 가구 제품들 중에서 필요한 추가 시안들이 뭔지 정리해 봤거든?”

“어.”

“딱히 잠금장치가 쓰일 것 같지는 않아서 도어락보다는 가구 손잡이랑 도어레일 위주로 추가 구성해 보려고 해.”

“그래?”

“응! 안 그래도 큰 변화는 없을 것 같다고 말해 주려고! 추가 시안도 다음 주까지는…….”

딱 거기까지 얘기했을 무렵, 나봄은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일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해 보려다 오히려 사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버렸다. 무덤덤한 태오의 표정도 이런 흐름을 바란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나봄은 부자연스럽게 끊어진 뒷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살포시 입술을 닫았다.

덕분에 한순간에 조용해진 분위기.

“집 다 왔다.”

익숙한 골목을 들어서며 태오가 말했다.

“아, 응…… 데려다줘서 고마워.”

겨우 꺼내 놓은 나봄의 목소리는 다시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철컥―

조수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며 나봄은 들리지도 않을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단태오 앞에서는 계속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밖에 할 수가 없는 건지.

계속 어색하게 굴다가 분위기만 이상하게 만들어 버리는 꼴은 스스로가 생각해 봐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모습이 그에게 어떻게 보일지, 나봄은 어림짐작하고 싶지도 않다.

“그럼 난 들어가 볼게! 오늘 오므라이스 맛있었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태오를 의식하고 있는 나봄은 혼란스러운 감정은 모두 숨긴 채 씩씩하게 인사했다.

“어, 뭐. 그래.”

때마침 막 운전석에서 몸을 내린 태오는 짧게 대답했다. 나봄은 그 모습을 끝으로 작별인 줄 알고 대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순간.

“저…… 한나봄.”

태오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를 붙들었다. 가방에서 막 열쇠를 꺼내 들었던 나봄은 곧장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또렷하게 담겨 오는 태오의 얼굴은 여전히 수줍은 기색이 역력하다.

밝은 가로등 불 아래서 더욱 붉게 물들어 있는 홍조부터,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는 눈빛까지.

그의 혀끝에 맺힌 말은 아무래도 쉽게 꺼내 놓기 어려운 모양이다.

나봄은 혹시 아까 미처 건네지 못했던 얘기를 하려나 싶어 가만히 그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태오는 더욱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고, 머지않아 말문을 열었다.

“저기…….”

“…….”

“잘 들어가라고.”

이번에는 끝까지 제대로 흘러나왔으나 나봄이 기다리고 있던 얘기는 아니었다. 조금 더 그를 마주한 채 기다려 봐도 다른 말은 끝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응, 너도 운전 조심히 해!”

나봄은 하는 수 없이 적당한 작별 인사만 남겨 둔 채 다시 대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열쇠는 벌써 손에 쥐고 있으니, 대문 손잡이 밑에 도어락만 연다면 오늘 밤은 이대로 끝.

나봄은 열쇠를 집어넣기 전 오늘 하루를 조용히 회상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면 안 될까. 나도 어제 노래방에서 있었던 일 무릅쓰고 용기 내서 먼저 전화한 건데…….’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걸었던 전화.

[알려 줘서 고마워^^ 보답으로 저녁을 대접하고 싶으니까 5시까지 우리 집으로 와 줬으면 좋겠어^^♡]

예상치도 못했던 그의 초대.

‘그랬구나. 나는 요리에는 영 소질이 없어. 이러다 시집이나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뭐 그런 걱정을 해. 어차피 요리는 한 명만 맡아도 되는 거잖아.’

‘……어?’

그가 해 준 오므라이스를 먹으며 주고받았던 달콤한 대화.

‘……못되게 군 벌이다.’

그리고 수줍게 맞잡아 본 따듯한 손길.

하지만 그렇게 설렘 가득한 시간들을 보내 놓고 나서도 결국에 남은 건 아쉬움뿐이다. 특별한 하루를 보내 놓고서 이런 식으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안녕을 고하는 건 왠지 억울하고 분하다.

이 상태로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나봄은 대문을 열기가 무섭게 또 한 번 뒤를 돌았다.

“단태오!”

그리고 씩씩하게 그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물끄러미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태오의 눈동자가 순간 휘둥그레졌다.

정면으로 와 닿은 그의 시선은 나봄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아랑곳 않고 대차게 입을 열었다.

“아까 계속 하려던 말이 뭐야?!”

“어?”

“무슨 말 하려고 했잖아.”

“…….”

“두 번이나!”

일부러 ‘두 번이나’ 부분에서 힘을 주었다.

그와 마주하고 있는 얼굴은 점점 더 뜨거워졌으나, 나봄은 그래도 눈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 때문에 덩달아 온몸에 화악 열이 올라 버린 태오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있는 고민은 단 하나.

말해도 될까. 내가 하려던 얘기를 너에게 전해도 될까.

“그게…….”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 태오는 괜히 시간만 끌었다.

그러나 나봄은 집요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시 들어 올린 얼굴은 사뭇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그녀를 무시할 수도 없게 되어 버린 태오는 결국 솔직한 얘기를 털어놓기로 했다.

“남자 친구…….”

“응?”

“……까지는 아니지만 썸남 정도는 되지 않냐.”

“…….”

“……나 말이야.”

띄엄띄엄 끊어 나온 질문은 소라와의 통화를 의식한 것이 분명했다. 아까 안 들었다고 하더니 역시나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황한 나봄은 하느니 마느니 한 되물음만 건넸다.

“그, 그래?”

“그래야 될걸. 안 그러면 우리 집에 와서 손잡고 영화 본 게 이상해지니까.”

“아…… 그건 또 그렇네. 하하.”

그 대답을 들은 태오의 눈동자가 일순 반짝 빛났다. 머지않아 벌어진 입술 틈새로 새어 나오는 건 조금 더 당찬 목소리였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누가 썸 언제부터 탔냐고 물어보면 오늘부터 탔다고 해.”

“아…….”

“안 그러면 나 삐진다.”

그리 말하는 태오의 눈썹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어도, 나봄이 소라에게 썸을 부정했던 게 내내 찜찜했던가 보다.

나봄은 그런 그를 향해 재차 고개를 끄덕이고는 싱긋 웃어 보였다.

“저기…….”

“왜, 왜.”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방금 전의 태오처럼 무슨 말을 하려다 멈춰 버렸다.

인내심 좋은 나봄과 달리 성질 급한 태오는 곧장 사납게 따져 물었다.

“아, 뭐야! 난 다 말했잖아! 너도 하려던 말 하고 가!”

하지만 나봄은 그 말을 듣고도 느긋하게 대문을 열었고, 여전히 생글생글 미소를 띤 채 마당으로 들어섰다.그렇게 문이 닫혀 버리나 싶어, 태오의 애가 닳아 없어지려던 그 순간.

빼꼼―

나봄이 열린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곧이어 복숭아 빛 그녀의 입술에서 툭 꺼내진 말은 단태오 인생을 통 틀어 몇 번 들어 본 적 없던 말이었다.

“너 되게 귀엽다.”

그 한 마디를 듣자마자 태오의 머리는 띠잉―

수줍은 나봄이 힘주어 닫아 버린 파란 대문은 콰앙!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달달함이 홀로 남은 태오를 휘감았다.

누군가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는 지금 하늘을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귀엽다니.

험악한 인상 때문에 사람들한테 이런저런 오해만 사고, 괜히 겁만 줬던 내가 심지어 되게 귀엽기까지 하다니.

“내, 내가 그런가…….”

태오는 뜨거운 뺨을 두 손으로 쓱쓱 문질렀다.

그녀가 남겨 두고 간 귀엽다는 칭찬을 두고두고 되풀이하는 그는 마치 꽃밭을 거니는 느낌이었다.

까만 하늘엔 새하얀 달 대신 피어난 건 노란 달맞이꽃. 구질구질했던 골목을 붉게 물들인 건 짙은 향기가 밴 장미꽃.

그리고 방금 전 그녀가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사라진 대문은 형형색색의 꽃들로 화려하게 꾸며진 아름다운 플라워게이트.

달콤한 향기에 취해 버린 태오는 깊은 심호흡으로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달랬다.

그래도 요동치는 감정은 쉽사리 추슬러지지 않았다. 하도 다쳐서 너덜너덜해졌던 마음에 몽글몽글한 행복이 잔뜩 달라붙은 것 같다.

그래서 누구보다 기쁜 미소를 띠고 돌아가는 길.

늘 슬프기만 했던 태오의 밤은 오늘따라 눈이 부시도록 밝았다.

“하아…….”

어둔 골목 한편.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 앞에 차마 나타나지 못하고 그림자가 되어 버린 그 남자와 달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