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앞치마가 섹시하게 어울리는 남자
2017.09.18.
[오늘 못난 아들내미를 위해서 귀빈을 초대했으니까 정장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있어라. P.S 넌 오므라이스를 제일 잘하더라.]
박 여사에게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그걸 확인한 태오의 눈썹이 한쪽만 노골적으로 구겨졌다.
차 안에 가방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 착잡한 마음으로 돌아오니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그녀.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도 안 받길래 오만 가지 걱정을 다 했건만, 이제 와서 띡 보내 놓은 문자 내용이 아주 황당하다.
본인의 귀빈을 왜 내 집으로 부르는지도 모르겠고, 갑자기 정장을 갖춰 입으라고 하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
태오는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하기 위해 박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쿵짜라 쿵짝♪― 쿵짜라 쿵짝―♬
하지만 요란스러운 트로트 음악만 이어질 뿐, 그녀와는 끝까지 통화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 진짜 사람이 왜 이렇게 제멋대로야.”
답답해진 태오가 오직 할 수 있는 건 오만상을 쓴 채 통화종료 버튼을 눌러 버리는 것뿐이었다.
“하여간 집에 들어오기만 해 봐라…….”
태오는 툴툴거리면서도 격식 있는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 룸으로 들어섰다.
옷장엔 얼마 입지 않아서 거의 새것과 다름없는 풀세트 정장이 두 벌이나 모셔져 있었지만, 태오는 그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무리 귀빈이라고 해도 평소에도 안 입는 정장을 꺼내 입는 건 오버스러워 보일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선택한 까만 슬랙스와 그레이톤 와이셔츠. 그리고 평소엔 답답해서 절대 매지 않는 넥타이.
마지막으로 헤어스타일까지 매만지고 나니 옷장에 붙은 전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제법 그럴싸했다.
흡족해진 태오는 가벼운 손길로 옷장 문을 닫고 다시 거실로 걸어 나왔다.
때마침.
띵동―
귀청을 때리는 초인종 소리가 온 집 안에 울려 퍼졌다.
불쑥 찾아온 손님이 박 여사와 그녀의 귀빈일 거라 생각한 태오는 딱딱한 목소리로 인기척을 냈다.
“예, 나갑니다.”
어떤 사람이 서 있을지는 모르지만 태오는 박 여사에게 서울 지리도 모르면서 어디 나간단 말도 없이 사라지면 어떡하냐고 한 소리 해 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거칠게 현관문 잠금장치를 풀고 문고리를 열어젖힌 순간.
열린 문 틈새로 보이는 얼굴은 그를 굳어 버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 안녕.”
“한…… 나봄?”
아니, 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원래…… 집에서도 이렇게 차려입고 있어?”
상황 파악이 덜 된 태오에게 나봄이 먼저 물었다.
아직 그녀가 왜 자신의 집에 찾아왔는지 납득할 수가 없었던 태오는 그 어떤 대답도 못 하고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러자 나봄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할 말을 고르더니.
“괜찮으면 집에 들어가도 될까?”
파격적인 질문 하나를 꺼내 놓는다.
더욱 놀란 태오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현관문만 좀 더 열어젖혔다.
그러자 기꺼이 그의 집 안으로 들어선 나봄은 신고 온 구두를 벗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집이랑 너희 집, 지하철로 겨우 세 정거장 거리더라. 여기까지 오는 데 30분밖에 안 걸렸어.”
“아…….”
“처음 초대받은 자리에 빈손으로 오는 건 실례인 것 같아서 비타민 음료 좀 샀는데…….”
“초, 초대?”
“혹시 신 거 못 먹는 건 아니지?”
“아니, 뭐…… 잘 먹는데…….”
“다행이다!”
혼란스러운 태오의 속을 알 리 없는 나봄은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상황 파악이 안 된 태오는 마른침을 삼키며 목소리를 정리하고는, 겨우 입술을 떼어 내 물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지하철 타고 왔다니까.”
“지하철이 문제가 아니라…… 대체 왜 온 거야?”
“왜 왔냐니. 가방 가져다주러 왔지.”
“…….”
“그리고 니가 저녁 같이 먹자며.”
‘내가?’
곧바로 되물으려던 태오의 머릿속에 박 여사의 문자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오늘 못난 아들내미를 위해서 귀빈을 초대했으니까 정장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있어라. P.S 넌 오므라이스를 제일 잘하더라.’
못난 아들내미를 위해 초대한 귀빈. 그건 아무래도 한나봄을 뜻하는 모양이었다.
그녀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연락은 또 어떻게 했고?
뒤따르는 수많은 의문들은 태오의 관자놀이를 지끈지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마를 짚은 채 옅은 한숨을 내쉬자, 나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내가 아직 준비 안 됐을 때 왔어?”
“어?”
“뭔가 곤란해 보여서…….”
“아니, 아니야. 곤란하긴.”
그냥 무책임한 박 여사와 천륜을 져 버리고 싶은 것뿐인걸.
가까스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태오는 얼굴에 남아 있는 당황감을 애써 지워 냈다.
그리고는 이왕 찾아온 나봄이 편히 있을 수 있도록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거실에서 TV 보면서 기다려. 저녁 금방 차려 줄게.”
그런 뒤 남색 앞치마를 둘러매는 태오의 모습은 왠지 섹시해 보인다. 예상치 못한 구간에서 설레어 버린 나봄은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싶어 씩씩하게 물었다.
“저, 저녁 메뉴는 뭐야?”
그러자 태오는 잠시 냉장고를 훑어보며 고민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요리들 중에서는 오므라이스가 가장 평이 좋은데…… 넌 오므라이스 좋아해?”
태오의 까만 눈동자가 다시 나봄에게 와 닿았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게 오늘이 처음은 아닌데, 왠지 낯설면서도 기분을 들뜨게 만드는 감정이 나봄을 덮쳐 온다.
“허리선 예쁘다…….”
그 분위기에 그대로 휩쓸려 내뱉고 만 솔직한 감탄사.
“어……?”
그걸 들은 태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순간 정신이 돌아온 나봄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앗! 미안!”
“뭐, 뭐가.”
“허리를 너무 빤히 쳐다본 것 같아서…….”
당황감을 수습하지 못한 채 내뱉는 말은 점점 상황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새빨개진 나봄은 얼굴을 푹 숙이며 그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서 곧잘 긴장하긴 했어도 이렇게 나사 빠진 것처럼 아무 말이나 막 뱉어 내지는 않았는데, 대체 왜 자꾸 바보같이 구는 건지.
아무래도 어젯밤 노래방에서 머릿속 나사 하나를 빠트리고 온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도 휘둘릴 수가 없다.
“아…… 고마워.”
머지않아 태오의 어색함 가득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런 반응이 더욱 부끄러웠던 나봄은 아예 그에게서 몸을 돌려 소파로 발걸음을 옮겨 버렸다.
그래서 미처 구경하지 못했다.
나봄보다 더 빨개져 있던 태오의 수줍은 두 귀를.
* * *
“와, 진짜 맛있겠다!”
식탁에 앉은 나봄이 태오가 올려 놓은 오므라이스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노란 계란 이불을 예쁘게 덮은 오므라이스는 태오의 투박한 손으로 만들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겉모양까지도 완벽한 요리였다.
그런 나봄의 반응이 쑥스러웠는지, 태오는 그녀의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기며 딱딱하게 말했다.
“먹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안 먹어 봐도 알 수 있어. 이건 분명 내가 먹어 본 오므라이스 중에서 제일 맛있을 거야.”
“참나…….”
혀를 차고는 있지만 그의 눈가엔 웃음기가 어려 있다.
기뻐하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았던 나봄은 두 눈동자를 더욱 빛내며 물었다.
“냄새가 정말 좋은데 혹시 무슨 비법이라도 있어?”
“밥을 버터에 볶아. 허브 솔트로 간하고.”
“계란은 어쩜 이렇게 색이 예뻐?”
“섞을 때 잘 섞으면 돼. 위아래로 원을 그리듯이 빠르게.”
“아아, 그렇구나.”
나봄은 척척 대답하는 태오를 향해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크게 한술을 떠 입 안에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버터향이 솔솔 풍기는 단태오표 오므라이스는 그녀가 먹어 본 오므라이스 중에 최고라고 해도 될 만큼 맛이 뛰어났다.
“으음!”
나봄은 태오의 눈앞에서 곧바로 엄지를 세웠다.
그녀의 만족스러운 리액션에 한결 마음을 놓은 태오는 그제야 뒤늦은 첫 술을 떴다. 피식, 흘러나오는 웃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해 보였다.
나봄은 그런 그를 살펴보다가 입 안에 든 음식물을 꿀꺽 삼킨 뒤 물었다.
“평소에 요리 좋아해?”
“아니.”
“안 좋아하는 것치고는 되게 잘하는데?”
“대학생 때부터 자취했으니까. 굶어 죽지 않으려고 기본적인 요리 몇 개는 마스터했지.”
“그랬구나. 나는 요리에는 영 소질이 없어. 그럭저럭 먹을만은 한데 엄청 맛있다는 생각은 안 들더라구.”
나봄은 그리 말하며 그동안 실패했던 수많은 음식들을 떠올렸다.
막 만들어도 맛있다는 비빔밥부터 초등학생도 끓일 수 있다는 라면까지. 시도는 해 봤으나 만족스러운 결과물은 나오지 않아서 항상 실망했던 그녀였다.
“이러다 시집이나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나봄은 진담이 반쯤 섞인 농담을 흘려보냈다.
“뭐 그런 걱정을 해. 어차피 요리는 한 명만 맡아도 되는 거잖아.”
그러자 곧바로 따라붙은 태오의 대답은 그녀의 심장을 쿵! 하고 두드린다.
“……어?”
지금 저 말이 왠지 요리 잘하는 본인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기분 탓일까?
“아, 아…… 그러니까 꼭 요리 잘하는 사람 만나라고! 니가 못하면 신랑이라도 해야 하잖아.”
“…….”
“나야 그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하아, 괜히 설레발치며 대답하지 않길 잘했다. 아무리 어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저런 얘길 스스럼없이 꺼내 놓을 리가 없지.
“으, 응. 나도 요리 잘하는 사람 만나고 싶다.”
“그래, 넌 먹는 걸 잘하니까.”
“아, 내가 그래?”
“그렇지 않나. 아니면 말고, 뭐…….”
“하하…….”
살짝 오해할 뻔했던 상황은 두 사람의 분위기를 심상치 않게 만들어 놓았다.
오므라이스로 인해 겨우 풀어지나 싶었던 긴장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한층 더 심해졌다.
나봄은 두근대는 가슴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심장박동이 겨우 제 템포를 찾고 나서야 다른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 있잖아! 태오야! 혹시 대학 동기들이랑 아직까지 친해?”
“글쎄, 처음부터 친하다고 할 애들이 없어서.”
“왜? 너 친구들 되게 많았었잖아.”
“내가?”
“응, 넌 항상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 말하며 나봄은 대학 시절의 태오를 떠올렸다.
언제 어디서나 패기 넘쳤던 태오는 특히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사람이었다.
어딜 가나 주변에 남자 녀석들이 득실거렸던 그는 마치 늑대의 우두머리 같았지.
예전의 나봄은 그런 태오를 지레 겁을 무서워하며 피해 다녔었지만, 요즘은 그의 드센 성격마저도 달리 보는 중이었다.
비록 하고 싶은 얘기를 거침없이 내뱉고, 특히 일에 관해서는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긴 해도…….
“넌 예전부터 변함없이 당당했어. 누구한테 기죽지도 않고, 쉽게 주눅 들지도 않고.”
“…….”
“그래서 다들 널 따랐었나 봐.”
나봄은 태오를 똑바로 마주한 채 진심 어린 칭찬을 꺼내 놓았다.
하지만 태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까 오므라이스를 추켜세워 줬을 때와 달리 그의 입가엔 조금의 미소조차 없었다.
“아니, 나 그런 사람 아니야.”
그렇게 가만히 멈춰 있다가 그가 나직이 꺼내 놓는 말은 나봄의 평가에 대한 부정이었다.
이런 반응을 예상치 못했던 나봄의 시선이 그의 입술 위로 가만히 고정되었다.
그러자 옆에 놓인 물을 들이켜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태오는 이내 끊어졌던 뒷말을 단호하게 이었다.
“난 니 생각만큼 당당한 사람이 아니라서, 정말 중요한 순간 겁을 먹어 버려.”
“…….”
“그래서 인생에 한 번 올까 말까한 기회가 와도 서툴게 구는 바람에 다 망쳐 버리기 일쑤야.”
그가 딱 이 대목까지 흘려보낸 순간, 나봄의 머릿속에선 왜 5년 전 그와의 첫 데이트가 떠오르는 건지.
아무래도 마주하고 있는 태오의 눈동자가 첫 데이트를 마친 뒤 내비쳤던 불안감과 비슷해서인 것 같다. 그래서 지금 그가 내뱉는 고백은 꼭 그날에 대한 해명처럼 느껴진다.
‘한나봄, 남자친구 있어?’
‘아, 아니. 없는데…….’
‘그럼 나 시켜 줘.’
어느 날 갑자기, 분위기에 휩쓸려 그와 사귀기로 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까.
드디어 첫 데이트를 가지게 된 두 사람은 사랑스러운 분위기의 카페, 연인들이 득실대던 공포 영화 상영관, 그리고 야경이 정말 멋진 레스토랑을 차례로 들렀다.
물론 이 완벽한 데이트 코스는 모두 태오가 짜 온 것이었다.
거리와 시간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걸 보며 나봄은 그의 세심한 준비성에 내심 감탄을 했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과 달리 그날에 대한 기억은 그리 좋게 남겨지지 못했다.
실패의 이유는 다양했다.
로맨틱한 카페의 분위기가 쓸모없게 느껴질 정도로 둘 다 말주변이 없어서.
나봄이 선천적으로 공포 영화를 못 보는 바람에 안 그래도 어색한 둘의 분위기가 더욱 경직되어 버려서.
레스토랑 예약이 꼬여 버린 바람에 제 시간에 갔어도 1시간이나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게 되어 버려서.
안타까운 사실은 그중 태오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뭘 어떻게 개선해 보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나봄은 그냥 연애 자체가 자신과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단정지어 버렸다.
그래서 태오에게 이별을 말하는 일이 너무나도 쉬웠다.
‘만약 그때, 조금 더 서로를 알아보기로 결정했더라면 우리의 인연은 지금과 달라졌으려나.’
감상에 젖은 나봄은 홀로 고민해 보았으나 이제는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태오도 우리에 대한 얘기를 한 게 아니었을 텐데,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걸 보니 자신이 단태오를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쓰고 있긴 한가 보다.
더 이상의 김칫국은 마시고 싶지 않았던 나봄은 멋대로 날뛰는 이성을 단단히 다잡기로 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또렷이 치켜뜬 눈으로 태오를 마주 보고, 무슨 격려라도 꺼내 놓으려 하던 찰나.
불현듯 태오의 시선이 그녀에게 와 닿았다.
그의 두 뺨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사이 나봄도 깜짝 놀랄 만큼 붉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동요한 모습을 하고서 태오는 보기 좋게 젖어 있는 입술을 떼어 낸다.
“맞아, 나 지금 니 얘기 하는 거야.”
귀를 의심케 하는 고백에 나봄의 두 눈은 토끼처럼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태오는 점점 기어들어 가는 흐린 목소리로 오랫동안 묵혀 놨던 고백을 이어 나간다.
“그래서 너랑 연애하는 짧은 시간 동안 잘해 주지 못했었다고…….”
“…….”
“계속 말해 주고 싶었어. 지금은 다 늦었지만.”
순간 그가 털어놓은 진심보다 지금은 다 늦었다는 그 한 마디가 나봄의 마음에 더욱 깊게 박혀 버린 건 왜일까.
욱신거리는 가슴은 꼭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반박하는 듯하다.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그녀는 답답하고 서운하다.
눈앞에 있는 태오를 따라 감정에 충실해진 나봄은 결국 제 할 말을 꺼내 놓고야 말았다.
“어차피 다 늦었다면서 왜 말하는 거야?”
“……어?”
“내가 지금 뭐라고 대답해 주길 바라는 건데?”
소극적인 나봄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아서 태오는 전혀 준비하지 못하고 있던 노골적인 질문.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혼란스러워진 태오의 눈동자가 옅게 떨려 왔다.
숨소리까지 잦아들어 버린 정적 속에서 들려오는 건 거세게 쿵쿵대는 그의 심장 소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