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뜻밖의 큐피드 등장이요
2017.09.15.
“으음…….”
요란한 알람음이 방 안을 채웠다.
이불에 둘둘 말려 있던 태오는 거칠게 손을 뻗어 휴대폰을 잡았다.
겨우 뜬눈으로 알람을 끄고 현재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출근을 하고도 남았어야 할 11시 반.
“아, 망했다…….”
놀란 태오는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어제 눕고 나서도 한참 동안 잠에 들지 못했던 탓에 기어이 늦잠을 자고 말았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네.
“알람은 왜 이제야 울리고 난리야!”
성질을 내며 황급히 옷장 문을 연 태오는 가장 먼저 잡히는 옷을 대충 주워 입었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뻗쳐 있는 머리를 감추기 위해 아무 모자나 푹 눌러썼다.
1분 만에 완성된 모습은 흡사 현상 수배 중인 범죄자와 다름없었으나 그에게는 전신 거울을 확인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렇게 번개 불에 콩 구워 먹듯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나가 차키를 챙겨 들고.
현관문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간 태오는 대충 운동화를 꺾어 신으며 잠금장치를 풀었다.
그런 뒤 현관문을 거칠게 열어젖히자.
“아…….”
방긋 열린 문틈 새로 불어오는 한가로운 바람이 그를 맞이했다.
곧이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사실 하나는 모든 긴장감을 풀어 놓기에 충분했다.
“……오늘 주말이었지.”
그걸 깨달은 순간, 잔뜩 굳어 있던 태오의 몸에선 순식간에 힘이 쫙 빠져나갔다. 힘없이 문고리를 놓아 버리는 손은 그야말로 축 늘어진 상태였다.
쾅―!
덕분에 현관문이 굉음과 함께 도로 닫혀 버리자 태오의 뒤통수는 얼얼하게 아파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현실을 도피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어제의 기억이 다시 뇌리에 꽂혀 들어온 모양이다. 흐려졌던 현실감각은 날카롭게 되살아나고 자신이 저지른 대담한 일들이 하나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내가 얼마나 널 좋아했는지 아냐?’
‘자그마치 9년이다. 우리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을 적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좋아했어.’
‘정말 하루도 쉬지 않고…….’
그래, 어제 나는 너에게 9년 동안이나 묵혀 둔 마음을 구차하게 털어놓았고.
‘왜…… 날 그렇게 버렸어?’
‘왜 나한테는 사랑받을 기회도 안 줬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끝내 사랑해 주지 않았던 그녀를 원망했고.
‘……키스해도 되냐.’
감히 너를 끌어안고 멋대로 입술을 맞췄었다.
생각해 보면 입술‘만’ 탐했던 건 아닌 것 같다. 다시 되새기기도 낯부끄러운 일을 어제의 나는 거침없이 저질렀었다.
그 오랜 키스가 끝나고 너는 무슨 말을 했더라.
‘저기…… 나는 이만 가 볼게!’
나봄의 당황한 얼굴이 떠오르자 태오는 푹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흔들리는 동공과 떨리는 목소리.
그건 명백히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아마 벽을 치는 걸로는 어느 누구 따를 자가 없는 그녀라면 앞으로 두 번 다시 그에게 먼저 다가오려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젠…….
“……다 끝이네.”
모든 걸 때려치우겠다는 마음으로 나봄의 집까지 찾아갔던 태오였지만, 진짜 끝을 맞이하는 건 생각보다 더 힘겨운 일이었다.
애초부터 그녀와 뭘 해 본 적도 없으면서 뭐가 이리도 아쉬운지.
다 털어놓고 끝내면 그저 후련할 줄 알았건만 가슴에 돌덩이 같은 미련만 더 얹혀 버렸다.
이건 전부 어제 충동적으로 저질렀던 첫 키스 때문이다.
‘그러니까 짐승 같은 짓은 왜 해서…….’
태오는 마음속에 울컥 차오르는 자책을 가까스로 삼켜 냈다.
후회조차 거부하는 건 어제의 일을 완전히 없었던 일처럼 묻어 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체면도 없이 쏟아 냈던 눈물이 잊히고, 애원이나 다름없던 고백도 잊히고.
그 어떤 사탕보다 달콤했던 너의 입술도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릴 수 있을 테니까.
“어제는…… 아무 일도 없었어.”
태오는 복잡한 머릿속을 강제로 멈춰 두고 고집스러운 한 마디를 흘려보냈다.
그런다고 해서 잊어버리기엔 지난밤이 너무도 생생했으나, 태오는 끝까지 모르는 척 버텨 보기로 했다.
“아니,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어…….”
쿵― 쿵― 쿵―
그 말을 덧붙이며 태오는 닫힌 현관문에 머리를 찧었다.
고통이 강렬해지면 강렬해질수록 잡생각은 점차 흐려져만 갔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고문 아닌 고문을 반복하고 있던 그때.
띵동―!
요란한 벨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뜻밖의 인기척에 놀란 태오의 눈이 일순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단번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얼어붙어 있자,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목소리 하나가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터져 나왔다.
“단태오! 너 안에서 뭣하고 있냐! 마중 나온다며, 이 썩을 놈아!”
“뭐, 뭐야.”
“뭐긴! 이제 니 어미 목소리도 못 알아들어?! 아이구, 참 효자 나셨다!”
“엄…… 마?”
멍한 정신으로 그녀임을 알아차린 태오의 눈빛이 다른 의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 이제야 기억났다. 토요일 낮에 알람을 맞춰 놓은 이유.
오늘은 전주에서부터 박 여사가 올라오는 날이었구나.
“빨리 문 열어! 반찬통 무거워 죽겠어!”
“잠깐, 나 지금 놀라서 문 여는 법을 까먹……”
“그리고 너 안에서 쿵쿵 소리 나던데 혹시 전셋집에다가 대못질 하고 있냐!”
“아니, 그게 아니고……”
“너 거기다 대못질 하면 이사 가면서 그거 다 땜빵 해서 줘야 돼! 알아?!”
“아! 좀 시끄러워요! 정신 사나워서 문을 못 열겠네!”
그래, 맞아. 11시 반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 놓으라는 소리였어.
박 여사가 오는 날은 아늑하고 고요하던 나의 보금자리가 아작 나는 날이니까 말이야.
* * *
“입술 상태가…… 말이 아니네.”
화장실 세면대 거울 앞에 선 나봄이 부어오른 입술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어제부터 왠지 붉어졌다 싶더니, 지금은 붕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나봄은 어떻게든 입술을 가라앉혀 보려 수도꼭지를 틀었다. 하지만 손끝에 차가운 물이 닿자마자 일순간 모든 동작을 멈춰 버렸다.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날카로운 기억 때문이었다.
밝은 빛을 내며 돌아가던 노래방 조명. 코끝을 스치던 싸구려 방향제 냄새. 두 볼을 감싸던 따듯한 손길.
그리고…… 닿을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던 입술의 감촉.
그 부드러운 느낌을 떠올리는 순간 나봄의 얼굴엔 불긋불긋한 홍조가 피어났다. 가슴은 어제로 돌아간 듯 두근거리고, 눈빛은 그를 바라볼 때처럼 일렁였다.
이 모든 건 어제의 키스를 잊지 못했다는 증거였지만 나봄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어 모든 감정을 지워 버리려 했다.
‘미, 미안해.’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
그의 말대로 우린 어제 잠깐 정신이 나갔던 거니까.
애절했던 그의 고백도, 동요했던 내 마음도 한순간의 실수였던 거다. 키스가 끝난 후 계속해서 시선을 피하던 태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하아…….”
긴 한숨을 내쉰 나봄은 동요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찬물로 세수를 했다.
이런다고 씻길 감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뺨의 열기가 가라앉으니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던 잡생각이 조금 줄어들었다.
나봄은 화장실을 나서자마자 습관적으로 거실의 시계부터 확인했다.
워낙 늦게 일어난 탓에 시간은 벌써 오후 1시 반.
“아, 점심 먹어야지.”
사실 배는 그다지 고프지 않았지만 냉장고의 반찬에 손도 안 댄다면 한 사장이 서운해할 게 뻔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식사를 하기로 한 나봄은 주방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
“어?”
부엌 식탁 의자에 놓인 낯선 가방 하나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빈티지한 디자인의 까만 가죽 백팩은 떠올려 보건대 단태오의 것이 분명했다. 어제 그는 노래방에 갔다가 돌아올 줄 알고, 가방은 미처 챙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중요한 서류라도 들어 있으면 어쩌려고…….”
잠시 고민하던 나봄은 그의 가방을 열어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약간 뻑뻑한 감이 있는 지퍼를 열고 들여다본 내부는 그의 사무실 책상처럼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누가 워커홀릭 아니랄까 봐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건 각종 업무 파일.
그 와중에 책갈피까지 꽂혀 있는 시집 한 권이 의외였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이리도 아련한 제목의 시집을 가방에 넣어 두고 다니는 걸 보니, 단태오는 제법 감성적인 사람인가 보다. 생긴 걸로 봐서는 사랑 얘기에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데…….
이렇게 그의 색다른 면을 또 한 가지 발견한 나봄은 어느새 흥미 가득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나봄은 열심히 밑줄이 그어진 자료를 훑으며 태오가 주로 쓰는 펜이 파란색이라는 걸 알았고, 해야 할 일이 잔뜩 적힌 스케줄러를 보며 그날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날 끝내 버리는 태오의 성격을 알았다.
그리고 업체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적힌 연락처를 보며 그가 숫자 8을 눈사람 그리듯 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가방 안만 살펴보았을 뿐인데 얻은 정보가 제법 많다.
“이건 또 언제 갖다 줘야 하나.”
그렇게 구경할 거 다 구경하고 나니 슬슬 걱정되기 시작하는 건 그를 상대하는 일이었다.
가방을 전해 주기 위해선 태오와 만날 약속을 잡고 얼굴을 마주해야 하지만 아직은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 버렸던 어제의 상황에 비해 그녀의 마음은 복잡할 대로 복잡해진 터라, 태오를 만나서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월요일에 태오 몰래 우드 팩토리로 가서 직원을 통해 건네줘야겠다 다짐하고 있으니, 문득 형광색 포스트잇이 붙여진 A4용지 뭉치가 거짓말처럼 눈에 띈다.
포스트잇에 적힌 글자는 ‘월요일 오전 회의 자료. 주말 동안 읽어 둘 것!’
그리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별표 네 개.
“주말이면…… 지금 당장 필요한 거 아닌가?”
걱정에 휩싸인 나봄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케줄러를 통해 알게 된 단태오는 업무를 미루지 않는 성격인데, 지금쯤 가방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몹시 당황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걸 뻔히 알면서 단지 상대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가방을 전해 주지 않는 것도…….
“……사람이 할 짓이 못 되지. 그래, 어떻게든 오늘 갖다 줘야겠다.”
결국 용감한 선택을 한 나봄은 냉장고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다시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아무 데도 나가지 않을 생각으로 대충 고양이 세수만 했었건만.
아무래도 목욕재계를 해야 할 것만 같다.
이 초췌한 몰골로는 그의 앞에서 당당하게 굴 수 없을 것 같으니.
* * *
“아, 내 가방…….”
제 가방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태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말에 처리해야 할 밀린 일이 잔뜩인 이 와중에 가방이 없어지다니. 이건 단태오의 업무에 노란 비상등이 켜진 것과 다름없었다.
“어째 되는 일이 하나도 없냐!”
태오는 온갖 신경질을 내며 차키를 들었다.
어디에 두고 왔는지 짐작 가는 곳은 있지만, 그건 가장 마지막에 확인할 예정이었다.
못 할 짓을 저질러 버린 상대의 집에 가방을 두고 왔다는 건 너무 막나가는 전개잖아.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돼.
“주차장 좀 내려갔다 올게요.”
태오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박 여사에게 말하며 신발을 챙겨 신었다.
물론 어제 대리 기사가 몰아 주는 차를 타고 오면서 가방을 봤던 기억은 없었지만, 잔인한 현실을 피하기 위해선 일말의 희망에 기대를 걸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뭐야, 배고파 죽겠는데 또 어딜 가?”
지금 막 점심을 차리려 했던 박 여사가 까칠하게 물었다. 그러자 태오는 신발을 신으며 되는 대로 대충 대답했다.
“가방 가지러.”
“가방을 주차장에 놔두고 왔어?”
“아니, 차에 있겠지.”
“있겠지는 또 뭐야. 너 혹시 가방 잃어버렸냐! 몇 살이나 먹었다고 벌써부터 깜빡깜빡……!”
“다녀오겠습니다.”
태오는 박 여사의 목소리가 여기서 더 날카로워지기 전에 서둘러 현관문을 빠져나갔다. 한 번 잔소리를 시작하면 끝낼 줄을 모르는 박 여사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단태오의 성질머리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품의 아버지가 아닌 화통한 대장군 스타일의 어머니를 닮았다.
“저게 그냥 사람 말을 뚝 끊어 버리기나 하고!”
버럭 고함을 내지른 박 여사는 닫힌 현관문을 노려보았다.
저렇게 무뚝뚝해서야 어느 처자가 받아 줄는지. 저 성깔머리로는 아마 장가도 제대로 못 갈 거다.
“하여간 귀염성이 없어. 귀염성이…….”
박 여사는 한탄 섞인 혼잣말을 내뱉으며 냉장고를 마저 정리했다.
태오가 잘 먹는 오이소박이를 잔뜩 해 왔는데, 이건 분위기 봐서 도로 가져가 버릴 참이다. 한 번만 더 얄밉게 굴면 남아 있던 오이소박이마저도 뺏어 가야지.
그렇게 불평을 하면서도 오이소박이부터 냉장고 안에 넣어 두고 있는데.
♩♪♬― ♩♪♬―
거실에서 요란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박 여사가 좋아하는 최신 뽕짝 벨소리가 아닌 걸 보니 태오의 휴대폰이 분명했다.
아들 일에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박 여사는 첫 번째 전화를 못 들은 척 무시했다.
하지만 잠시 후 끊어지는가 싶었던 벨소리는 이내 다시 걸려 오기 시작한다. 두 번이나 거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급한 용건인가 보다.
“아휴, 참…… 휴대폰을 왜 놔두고 다니는 거야.”
슬슬 벨소리 듣는 것도 귀찮아진 박 여사는 거실로 걸어가 마지못해 태오의 휴대폰을 들었다.
발신자 이름은 ‘한나봄’. 명백한 여자 이름이었지만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박 여사는 지금 단태오에게 여자 친구 따위 없을 거라 확신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망설임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을 때.
―태, 태오야! 혹시 자고 있었니? 어제는 잘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휴일에 전화해서 미안한데, 다름 아니라 니가 우리 집에 가방을 놓고 가서 그거 돌려주려고 연락했어.
그녀가 첫 마디를 꺼내기도 전에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는 굉장히 구구절절했다.
사실 나봄은 지금 너무 긴장되는 마음에 종이에 할 말을 적어 두고 읊는 중이었으나, 박 여사가 그런 상황을 알 리가 없었다.
―주말까지 끝내야 할 자료도 들어 있던데, 니가 가방 잃어버렸다고 걱정하고 있을 까 봐…….
“…….”
―아! 저기! 내가 일부러 니 가방 열어 본 건 아니야! 처음엔 우리 아빠 가방인 줄 알았거든!
“…….”
―그래서, 저기…… 그게…….
그래서 대꾸할 타이밍을 찾지 못해 계속 듣고만 있으니, 전화를 받은 상대방이 태오의 어머니라는 걸 미처 인지하지 못한 나봄은 기어이 엄청난 말을 내뱉어 버리고 만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면 안 될까. 나도 어제 노래방에서 있었던 일 무릅쓰고 용기 내서 먼저 전화한 건데…….
노래방에서 있었던 일!
그 한 마디를 들은 박 여사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해졌다.
언뜻 듣기에도 수줍음 많아 보이는 이 처자가 하는 얘기로 봐선 어제 노래방에서 뭔가 심상찮은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로 인해 불안해하는 나봄을 달래야 하는 건 박 여사의 소관이 아니었다. 그건 이 중요한 순간 자리를 비운 원수 같은 아들내미의 몫이 분명했다.
혹시나 그녀가 민망해질까 싶었던 박 여사는 잠시 깊은 고민을 했고.
―태오…….
뚝―
그녀가 또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언뜻 보기엔 단순 무식한 행동이었으나 사실은 다방면으로 복잡하게 생각해 보고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그녀의 말투를 들어 봤을 때 태오와 수수께끼의 처자는 아직 조심스러운 사이.
이럴 때 부모가 불쑥 끼어들었다간 처자에게 괜한 부담만 줄 게 뻔하다.
만약 아들의 여자 친구를 대하는 일이 익숙했더라면 부드럽게 상황을 풀어 나갔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박 여사의 아들은 단 한 번도 그런 걸 연습해 볼 기회를 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괜히 입을 열어서 호들갑을 떨 바에야 내가 아닌 척 한 마디 말도 않고 끊어 버리는 게 낫지.
물론 이대로는 둘 사이에 괜한 오해가 생겨 버릴 것을 알기에, 박 여사는 애프터서비스까지 확실히 해 주기로 했다.
헐렁하게도 제 생일로 비밀번호를 설정해 둔 태오의 메신저를 한 번에 열고, 방금 전화를 건 한나봄의 이름을 찾은 뒤.
그녀는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간결한 문장들을 입력한다.
[알려 줘서 고마워^^ 보답으로 저녁을 대접하고 싶으니까 5시까지 우리 집으로 와 줬으면 좋겠어^^♡]
다정한 말투나 이모티콘은 단태오 성격에 안 쓸 것 같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쓰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넣어 봤다.
자, 이제 남은 일은 자신이 이 자리에서 빠져 주는 것뿐인가.
태오의 휴대폰을 있던 자리에 그대로 내려놓은 박 여사는 서둘러 미처 정리하지 못한 반찬들을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그러고는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전주에서 여기까지 고생해서 올라온 것에 비해 머물다 간 시간이 무척이나 짧았지만, 억울하거나 아쉽지는 않았다.
박 여사가 또다시 서울에 올라올 일은 숱하게 있어도, 연애와 담 쌓은 단태오가 주말 데이트를 할 기회는 평생을 걸쳐 몇 없을 게 분명했다.
떠나기 전, 박 여사는 신발장 위에 놓인 방향제를 온 집 안에 칙칙 뿌리는 것으로 마지막 마무리를 했다.
그러곤 뿌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현관으로 향했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처자의 목소리는 참 순하고 곱던데, 제발 좀 잘 해 봤으면 좋겠다. 또 서툴게 행동하다 좋은 인연 놓쳐 버리지 말고.
찰나에 스친 불안감은 그녀가 알고 있는 태오의 면모를 떠올리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비록 성깔 있고 무뚝뚝한 게 흠이긴 하나, 제 사람 하나는 끔찍이 챙기는 태오는 기회만 잡으면 누구보다 잘할 것이다.
워낙 쓸데없이 진지하고 안 어울리게 순진한 애라, 그 기회 하나를 잡는 데까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