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남친이 내게 반했다-38화 (38/104)

38. 이런 식의 고백은 어때

2017.09.08.

“모두 다 손을 들고! 소리 질러! 쉐킷쉐킷!”

괴성에 가까운 소라의 노랫소리가 노래방 8번 룸을 메웠다. 요란스러운 조명 아래서 춤추는 그녀의 모습은 꼭 접신을 한 무속인 같았다.

태오는 그 모습을 보며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쉬었지만 맞은편에 앉은 나봄은 까르르 웃었다.

그래, 니가 행복하면 됐다.

그 생각이 본능적으로 스치자마자 태오는 제 허벅지를 남몰래 꼬집었다. 저렇게 해실해실 웃는 건 날 가장 설레게 만들었던 모습이지만, 오늘부터는 절대 곧이곧대로 좋아해선 안 됐다.

“쉐킷 바디 후!”

그렇게 각오를 다지는 사이 소라의 광란의 댄스곡이 끝나고.

“와아, 넌 볼 때마다 너무 잘 놀아서 감탄하게 돼.”

“아직 홍대 가라오케를 주름잡던 실력 안 죽었지?!”

“응!”

나봄은 더욱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 손에 들린 탬버린을 차르르르 흔들었다. 그건 그냥 웃기만 하던 때보다 더 귀여워서 태오는 차라리 시선을 돌리기로 했다.

그런 그의 고군분투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오야, 너는 안 불러?”

나봄은 제 앞에 놓여 있던 노래방 리모컨을 태오 쪽으로 밀었다. 태오는 그녀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최대한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는 노래 없어. 안 불러.”

“예전 노래도 괜찮으니까 하나 선곡해 봐.”

“안 부른다니까.”

툭 내뱉어 놓고 보니 너무 매정하게 굴었나, 싶어졌지만 후회하지는 않기로 했다. 살짝 움츠러든 나봄의 눈빛도 더는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다.

“아…… 그래, 그럼.”

“…….”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요상한 긴장감.

눈치 빠른 소라는 그걸 당연히 알아채곤 태오를 나무랐다.

“튕기지 말고 한 곡 뽑아라. 아니면 탬버린이라도 치든가.”

“애초부터 노래방 싫어해서 안 온다고 했잖아.”

“하지만 왔잖아. 거기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지.”

“무슨 논리가 그래?”

“이 채소라 님의 논리가 그러하다. 잔말 말고 선택해. 노래 부를래, 아니면 일어나서 엉덩이 흔들면서 탬버린 칠래.”

갑자기 탬버린 앞에 각설이 잔뜩 붙었다. 여기서 말대꾸를 해 봤자 말빨 센 그녀는 화만 더욱 돋울 것이다.

분위기가 좋아지는 것도 싫지만 자신으로 인해 나빠지는 것도 싫었던 태오는 하는 수 없이 노래방 리모컨을 들었다.

단태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건 오직 슬픈 이별 노래뿐.

이별 노래만 빼고 부른다면 적당히 상대해 주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눈물 젖은 술주정을 선보이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저 신나기만 한 댄스곡은 내 낮은 목소리로 무리고.

‘아, 적당히 멜로디가 좋으면서도 음역대는 낮은 그 노래를 부를까.’

태오는 깊은 고민 끝에 한 곡을 검색해 시작 버튼을 눌렀다. 잔잔한 전주와 함께 노래 제목이 뜨자 소라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태오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시계? 이거 동요잖아. 너 험상궂은 이목구비에 비해 음악 취향이 아주 퓨어하다?”

“좋게 얘기할 때 험상궂은 빼.”

“하하하, 그건 너 부르는 거 봐서!”

태오는 끝까지 깐죽대는 소라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전주가 끝나고 첫 소절이 시작되자,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길고 커다란 마루 위 시계는 우리 할아버지 시계.”

놀랍게도 그의 검붉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90년 전에 할아버지 태어나던 날 아침에 받은 시계란다.”

듣는 이의 시선을 확 사로잡을 만큼.

“언제나! 크흠! 아, 삑사리.”

“…….”

“정답게…… 흔들어 주던 시계.”

음정 박자가 하나도 맞지 않았다.

아마 노래가 시작될 때 제목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이승에는 존재하지 않는 저승사자의 장송곡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할아버! 지의! 옛날 시계!”

본인도 박자가 안 맞는 걸 아는지, 가사의 색깔이 변하는 것에 맞춰 보려 애쓰는 모습은 퍽 안타까웠다.

보다 못한 소라는 노래방 리모컨을 들며 태오에게 물었다.

“저기, 키 좀 낮춰 줄까? 너의 성대가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태오는 신경질을 가득 담아 대꾸했다.

“노래 도중에 말 시키는 게 어디 있어. 매너 갖다 팔았냐.”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지금 미국 민요 할아버지 시계 부르는 거 맞지?”

“시끄러워. 혹시나 해도 물어보지 마. 너 때문에 지금 후렴구 다 끝났잖아.”

소라에게 툭 쏘아붙인 태오는 마이크를 도로 입에 가져다 댔다.

비록 음정 박자는 험한 꼴이 되었어도 노래에 임하는 태도는 진지한 모양이었다.

소라는 그런 그를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그러고는 나봄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래서 노래를 안 부르려고 했나 봐.”

“왜?”

“너무 음치잖아.”

그러나 나봄은 그녀의 말에 동의해 주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난 잘 부르는 것 같은데.”

말투와 표정으로 보건대, 그 말은 동정이 아닌 진심이 분명했다.

그 반응을 납득할 수 없었던 소라는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되물었다.

“저게 잘 부르는 거라고?!”

“응, 내 귀엔 괜찮게 들려.”

얼핏 들려온 나봄의 대답에 태오의 시선이 다시 그들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이어진 그녀의 뒷말은 태오의 마음속에 아주 깊숙이 콱 박혀 버린다.

“내가 태오 목소리를 좋아해서 그런가?”

쿵―

순간 그녀로 인해 내려앉아 버리는 심장.

하필 감성적인 간주 구간에서 흘러나와 버린 나봄의 말은 귀가 아닌 태오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들어 왔다.

고집처럼 안고 있던 생각들은 삽시간에 흐릿해지고, 눈빛은 휘둘리지 않겠다는 각오가 무색하게끔 하염없이 일렁인다.

'저건 별 뜻 없는 소리야.'

태오는 동요하는 자신을 애써 모른 척하기 위해 억지로 노래를 이어 불렀다.

“할아버지의 커다란 시계는…… 무엇이든지 알고 있지.”

그러나 그가 그러든가 말든가, 소라는 아랑곳 않고 장난스러운 질문을 이었다.

“단태오 목소리가 그렇게나 좋아?”

“어, 어?”

“어머, 단태오가 목소리로 우리 나봄이 취향을 저격했구나! 그랬구나!”

순간 왠지 기대감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이 들뜨는 만큼 태오의 기분은 최악으로 가라앉는다. 그런 의미 아니라는 건 태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태오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그녀들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헛소리만 늘어놓는 채소라의 입을 멈춰 두기 위해서였다.

“아…….”

그러나 곧바로 맞닿아 버린 시선은 소라가 아닌 나봄의 것이었다.

어쩐 이유에서인지 두 뺨을 붉히고 있는 그녀는 얼핏 보기에 수줍어하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흐려지는 숨소리도, 일렁이는 눈빛도, 지금의 나와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내가 돌았구나.’

태오는 가슴속에서 지병처럼 돋아나는 감정이 들킬까 싶어, 억지로 노래방 기기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비록 가사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적어도 나봄이 보이지 않으니 마음은 추스를 수 있을 터였다.

오기가 와르르 무너져 버리기 직전에 가까스로 붙잡은 정신.

조금만 더 동요했다가는 구질구질한 미련이 또 다시 폭발해 버릴 뻔했다.

이곳에 온 이유도, 밤새 한 다짐도, 전부 흐릿해지는 지금.

태오에게 필요한 건 나봄의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는 것이었다. 그는 마이크를 다시 야무지게 붙잡았고, 잠시 멈춰 놓았던 노래를 이었다.

“우리 할아버지 돌아가신 그날 밤…….”

“…….”

“종소리…… 울리며 그쳤네.”

그런데 가사가 왜 이리도 슬픈 건지.

이제 보니 이 노래는 어지간한 이별 노래보다 더 심오하고 우울한 내용이었다. 동화 같은 멜로디에 비해 죽음이라는 고차원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

“이젠 더 가질 않네…….”

“…….”

“가지를 않…….”

울컥―

결국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구쳐 버린 무언가가 시야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술기운에 섞여 시큰해지는 코끝은 분명 5년 전부터 계속 되어 온 주사의 예고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봄 앞에서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태오는 어떻게든 복받치는 감정을 참아 보려 했다.

“가…… 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애써 이어 보려던 목소리엔 이미 울음기가 가득 찬 상태였다.

심상찮은 그의 낌새를 눈치챈 소라와 나봄의 시선이 동시에 태오를 향했다.

“태, 태오야……?”

“어머.”

망했다.

이대로 나가서 죽어 버리고 싶다.

눈가에 무겁게 매달린 미련스러운 감정을 대놓고 닦을 수도, 그렇다고 해서 흘려 버릴 수도 없었던 태오는 결국 무턱대고 등을 돌렸다.

그 모습에 더욱 놀라 버린 나봄은 그를 달래 보려 했다.

하지만 나봄이 태오에게 향하기도 전에.

“어어…… 저기 말이야. 나 아주 중요한 메일 보내야 할 게 생각났어!”

소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

“이쯤에서 집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난 여기 있으면 안 돼!”

사실 눈치가 굉장히 빠른 그녀는 둘 사이에 흐르던 요상한 기류를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오고 가는 시선에 섞여 있는 달콤한 긴장감. 서로에게 다가가고 싶은 만큼 뒷걸음질 치게 되는 귀여운 소심함.

마지막으로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걸 표현하고는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눈빛까지.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요한 사실을 정작 당사자만 몰라서 보는 사람 속 답답하게 만들더니, 결국 성질 급한 단태오가 먼저 폭발해 버린 모양이다.

“바, 밖에 깜깜하지 않아?”

나봄은 떠날 채비를 하는 소라를 잡고 물었다. 걱정처럼 들리는 그 말은 사실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혼자 두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SOS와 비슷했다.

하지만 수습은 그녀의 몫이었다.

친구로서 이 상황까지 이끌고 와 준 걸로 할 도리는 다했다고 본다.

“어차피 둘이 할 얘기도 있다며!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잘하고 와! 그럼 난 이만 퇴장해 볼게!”

“저, 저기…… 소라야!”

쾅―!

소라는 나봄의 부름을 뒤로하고 서둘러 8번 룸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혹시나 나봄이 따라 나올까 싶어 재빠른 걸음으로 노래방 복도를 가로질렀다.

물론 무슨 일이라도 저질러 버릴 듯 위태로웠던 태오의 분위기가 신경 쓰이긴 하지만, 아마 엄한 짓은 못할 거라 확신한다.

짧은 시간이나마 면밀히 관찰한 단태오라는 남자는 비록 더러운 성질머리에 비해 참 순수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흐음, 어쩌면 차준 선배보다 더 나봄이랑 잘 맞을지도 모르겠어…….”

소라는 제법 확신 가득한 혼잣말을 하며 노래방 유리문을 열었다.

“사장님! 8번 룸에서 노래가 안 나오더라도 서비스 많이 넣어 주세요!”

완전히 밖으로 나가기 전, 카운터에 있는 주인아주머니께 오지랖을 떠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친구의 꽉 막힌 연애사까지 이렇게 뻥뻥 뚫어 주다니.

나는 아무래도 전생에 큐피드였나 봐.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도 잘 도와줄 수가 없어.

* * *

그나마 정적을 메워 주던 ‘할아버지 시계’ 반주도 끝이 났다.

덕분에 고요해진 8번 룸에선 잔뜩 젖어 버린 숨소리만 들려왔다.

나봄은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선 한동안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눈치를 살폈다.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 오른 이유를 알아야 위로를 해 주든, 격려를 해 주든 할 텐데. 완전히 돌아서 있는 그는 스스로 이유를 설명해 주진 않을 것 같다.

‘혹시 아까 그 노래가 너무 슬퍼서 그런가?’

혼란만이 가득한 머리로 그리 생각한 나봄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태오야, 괜찮아?”

“…….”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힘든 거야?”

그런 뒤 꺼내 놓는 걱정은 다정하고 따듯하고 상냥했다. 매사에 서툴고 사나운 태오가 무척이나 동경했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욱 힘겨워진 태오는 여전히 그녀를 등진 채 가까스로 흐린 음성을 흘려보냈다.

“할아버지 말고 내가 생각나…….”

“응?”

“벌써 9년 동안이나 멈춰 있는 내 시계가 생각나서 미칠 것 같다고…….”

그리 말하는 태오의 머릿속에는 슬픈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

‘저, 저기요?’

‘왜 자꾸 귀찮게 사람을…….’

‘가방 문 열렸는데…… 닫아드려도 될까요?’

봄꽃 같은 나봄을 처음 마음에 담았던 순간부터.

‘한나봄, 남자친구 있어?’

‘아, 아니. 없는데…….’

‘그럼 나 시켜 줘.’

‘뭐?’

‘대신 이거 너 줄게.’

기적적으로 내뱉은 고백에 화답 받았던 순간.

‘우리 만나기로 했던 거 말이야. 그거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

‘없었던 일로 하자니.’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을 때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나 얼마 못 가 곧바로 버려졌던 순간까지.

너를 사랑한 시간은 강산이 변할 만큼 긴데, 너와의 추억은 형편없을 만큼 적다.

내 전부를 가져가 놓고서 단 한 줌의 정조차 주지 않은 넌, 매사에 상냥하고 다정하고 따듯해서, 내겐 더 해로운 사람이다.

그래서 난 지금 니가 참 미워. 이렇게 다가와 놓고 내일이면 또 다시 어제처럼 나를 버릴 니가 정말 원망스러워.

오랜 짝사랑에 지친 태오는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더는 억누르지 못했다.

“한나봄.”

“응.”

“내가 얼마나 널 좋아했는지 아냐?”

“어……?”

그래서 무턱대고 쏟아 내기 시작한 진심.

그걸 듣는 나봄의 눈동자가 점점 커다래졌다. 그녀는 숨까지 멈춰 버릴 만큼 놀란 상태였으나, 태오는 아랑곳 않고 뒤를 돌아 축축이 젖은 눈으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얼굴은 엉망이 되어 있을 게 분명했지만 그런 걸 생각할 여유 따윈 없었다.

“자그마치 9년이다. 우리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을 적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좋아했어. 정말 하루도 쉬지 않고…….”

“…….”

“난 니가 내 고백을 받아 줬던 날도 똑똑히 기억해. 너한테는 실수로 남았을지 몰라도 나한테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던 기적이었으니까.”

“아…….”

하지만 그 기적을 거머쥐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오는 그녀에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추억을 만들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2주밖에 없었고, 그동안 데이트는 단 두 번밖에 하지 못했다.

그마저도 첫 번째 데이트 때는 너무 긴장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었고, 두 번째 데이트 땐 많은 것을 준비해 갔지만 만나자마자 헤어지자는 말부터 들어야 했다.

그렇게 태오는 다시 그녀의 그림자가 되었다.

3년 동안 머물렀던 그늘진 세상은 겨우 2주 만에 세상에서 가장 차갑고 쓸쓸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그 뒤로 이어진 차가운 시간 속에서, 태오는 나봄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왜…… 날 그렇게 버렸어?”

“태오야…….”

“왜 나한테는 사랑받을 기회도 안 줬어?”

“…….”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아주 가끔씩 꿈에서 그녀가 나올 때마다 원망 섞인 목소리로 던졌던 질문.

꿈속의 그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바로 지금처럼.

“넌 진짜 나쁜 가시나야.”

“…….”

“넌 정말…… 정말 내 인생에서 최고로 못된 가시나야.”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을 만큼 비참해진 태오는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봄은 그런 그의 까만 정수리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울음 섞인 태오의 숨소리와 달리 차분하기만 한 나봄의 숨은 태오를 다시 겁쟁이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지금 니가 무슨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지, 확인할 자신이 없다.

“그런데…… 니가 아직도 좋아.”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내뱉어 버린 고백.

이렇게 구차하게 매달리면서 얘기하고 싶진 않았는데 결국 이 꼴이 되어 버렸다. 나는 아무래도 너의 앞에선 도무지 모질어질 수가 없나 보다.

“니가 좋다고…….”

한 번 더 읊조린 그의 진심은 혼잣말과 비슷했다. 애초부터 그녀의 대답을 바라지 않고 내뱉은 것이니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태오는 긴 한숨으로 고백의 마침표를 찍었다.

이제 드디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상처 받아야 할 시간.

각오는 되어 있지만 역시나 무서웠다. 그리고 상상했던 것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아팠다.

‘차라리 서러워도 참고 살걸…….’

하는 후회가 절로 들 만큼.

그런 태오 앞에서 나봄은 무릎을 구부려 앉았다.

“그렇게 나쁘고 못됐는데…… 내가 왜 좋아?”

이내 조심스레 입술을 열어 꺼내 놓는 질문은 태오조차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보았던 질문이었다.

다행히 답은 얼마 전에 가까스로 나왔다.

“몰라.”

“…….”

“그래서 싫어하는 법도 모르고 살잖냐…….”

군더더기 없이 솔직한 그의 대답을 들은 나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흘러나오는 숨소리만으로는 어림잡아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 침묵의 무게감을 참지 못한 태오는 물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사람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그러고는 푹 숙여 놨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아…….”

놀랍게도 그의 시선에 가득 들어차는 건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녀의 얼굴이다.

새빨갛게 피어난 장미처럼 붉어질 대로 붉어진. 바람에 휩쓸린 파도처럼 넘실넘실 일렁이는.

누가 봐도 그에게 잔뜩 동요해 버린 그녀가 작은 입술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

“모르겠어…….”

그렇게 불확실한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그에게 또렷이 고정되어 있는 눈동자엔 분명 선명한 감정이 담겨 있다.

그걸 발견한 태오는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드디어 깨달았다.

술김인지, 홧김인지, 아니면 정말 단단히 돌아 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 지금 너한테……

“……키스해도 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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