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이 답답이들을 어쩌면 좋아
2017.09.04.
“그래서, 나봄이랑 썸은 언제부터 탄 거야?”
소라의 난데없는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쿨럭!”
갑작스럽게 기침을 하는 나봄 옆에서 방심하고 있던 태오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들고 있던 막걸리 병을 차마 내려놓지도 못한 채.
“썸이라니…… 그런 사이 아니야!”
그런 그를 알아챈 나봄은 고개까지 도리도리 흔들어 가며 소라의 의심을 부인했다.
그러나 소라는 나봄의 반응은 본체만체하고 태오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목구비가 저리도 사납게 생긴 주제에, 귀까지 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모습이 아주 볼 만했다.
저건 누가 봐도 마음이 있는 건데, 한나봄 눈에는 그게 안 보이는 걸까.
“흐응. 그게 아니면 대학 동창이 금요일 밤에 집 앞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잖아.”
소라는 나봄을 일깨워 줄 심산으로 예리한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러자 나봄은 해명이랍시고 상황을 더욱 꼬아 놓는 대답을 내뱉었다.
“나한테 고백할 게 있다고 해서 온 거야.”
“뭐어?! 고백?!”
“아앗! 그런 쪽의 고백은 아니고!”
야, 그런 쪽의 고백 맞아.
태오는 불쑥 내뱉을 뻔한 한 마디를 간신히 삼켜 냈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빛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애썼다.
오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찾아온 태오였지만 소라 앞에선 조심성 있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한나봄은 그의 마음을 짐작도 하지 못해서 별 신경 안 쓴다고 해도, 기 센 그녀의 친구 소라는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닌 것 같으니.
“일 때문에 온 거다.”
태오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라는 더욱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일?”
“회사 일.”
“너 나봄이 아버지네 회사 직원이야?”
“아니, 그 회사 협업 업체 우드레일 현장팀인데.”
“아아, 차준 선배네 회사 직원이구나?”
선우차준의 회사 직원.
그건 맞는 말이었으나 태오의 마음에 드는 말은 아니었다. 어제의 사건으로 인해 차준은 그에게 철천지원수보다 더 만나기 싫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태오는 차준의 존재를 아는 소라에게 한층 딱딱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선우차준에 대해 알고 있으면 쓸데없는 의심은 하지 말지.”
“…….”
“그 인간이 한나봄이랑 무슨 사이인지는 너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소라에게 알아들으라고 한 소리였으나, 그 말에 반응하는 건 나봄이었다.
나봄은 태오가 확신을 가지고 내뱉는 저 말이 어제 일 때문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어제 단태오 앞에서도 차준 오빠를 찾았나 보다.
그렇게 알아 버린 순간 어째서 심장은 쿵 떨어져 내리는 건지.
태오를 바라보는 나봄의 눈빛이 바람 앞 촛불처럼 흔들렸다.
하지만 그에 비해 태오의 눈빛은 새벽달처럼 고요해서, 나봄은 그 불안한 마음을 표현할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아니라고 말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문득 스친 생각은 그녀의 마음을 오해하지 말아 달라는 뜻과 비슷했다.
그 절실함은 태오에게 맺힌 시선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떨리는 나봄은 지금 옅게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지켜보고 있다.
그의 긴 속눈썹, 흑연처럼 새까만 눈동자, 마른침을 삼킬 때마다 움직이는 목젖.
평소에도 줄기차게 봐 왔지만 좀처럼 눈에 띄진 않았던 단태오의 모든 것들을 아주 은밀하게.
물론 그녀는 이런 자신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빼앗긴 시선을 쉽사리 거두지 못하고 있던 그때.
“한나봄, 거기 물 좀.”
예상치 못하게도 태오의 고개가 나봄을 향해 틀어졌다. 또렷이 마주한 얼굴은 나봄의 심장을 쿵―! 떨어지게 만들었다.
“아…….”
“왜, 내 얼굴에 뭐 묻었냐.”
화아아악!
“나,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두 뺨을 달구는 열기는 술기운과 비슷했다. 제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는 걸 직감한 나봄은 소라와 태오만을 남겨 두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나봄이 꽤 오랫동안 자신을 훔쳐보고 있었다는 걸 모르는 태오는 걱정 어린 혼잣말을 내뱉었다.
“술병이라도 났나…….”
그들의 이런 모습을 관객처럼 지켜보고 있던 소라의 입술 새로 깊은 탄식이 샜다.
“하이고야…….”
태오는 금세 날이 선 표정으로 소라를 쏘아붙였다.
“넌 땅 꺼지게 웬 한숨이야.”
“이 답답이들을 어쩌면 좋아.”
“갑자기 뭔 소리야, 그거.”
굉장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의 이 장면만으로도 소라는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나봄이 왜 겨우 재회한 차준을 혼란스럽게 여기는지. 어째서 차준의 고백을 반가워하지 못했는지.
그는 왜 이곳에 찾아왔고, 낯을 많이 가리는 나봄은 왜 친하지도 않아 보이는 그를 스스럼없이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는지.
“아, 왜 그런 표정으로 보냐.”
“됐다. 아가들 문제는 아가들끼리 풀게 놔둬야지.”
“뭐, 뭐? 아가?”
하지만 말해 주지는 않을 생각이다.
부딪혀 가며, 실수해 가며, 때로는 후회하고 때로는 기회를 놓쳐 가며 잡은 인연일수록 더욱 특별해지는 법이니까.
“술이나 마시자. 너 오늘 필름 끊길 때까지 마셔야겠다.”
“싫어. 막걸리 뒤탈 심해.”
“아가야. 가끔은 술기운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란다.”
소라는 태오의 빈 잔을 걸쭉한 막걸리로 다시 채워 주었다.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쩐지 취하고 싶었던 태오는 별 반항 없이 순순히 술을 받았다.
다른 술보다 막걸리에 특히 훅 가는 자신을 잘 알면서도.
* * *
삐― 삐― 삐― 삐―
규칙적인 기계음이 들리는 VVIP 개인 병실.
긴 잠에 빠져 있던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때마침 링거액을 갈아 주고 있던 간호사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어?”
하지만 그러고도 한동안 다시 미동이 없는 그는 여전히 코마 상태였다.
“잘못 봤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간호사는 주름진 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재차 불렀다.
“서재균 회장님. 서재균 회장님.”
바로 그때.
“…….”
오랜 시간 감겨 있던 눈꺼풀이 스르륵 위로 치켜 올려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간호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회, 회장님! 정신이 드세요?”
“…….”
“제 목소리가 들리시면 눈 한 번 떴다 감아 주세요.”
깜―빡.
서 회장은 느리지만 분명하게 눈을 떴다 감았다. 간호사에게 또렷이 향해 있는 시선은 다행히 정신도 멀쩡하다는 걸 뜻했다.
대체 몇 명의 전문의가 달려들어 그의 의식을 찾아 주기 위해 애썼던가.
간호사는 그간의 부담감과 마음 졸였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비상벨을 눌렀다. 그리고 그의 쾌차를 누구보다 기다리고 있었을 담당 의사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선생님, 서재균 회장님 깨어나셨어요!”
그 반가운 음성은 문 밖을 지키고 서 있던 경호실장에게도 들렸다.
경호실장은 곧바로 서 회장이 누워 있는 병실 안으로 들어왔고, 그의 상태를 유심히 살펴보며 간호사에게 물었다.
“정말 깨어나신 거 맞습니까? 특별한 이상은 없나요?”
“좀 더 검사해 봐야겠지만 반응은 정상이에요. 담당의를 호출해 두었으니까 금방 오실 거예요.”
“나도 서 대표님께 연락을 드려야겠군…….”
경호실장은 간호사만큼이나 다급한 손길로 휴대폰을 꺼냈다. 그 순간 힘겹게 들어 올려진 서 회장의 손이 제 산소호흡기를 톡톡 쳤다.
“지금 바로 호흡기를 제거하는 건 위험한데…….”
그 의미를 알아들은 간호사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경호실장이 보기에 서 회장은 지금 눈빛만으로 단호한 명령을 내리는 중이었다. 그의 말엔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경호실장은 망설이는 간호사에게 힘주어 말했다.
“제거하십쇼. 회장님이 원하십니다.”
“아…… 네, 그럼.”
간호사는 서 회장의 입을 가로막고 있던 산소호흡기를 조심스럽게 제거했다. 드디어 호흡이 자유로워진 서 회장은 메마른 입술을 적셨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었지.”
“심장 수술 하신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주가가 많이 떨어졌겠구만.”
역시 대기업의 총수답게, 서 회장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회사의 안위부터 걱정했다. 경호실장은 그런 그에게 걱정 말라는 듯 대답했다.
“회장님의 상태에 대해선 김 실장님이 제대로 입단속을 시켜 두었습니다. 덕분에 주가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다행이군…… 그동안 특별히 문제될 만한 사항은 없었나?”
“네, 제가 전해 들은 바로는 회장님이 신경 쓰실 만한 부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확답을 듣고서야 서 회장의 눈에 서려 있던 냉기가 한결 잦아들었다.
아마 자그마한 문젯거리라도 만들어 뒀다가는 이 자리에서 뼈도 못 추리고 모가지가 잘려 나갔을 거다.
경호실장은 이제야 한시름을 놓으며 흐트러진 서 회장의 이불을 정리해 주었다.
“곧 담당의가 와서 회장님의 건강을 체크할 겁니다. 그 전에 서 대표님께 회장님이 의식을 되찾으셨다는 소식을 전달해 놓겠습니다.”
서 회장은 대답 대신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묵직한 음성으로 두 번째 명령을 내렸다.
“아니, 쓸모없는 놈들은 들이지 마.”
그의 매정한 태도는 마지막 기억과 관련이 있었다.
그가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전, 서 회장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태준을 집안에서 내쫓으려 했고, 서미란 대표는 그걸 막기 위해 그에게 언성을 높여 맞서 싸웠다.
‘함부로 태준이 이름 입에 담지 말아요!’
‘뭐?’
‘내 새끼한테 상처 주는 건 아무리 아버지라도 용서 못 합니다!’
‘이, 이 버르장머리 없는 것이……!’
그때를 회상한 서 회장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선우태준에 관한 문제는 지난 10년간 가장 골머리를 썩혀 왔던 것이었지만, 그가 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 한 달 내에 뿌리 뽑아 버릴 생각이다.
발악했던 만큼 잔혹하고 잔인하게.
“당장 선우차준 이사를 불러와.”
서 회장의 서슬 퍼런 음성이 꺼내졌다. 그가 집안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순순히 그의 뜻에 따라 준 차준이 전부였다.
비록 깨어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독기를 품은 눈빛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모든 일을 다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그가 쾌차되는 대로 우드레일엔 대형 피바람이 불지 모른다.
경호실장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얼어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제야 서 회장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
미간에 잡힌 주름은 지나온 세월을 보여 주듯 사납고 짙었다.
* * *
“다들 그만 좀 마셔. 너무 취했어.”
“에이, 나는 아직 멀쩡해! 단태오라면 모를까!”
“너보단 내가 더 멀쩡하거든.”
너무 많이 먹는 것 같다 싶더니 술판이 거대해졌다.
처음엔 저녁 식사에 가벼운 반주를 곁들이는 수준인 줄 알았더니만, 하염없이 막걸리를 주고받던 태오와 소라는 어느새 거나하게 취해 버렸다.
“오오, 멀쩡하면 조금 더 달릴 수 있겠네! 어디 한 번 주량의 끝을 보자!”
하지만 소라는 아직도 알코올이 부족한지 막걸리 한 병을 더 집어 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병은 벌써 텅텅 비어 있었다. 소라는 아쉬움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빈 병을 멀리 굴려 버렸다.
“아이고, 술이 떨어졌네. 단태오, 니가 나가서 사 와야겠다.”
“이 동네 슈퍼가 어디 있는지 알고 내가 나가.”
“요 앞에 골목 돌면 바로 보여. 자, 어서 출발!”
소라가 그녀보다 훨씬 적게 마신 태오를 심부름 보내려 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봄은 기가 찬 표정으로 핀잔을 주었다.
“여기서 더 마시게? 사 온 것도 벌써 다 비워 버렸으면서!”
“에이, 처음부터 얼마 없었어.”
“무슨 소리야! 아빠도 막걸리 좋아해서 일부러 여섯 병짜리 세트로 사 왔는데!”
“여섯 병밖에 없었으니까 금방 마시지!”
태오는 그녀들의 실랑이를 지켜보며 찬 물로 입 안을 헹궈 냈다.
그리고는 흔적도 남지 않은 빈대떡과 반찬들을 확인하고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주도 떨어졌는데 술판은 이쯤에서 접지?”
“단태오, 뭐야. 너 지금 치사하게 나봄이 편드는 거야?”
“편, 편을 들다니…… 무슨 유치원생이냐?”
태오는 소라의 지적을 정색하고 받아쳤지만 내심 마음이 찔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어차피 이렇게 편히 어울리는 것도 오늘로써 마지막인데, 잘 보일 필요도 없으면서 왜 눈에 어긋나고 싶지는 않은 건지.
‘정신 똑바로 차려. 난 지금 한나봄이랑 연을 끊으러 온 거야.’
태오는 어느새 약해져 있던 각오를 다시 다잡았다. 그리고는 다소 차가운 표정으로 단호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 여기 술 먹고 놀자고 온 거 아니야.”
하지만 그 매정한 말을 들은 소라의 입가엔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 맺히는가 싶더니.
“그래! 술을 먹었으면 놀아야지! 좋아, 술판 접는 대신에 노래방 어때?”
아주 난데없을 만큼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그건 소라가 노래방에서 얼마나 재미있게 노는지 알고 있는 나봄에게 꽤 구미 당기는 제안이었으나, 태오로서는 어떻게든 피해야 할 위기 상황이었다.
“노래방은 절대 안 가.”
태오는 두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고 매정히 거절했다. 그러자 소라는 까르르 웃으며 물었다.
“왜? 너 설마 음치라서 그래?”
“음치 아닌데.”
“괜찮아. 노래 못 불러도 비웃지 않을게.”
“음치 아니라니까!”
“음치가 아니면 왜 빼는 건데.”
“그거야…….”
술 먹고 노래방 가면 이별 노래 부르면서 질질 짜는 게, 내가 가진 유일한 술버릇이니까.
머릿속에 떠오른 대답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태오는 소라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누가 봐도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표정으로 뒷말을 얼버무렸다.
“시끄러운 데 가면 귀 아파서…….”
비록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이었지만 흔들리는 태오의 눈빛은 신빙성을 더했다.
“너 귀가 안 좋아?”
그래서 나봄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으니, 소라가 대뜸 정색을 했다.
“넌 저 말을 믿니, 나봄아?”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자.
태오는 자꾸 정곡만 콕콕 찔러 대는 소라를 까칠하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소라는 그걸 마주하면서도 아랑곳 않고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럼 넌 귀 막고 앉아 있으면 되겠다.”
“뭐, 뭐?”
“어차피 나봄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나갈 거 아냐. 일단 다 같이 노래방 갔다가, 상황 봐서 나 내버려 두고 얘기 나누고 오든가 해.”
그리 말하며 나봄부터 일으켜 세우는 소라는 꼭 꿍꿍이라도 있는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음흉한 눈웃음을 계속 유지하고 있을 리가 없다.
“우리 얼마 만에 노래방 가는 거지? 거의 세 달 됐지?”
“그쯤 됐을걸. 프로젝트 준비 들어간 뒤로 거의 여유가 없었으니까.”
“와우! 정말 신난다! 오랜만에 목 디스크 춤 보여 줄게!”
“하하, 나 그거 되게 좋아.”
들뜬 소라와 나봄을 지켜보던 태오는 마지못해 느린 발걸음을 옮겼다.
슬슬 취기가 돌고 있는 머릿속에선 벌써 그를 서럽게 만드는 수많은 이별 노래 가사들을 떠올리고 있었으나, 태오는 애써 깨끗이 지워 냈다.
그래, 문제는 노래방이 아니라 이별 노래야.
술 취한 상태에서 슬픈 노래만 안 부르면 못 볼 꼴 보이지 않고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어.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 나올 수 있다고 했잖아.
마음을 다잡은 태오의 표정이 차분해졌다.
그건 바로 한 시간 뒤, 꿈에서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일이 본인에게 닥쳐올 줄도 모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