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이러려고 온 건 아닌데
2017.09.01.
♩♪♬♩♪♬―
침대 위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모처럼 방을 정리하고 있던 나봄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곧바로 휴대폰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액정 위에 선명하게 떠오른 이름 석 자는 내심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차준 오빠…….”
어제 그 술자리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그녀를 데려다주었던 선우차준.
안 그래도 정황이 궁금했던 나봄은 짧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봄아, 일어났어? 머리는 좀 어때?
아니나 다를까.
통화가 시작되자마자 차준은 어제 필름이 끊겼던 그녀의 몸 상태부터 물어보았다. 아직 머리가 지끈거리긴 했으나 괜한 걱정을 사고 싶진 않았던 나봄은 최대한 멀쩡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푹 자고 일어났더니 괜찮아요.”
―다행이네. 어제 너무 취했던 것 같아서 하루 종일 걱정했어.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사실 기억이 잘…… 만취하면 필름이 끊기는 타입이었나 봐요.”
―아아, 그렇구나.
그리 답하는 차준에게선 얼핏 아쉬움이 비쳐 나왔다.
―그럼 어제 일도 기억 안 나겠네.
곧바로 이어 내는 말도 왠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안 그래도 까맣게 잊어버린 술자리의 기억을 궁금해하고 있던 나봄은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차준은 부드러우면서도 또렷한 음성으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니가 날 찾았어. 애타게.
“……네?”
―그래서 내가 바로 데리러 갔어. 나 잘했지?
내가 차준 오빠를 찾았다고?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들은 나봄은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예전에 소라랑 술을 마실 때에도 종종 술기운에 차준 얘기를 꺼내긴 했었지만, 그땐 차준을 영영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진심으로 그리워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재회한 그와 애매해서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으니, 그때처럼 찾아 헤매지는 않을 줄 알았건만.
“죄, 죄송해요. 제가 취해서 잠깐 어떻게 됐었나 봐요. 유리 씨랑 단 팀장님도 같이 계신 자리였는데…….”
지난 일을 습관이 불러온 실수라 확신한 나봄은 서둘러 사과부터 했다.
그러자 차준은 의아함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단 팀장님이라면 단태오?
“네, 어제 현장팀이랑 친목 도모 비슷하게 모였거든요.”
―…….
“여보세요? 본부장님?”
―어, 듣고 있어. 단태오 팀장이 같이 있었다는 얘기는 듣질 못해서.
응? 어제 나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면서, 단태오는 못 마주쳤던 건가?
차준이 품은 의문은 나봄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차준은 이내 다시 가라앉았던 음성을 높여, 나봄을 달래 주었다.
―그래도 나는 기분 좋았어. 넌 평소에 너의 마음이 어떤지 내색을 잘 안하잖아.
“…….”
―이제 보니 술이 들어가니까 솔직해지는 타입이었나 봐.
그의 말에 나봄은 차마 어떤 대답도 꺼내 놓을 수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기엔 스스로의 감정이 정말 그를 찾아 헤매던 때와 다르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아니라고 선을 긋기엔 그를 애타게 찾았다는 어제의 자신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잠시 입술을 벌린 채 말을 고르고 있던 나봄은 겨우 난처함을 감추고 대답했다.
“앞으로는 조심해서 마셔야겠네요. 또 다시 이런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
굳이 ‘폐’라는 단어를 넣은 건 어제의 일이 관계의 진전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서로에게 남아 있는 감정은 작은 불씨 하나에도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오르고 말 테니.
비록 무의식의 나는 그를 원하고 있을지 몰라도, 말짱한 이성이 돌아온 나는 정확히 알고 있잖아. 그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인지.
뚜― 뚜― 뚜―
때마침 그녀의 휴대폰에 다른 전화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나봄은 때를 놓치지 않고 차준에게 마무리 인사를 건넸다.
“저 중요한 전화가 도착해서요.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나봄아.
그러자 차준은 그 인사를 받아 주는 대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 뒤 이어 내는 목소리는 왠지 평소보다 가벼우면서도 나긋했다.
―또 내가 보고 싶어지면 언제든 불러 줘. 어제처럼 내가 바로 달려갈게.
예전엔 이런 낯 뜨거운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 놓는 그가 참 여유로워 보였었는데.
지금은 어쩐지 초조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그를 보는 내 마음이 전과 달리 불안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
―그럼 얼른 전화 받아. 끊을게.
무슨 대답이라고 하려 했는데 차준은 언제 붙잡았었냐는 듯 서둘러 전화를 끊어 버렸다.
차라리 그게 다행이었던 나봄은 흐린 한숨을 내쉬고 다음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뭐야!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귀를 파고드는 커다란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소라였다.
오늘따라 잔뜩 신이 나 있는 나봄의 가장 가까운 절친.
나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층 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응,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 갑자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오늘 너희 아버지 출장 가셨잖아!
“어, 그런데?”
―오늘 우리끼리 불타는 밤 보내기로 한 거 잊었어? 나를 위한 파티를 열어 주겠다며! 이 기지배야!
아, 맞다.
뒤늦게 소라와의 약속을 기억해 낸 나봄의 눈빛에 난처함이 어렸다. 신경 쓰이는 일도 있고 지나친 과음으로 몸도 안 좋아서, 오늘은 도저히 그녀와 밤새 어울려 놀 컨디션이 아니었다.
“저기, 소라야…….”
그래서 최대한 미안한 기색을 띤 채 약속을 다음으로 미뤄 보려 막 입을 뗀 순간.
―야야, 이제라도 기억했으면 됐고! 나 지금 칼 퇴근해서 이제 막 택시 타고 가는 중이야. 우리 회사 근처에서 파는 기가 막힌 빈대떡 샀으니까 기대해도 좋아.
“버, 벌써 뭘 샀어?”
―당연하지! 아참, 주종은 막걸리로 정했으니까 니가 좀 사 놔라!
소라가 잔뜩 들떠 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에 회사 일이 바빠 스트레스가 많다고 하더니, 오늘 전부 발산해 낼 모양이었다.
하긴, 저번에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 준 게 고마워서 그녀만을 위한 파티를 열어 주겠다고 선언한 건데. 갑자기 취소해 버리는 건 너무 양심 없는 일이지.
“아…… 그래, 알았어. 삼십 분쯤 걸리지?”
―응, 차만 안 막힌다면.
“고속도로만 잘 타면 안 막힐 거야. 그럼 이따 봐.
결국 나봄은 머리가 아픈 와중에도 약속을 취소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홀로 느긋하게 쉴 수 있는 날이 아닌 것 같다.
―좋았어! 이따 너희 집 앞에 거의 도착했을 쯤에 다시 전화할게!
소라는 씩씩한 목소리로 집 앞에서 전화하겠다고 말했고, 그건 너무 신경 쓰이는 나머지 잠시 덮어 두고 있던 존재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따 단태오가 뭔가를 따져 물으러 내게 올 모양이던데. 이따가 그 애도 잠깐 보러 나갔다 와야겠네.
“일단…… 장부터 보고 올까?”
나봄은 아직 머릿속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옷을 챙겨 입기 위해 옷장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바라본 창밖의 하늘은 아직 해가 지지 않아 마냥 밝기만 했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가슴이 이상할 정도로 조여들기 시작한다.
이러한 반응은 오늘 꿈에도 상상한 적 없던 엄청난 일이 그녀에게 들이닥칠 거라는 예감이었지만.
“속이 너무 울렁거리네. 숙취 해소 음료라도 마셔야겠다.”
자신의 촉을 믿지 않는 나봄은 딱히 신경 쓰지 않고 넘겨 버렸다.
앞일을 미리 내다볼 수 있었더라면, 그녀가 가장 아끼는 복숭아 향 립밤을 주머니에 챙겨 넣었을 텐데.
* * *
“얜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퇴근하자마자 나봄의 집 앞으로 차를 몰고 온 태오가 말했다.
벌써 세 번이나 통화를 시도해 보았건만, 일부러 피하는 건지. 아니면 무슨 일이 생겨서 못 받고 있는 건지.
초조해하던 태오는 담벼락으로 가까이 붙었다.
하지만 집 안 창문은 죄다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서 좀처럼 안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딱히 전등을 켜 놓을 만큼 어두운 시간대도 아닌지라, 그녀가 안에 있는지 없는지도 분간이 안 간다.
“하아.”
탄식과 비슷한 한숨을 내쉰 태오는 매달려 있던 담벼락에서 물러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았는데.
“너 거기서 뭐하세요?”
누군가의 앙칼진 목소리가 공격적으로 튀어나왔다. 깜짝 놀라 바라본 곳에는 화려하게 꾸민 웬 여자 하나가 그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그냥 좀…….”
너무 당황한 태오는 똑바로 해명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여자는 더욱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몇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선 잡아먹을 듯 두 눈을 빛내며 태오를 다시 한 번 추궁하기 시작했다.
“남의 집 담벼락에 달라붙어서 그냥 좀 뭐하셨는데요?”
“아…….”
“혹시 넘어가서 뭐라도 좀 훔쳐 나오려고 했나?”
“뭐, 뭐? 아니,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닙니다.”
뒤늦게 그녀가 자신을 도둑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안 태오는 정색을 하고 부인했다.
하지만 소라는 그를 곧이곧대로 믿어 주지 않고 사납게 따져 물었다.
“그럼 뭐하느라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한나봄 있나 없나 확인했다, 왜.”
“그러니까 그걸 왜 확인하냐고. 나봄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길래.”
“대학 동기…….”
“거짓말! 한나봄은 대학교에서 남자랑 손끝 하나 안 스친 애야! 집까지 찾아올 남자 동기가 있을 리 없어!”
그 말을 들은 태오의 눈썹이 노골적으로 구겨졌다.
대학교 때 남자랑 손끝 하나 안 스쳤다는 얘긴 태오와 나봄이 사귄 2주의 시간을 완벽하게 부정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심기가 불편해질 대로 불편해진 태오는 소라를 향해 잡아먹을 듯 이빨을 드러냈다.
“하나가 있었는지 둘이 있었는지 그쪽이 어떻게 알아. 그리고 난 오늘 한나봄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거니까 괜히 생사람 잡지 마.”
한층 날카로워진 태오의 음성은 소라의 신경을 건드렸다.
집 안을 확인하고 있던 표정이 어쩐지 심상치 않더니만, 역시 나봄을 좋은 의도로 찾아온 건 절대 아닌 모양이다.
굳이 말하자면 스토커. 그것도 아주 난폭한 성질머리를 가진 스토커인 게 분명해.
“할 얘기가 있으면 잠자코 기다릴 것이지! 어디서 몰래 담을 넘으려 들어!”
태오를 다신 얼씬도 못 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한 소라는 보다 언성을 높였다.
“담 넘으려던 거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냐!”
하지만 그에 반박하는 태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게 거칠었다.
이대로라면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그 일촉즉발의 순간.
“어? 둘이 여기서 뭐해?”
두 사람 모두에게 반가운 목소리가 골목 끝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한창 다투던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기척이 들려온 쪽으로 틀어졌다.
그런 그들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오늘따라 더욱 순해 보이는 게, 토끼가 따로 없는 나봄이었다.
“하, 한나봄…….”
그녀에게 고백을 할 생각으로 찾아왔던 태오는 갑작스러운 조우에 습관적으로 긴장해 버렸다. 원래는 잔뜩 분위기를 잡고 왔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나서 마음을 흩트려 놓은 요란한 여자가 다 망쳤다.
하지만 태오의 그런 세세한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소라는 나봄을 보자마자 확인 작업부터 거쳤다.
“나봄아! 이 남자랑 아는 사이 맞아? 오늘 니가 불렀어?”
그러자 나봄은 난처한 눈빛으로 태오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술을 떼어 냈다.
“내가 부른 건 아닌데…….”
“역시 네 이놈……!”
“오늘 만나기로 한 건 맞아. 인사해, 대학 친구 단태오야.”
“으, 응?”
조곤조곤하게 꺼내진 나봄의 설명을 들은 소라는 두 눈을 휘둥그레 치켜떴다.
그러고는 나봄과 태오의 얼굴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영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은 마치 초식동물과 육식동물 같았다.
한나봄은 이런 녀석이랑 어떻게 친해진 거지? 얜 겁이 많아서 거친 성격이랑은 영 안 맞는데 말이야.
소라는 나봄의 설명을 들어 놓고서도 한동안 둘 사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새 태오 앞으로 다가선 나봄은 긴장감은 느껴져도 두려워 보이지는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 전화 많이 했었지? 휴대폰을 놔두고 나가는 바람에 못 받았어.”
그러자 언제 성질을 부렸다는 듯 급격히 온순해지는 단태오의 눈빛이 굉장히 신기하다.
딱히 무슨 대꾸를 하진 않아도 쓱 눈길을 피해 버리는 그는 이제 보니 야생의 맹수가 아니라 주인에게만 쩔쩔매는 충견이다.
‘오호라, 딱 촉이 오네.’
그런 태오를 지켜보던 소라는 별안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순간 소라를 바라보는 태오의 눈엔 다시 예리한 날이 섰지만.
“야, 도둑괭이.”
“도둑괭이라니. 누구더러 지금…….”
“너 저녁밥은 먹었니? 안 먹었으면 빈대떡에 막걸리나 걸치고 가라.”
그녀가 이어 내는 권유는 그를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뭐? 저녁밥?”
한나봄과 연을 끊어 버릴 생각으로 찾아온 마당에 저녁밥이라니…….
이건 당연히 냉정하게 거절해야 하는 권유가 맞았다. 그러나 태오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나봄은 싱긋 미소 띤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시간 괜찮으면 그렇게 해. 어차피 나한테 할 얘기도 있다며.”
“아니, 그게…….”
“어차피 약속 잡고 온 거라며. 그럼 한가하겠지. 나봄아, 얼른 대문 열어라. 팔 빠지겠다.”
그는 아직 무슨 대답을 하지도 않았는데 둘은 확정된 것처럼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런 전개로 가 버리면 이따가 매정한 굿바이 인사를 건넬 수가 없을 텐데.
“어이, 얼른 안 들어오냐! 배고파 죽겠다!”
“태오야, 들어오면서 대문 좀 닫아 줄래?”
하지만 거절할 타이밍을 놓친 태오는 결국 순순히 대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그래도 제 마음을 다잡는 건 잊지 않았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한나봄과 연을 끊고 만다.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천지가 개벽할 일이 생길지라도 반드시!
* * *
“자, 다 같이! 짜안!”
아, 이런 분위기로 흘러가면 안 되는데.
소라가 호쾌하게 내미는 막걸리 잔에 건배를 하며, 태오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예상치 못하게 나봄의 집까지 입성해서 술까지 얻어먹고 있는 지금.
모든 걸 다 끝내러 온 것치고는 굉장히 분위기가 좋아서 태오에게는 큰일이었다. 그건 아마도 혼자 신이 난 나봄의 친구, 채소라의 탓일 것이다.
“크으! 역시 시원하다! 내일 숙취가 걱정되긴 하지만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니까! 그치?!”
얜 왜 이렇게 텐션이 높냐.
태오는 귀청을 때리는 소라의 목소리에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비워 낸 잔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소라는 하, 코웃음을 쳤고, 태오의 잔을 반만 채워 주었다. 그러고서 하는 말은 그를 굉장히 억울하게 만들었다.
“너 술 못 마시는 구나? 알았어, 알았어. 이 누나가 다음 잔은 조금만 따라 줄게.”
“그런 거 아니거든?”
“에이, 고작 막걸리 한 잔에 오만상을 쓰면서.”
“니 목소리가 너무 우렁차서 눈살이 찌푸려진 거다. 뭘 알고나 말해.”
태오는 오기 섞인 손끝으로 막걸리 병을 붙잡아 직접 나머지 반을 채워 넣었다.
그 모습이 더 우스웠던 소라는 푸핫 웃음을 터트리며 제 잔을 건넸다.
“그럼 다행이네. 나봄이는 주량이 형편없어서 맨날 혼자 마시기 심심했는데.”
“어이가 없네. 누가 같이 마셔 준대?”
“넌 원래 그렇게 성격이 까칠하니, 아니면 내가 도둑놈 취급해서 삐친 거니?”
“둘 다 맞으니까 더 건드리지 말고 술이나 마셔.”
두 사람의 관계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쉽게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순순히 소라에게 막걸리를 따라 주는 태오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아서, 나봄은 마음 놓고 빈대떡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그리고선 술 대신 사 온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려는데.
“그래서, 나봄이랑 썸은 언제부터 탄 거야?”
소라의 난데없는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쿨럭!”
갑작스럽게 기침을 하는 나봄 옆에서 방심하고 있던 태오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들고 있던 막걸리 병을 차마 내려놓지도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