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넌 나에게 돌아와 줄 거잖아.
2017.08.28.
끼익―
무방비한 그녀를 태운 차가 드디어 멈추었다.
“하아…….”
차준은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운전대를 내려놓았고, 떨리는 눈빛으로 나봄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차 안에서도 달빛처럼 환히 빛나는 그녀의 목덜미는 미치도록 탐스러웠다.
‘술기운에 나를 찾았다는 건, 너도 나를 원하고 있다는 뜻 아닐까.’
남몰래 가져보는 기대감은 차준의 본능을 더욱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기는 정돈되어 있던 그의 눈빛을 엉망으로 흩트려 놓는다.
차준은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손끝을 앞으로 뻗었고, 나봄의 작은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았다.
이젠 고통스럽기까지 한 너를 향한 갈증.
그걸 해소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널 내가 원하는 만큼 마음껏 들이켜는 것뿐이다.
메마른 가슴이 너로 인해 한껏 젖어 들 수 있게 이 작은 몸을 끌어안고, 머금고, 입술이 닿는 곳마다 붉어질 때까지 빨아들이고 싶다.
“나봄아.”
하지만…….
“나봄아, 일어나. 집에 다 왔어.”
조급하게 굴지는 않기로 했어. 어차피 넌 나에게 돌아와 줄 테니까.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걸 너라고 해서 잊었을 리 없잖아.
“으음…….”
“아버님 어떻게 보려고 그래.”
차준은 조심스레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아직 술에서 깨지 못한 나봄은 쉽사리 눈을 뜨지 못했다.
차준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먼저 차에서 몸을 내렸다. 스스로 일어나지는 못할 것 같으니 집 안으로 직접 데리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차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담벼락 너머로 집 안을 확인했다. 다행히 불 켜진 창문에선 누군가의 실루엣이 비쳐 보였다.
그가 한 사장임을 알아차린 차준은 대문으로 다가서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리고는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초인종을 눌렀다.
―어우, 이 시간에 누구요.
이윽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역시나 한 사장의 것이었다.
마른침을 삼켜 넘기며 목을 가다듬은 차준은 최대한 예의를 갖춘 대답을 했다.
“아버님,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저 차준입니다.”
―차준이? 그 본부장?
“네, 오늘 회사에서 회식이 있었는데 나봄이가 많이 취해 버렸네요. 괜찮으시다면 잠깐만 나오셔서 나봄이를 부축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아이고, 어쩐지 전화를 안 받더라니. 자, 잠깐만 기다리게!
놀란 한 사장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끊겨 버리는 인터폰.
곧이어 현관문이 벌컥 열렸고, 치릭치릭 슬리퍼 끄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잠금장치를 풀어낸 한 사장은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대문을 열어젖혔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 나봄이가 어디서 이렇게 술이 떡이 되어서 돌아오는 애는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마셔 버렸는지는 차준도 잘 모르지만, 그는 살가운 미소를 입가에 띤 채 대답했다.
“원래 회사 회식 자리가 다 그렇죠, 뭐. 제가 잘 챙겨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여기까지 데리고 오느라 정말 수고 많았네. 나봄이는 차 안에 있나?”
“네, 잠들었어요.”
차준은 대문 바로 앞에 주차한 하얀 벤츠의 조수석을 열었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곤히 자고 있는 나봄은 한 사장을 기가 차게 만들었다.
“하참, 아주 술에 떡이 되셨구만…….”
“…….”
“한나봄! 어여 일어나! 업체 본부장님 차 안에서 뭐하고 있는 거야!”
거침없는 손길로 나봄의 어깨를 붙잡은 한 사장은 그녀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자 살짝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빠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대뜸 미간부터 구겼다.
“아빠…… 10분만 더…….”
“10분은 무슨 얼어 죽을 10분! 너 진짜 정신 안 차려?!”
“음…….”
“하이고, 미쳐. 아무래도 들춰 업고 가야겠구만.”
한 사장의 탄식 섞인 혼잣말을 들은 차준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업을게요.”
“아, 아니야. 내가 업어야지.”
그러나 한 사장은 한사코 사양했다. 아무리 차준이라고 해도 외간 남자 등짝에 하나뿐인 딸을 맡기는 건 불편해서였다.
그런 한 사장의 미묘한 감정까지 꿰뚫어 본 차준은 입꼬리를 더욱 힘주어 들어 올렸다. 단 한 번도 흑심이라는 걸 품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아버님 허리 상하실까 봐 그래요. 소중한 따님분, 얌전히 침대까지만 모셔다 놓을 테니까 한 번만 제가 업게 해 주세요.”
차준은 장난스레 웃으며 한 사장에게 부탁했다.
그런 차준이 싹싹해서 마음에 들었던 한 사장은 더는 호감을 숨기지 못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까 아버님 소리 턱턱 잘도 하는구만! 누가 들으면 사위인 줄 알겠어!”
“입에 너무 잘 붙어서 계속 아버님이라고 부르게 되네요. 아버님도 듣기에 자연스럽지 않으세요?”
“허허, 너스레하고는. 좋아, 허리 튼튼하게 생긴 자네한테 한나봄 운송을 맡기지.”
“네, 아버님. 편히 모시겠습니다.”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는 차준의 숨통마저 트이게 만들었다.
초인종을 누르기 전까지만 해도 미처 정리하지 못한 미련이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이 악물고 이성을 되찾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능숙하게 그녀의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사로잡는 건, 인간관계에 서툰 그 녀석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테니.
차준은 한 사장의 도움을 받아 새근새근 자고 있는 나봄을 등에 업었다.
드디어 맞닿은 그녀의 온기는 감히 품었던 욕망이 미안할 만큼 하염없이 따스했다.
그로써 갈증을 해소하지 못해 날뛰던 본능은 잠잠해지고, 차준은 기다림을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안정을 되찾는다.
처음부터 시작해 보고 싶다고 말한 너니까, 이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으면 언젠가 니가 먼저 다가와 줄 거야.
그날이 오면 난 너를 품 안에 꽈악 끌어안고 두 번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야.
난 더 이상……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아.
* * *
“아아…….”
따가운 아침 햇살과 함께 깨질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부은 눈을 뜬 나봄은 신음과 함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자고 싶지만 목이 타서 일어나 버린 지금, 나봄은 몽롱한 정신 상태로도 서늘한 이질감을 느꼈다.
분명 나는 유리 씨가 주최한 술자리에 있었는데, 왜 우리 집 침대에서 눈을 뜬 거지?
끊긴 기억을 더듬어 보기 위해선 잠부터 깨야 했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움직여 침대에서 벗어난 나봄은 제 방문을 열었고, 난간에 몸을 의지한 채 1층으로 내려갔다.
아직 제대로 눈을 뜨지는 못한 탓에 본능으로 찾아온 주방.
항상 같은 자리에 놓아둔 제 컵을 들어 정수기의 찬물을 받은 그녀는 그 자리에서 꿀꺽꿀꺽 한 잔을 원샷했다.
순간 관자놀이부터 띵 해져 왔지만 덕분에 기억은 좀 더 빠르게 되돌아왔다.
‘어, 한나봄이다.’
‘앗, 일찍 오셨네요!’
‘비도 오는데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배 많이 고프지?’
어제 저녁, 단태오와 유리 씨를 술집 앞에서 만났고.
‘첫 잔은 원샷인 거 알잖아.’
‘으읍!’
앉자마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잘 마신다! 여기 찬물!’
‘쿨럭! 이, 이거…… 술인데요?’
‘어머! 미안해, 나봄 씨! 단태오 엿 먹이려고 따라 놨던 건데 나봄 씨한테 줘 버렸네!’
‘허유리, 너 미쳤냐?!’
술자리가 시작된 지 5분 만에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주량을 훌쩍 넘겨 버려서.
‘한나봄! 어여 일어나! 업체 본부장님 차 안에서 뭐하고 있는 거야!’
‘아빠…… 10분만 더…….
’
‘10분은 무슨 얼어 죽을 10분! 너 진짜 정신 안 차려?!’
곧바로 집까지 실려 왔구나. 다른 건 몰라도 아빠의 거친 목소리만큼은 똑똑히 기억나.
상황을 정리해 보고 나니 신경 쓰이는 건 단태오였다.
한 번도 필름 끊길 만큼 과음해 본 적이 없던 나봄은 술김에 무슨 추태라도 부렸을까 봐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그에게 물어보긴 민망해서, 유리에게 먼저 연락해 어제 있었던 일을 대충이라도 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한 그때.
“어?”
냉장고에 붙어 있는 한 사장의 메모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너 한 번만 만취돼서 돌아오면 쫓겨날 줄 알아라. 어제 너 옮겨 준다고 선우차준 본부장이 고생 많이 했으니까 미안했다는 연락이라도 해. P.S 아빠 오늘 출장인 거 알지? 냉장고에 먹을 거 좀 쟁여 놨다.]
그 메모 안에 적힌 차준의 이름은 나봄을 더 커다란 혼란 속으로 빠트려 놓았다.
“차준 오빠가…… 갑자기 왜 나오지?”
비록 어제 일의 대부분을 잊어버린 나봄이었지만 차준이 합석했을 리 없다는 건 단정 지을 수 있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태오와 차준은 사적인 자리에서 함께 술을 마시지 않을 사이였으니까.
‘혹시 내가 차준 오빠한테 전화해서 매달렸나?’
찰나에 의심은 나봄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단태오에게 추태를 부린 건 해프닝으로 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차준에게 매달린 건 결코 그냥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난 감정은 전부 잊어버리고 아예 모든 관계를 처음부터 시작해 보자고 한 건 나였잖아.
그래 놓고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런 일이…….
혼란이 더욱 커지기 전에 사실 확인부터 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나봄은 빠르게 제 방으로 올라갔다.
어제 자 통화 목록에 차준에게 전화한 기록이 있다면 술김에 매달린 것이 백 퍼센트 확실하니, 그에게 곧바로 전화해 진심 어린 사과부터 할 생각이었다.
누가 꽂아 놓았는지 모르겠지만 충전기에 얌전히 연결되어 있는 휴대폰을 들어 꺼져 있던 전원을 켜고.
귀여운 강아지가 자고 있는 배경 화면이 뜨자마자 나봄은 통화 목록 버튼부터 눌렀다.
필름이 끊긴 사이에 온 아빠의 부재중 전화들, 아무리 찾아봐도 그사이에 차준에게 건 기록은 없었다.
“이상하네. 그럼 차준 오빠는 어떻게 날 집까지 데려다준 거야…….”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으나 깔끔하게 풀리지 못하고 커져 버린 의문.
혼란스러워하던 나봄의 눈동자에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 하나가 들어왔다.
혹시 어제의 일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지 않을까, 싶었던 나봄은 긴장된 손끝으로 휴대폰 메시지함을 열었다.
그러자 곧바로 시선을 사로잡아 버리는 이름 석 자는 다름 아닌 ‘단태오’였다.
어제 술을 같이 마셨으니 연락 정도는 올 수 있었으나, 문제는 그가 보낸 메시지 내용이었다.
[한나봄, 내일 고백하러 너희 집 갈 거니까 전화하면 나와.]
뭔가 고백할 게 있단다.
마침표까지 야무지게 찍혀 있는 게, 아마 그는 오늘 중요한 얘기를 꺼내려는 모양이다.
그래봤자 어제 술에 취해 기억까지 잃어버린 내가 그에게 들을 얘기는 욕 아니면 다행이었지만.
‘내가 어제 대체 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차준으로 인해 불안해하다가 태오로 인해 더 큰 혼돈에 빠져 버린 나봄은 좀처럼 떨리는 눈빛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아득한 기억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태오의 모습이 다시금 떠오르는 게…….
이번에도 난 그 녀석과 제대로 어긋난 모양이다.
겨우 진정되나 싶던 머리가 다시금 참을 수 없이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 * *
자고 일어나서 거울을 확인해 보니 눈이 너무 부었다. 게다가 흰자가 빨갛게 충혈되기까지 해서 언뜻 보면 눈병이라도 걸린 사람 같다.
욕실 거울로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오는 짧은 숨을 내뱉었다.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어제의 일은 대부분 잊힌 상태였는데, 이렇게 엉망이 된 꼬락서니를 보자 다시 가슴이 욱신거린다.
누가 날 아프게 했는지, 내가 얼마나 서러운 밤을 보냈는지. 찰나의 고통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오늘은 드디어 9년 동안 혼자 품고 있던 감정을 전부 터트려 버리기로 한 날.
태오는 심기를 다기지 위해 가장 찬물을 틀었다. 그리고 아직 얼굴에 남아 있는 두려움과 긴장감들을 연거푸 씻어 지워 냈다.
그동안 번번이 포기를 다짐했다가 무너졌던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어떻게든 모든 걸 끝내 볼 참이었다.
‘나봄 씨가 술김에 데리러 와 달라고 연락한 모양이더라. 너 나가고 나서 바로 본부장님이 찾아오셨어.’
‘갑자기…… 왜?’
‘글쎄, 모르긴 몰라도 나봄 씨 집으로 가는 것 같지는 않던데.’
‘…….’
‘그럼 둘 사이 뻔한 거 아니겠어?’
그 말을 듣고도 정신 못 차리고 널 그리워했던 미련한 나를 위해서라도.
거친 손길로 수도꼭지를 잠근 태오는 젖은 얼굴을 닦지도 않고 욕실을 떠났다.
깔끔히 정리된 거실을 지나 옷방으로 들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단호했다.
아직 옅게 떨리는 눈빛까지 말끔히 정돈한 건 아니었지만 오늘 해야 할 일은 정확히 알고 있다.
나는 항상 날 휘둘렀던 그 순진한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보며, 조금의 미련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널 감히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좋아했다고. 니가 날 알기 훨씬 전부터 너는 내 전부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지 마.’
다 끝내 버리는 마당에 굳이 고백을 하는 건, 태오 스스로가 도망칠 수 있는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태오는 그 고백을 들은 나봄이 지어 보일 표정도, 작은 목소리로 겨우 꺼내 놓을 대답도 이미 알고 있다.
그때 무너지지 않고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긴 무너져도 상관은 없지. 어차피 너는 내 마음을 알아 버린 이상, 더 이상 나를 상종하지 않으려 할 테니.
칼은 내가 쥐었는데 찔리는 건 나다.
그 순간의 고통은 아마 지금까지 느껴 본 고통 중에서도 가장 지독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멍청한 나는 그렇게 개고생을 해 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거다. 그래서 피해 볼 생각도 없다.
그저, 너에게 받는 마지막 상처가 흉터 없이 잘 낫기만을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