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다 고백하고 때려치울 거야.
2017.08.25.
“본부장님! 여기예요! 여기!”
점점 더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하는 자정에 가까운 시각. 압구정 로데오역에 멈춰 서는 하얀 벤츠를 본 유리가 크게 소리쳤다.
“으음…….”
그 소란을 들은 나봄은 옅은 신음을 흘려보냈지만 스스로 몸을 가누지는 못하는 상태였다.
한 번에 몰아 마신 술 탓도 있었으나, 혹시 정신이 들까 싶어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몰래 사다 먹인 이온음료 영향이 가장 컸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차준은 운전석 문을 급히 열고 나와 유리에게 걱정 어린 첫 마디부터 건넸다.
“들어가서 기다리지 그랬어요. 비도 오는데.”
“나온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나저나 되게 빨리 오셨네요. 막 밟으셨나 봐요.”
“차 막힐 시간은 아니니까요. 나봄이는 얼마나 많이 마신 거죠?”
“글쎄요. 앉자마자 연거푸 들이켜더라구요. 그러고선 어찌나 본부장님을 찾던지…….”
그런 적은 없지만 안 들키면 그만이다.
학창 시절부터 거짓말 하나는 능숙하게 잘 치는 유리는 애매모호한 차준과 나봄의 사이를 한순간 연인으로 만들어 버릴 자신이 있다.
“우선 나봄 씨 좀 붙잡아 주세요. 혼자서는 잘 서지도 못해요.”
유리는 나봄을 자연스레 차준의 품으로 넘겨주었다.
넓은 그의 가슴에 안긴 나봄은 유리에게 있을 때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본 유리는 일부러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정말 부러워요.”
“뭐가요?”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달려와 주는 거요. 솔로는 외로워서 어떡하나.”
언뜻 듣기엔 신세 한탄 같겠지만 사실 유리는 그들의 관계를 확정짓는 중이었다.
비록 인사불성이 된 나봄은 이런 상황을 모르겠지만 차준의 마음은 확실히 동요할 것이다. 그럼 앞으로 그녀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겠지.
하지만 유리의 바람과는 달리, 차준은 그녀의 말에 대해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그저 단조로운 마무리 인사를 끝으로 유리에게서 곧바로 등을 돌려 버리는 그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는 중이었다.
이 이상, 친근한 척 굴지 말아 달라고.
조수석 문을 연 차준은 나봄을 조심히 앉혀 두었고, 안전벨트까지 단단히 채워 놓았다.
“으음…….”
그 압박감에 가슴이 불편해졌는지, 나봄의 입술 새로 새는 나른한 신음.
그 야릇한 목소리는 차준의 귓가로 스며들어, 그의 갈증을 강렬해지도록 만든다. 아마 뒤편에 서 있던 유리만 없었더라면 이대로 문을 닫고 그녀의 붉은 입술을 탐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이성이 끊어지기 직전, 유리가 살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장소는 물어보나마나 나봄의 집이었는데 차준은 자기도 모르게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목적지까지 시시콜콜하게 알려드려야 하나요?”
다정한 미소 뒤에 어린 서늘한 한기.
지금의 되물음은 더 이상 자신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엄포가 분명했다.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런 반응을 원했던 유리는 더욱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죄송해요. 성인 남녀의 목적지를 물어보는 건 실례인데.”
“…….”
“그럼 들어가 보세요. 나중에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차준에게서 얻어 낼 걸 전부 얻어 낸 유리는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차준은 그런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탁―!
차문을 닫자 밀폐된 공간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그녀의 숨소리.
그 새근새근한 숨결은 이 불편한 차 안이 푹신한 침대가 되어 버리는 착각까지 일으킨다.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살짝 벌어진 입술도, 내리 감긴 긴 속눈썹도, 왜 이렇게 욕망을 자극하는지.
“나봄아…….”
차준은 눈앞에서 흐트러져 있는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물론 잠든 그녀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보드라운 촉감이 손끝에 느껴지자 차준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켜 넘겼다.
“한나봄…….”
그러고 나서 한 번 더 불러 보는 그녀의 이름.
“너 어떻게 하려고 이래.”
“…….”
“나…… 생각보다 나쁜 사람인데.”
이게 변명이 될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난잡해질 대로 난잡해진 머릿속은 가장 은밀한 곳으로 목적지를 안내한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린 차준은 휴대폰 내비게이션을 켰다.
얼마 전 들렸던 나봄의 집 주소보다, ‘우리집’으로 설정된 자신의 타워펠리스가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먹음직스러운 과자집처럼.
* * *
나봄을 차준에게 넘겨주고 이자카야로 돌아가는 길.
비 오는 거리를 걷고 있던 유리의 시선에 한 남자가 비쳐 들어왔다.
모델처럼 커다란 키, 멀리서도 단연 눈에 띄는 선명한 이목구비, 입고 있는 옷까지.
누가 봐도 완벽한 그는 오늘따라 더욱 빛이 나는 단태오였다.
그 허울 좋은 모습이 무색할 만큼 흔들리는 눈빛을 띤 태오는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보이질 않는지,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는 애달픈 한숨과 함께 머리를 흩트려 버린다.
그런 그의 손에 꼬옥 쥐어진 노란 우산.
그건 태오가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허나 이미 그 사람을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보내 버린 유리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에게 걸음을 옮겼다.
“단태오!”
힘주어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그녀에게 머무르는 태오의 눈동자.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모습은 들고 있는 까만 우산이 무색할 정도로 다 젖어 있었다. 아마 이 빗속에서 우산을 들고 한참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모양이다.
“말도 없이 어딜 갔다 와! 휴대폰도 꺼 놓고!”
“…….”
“뭐야, 한나봄은 어디 있어?”
그런 그가 겨우 꺼낸 질문은 아니나 다를까 나봄에 관한 것이었다.
유리는 그의 젖은 어깨를 탈탈 털어 주다가, 그가 상상도 하지 못했을 대답을 꺼내 놓았다.
“본부장님한테 갔어.”
“뭐?”
“나봄 씨가 술김에 데리러 와 달라고 연락한 모양이더라. 너 나가고 나서 바로 본부장님이 찾아오셨어.”
앞뒤가 많이 각색되긴 했지만 어쨌든 나봄과 차준이 같이 있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태오를 마주하고 있으니, 그는 살짝 미간을 좁힌 채 흐린 목소리로 되묻는다.
“왜……?”
왜라니.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다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재차 묻는 태오에게 유리는 준비된 진실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글쎄, 모르긴 몰라도 나봄 씨 집으로 가는 것 같지는 않던데.”
“…….”
“그럼 둘 사이 뻔한 거 아니겠어?”
유리의 확신 어린 목소리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태오의 눈에 어린 아픔도 짙어져 갔다. 점점 붉어지는 그의 눈가는 금방이라도 서글픈 눈물을 뚝 떨어트릴 것만 같다.
가끔 나오는 그의 여린 모습을 좋아하는 유리이지만, 한나봄 때문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걸 지워 내고 싶었던 유리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의 감정을 단칼에 잘라 주기로 했다.
“나봄 씨는 너랑 안 돼.”
“…….”
“그 이유는 너도 알고 있잖아.”
태오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그건 그만해 달라는 신호와 같았으나 유리는 입술을 멈춰 두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구질구질하게 청승 떠는 거, 니가 생각해도 한심스럽지 않아?”
“…….”
“니가 뭐가 아쉬워서 그래. 주변을 둘러보면 얼마든지 널 사랑해 줄 여자는 많을 텐데.”
나를 알아봐 달라는 얘기와 다를 것 없는 유리의 말은 태오의 귀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의 황폐한 마음까지 적시지는 못했다.
나봄과 차준이 함께 어딘가로 향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의 머릿속은 만취한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버렸으니까.
“하아…….”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태오는 긴 한숨을 내쉬었고, 들고 있던 까만 우산을 바닥에 힘없이 떨어트렸다.
“뭐해. 아직 비 오잖아.”
유리는 그런 태오를 위해 우산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태오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먹먹하게 잠긴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갈래.”
빗물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유리는 일그러진 태오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대로 뒤를 돌아 서글픈 발걸음을 옮기는 그는 눈 뜨고 봐 주기도 힘들만큼 애처로웠다.
그래서 멀어지는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지만 유리는 상황이 여기까지 온 걸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그녀가 바라는 건 그를 손에 넣는 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가지지 못하게 막아 두는 것이었으니.
* * *
“등신 새끼…….”
다 젖은 몸으로 지하철 막차에 오른 그가 중얼거렸다.
“자존심도 없는 새끼…….”
아직까지 빌어먹을 노란 우산을 내다 버리지 못하고 챙겨 온 자신에게 바치는 욕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오기 섞인 욕을 내뱉어 봐도, 하염없이 스스로를 다그쳐 봐도, 이미 터져 버린 눈물샘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오늘은 만취 상태에서 청승맞은 이별 노래를 부른 것도 아닌데.
혹시나 다른 사람들에게 울고 있는 모습이 들킬까, 태오는 푹 숙인 고개를 절대 들지 못했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만큼 젖어 버린 건 정말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 마음 놓고 터지는 울음은 태오의 마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이렇게 나 혼자 아파하는 걸 누가 알아주기나 한다고. 정말 지지리 궁상떠는 법도 가지가지다.
‘난 왜 또 이런 꼴이 된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번에도 혼자 들떠서 기대한 탓이었다.
그녀가 듣기 좋은 소리 몇 번 해 줬다고 한껏 들떴던 죄로,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만신창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한나봄은 나한테 왜 자꾸 이러는 걸까.’
이건 오랜 시간 태오를 혼란스럽게 한 문제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한 가지였다.
모든 건 내가 너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너는 조금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우리 만나기로 했던 거 말이야. 그거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을 때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생각해 보면 잔인했던 나봄의 이별 멘트도 태오에게 감정이 없다는 걸 전제로 한 내용이었다.
이미 깊어진 마음을 몰랐기에 그녀는 너무도 쉽게 떠나 버렸고, 5년 만의 재회에서도 상처 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냈다.
게다가 지금도 봐.
남겨진 내 생각은 조금도 안 하고 그 남자에게로 훌쩍 떠나가 버렸잖아.
지난날들을 떠올려 보면,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속 편히 그를 무너트려 놓았다.
하지만 태오는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때와 같은 이유로 온갖 맘고생 다 하면서도 그만하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이 짓을 1년만 더 하면 벌써 10년.
강산도 변할 만큼 긴 시간 동안 난 헛된 삽질만 하고 있었던 거다.
“더러워서라도 그만한다, 진짜…….”
태오는 젖은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오기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나 이런 결심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갈 뿐이었으니, 이번엔 돌이키지 못할 짓부터 저질러 놓기로 했다.
내가 널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이런 감정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동안 넌 나에게 어떤 존재였고, 너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기대가 피어났다가 맥없이 져 버렸는지.
“……다 고백하고 때려치운다.”
그래야 니가 하다못해 죄책감이라도 느낄 거 아니야.
어째서 결론이 이런 방향으로 났는지는 태오 본인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를 괴롭히는 이 절망의 굴레는 꽁꽁 감춰 왔던 진심을 모두 꺼내 놓아야만 겨우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겨우 울음을 멈추고 정신을 차린 태오는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비를 고스란히 맞은 휴대폰은 물기가 스며 있었지만 다행히 작동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덕분에 지금의 결심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할 시간도 얻지 못한 그는 격분한 손가락으로 빠르게 메시지를 입력했다.
[한나봄, 내일 고백하러 너희 집 갈 거니까 전화하면 나와.]
마지막 마침표를 찍자마자 스스럼없이 누른 전송버튼.
이것으로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그동안 억눌러 놓은 감정들을 장렬하게 터트리고 모든 관계를 끝장내 버리는 것뿐이다.
“하아…….”
긴장이 풀려 버린 태오는 먹먹한 한숨을 내뱉었다.
고백은 심장이 떨려서 죽었다가 깨나도 못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확 터트려 버릴 생각을 하니 답답한 속앓이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정말, 강산이 변한다는 긴 시간 동안.
너를 열심히 사랑했고, 최선을 다해 그리워했고, 내 감정들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어.
그래서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후회는 없을 테지만, 너는 내일부터 죽도록 후회했으면 좋겠어.
나처럼 널 사랑해 줄 사람을 영영 잃어버린 걸, 오늘의 나보다 수천 배는 더 가슴 아파 하며 잠 못 들었으면 좋겠어.
알아듣냐, 이 나쁜 가시나야.
넌 오늘 정말 소중한 사람을 놓친 거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 우리의 인연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해도, 그 사실 하나는 변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