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이제 주량 넘겨 버려서 어떡해?
2017.08.21.
굵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목요일 저녁.
“단태오! 여기야! 여기!”
약속 장소인 압구정 로데오거리 이자카야 앞에 먼저 도착해 있던 유리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까만 장우산을 쓴 채 천천히 걸어오던 태오는 고갯짓으로 화답했다.
유리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관찰하다가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뭐냐? 그 옷차림은?”
“뭐가.”
“너 선보러 왔어?”
비아냥대는 유리의 말은 기분을 언짢게 만들었지만 딱히 대꾸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사적인 술 약속에선 항상 트레이닝복 차림이던 태오는 오늘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검은색 실크 셔츠를 입고 왔으니까.
“와, 때깔 좋네. 이러려고 집에 갔다 온다고 했구나?”
“그런 거 아니야. 편한 옷 다 세탁소 갖다 맡겨서 그래.”
“치, 다 들통날 거짓말을 왜 하십니까. 누구한테 잘 보이려는지 딱 알겠는데.”
“알기는 무슨. 헛소리 좀 작작 해라.”
이자카야 천막 밑에 들어선 태오는 자신을 놀리는 유리에게 까칠한 반응을 보이며 우산을 접었다.
그리고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너무도 뻔한 질문을 던졌다.
“한나봄은 아직 안 왔냐?”
“응, 우리가 10분이나 일찍 도착했으니까.”
당연한 질문에 대한 당연한 대답을 들은 태오는 괜히 멋쩍어졌다.
“그럼 들어가 있지, 왜 나와서 비를 맞고 서 있어.”
그래서 만만한 유리에게 애꿎은 핀잔을 건네자,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뱃갑을 태오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아아,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가려고. 너도 한 대 할래?”
비록 얼마 전 홧김에 담배를 다시 찾았던 그였으나, 지금은 다시 금연 상태였다.
한동안은 계속 피울 일 없을 거라 생각한 태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 끊었다고 몇 번을 말해.”
“이상하다. 이제 다시 피울 때가 됐는데.”
“안 피워. 그러니까 너도 슬슬 줄여.”
그리 말하는 태오의 표정은 딱딱했지만 유리는 씨익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비록 친구 사이에 오고 가는 흔한 염려일지라도, 무뚝뚝한 그가 은근슬쩍 그녀를 신경 써 주는 건 언제 느껴도 기분이 좋았다.
태오의 말을 듣기로 한 유리는 순순히 담뱃갑을 집어넣었고, 그의 어깨에 살갑게 팔을 둘렀다.
“너 장례식 날 가 줄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챙기는 거야?”
오늘 기분이 좋은지, 태오는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래. 그런 걸로 치자.”
물론 그렇게 대답하며 어깨에 닿은 그녀의 손을 팩 떼어 내 버리긴 했지만, 유리는 이걸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이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이 남자가 나를 누구보다 편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그래서 남몰래 자만심에 젖어 있던 그때.
“어, 한나봄이다.”
태오의 입에서 신경에 거슬리는 이름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의 얼굴로 향해 있던 고개를 돌리자,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병아리처럼 노란 우산을 쓰고 걸어오는 나봄이었다.
“앗, 일찍 오셨네요!”
그들을 진작 알아본 나봄은 제법 먼 거리에서부터 밝은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버릇처럼 일렁이기 시작하는 태오의 눈빛은 유리의 눈에도 선명하게 비쳤다.
제대로 다가가지도 못할 거면서 왜 이렇게 티를 내는지.
유리는 너무도 순박한 그의 짝사랑이 너무 같잖아 보일 뿐이다.
하지만 조금도 티를 내지 않고, 유리는 어느새 가까워진 나봄에게 친근히 말을 걸었다.
“비도 오는데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배 많이 고프지?”
“지하철이랑 가까워서 오기 편했어요. 여기가 유리 씨가 말한 그 이자카야인가요?”
“응, 다른 것보다 해물탕이랑 참치회가 최고야. 그 두 개면 사케 몇 팩은 동낸다니까.”
“아아, 그렇구나. 분위기도 아늑하니 좋아 보이네요.”
나봄이 유리와 친근하게 대화하는 동안, 태오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화장도 옷차림도 머리스타일도 수수하던 평소랑 다르지 않은데, 오늘따라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예뻐 보인다.
자꾸 저렇게 해실해실 웃어서 그런 가 봐.
맨날 보던 그를 평소와 다르게 느끼고 있는 건 나봄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 항상 캐주얼한 차림의 태오만 보던 그녀는 포멀한 실크 셔츠를 입은 그가 낯설면서도 근사해 보인다.
얘가 원래 이렇게 성숙한 느낌이었나, 싶을 만큼.
태오를 아래에서부터 조심스레 훑어보던 나봄이 그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자 곧바로 마주쳐 버린 태오의 눈동자는 마침 또렷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아…….”
순간 당황해 버린 나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괜히 애먼 곳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왜 그의 시선을 피해 버렸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전처럼 무서운 것도 아닌데 말이야.
“자자, 나봄 씨도 왔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자리 잡자.”
그때,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유리가 손뼉을 짝짝 치며 말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나봄은 비닐 지붕 밑으로 들어와 조심스레 노란 우산을 접었다.
그러는 동안 유리는 태오부터 가게 안으로 밀어 넣었고, 뒤따라 들어가기 전 나봄에게 잠시 고개를 돌려 말했다.
“나봄 씨도 얼른 들어와요.”
“네! 우산 좀 털고 갈게요!”
“괜찮아. 얼마 있지도 않을 건데, 뭐.”
“네?”
빠르게 스쳐 지나간 유리의 한 마디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유리는 되물어 볼 시간도 주지 않고 문 너머로 사라졌다.
나봄은 잠시 아까의 대화 내용과 다른 그녀의 한 마디를 의아하게 여겼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단태오와 처음으로 가져 보는 술자리.
소주 석 잔이면 바로 취해 버리는 나봄은 자신이 술자리를 싱겁게 만들어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그러니 제발 오늘은 디오니소스라도 영접해서 원래 주량보다 많이 마시고 오래 버텼으면 좋겠다.
* * *
“나봄 씨는 주량이 어떻게 돼?”
유리가 그리도 극찬한 안주들과 태오가 직접 고른 사케가 놓인 이자카야 테이블.
유리가 나봄의 잔에 맑은 사케를 가득 따르며 물었다. 두 손으로 조심히 술을 받은 나봄은 미소 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조금밖에 못 마셔요.”
“조금이 몇 병인데?”
“세 잔이면 취하는데…….”
“에이, 내숭은. 겨우 세 잔에 취해 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여기선 그런 말 해 봤자 봐주는 거 없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유리는 제 잔에 담긴 술을 비워 냈다. 그러고는 멀뚱멀뚱 그녀를 쳐다보는 나봄에게 턱을 까딱였다. 은근히 강압적인 눈빛은 한 잔을 비우라는 명령이 분명했다.
‘첫 잔부터 사양하는 건 좀 그렇겠지.’
나봄은 하는 수 없이 잔으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주량을 고려해서 입술에 술을 적시는 정도로만 마시려 했는데, 잔을 떼어 내려 하기가 무섭게 유리가 그녀의 팔목을 붙들어 버렸다.
“첫 잔은 원샷인 거 알잖아.”
“으읍!”
그대로 술을 다 넘길 때까지 놔주지 않은 탓에 한 번에 채워 버린 한나봄 주량의 3분의 1.
아무리 부드러운 사케라고는 하지만 가슴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다. 직감하건대, 조만간 이 열기는 온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말 것이다.
“자, 여기 물.”
사케 한 잔을 원샷하고 힘겨워하는 나봄에게 태오가 물컵을 내밀었다. 살짝 미간을 찡그린 그는 성깔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유리를 나무랐다.
“억지로 마시게 하지 마. 여기가 대학교 MT냐.”
“나봄 씨 오늘 나랑 제대로 술 마시러 나온 건데, 뭐.”
“잘 못 마신다잖아.”
“참나, 좀 취하면 어때. 너처럼 질질 짜지만 않으면 되지.”
“그, 그 얘기를 왜 여기서……!”
사실 술이 세긴 해도 창피한 술버릇을 가지고 있는 태오는 당황감을 감추지 못했다.
만취 상태가 되면 노래를 부르다가 곧잘 울곤 하는데, 그건 나봄에게만큼은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주정이었다.
태오는 혹시나 나봄이 방금 전의 얘기를 새겨들었을까 싶어,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눈치를 보았다.
“유리 씨, 여기 해물탕도 드세요.”
다행히 나봄은 유리의 앞 접시에 해물탕 국물을 담느라 알아채지 못했다. 오늘의 운을 여기다 다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다행인 순간이었다.
“……진짜 조용히 해라, 허유리.”
태오는 오늘따라 유난히 입을 간수 못하는 유리에게 작지만 강한 어조로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유리는 들은 척도 않고 웃는 낯으로 나봄이 내민 앞 접시를 받아 들었고, 또 다시 그녀 앞으로 차가운 사케 병을 내밀었다.
“어머, 고마워라. 나봄 씨 한 잔 더 따라 줄게.”
“아, 저는 조금 쉬었다가…….”
“주량이 세 잔이라며. 한 잔만 나랑 같이 원샷하자. 응?”
평소엔 팀원들한테 억지로 술을 먹이는 편도 아니면서 오늘따라 왜 이러는지.
“그만하라고 했잖아.”
유리의 행동이 의아해진 태오는 한 번 더 그녀를 만류했다. 안 그래도 나봄의 얼굴은 이전의 술 한 잔에 잘 익은 딸기처럼 붉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유리는 그런 태오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며 대답했다.
“여긴 회사 아니야. 이런 자리에서까지 니 명령 듣고 싶지 않아.”
“명령이 아니라, 못 마시는 술을 왜 억지로 먹이고 앉아 있냐고.”
“나봄 씨 아직 싫다는 거절도 안 했어. 그리고 한 잔쯤은 더 마실 수 있다잖아. 그치, 나봄 씨?”
“야, 허유리!”
벽창호처럼 구는 유리 때문에 결국 높아져 버린 태오의 언성.
테이블에 감도는 공기가 갑자기 살벌해졌다. 분위기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태오와 유리였으나, 본의 아니게도 원인은 나봄의 주량이었다.
이런 식의 말싸움이 커지길 원치 않았던 나봄은 하는 수 없이 유리 앞으로 술잔을 내밀었다.
“네, 한 잔쯤은 더 마실 수 있어요.”
“무리해서 받을 필요 없어. 잔 내려놔.”
태오는 그런 그녀를 넌지시 말렸지만 나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뒤 꺼내 놓는 목소리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한 밝은 기운이 가득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아! 초반에 마셔 두면 술 깰 시간도 벌고 좋지!”
“그래그래! 한 잔 더 받아! 단태오는 나봄 씨 아빠도 아니면서 괜히 저래, 그치?”
유리는 태오가 다시 막아서기 전에 재빨리 나봄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고는 이미 술이 가득 차 있던 제 잔을 들어 그녀에게 건배를 요청했다.
“나봄 씨! 짠!”
챙―!
잔끼리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신호탄처럼 터지고.
유리는 망설임도 없이 잔에 가득 담긴 사케를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봄도 뒤늦게 술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조금씩 나눠 마셔야 그나마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랬다간 또 분위기가 안 좋아질지 몰라 한 번에 넘겨 버린 두 번째 술.
이로써 주량의 반을 넘겨 버렸다. 아까까지는 속만 뜨거웠는데 이제는 얼굴에도 후끈후끈 열이 오른다.
거울로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이 내 얼굴은 지금 홍당무일 거야.
“잘 마신다! 여기 찬물!”
유리는 한결 신이 난 표정으로 나봄에게 차가운 물컵을 내밀었다.
안 그래도 냉수 한 잔 시원하게 들이켜고 정신을 차려 볼 생각이었던 나봄은 고갯짓을 까딱한 뒤, 차가운 물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하지만 거의 다 비웠을 때쯤 코끝에 느껴지는 건 물과는 다른 향기였다.
“쿨럭!”
나봄은 격한 기침과 함께 이미 비워 버린 잔을 내려놓았다. 소주처럼 술맛이 세지 않아서 미처 몰랐는데, 벌써 큰 컵으로 한 잔을 들이켜 버린 액체는 사케가 분명했다.
“이, 이거…… 술인데요?”
“어머! 미안해, 나봄 씨! 단태오 엿 먹이려고 따라 놨던 건데 나봄 씨한테 줘 버렸네!”
“허유리, 너 미쳤냐?!”
순식간에 혼비백산이 되어 버린 테이블.
그 와중에 나봄의 시야는 팽글팽글 돌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오래 버텨 보려고 다짐한 지 오 분은 지났으려나. 오래 버티기는커녕, 이대로 몇 분 안에 정신을 놓아 버리게 생겼다.
“아아…….”
나봄은 지끈거리기 시작한 머리를 부여잡고 여린 신음을 흘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태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넌 이따가 보자.”
경고성 짙은 한 마디를 유리에게 툭 던져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오의 분노를 산 유리의 표정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어, 어디 가?”
“새 컵 가지러.”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알지?”
유리는 필사적으로 해명해 보려 했으나, 자리를 떠나는 태오가 남겨 놓는 건 가운데 손가락뿐이었다.
유리는 멀어지는 그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제 볼을 매만지는 나봄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나봄 씨, 취기 많이 올라와?”
“아…… 머리가 아파요.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우선 안주 좀 먹어. 그럼 나아질 거야.”
유리는 살가운 목소리와 함께 나봄의 앞 접시에 참치 한 점을 놓아주었다. 나봄은 꼬인 혀를 움직이는 대신 꾸벅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자 유리는 흐트러진 나봄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겨 주었고, 걱정 어린 한 마디를 낮게 흘려보냈다.
“그나저나…… 이제 주량 넘겨 버려서 어떡해?”
하나 어쩐지 그 안에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건 왜일까.
시간이 갈수록 알딸딸해지는 정신 때문에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봄은 유리를 굳이 바라보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
다정한 손길과 달리 그녀는 지금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라는 걸.
* * *
꾸벅.
나봄의 고개가 잘 익은 벼처럼 맥없이 수그려졌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모습에, 태오는 곧바로 손을 뻗어 나봄의 머리를 도로 들어 올려 주었다.
“야야, 잠깐만. 정신 좀 차려 봐. 어?”
애타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 보았으나 도저히 정신을 되찾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사케의 희생양, 한나봄.
결국 낮은 한숨을 내쉰 태오가 매섭게 노려보는 건 유리였다. 그러니까 좀 작작 좀 먹이라고 말했거늘 왜 이리 대책 없는 짓을 저질렀는지.
“내숭이 아니라 진짜였구나. 나 이렇게 술 못 마시는 사람 처음 봐.”
하지만 유리는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태연한 소리만 내뱉을 뿐이었다. 덕분에 심기가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태오는 결코 곱지 않은 반응을 내비쳤다.
“그러니까 계속 말렸잖아. 넌 내 말이 말 같지가 않냐?”
“뭐야, 설마 내가 나봄 씨 이렇게 만들었다고 짜증 내는 거야?”
“아니, 화내는 거야. 개무시도 정도껏 해.”
그가 이 정도로 세게 말한다는 건 정말 제대로 열 받았다는 뜻이었다.
생각보다 그의 감정이 많이 상했다는 걸 확인한 유리는 일부러 더욱 너스레를 떨었다.
“나봄 씨가 너무 불편해하는 것 같길래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어.”
“…….”
“아, 미안해. 이제 주량 알았으니까 앞으로는 억지로 먹이지 않을게.”
하지만 재차 기분을 풀어 주려 해봐도 태오는 좀처럼 미간을 풀지 못했다. 오히려 안색이 더 안 좋아진 것 같은 느낌에, 유리는 살짝 후사가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그래도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리는 상황을 좀 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태오에게 제안했다.
“일단 근처 편의점에서 숙취 해소 음료라도 사 와 보는 게 어때? 그거 마시면 좀 술이 깰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저대로 한나봄을 집에 보낼 수는 없으니.
“하아…….”
또 한 번의 한숨과 함께 지갑을 챙겨 든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서 쓰러지지 않게 잘 잡아 주고 있어라.”
그래 놓고서 마지막까지 남겨 놓는 건 오직 나봄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그건 그거대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유리는 떠나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알았으니까 얼른 다녀오기나 해.”
딸랑―
머지않아 태오가 가게 문을 열고 순순히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유리는 나봄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일러 놓았던 대로 그녀를 부축해 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지금 그녀는 단태오가 없는 틈을 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유리는 완전히 멀어지는 태오의 뒷모습을 창문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입고 있던 재킷 안주머니에서 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 뒤 곧바로 주소록을 열어 한 사람에게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고급진 클래식이 흐르는 컬러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얼마 전 명함을 얻었던 선우차준이었다.
유리는 그와 어울리는 컬러링을 들으며 다 식은 해물탕 국물을 젓가락으로 뒤적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네, 여보세요.
다행히도 통화는 단 한 번의 시도 만에 연결되었다.
평소보다 딱딱하긴 하지만 익숙한 차준의 목소리에, 유리는 화색이 감도는 인사부터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우차준 본부장님! 제 번호를 저장하셨는지 모르겠는데 저 허유리예요.”
―허유리?
“네,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오피스가구 파트장이요!”
―…….
“에이, 며칠 전에 본부장님이 나봄 씨 잘 부탁한다면서 명함도 주셨잖아요.”
―아아…… 이제 기억나네요. 그런데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차갑게 되묻는 그는 유리의 전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하나 그런 것 따위 애초부터 중요하지 않았던 유리는 그럴수록 본론을 더욱 빨리 꺼내 놓기로 했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압구정 로데오에서 나봄 씨랑 둘이 술을 마시고 있는데요. 나봄 씨가 사케 세 잔에 인사불성이 되어 버렸지 뭐예요.”
―예?
“어휴, 술 취해서 계속 본부장님만 찾다가 지금 겨우 잠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나봄 씨 집 주소를 잘 몰라서…….”
뒷말을 의도적으로 흐리며 유리는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센다.
셋, 둘, 그리고 하나.
―지금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20분 정도 걸릴 것 같군요.
역시 사랑에 빠진 남자는 다루기가 쉬웠다.
성깔 나쁜 단태오도, 만만찮다고 소문난 본부장도 한나봄만 내세우면 원하는 대로 순순히 움직여 주잖아.
“네, 그럼 나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빗길 조심히 오세요.”
단순한 그들을 내심 비웃으며, 유리는 살가운 마무리 멘트를 꺼내 놓았다.
그러자마자 뚝 끊겨 버리는 차준과의 통화는 매정하기 그지없었으나 유리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무사히 장전된 총을 차준의 손에 쥐어 준 지금, 남은 건 그가 쏜 총알이 날카롭게 태오의 심장을 꿰뚫어 버릴 일 뿐이니.
“나봄 씨, 우리 나가자. 나봄 씨 남자 친구 온대.”
유리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봄을 부축해 일으켰다. 아직 차준이 도착하려면 멀었지만, 태오가 오기 전에 사라지려면 지금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나봄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고, 유리에게 전적으로 의지한 채 짐짝처럼 이자카야에서 끌려 나왔다.
남은 안주와 술이 무색할 만큼 텅 비어 버린 그들의 술자리.
깜빡 잊고 간 건 노란 우산이었고, 버려진 건 또다시 단태오였다.
물론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태오는.
“이걸로 술이 깰려나 모르겠네…… 한 병 더 살걸 그랬나.”
나봄을 위한 숙취 해소 음료와 아이스크림이 든 비닐봉지를 꼭 쥐어 든 채 돌아오는 중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