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뭔가 그렇고 그런 사이
2017.08.18.
“미나 씨! 혹시 단태오 출근 했어?”
언제나처럼 바쁜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의 이른 아침.
유리는 출근하자마자 태오부터 찾았다. 어제 미처 전달하지 못한 업무 보고서 때문이었다.
하지만 직원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못 봤는데요. 아직 출근 안 하신 것 같아요.”
“그래? 얘가 대체 어쩐 일이래. 지각을 다 하고.”
평소 지각조차 하지 않는 태오를 잘 아는 유리는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허나 직원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늦게까지 야근하시던데 피곤하셔서 늦잠이라도 주무신 건 아닐까요?”
“그런가. 아, 나 외근 나가기 전에 서류 넘겨줘야 하는데.”
“그럼 저한테 주세요. 제가 단 팀장님 출근하시면 곧바로 전해드릴게요.”
직원은 걱정 가득한 유리에게 친절한 손길을 내밀었다.
그러나 유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호의를 거절했다. 그녀는 오늘 책상 위 놔둔 서류를 빌미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에 술을 사 달라 졸라 볼 생각이다.
“아니야, 나 쟤 사무실 비밀번호 알아. 책상 위에 놓고 가면 돼.”
“역시 오피스 단짝.”
“단짝은 무슨. 오늘도 하루도 힘내, 미나 씨!”
유리는 쿨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태오의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떼어 냈다.
그 공간은 직원들이 쉽게 드나들지 못하는 던전과 같은 곳이었으나, 유리는 그럴수록 제집 안방처럼 편히 방문하곤 했다.
왜냐하면 난 그저 그런 회사 동료 사이가 아닌, 녀석과 특별하게 가까운 사이니까.
남들보다 가깝게 다가갈 수 있지. 그건 다른 직원들도 충분히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야.
어느덧 태오의 사무실 문 앞에 선 유리는 도어락 키패드를 눌렀다.
비밀번호는 그의 생일 네 자리. 예전에 급한 심부름을 부탁 받았을 때 알게 된 후로 쭉 그대로였다.
하지만 첫 번째 숫자를 누르기가 무섭게.
벌컥―
사무실 문이 열리고, 칫솔을 손에 든 단태오가 걸어 나왔다. 옷차림이 어제와 똑같은 걸 보니 사무실에서 밤을 지새운 모양이었다.
“단태오! 너 여기서 잤어?”
유리는 놀란 눈을 하고 물었다. 그러자 태오는 뻗칠 대로 뻗친 머리를 쓱쓱 정리하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래. 잤다.”
“왜?”
“어차피 집에 가 봤자, 두 시간 만에 다시 나와야 돼서. 그나저나 넌 왜 또 찾아왔어?”
“아아, 전해 줄 서류가 있어서.”
유리는 들고 있던 서류를 태오에게 내밀었다. 태오는 그걸 직접 받지 않고 사무실 안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책상 위에 놔줘. 나 화장실 가야 돼.”
“어, 그래. 그나저나 여기서 쪽잠 자 놓고 일할 수 있겠어? 너무 힘들면 무리하지 말고 반차 내.”
“반차 내기엔 일이 너무 밀려서. 끝나고 칼퇴 해야지.”
태오의 단호한 대답은 유리로 하여금 오늘 술 사 달라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건 무척 섭섭한 일이었으나, 그녀는 내색할 수 없었다.
그를 향한 마음은 집착과 비슷하긴 해도 어디까지나 진심이라서, 이 순간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보다 그의 컨디션에 대한 염려가 우선이었다.
“양치질이나 똑바로 하고 와.”
유리는 시원한 미소를 띤 채 태오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자마자 미련 없이 화장실 쪽으로 사라지는 태오는 꼭 말 잘 듣는 대형견 같았다.
유리는 그런 그를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이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얼굴이 많이 피곤해 보이니 이따가 외근 나가기 전에 커피라도 사 줘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책상 앞으로 직행한 그 순간.
“뭐야, 이거…….”
태오에게 있어서는 안 될 물건 하나가 발견되었다. 바로 나봄이 전해 달라고 했지만 유리가 갈기갈기 찢어 없애 버렸던 편지였다.
이게 왜 단태오 책상 위에 다 이어 붙여진 채로 놓여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유리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편지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누가 발견하고 찾아 줬나. 아니면 누군가 쓰레기통에 너한테 쓴 편지가 있다고 알려 줬나.
단태오는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아는 거지?
갑자기 복잡해진 머릿속은 쉽사리 진정되질 않았다. 그래서 미간만 잔뜩 좁히고 있으니.
“아, 치약을 안 들고 갔네.”
화장실로 떠난 줄 알았던 태오가 곧바로 돌아왔다. 책상 앞에서 나봄의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유리를 확인한 그는 훠이훠이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왜 남의 편지를 막 읽고 그래. 저리 안 비켜?”
“이거 어디서 났어?”
“바, 받았다. 왜.”
“이렇게 너덜너덜하게 찢겼던 걸 다 찾아 붙여서 너한테 줬다고? 대체 누가?”
“남이사 찢겨 있던 걸 받든, 멀쩡한 걸 받아서 다시 찢었다 붙였든 니가 무슨 상관이야.”
태오는 혹시나 자신이 어제 했던 구차한 짓이 들켜 버릴까, 괜히 성질을 냈다.
하지만 그 속을 알 리 없는 유리는 제 뜻대로 순순히 굴러가지 않는 상황이 다시 짜증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뒤집어지는 속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순 없지.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머리를 써서 행동해야 해.
“내일 뭐해? 특별한 약속 없지?”
유리는 억지로 밝은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어.”
그리 대답하는 태오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하지만 이내 유리의 입에서 꺼내진 질문은 태오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봄 씨 불러서 술이나 같이 먹을까?”
“뭐? 술은 갑자기 왜.”
“그냥 뭐, 친목도모도 할 겸, 나한테 빚진 술도 갚을 겸.”
밥도 먹을 일 없었던 한나봄이랑 이번엔 같이 술을 마시다니. 그건 꿈에서도 상상해 본 적 없던 일이었다.
그래서 태오는 감히 수락하기가 조심스러웠으나, 그의 대답 따위 애초부터 중요하지도 않았던 유리는 아예 약속을 확정지어 버렸다.
“나봄 씨한테는 내가 전화해서 말해 놓을 테니까 걱정 마.”
“아니, 잠깐만…….”
“그럼 나 본사로 외근 간다. 회의 중엔 휴대폰 꺼 놓을 거니까 무슨 일 있으면 미나 씨한테 말해.”
유리는 뭐라 말하는 태오를 내버려 둔 채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태오에게서 떠나는 그녀의 발걸음은 급한 업무라도 밀려 있는 사람처럼 바빴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오는 눈동자를 일렁이고 있다가, 이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평소엔 죽도록 바라도 오지 않던 기회가 요즘 들어 자꾸 굴러 들어오는 것 같은데, 이걸 똑바로 붙잡아도 될지.
너의 그 사람을 무시하고 내가 감히 다가서도 될지.
그녀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게 익숙해져 버린 태오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망령처럼 그녀를 쫓아다닌다.
이젠 외면 받는 게 당연해져서 어지간한 반응엔 상처도 받지 않는다.
그건 확실히 그의 짝사랑이 바래지 않도록 지켜 주는 데 큰 몫을 했지만, 마냥 득이 되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가끔 기적적으로 그에게도 볕이 들 때면 희망보다는 그동안의 실망감이 더 크게 반응해서, 한 번 뻗어 보고 싶은 손을 스스로 묶어 두게 되어 버리니까.
* * *
우드레일 본사 1층.
오찬 약속을 마친 차준이 로비로 들어섰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저마다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네요. 오늘 하루도 수고 하세요.”
차준은 다가오는 이들 모두에게 다정히 화답했으나, 대화를 친근하게 이어 가지는 않았다. 인간관계에 필요 이상 힘을 쏟지 않는 그의 성향 때문이었다.
타인에게 호감을 사는 건 너무나도 쉽다. 사람들은 원치 않아도 내게 관심을 주고,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호의를 베푼다.
그게 순수한 의도라고 볼 수는 없지만 어차피 타인의 속마음 따위 흥미도 없다.
딱 한 사람, 나봄을 제외하곤.
문득 나봄을 떠올리자 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다시…… 생각해 봐요, 우리.’
‘얼마 전에 처음 만난 사이처럼, 다시 서로에 대해 알아 가고 다시 마음을 키워 가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고 싶어요.’
그의 간절한 고백을 거둬 내고 시작을 말한 그녀.
사실 차준은 그 뒤로 마음이 혼란스럽다. 애초부터 그들의 인연은 나봄이 먼저 건네준 일방적인 관심과 사랑을 그가 받아 줌으로써 시작되었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봄은 그때처럼 먼저 손을 내밀어 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다가가도 미지근한 반응만 보이는 모습이 차준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
“후우.”
차준은 그녀로 인해 드리워진 먹구름이 표정으로 드러날까 싶어, 짧은 심호흡으로 복잡한 심경을 정리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어머! 선우차준 본부장님!”
누군가가 반가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뒤늦게 아는 척이라도 해 보려는 직원이라고 생각한 차준은 짧은 눈인사만 건네기 위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가오는 사람은 얼마 전 워크숍까지 같이 갔던 우드레일 현장팀의 허유리 파트장이었다.
나봄과 간접적인 관련이 있는 그녀를 무성의하게 대할 수 없었던 차준은 친히 걸음을 멈추고 몸을 틀었다.
“여기서 보게 되니 반갑네요. 본사 회의 오셨나요?”
“네, 퍼니쳐팩토리에서 여기까지 오기 너무 힘들어요. 식사는 하셨어요?”
“점심 약속 끝내고 오는 길이에요.”
“아아, 그러시구나.”
유리의 호응을 끝으로 한차례 대화가 종료되었다.
이쯤에서 제 갈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차준은 마무리 인사를 건네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맞다! 본부장님! 저 명함 새로 팠어요!”
그때,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유리가 소리쳤다. 잠시 가방을 뒤적이던 그녀의 손에 딸려 나온 건 자그마한 명함 한 장이었다.
“아…….”
차준은 악수를 위해 뻗었던 손으로 그녀의 명함을 받았다.
쓸모없는 명함 모으는 데에는 취미가 없건만, 적어도 이 앞에서는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고마워요. 지갑에 잘 넣어 둘게요.”
그래서 형식적인 감사를 표하며 정장 재킷 안의 지갑을 꺼내 들자.
“본부장님 명함도 주시겠어요?”
유리가 두 눈을 반짝이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지갑을 열던 차준의 손이 일순 멈추었다.
“명함이요?”
“네, 한 장 갖게 되면 영광일 것 같아서요.”
“뭐…….”
이렇게 거리감 없이 구는 타입은 불편한데. 명함 한 장 건네는 것 정도로는 별문제 없으려나.
“기꺼이 드리죠.”
차준은 가볍게 대답하며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빳빳한 명함을 꺼내 들었다.
금박이 박힌 고급스러운 차준의 명함을 본 유리는 두 눈을 반짝였다.
“정말 예쁘네요! 역시 본부장님 명함답습니다.”
“뭘요. 그거 다 쓰면 유리 씨 명함에도 금박 넣어드릴게요.”
“와아아, 정말요?”
“네, 그러니까 우리 나봄이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세요.”
나봄을 위한 부탁을 건네는 차준에게선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졌다.
안타깝게도 유리는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굳이 그걸 티내지는 않기로 했다.
“당연하죠! 안 그래도 나봄 씨랑 친해지려고 노력 중이에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 같아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유리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차준에게 말했다.
차준은 그런 그녀에게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지어 보였고, 이내 지갑을 도로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럼 나중에 봐요.”
그러고서 내뱉는 작별 인사는 끝까지 매너 있었다.
특히 선우차준 특유의 여유롭고 젠틀한 태도는 태오가 절대 따라하지 못할 것이었다.
‘성질 더러운 녀석보다는 확실히 이런 남자가 벤츠지. 특히 한나봄처럼 소심한 성격이라면 더더욱.’
유리는 멀어지는 차준의 근사한 뒷모습을 보며 자신의 계획에 당위성을 찾았다.
누군가는 이렇게 한나봄을 견제하는 날 악녀라고 칭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부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질투에 눈이 먼 나쁜 여자가 아니라, 그저 어울리지 않는 인연에게 더 맞는 짝을 찾아 주는 일을 좋아할 뿐이니.
* * *
♩♪♬♩♪♬―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 둔 나봄의 전화가 울렸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으나, 경계심 없는 그녀는 순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봄 씨, 나예요.
휴대폰 너머 수신인은 친근한 척 말했지만 나봄은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허유리 파트장. 번호 저장 안 했구나?
유리는 결국 제 이름을 직접 밝혔다. 그녀는 분명 나봄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나 나봄의 표정에는 난처함이 어렸다.
“아아, 유리 씨…….”
보통은 반갑기만 한 유리가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지난밤 일 때문이었다.
분명 곱게 접어서 그녀에게 건네줬던 편지는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다가 처참한 몰골이 된 채로 태오의 손에 들려 있었으니까.
“어쩐 일로 전화를…….”
나봄의 불편한 기색은 흐려지는 말꼬리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유리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특유의 쾌활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일 뭐해요? 태오랑 다 같이 술이나 마시러 갈래요?
“술이요? 저 술 잘 못하는데…….”
―태오도 잘 못 마셔요. 술 취하면 얼마나 감성적으로 변하는지. 저번엔 울기까지 했다니까요.
“아아…….”
갑자기 여기서 단태오 얘기는 왜 튀어나오는 걸까.
나봄은 늘 기승전 단태오인 유리가 의아해졌다.
나봄에게 태오는 공통 화젯거리로 꺼낼 만큼 친근한 존재가 아닌데, 그걸 알면서도 왜 자꾸 그의 얘기를 하는 건지.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와요.
유리는 한 번 더 힘주어 설득했지만 나봄은 여전히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피하기만 할 수는 없으니, 나봄은 용기를 내서 아주 자연스럽게 편지 이야기를 꺼내 보기로 했다.
“네, 그럴게요. 그런데 유리 씨. 어제 드렸던 편지는…….”
하지만 그녀의 말이 제대로 나오기도 전에.
―아, 맞다. 나봄 씨. 그리고 어제 준 편지 말이야.
“…….”
―내가 어디다 떨어트렸는지 도저히 보이질 않아서 못 줬어요. 나봄 씨가 꼭 전해 달라고 부탁했던 편지인데 어쩌지? 정말 너무너무 미안해요.
유리가 먼저 편지 얘기를 꺼내 주었다. 그 끝에 붙은 미안하다는 말은 진심처럼 느껴질 만큼 죄책감이 많이 담겨 있었다.
“아아, 그러셨구나…….”
나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꾸했다.
어제 찢긴 편지를 보았을 때 느껴졌던 악의는 아직 옅어지지 않았으나, 유리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보단 잃어버렸다고 알고 있는 편이 더 이해하기 쉬웠다.
어찌 보면 회피일지도 모르지만…… 확실하지 않다면 좋은 쪽으로 넘어가는 게 낫잖아.
“괜찮아요. 떨어진 거 누군가 발견해서 태오한테 잘 전달해 줬나 봐요.”
―그래요? 너무 다행이다!
“네, 잘 받았다고…… 메시지가 왔었어요. 아주 간단하게.”
나봄은 미안해하는 그녀를 안심시키면서도 거짓말을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겨우 메시지 한 통 보냈다고? 그 편지를 받고서?
“태오가 그렇죠, 뭐.”
―으이구, 그러니 인간관계 확장이 안 되지. 걔 장례식장도 나 혼자 가게 생겼어.
“하하…….”
나봄은 영혼 없는 웃음을 흘리며 통화를 마무리할 멘트를 생각해 냈다.
마주치기는 해야 하지만 같이 부딪히며 일할 사이는 아니니, 적당히 전형적인 격려 인사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았다.
“그럼 오늘도 수고하세요!”
나봄은 거리감이 드러나지 않도록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리는 ‘으응!’하는 밝은 추임새로 화답했고.
―우린 내일 보는 거 맞죠? 주종은 소맥 괜찮나?
다소 당황스러운 약속을 잡아 버렸다. 휴대폰을 얼굴에서 떼어 내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나봄의 눈동자가 대뜸 휘둥그레졌다.
“네, 네?”
―아까 그러자고 대답 했었잖아!
“아…….”
내가 그랬었나. 정말 그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려운 얘기를 꺼내기에 앞서 별 뜻 없이 그런 말을 덧붙였던 게 떠오른 나봄은 하는 수 없이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네, 그래요. 그럼 내일 봐요.”
―사케 괜찮으면 장소는 압구정 로데오! 내가 잘 가는 이자카야가 있는데 거기서 만나요. 시간은 넉넉잡아 여덟 시 콜?
“여덟 시…… 그때까지는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아! 우리 태오한테 술 사 달라고 그러자! 태오가 나한테 술 사 주기로 약속한 게 있어서!
역시나 마지막은 태오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스러웠던 나봄은 이번에도 어색한 웃음으로 때워 버렸다.
정말 알면 알수록,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인지 전혀 모르겠다.
그래서 이들과 함께 있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