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남친이 내게 반했다-29화 (29/104)

29. 자꾸 신경이 쓰여

2017.08.07.

“도착했어.”

“…….”

“나봄아?”

“네, 네?”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다 왔다고.”

차준의 말에,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나봄이 정신을 되찾았다.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얼떨떨한 눈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니, 곧바로 시야에 들어오는 건물은 분명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오는 길에 차가 한 번도 막히지 않은 덕분에 집에서 여기까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좀 더 정문 앞으로 가 줄까?”

차준은 다정한 목소리로 나봄에게 물었다. 그러나 나봄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여기서부턴 혼자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괜히 오해라도 사면 안 되잖아요.”

별 뜻 없는 말이었으나 차준의 눈빛은 순간 흐려졌다.

그는 입술을 닫고 마른침을 삼켰고, 이내 여린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오해 받으면…… 안 되는 거야?”

“네?”

“나쁜 의미가 없는 건 알지만 난 고백에 대한 대답 기다리고 있는 입장이라서…….”

“아…….”

“너의 말수가 부쩍 적어진 것까지 계속 신경이 쓰여.”

차준의 솔직한 말은 나봄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고백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려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녀보다 더 초조해하는 차준 때문이라도 대답을 미루고 싶지 않았던 나봄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아까 하려다 막힌 말을 조심스레 꺼내 놓았다.

“다시…… 생각해 봐요, 우리.”

“고민할 시간이 더 필요해?”

“아니요, 고민할 시간 말고.”

“…….”

“얼마 전에 처음 만난 사이처럼, 다시 서로에 대해 알아 가고 다시 마음을 키워 가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고 싶어요.”

그 말은 언뜻 거절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어린 감정은 차준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정의를 내려 본다면 뭐랄까.

브레이크.

그녀는 지난 10년의 공백을 채워 나가는 것이 버거워, 조금 쉬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 그녀에게 차준이 하고 싶은 말은 분명히 존재했다.

‘난 시작하고 싶지 않아. 그냥 모든 게 완벽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그러나 그녀가 듣도록 꺼내 놓지는 않았다.

매달리면 그녀가 절실해 보일 테고, 절실함이 엿보이면 불안정한 본모습이 들켜 버릴 테고.

망가진 날 알아채 버린 너는 예전과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 주지 않을 거잖아. 난 동정도, 비난도 없는 순수한 너의 사랑이 좋은데…….

“하아…….”

한동안 대꾸가 없던 차준은 기나긴 한숨을 흘려보냈다. 나봄은 갑작스럽게 가라앉은 그의 분위기를 눈치채곤 그에게로 가만히 시선을 두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감정은 분명 그녀의 대답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으나.

“그래, 그렇게 하자.”

정작 꺼내진 대답은 미련조차 남아 있지 않은 수긍이었다. 뒤따라오는 미소는 여느 때처럼 부드럽고 달콤했다.

“갑자기 분위기를 잡길래 거절당하는 건 줄 알았잖아.”

“…….”

“거절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 하하.”

차준은 심각해진 차 안 공기를 띄워 보려는 듯 밝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사이 두 번이나 들어간 ‘거절’이라는 단어는 제법 무게감이 있었다.

생각보다 후련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무사히 제 마음을 전한 나봄은 그를 따라 엷게 웃었다.

“그럼, 이제 전 출근해 보겠습니다.”

나봄은 가벼운 인사까지 마치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잠깐.”

하지만 짧은 말로 그녀를 가로막은 차준은 잠시 멈춰 놓았던 차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머지않아 그의 하얀 벤츠가 들어서는 곳은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의 정문 앞이었다.

나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안까지 차를 끌고 와 버린 차준을 바라보았다. 아까 분명 혼자 들어가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걸 그새 까먹어 버렸을 리는 없었다.

그래서 놀란 눈만 깜빡이는 나봄에게 차준은 낮은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이제야 제대로 도착.”

“…….”

“생각해 보니까 어차피 본사에서 회의가 있다고 말해 뒀었는데, 굳이 오해 살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말을 마친 차준은 제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마침 정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직원들은 그를 알아보고 서둘러 달려 나왔다.

“앗, 본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워크숍 이후 처음 뵙습니다! 현장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공간.

그 한복판에서 차준은 조수석 문을 손수 열어 주었다. 파르르 떨리는 나봄의 눈동자가 주변을 살펴보다가 차준에게로 옮겨졌다.

“오빠……?”

“괜찮아, 괜찮아. 편히 내려.”

차준은 그리 말했으나 나봄은 이미 난처해질 대로 난처해져 버린 후였다. 차준의 차에서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저들끼리 무슨 말을 수군거리는 직원들 때문이었다.

“본부장님! 오늘도 한나봄 팀장님하고 같이 계시네요! 오오!”

아니나 다를까.

그들 중 가장 넉살 좋은 한 명이 두 사람을 향해 짓궂은 농담을 건넸다.

덕분에 더욱 경직되어 버린 나봄과 달리 차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고,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대꾸했다.

“안녕하세요, 근처에 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들렀습니다.”

“…….”

“단태오 팀장님한테 안부 전해 주세요.”

왜 난데없이 그 아이의 이름이 튀어나온 걸까.

그 찰나의 순간 나봄은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미처 드러내지도 못하고 얼어 버렸다.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옥외 휴게실 음료 자판기 앞.

차마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못하고 그저 물끄러미 그녀만 바라보고 있는 단태오 때문에.

* * *

“하아…….”

태오의 사무실, 나봄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자판기 앞에 서 있던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건물 안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던 것 같은데, 곧바로 따라 들어와 보니 그는 보이질 않았다.

어차피 같은 건물 안에 있겠지만 나봄은 괜히 걱정스러워졌다.

그녀가 차준의 차에서 내리던 순간, 바람 앞 촛불처럼 흔들리던 그의 눈빛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이따금 그런 눈빛으로 나봄을 볼 때가 있었다.

5년 만에 본사 회의실에서 마주쳤을 때, 허유리 파트장이 대학교 첫사랑 얘기를 꺼냈을 때, 뜻밖의 건네진 도움에 고맙다는 말을 할 때, 얼마 전 미안한 마음을 담아 저녁 식사를 신청했을 때.

그리고 레스토랑 무대 위에서 본의 아니게 진심을 전해 버렸을 때.

되새겨 보니 꽤 많은 순간이었다. 그때마다 지어 보였던 특유의 표정은 이제 보니 전부 비슷한 감정을 띠고 있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단태오라는 사람이 부쩍 궁금해진 나봄은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예전에 들었던 대학교 첫사랑 얘기가 전부 거짓말이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제대로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그녀가 체감하고 있는 태오와의 거리는 사적인 질문을 물어볼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평소에 전화나 문자로 간단한 안부조차 주고받은 적이 없다.

그래서 슬슬 복잡해지려는 머릿속을 정리하던 도중.

철컥―

사무실 문이 열리고 드디어 단태오가 돌아왔다. 동그란 나봄의 눈동자가 곧바로 그를 향했다.

“와 있었네.”

“어? 아…… 응.”

“본부장은.”

“나 여기 내려 주고 바로 가셨어.”

나봄은 태오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했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사무실 책상까지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나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을 뿐.

나봄은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태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앉자마자 책상 위 파일부터 펼쳐 든 그는 서류에 눈동자를 고정시킨 채 바로 본론으로 직행했다.

“새로운 디자인을 살펴봤는데 확실히 그립감은 나아진 것 같아. 문제는 색상인데, 목재가 화이트 오크로 확정됐으니까 그거 고려해서 결정해 보자.”

너무 많은 걸 눌러 담아 놓느라 오히려 딱딱하게 굳어 버린 표정.

나봄의 눈에 비치는 태오는 딱 그랬다. 그래서 회의 내용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그에게만 온통 신경이 쏠린다.

“가구는 침대, 협탁, 5단 서랍장, 분리형 장식장까지는 넣기로 했어. Lily 라인은 기본적으로 침실에 맞춰져 있거든.”

“…….”

“하지만 최근엔 Lily 라인에 대한 매스컴 관심사가 높아져서 부엌이나 거실 가구 쪽으로도 확장할 가능성이 있어. 거기까지 염두에 두고 디자인 시안 몇 개 더 가능해?”

“…….”

“한나봄?”

드디어, 단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계속 보던 눈동자인데 오늘따라 유독 까맣다고 생각했다.

“내 말 듣고 있어?”

“어, 어?”

“디자인 시안 가능하냐고.”

재차 꺼내진 태오의 질문에 정신줄을 다잡은 나봄은 황급히 시선을 책상 위 서류 쪽으로 끌어 내렸다.

하지만 지금 그가 뭘 물어보는 건지 제대로 듣지 못했던 탓에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아, 그게…….”

그래서 괜히 종이만 뒤적이며 시간만 끌고 있자, 태오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집중 좀 해.”

기어이 한 소리를 듣고 말았다. 면목이 없는 나봄은 작게 대답했다.

“미안…….”

태오는 나봄에게 손을 뻗었고, 그녀가 보고 있는 페이지의 뒷장을 넘겨주었다. 그러고서 덧붙이는 말은 나봄의 심장을 쿵 떨어지게 만들었다.

“본사에 간다는 거짓말로 회의 미룬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도 않잖아.”

그걸…… 어떻게 알았지?

차준이 해 놓은 거짓말을 맥없이 들켜 버린 나봄은 두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내가 미룬 건 아닌데. 난 원래 제 시간에 맞춰 여기로 올 생각이었는데.

그런 사사로운 변명을 내뱉기에는 태오의 시선이 너무 금방 그녀에게서 떨어져 버렸다. 다시 제 서류로 고개를 내려 버린 그는 어쩐지 표정이 더 굳어 버린 것 같다.

“일단…… 추가 시안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고.”

아아, 그래서 넌 화가 나 보였구나.

“잠금장치는 기존 모델이 워낙 내구성 좋게 나와서 손볼 필요도 없겠지만 한 번 더 확인해 줘.”

오늘따라 유달리 날 바라보지 않는 이유도 이제야 알겠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나봄은 그에게 향해 있던 흔들리는 눈빛을 들고 있는 서류로 내려놓았다. 모르는 글자는 하나도 없었으나 좀처럼 읽히지가 않았다.

“그럼 세부 스케줄 설명해 줄게. 아직은 유동적이니까 변경하고 싶은 일정 있으면 미리 말해.”

“응.”

“다음 달에 열릴 정기 총회에서 Lily 프로젝트 브리핑이 있을 예정이고, 아마 그 전에 창립 기념 파티에서도 간단하게 소개될지 몰라.”

“응, 알았어.”

“소개가 되든 안 되든 외주 업체 관계자는 참여하는 편이 좋고.”

“응…….”

대답은 하고 있지만 집중은 못하고, 그를 따라 종잇장을 넘겨 보지만 어딜 말하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고.

마냥 혼란스럽기만 한 나봄은 지금 온 신경을 기울여 해명할 타이밍을 살피고 있다.

차라리 평소 하던 대로 열을 올리거나, 흥분해서 씩씩거리고 있으면 휩쓸려서 확 얘기해 버릴 수나 있을 텐데.

오늘의 태오는 다른 때와 달리 지독히도 차분하고 사무적이어서 큰일이다.

오해를 풀어 볼 조금의 실마리도 보이질 않아.

.

.

.

한 시간 남짓한 회의가 끝났다.

기쁜 소식은 더 이상 단태오에게 싫은 소리를 듣지 않았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끝끝내 아까 일에 대한 해명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라도 좋은 사이로 거듭나 보겠다고 결심한 지 얼마나 지났더라.

그동안 쌓인 앙금이 풀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얽히기만 하는 것 같다. 일에 모든 걸 다 건 사람인데 일 문제로 실망을 시켜 버렸으니, 어떻게 만회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하기만 하다.

“오늘 회의 내용은 내가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 줄게.”

“어? 아니, 괜찮아. 잘 이해했어.”

“내 업무라서 그래.”

나봄을 사무실 밖까지 배웅하는 태오는 마지막까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나봄은 그런 그에게 작은 고갯짓을 하고는 이내 등을 돌렸다. 천근만근인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여기서 더 버텨 봤자 나아질 게 없었다.

탁―

머지않아 들려오는 사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

그의 눈길이 떨어진 걸 느낀 나봄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빌미를 잡아 사과를 해야 할 텐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던 그때.

“아.”

잊고 있던 무언가가 떠올랐다.

“편지…….”

아직 쓰진 않았지만 오늘 꼭 주기로 약속했던 그거.

그걸 써야겠어.

편지 전하는 걸 잊은 척하며 돌아가서, 오늘 본의 아니게 거짓말로 일정 꼬이게 만들어 버린 일을 제대로 사과해야겠어.

막막한 상황에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생기자, 힘없이 처져 있던 나봄의 어깨가 씩씩해졌다.

서둘러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건물을 빠져나간 나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인적이 드문 곳을 찾기 시작했고, 이내 주차장 한구석에 있는 텅 빈 흡연실을 발견했다.

태오의 사무실 쪽에서도 보이지 않는 그곳은 숨어서 몰래 편지를 쓰기에 딱 좋았다.

나봄은 흡연실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가장 외진 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러고선 가방을 뒤적였다. 다행히도 펜과 종이는 넉넉히 들어 있었다.

종이가 편지지가 아닌 단순한 A4용지라는 게 좀 걸리지만, 어차피 그날 무대 위에서 들고 읽어 줬던 것도 A4용지였으니까 괜찮겠지.

나봄은 벤치를 책상 삼아 글씨를 쓰기 위해 몸을 옆으로 돌렸다.

짧은 고민 끝에 적은 첫 마디는 겨우.

[단태오 팀장에게]

그리고 한동안 펜을 움직이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 보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서 첫 마디를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음, 일단 인사부터 해 볼까.

[안녕, 알고 지낸 지는 꽤 됐는데 편지를 써 본 적은 없는 것 같네.]

이건 너무 당연한 얘기잖아. 오래 알고 지냈으면 뭐해. 학교 다닐 땐 친하지도 않았고, 졸업 후 5년 동안은 따로 연락한 적도 없었는데.

어색한 인트로에는 반드시 수습이 필요했다. 펜 끝을 입에 문 채 고심하던 나봄은 이내 결심한 듯 다시 글씨를 적기 시작한다.

[그동안 내가 너에 대한 오해를 너무 많이 하고 있었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 속에 너는 무섭고, 괴팍하고, 또 조금은 안하무인이었거든.]

그에 대한 험담은 지니고 있던 세월만큼 술술 잘도 써졌다.

하지만 그동안의 오해는 이쯤에서 접어 두고, 그녀는 최근 들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 제 마음을 풀어 놓기로 했다.

[그런데 요즘 내가 보고 있는 너는 누구보다 자기 일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 같아. 함께 프로젝트를 한 지는 오래 되지 않았어도 늘 멋있다고 생각해.]

‘멋있다’는 단어를 쓸 때쯤, 나봄은 오늘 몰래 지켜봐 왔던 그의 얼굴을 은밀하게 떠올렸다.

서류를 내려다볼 때마다 돋보이던 긴 속눈썹, 깊은 생각에 잠길 때마다 지그시 깨무는 아랫입술, 가끔 등장하는 영어 단어를 완벽하게 발음하던 혀.

그리고 긴 글을 한 번도 더듬거리지 않고 읽어 주던 낮은 목소리.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와중에 참 많은 걸 훔쳐보았다. 그저 떠올렸을 뿐인데도, 그를 정말 눈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모든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덕분에 나봄의 펜에는 한층 속도가 붙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왜 더 가까워지지 못했을까 싶어. 학교에서 조금 더 친하게 지냈더라면 너에게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을 텐데. 난 사람 보는 눈이 없나 봐.]

그래, 난 사람 보는 눈이 없어. 눈치코치도 없고.

어느새 스스로를 탓하고 있는 나봄은 종이 위로 쏟아지는 진심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은 돌이킬 수 없지만 앞으로 맞이할 시간은 후회가 남지 않게 잘 보냈으면 좋겠어. 너에 대해 궁금한 것도 많고 더 알아보고 싶은 것도 많아. 가만 보면 넌……]

그렇게 마음이 이끄는 대로 펜 끝을 움직이다가, 툭.

[참 귀여운 구석이 있어.]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문장이 튀어나오자 나봄은 일순 펜을 멈추었다.

단태오가 귀엽다니. 난 대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지. 까딱하다가는 만만하게 본다는 오해를 사겠어.

당황한 나봄은 서둘러 그가 싫어할 만한 뒷말을 새까맣게 지웠다. 그러나 까만 선을 따라서 주르륵 흘러나오는 건, 그에게 ‘귀여움’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렸던 지난 순간들이었다.

‘한나봄, 남자친구 있어?’

‘아, 아니. 없는데…….’

‘그럼 나 시켜 줘.’

‘뭐?’

‘대신 이거 너 줄게.’

전혀 짐작하지도 못했던 뜻밖의 고백.

‘데이트라니! 내가 너랑 왜!’

‘왜. 개나 소나 다 하는데 나만 못 하는 이유라도 있어?’

‘……뭐?’

‘난 적어도 내 사람 버리고 어디 가진 않아.’

날 지켜 주려는 건지, 성질만 퍼붓고 있는 건지 모를 서툰 도움의 손길.

‘중학교 2학년 때, 바다로 가족 여행을 갔는데 엄마가 목욕탕도 못 들어가는 놈이 바닷가는 오죽 무섭겠냐면서 계속 손을 붙들고 있었어.’

‘뭐?’

‘다 큰 놈이 엄마 손 잡고 다니는 게 너무 쪽팔려서 그 뒤로 물 같은 건 무섭지도 않게 됐어.’

‘그래서…… 지금 더 안 좋은 기억을 만들어 주겠다는 거야?’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사람한테 난데없이 자신의 수치스러운 기억을 꺼내 놓던 엉뚱함.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니라고 거짓말까지 했는데…….’

‘거짓말은 왜 하신 거죠?’

‘……날 더 피할까 봐.’

마지막으로.

‘내 성격이 워낙 오해를 많이 사서…….’

‘…….’

‘내가 조심해야 되거든요. 겁먹지 않게.’

자신이 주인공도 아닌 무대 위에서 어울리지 않는 홍조를 띤 채 쏟아 내던 속마음까지.

그건 다시 떠올려 봐도 귀엽게 비쳐지는 모습들이었다. 그래서 나봄은 방금 전 그 문장을 지웠던 게 살짝 후회가 됐다.

나쁜 뜻도 아닌데 그냥 쓸걸 그랬나. 어차피 편지를 전해 주면서 쌓인 오해들을 풀 생각이었잖아.

그렇게 다 늦은 고민에 곰곰이 잠겨 있던 그 순간.

“나봄 씨, 거기서 뭐해?”

흡연실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나봄은 인기척이 나는 쪽으로 곧바로 고개를 틀었다.

“유, 유리 씨…….”

“나봄 씨가 담배 피우러 온 건 아닐 테고.”

“아, 그게…….”

“여기서 뭘 쓰고 있는 거야?”

평소의 쿨한 미소를 입가에 띤 유리는 나봄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어렵지 않게 편지의 맨 첫 줄을 눈에 담았다.

“단태오 팀장님…… 에게?”

하필 좋던 마음도 예민해지게 만드는 이름에, 그녀의 눈빛이 일순 차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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