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계속, 여기 남아 있었다.
2017.08.04.
“오…… 빠?”
“주말 잘 보냈어?”
“예, 예. 그런데 아침부터 여긴 왜…….”
“응, 너 납치하려고.”
납치.
라는 파격적인 단어에 놀란 나봄은 동그란 눈동자만 깜빡이고 서 있었다.
차준은 그런 그녀에게로 한 발자국씩 여유로운 걸음을 옮겼고, 이내 바로 코앞에 멈춰 섰다. 그러고선 따듯한 온기가 어린 손을 뻗어 그녀의 작은 손을 꼭 붙잡았다.
“가자.”
“어딜…… 요?”
“데이트.”
그리 말하는 차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했다.
하지만 그녀는 순순히 수락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우드레일 현장팀과 업무적인 스케줄이 잡혀 있었으니까.
“오늘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가 봐야 해요. 열 시 반에 회의가 있거든요.”
나봄은 조곤조곤하게 말하며 그에게 사로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손끝에 힘을 더한 차준은 특유의 눈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본사에서 더 급한 회의를 해야 한다고 말해 놨어.”
“네?”
“그러니까 점심때까지는 나랑 있어 줘. 부탁이야.”
늘 장난기 넘치던 차준의 눈빛이 한순간 애절해졌다. 원래 이렇게 무턱대고 조르던 사람인가, 싶긴 했지만 여전히 거부하기는 힘들었다.
고민하던 나봄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결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점심때까지 같이 있어 줄게요.”
어차피 그에게 해야 할 말도 있었다. 며칠 더 마음의 준비를 한 뒤에 말할 생각이긴 했으나,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냥 오늘 얘기해야겠다.
차준은 나봄의 복잡한 마음과 상관없는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랑 꼭 가고 싶은 데가 있어.”
“거기가 어딘데요?”
“비밀. 하지만 기대해도 좋아.”
그는 나봄을 제 차로 이끌었다. 어딜 가려는 건지는 몰라도 평소보다 들뜬 모습이었다.
나봄은 그런 차준을 따라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곧바로 안전벨트를 찾아 매던 순간, 갑자기 지난 금요일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나…… 그 편지, 주면 안 되냐.’
‘무슨 편지?’
‘아까 읽어 줬던 거…….’
‘괜찮다면 월요일 날 다시 써서 줘도 될까?!’
아, 편지 써 주기로 했는데. 주말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네.
나봄은 오늘 태오를 만나러 가기 전에 뭐라도 써서 전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때마침 운전석에 오른 차준은 이미 채워진 그녀의 안전벨트를 보곤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거 내가 채워 주려고 했는데.”
“워낙 습관이 되어 놔서…….”
“안아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깝다.”
애정 어린 멘트를 난데없이 훅 집어넣는 건 여전했다.
나봄은 이럴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늘 그렇듯 눈빛만 일렁이고 있으니 차준은 싱그러운 미소를 띤 채 내비게이션을 만졌다. 목적지 칸에 입력하는 주소는 나봄에게도 많이 익숙한 장소였다.
“오, 차로 10분밖에 안 걸리네.”
“해성 고등학교…… 오빠, 지금 우리 학교 가는 거예요?”
“응응, 넌 집 근처라서 종종 가 봤으려나.”
“아니요, 저도 안 가 본 지 꽤 됐어요.”
사실은 못 갔던 것에 가까웠다. 차준과의 추억이 너무 많이 묻은 그녀의 고등학교는 혼자 찾아가기 너무 쓸쓸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피해 다니던 게 몇 년. 그 뒤로는 아예 존재 자체를 잊고 살았다. 오늘 가게 된다면 적어도 9년 만에 방문일 거다.
“출발합니다.”
“아…….”
“이제 우리 과거로 돌아가는 거예요, 나봄 씨.”
차준이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의 과거로 돌아가는 거라고.
그건 얼마 전의 나봄이라면 그저 마음껏 설레며 기뻐할 일이겠지만, 과거의 기억을 떠나 새로운 기억을 쌓아 보기로 한 지금의 그녀에겐 꽤 곤란한 일이었다.
왠지 앞으로 나아가려 했던 걸음이 억지로 멈춰진 것 같아서.
* * *
똑똑―
낮은 노크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책상 앞에 앉아 추리소설을 읽고 있던 태준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네, 들어오세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은 서미란 대표였다. 어차피 이 집에서 그를 찾아올 사람은 그녀밖에 없긴 했지만.
“출장은 잘 다녀오셨나요?”
태준은 언제나처럼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서 대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어제 병원에서 도망쳤었다고 들었어. 대체 혼자 어디 갔던 거니?”
“혹시라도 김 실장님께 책임을 물으실 생각이라면 관두세요. 제가 멋대로 행동한 거니까.”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태준의 시선은 여전히 책상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게 답답했던 서 대표는 성난 걸음으로 또각또각 걸어와 책상 위 책을 빼앗아 버렸다. 그제야 느리게 들어 올려지는 태준의 눈은 심각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대답해. 어딜 갔다 왔던 건지.”
서 대표는 애써 울화를 참아 낸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러자 긴 한숨부터 흘려보낸 태준은 이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회사에 다녀왔어요.”
“뭐?”
“차준이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더라구요.”
그건 그녀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대답이었다. 그래서 더욱 심란해진 서 대표는 미간까지 좁힌 채 말했다.
“그 애한테는 너 혼자서 가지 말라고 했잖아.”
“…….”
“너만 보면 모진 말을 퍼부어 대는 철없는 놈이야. 다시 우울증이라도 도지면 어떡하려고 그러니.”
서 대표의 걱정에 태준은 옅은 웃음을 흘려보냈다. 그러고는 또렷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어머니와 같이 가면…… 뭐가 달라지나요?”
“아니, 달라질 건 없겠지. 하지만 난 너처럼 그 애가 난리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아.”
“…….”
“니가 상처받기 전에, 내가 멈춰 줄 수 있어.”
내가 상처 받기 전에 멈춰 준다는 그 말이 녀석을 더욱 분노하게 만든다는 걸, 그녀는 과연 알고 있을까.
모르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심리전엔 누구보다 강한 그녀이니까.
하지만 그래서 되도록이면 차준을 혼자 만날 생각이었던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차준의 분노를 상대하고 싶은 게 아니라, 전부 다 후련하게 폭발시킬 때까지 받아 주고 싶었다.
그 마음까지도 모두 읽어 낸 서 대표는 그를 동정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넌 생각이 깊고 순수한 그 사람을 닮았어.”
이윽고 꺼내지는 이야기는 사는 동안 내내 들어왔던 아버지에 관한 것이었다.
태어나기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태준에게도 소중한 존재이긴 했으나, 그 얘기가 꺼내지는 건 끔찍이도 싫었다. 그리움으로 감춰 놓은 그녀의 칼끝이 누굴 겨누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서였다.
“그 얘기는 그만두세요.”
태준은 듣고 싶지 않은 뒷말이 이어지기 전에 멈추려 했다.
그러나 쉽사리 멈추지 않은 그녀의 입술은.
“하지만 차준이는 흐르는 피부터가 달라. 지 애비를 닮아서 생각도 없고, 정도 없고, 인간미도 전혀 없지. 도무지 사랑해 줄 수가 없는 애야.”
이번에도 역시나 차준을 상처 입히는 말을 한다. 차준이 태어난 뒤로 30년 동안 쭉 그래 왔듯이.
‘이럴 거면 낳지를 말지 그랬어요! 아니면 뱃속에 있을 때 죽여 버리던가!’
순간 태준의 귓가에 그 애의 울음 섞인 절규가 들려왔다. 욱신거리는 심장의 고통은 지난 세월만큼 흐려지지도 않았다.
태준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입술을 닫았다.
여기서 그 애를 위한 말을 해 봤자, 인정 넘치던 아버지를 떠올리고 말 서 대표였다. 그럴수록 차준의 존재는 더욱 더 어둡고 구석진 자리로 밀려나 버리겠지.
“나가 주세요.”
“태준아…….”
“책은 돌려주시구요.”
급격히 온도가 낮아진 태준의 눈빛은 완강한 거부 의사였다.
더 이상 건드렸다가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그였기에, 서 대표는 하고 싶은 많은 말을 남겨 둔 채 자리를 뜨기로 했다.
그녀는 태준의 책을 도로 책상 위에 올려 두었고, 스탠드에 불을 켜 주었다.
“아무리 낮이라도 불은 켜고 읽어야지. 햇빛을 등지고 있잖니.”
“…….”
“필요한 게 있으면 꼭 나를 불러. 니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 줄게.”
억지로 내보내지면서도 다정한 그녀의 눈빛.
이 자리에 차준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녀는 어린 차준의 곁에 있어 달라는 애원에도 차갑게 등만 보여 왔었으니.
태준은 눈앞에 펼쳐진 책장에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한 문장도 눈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때 마침,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재킷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든 서 대표는 사무적인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어, 무슨 일이야. 본사 회의? 그런 스케줄 있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퍼니쳐팩토리에서 확인 전화가 왔다고?”
서 대표는 문손잡이를 붙잡아 돌렸고, 서둘러 복도로 나섰다.
하지만 문을 닫기 직전.
“아아, 선우차준이 수작을 부려 놓은 모양이네.”
“…….”
“이유야 뻔하지 않겠어? 한나봄 때문이겠지.”
동생의 이름과 함께 불린 낯익은 이름.
머지않아 태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작은 토끼처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한 여자의 얼굴이었다.
‘한봄 도어락 쪽 사람이라고 했죠? 이름이 어떻게 돼요?’
‘한, 한나봄 입니다.’
‘날 만났던 건 나봄 씨도 비밀로 해 줘요.’
‘전 그쪽이 누구신지도 모르는데요?’
‘그럼 더 잘됐구요. 자, 내릴 준비.’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릴 때쯤 방문은 닫혔으나, 서 대표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들려왔다.
“……10년 전 첫사랑에 목매달고 있는 꼴도 한심스럽기 그지없어.”
차준에게서는 듣지 못한 새로운 사실.
그걸 놓치지 않고 들은 태준의 눈빛이 옅게 흔들렸다.
* * *
1교시 수업이 한창일 고등학교 운동장.
나무 그늘 밑에 놓여 있던 낡은 벤치는 10년 전과 색깔이 달랐다. 하도 낡아서 최근에 한 번 페인트칠을 다시 한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부스러진 끄트머리는 여전했지만.
그곳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10년 전처럼 지그시 눈을 감고 살랑거리는 바람을 느끼고 있을 뿐.
“그거 기억나?”
그러다 먼저 입술을 떼어 낸 건 차준이었다.
나봄은 대답 대신 감은 눈꺼풀을 열고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머지않아 흘러나온 목소리는 지금 불고 있는 바람보다도 부드러웠다.
“나 축구하다가 여기 앉아서 땀 식힐 때…… 저쪽에서 니가 나 훔쳐보고 있는 거 다 구경하고 있었다.”
“네?”
“우리가 사귀기 훨씬 전부터, 나도 훔쳐보고 있었어.”
“…….”
“널.”
나봄을 따라 느리게 눈을 뜬 차준이 시선을 틀었다. 덕분에 마주보게 된 얼굴엔 여유로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나봄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정면으로 눈길을 두었다. 자신이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그녀 스스로도 모르겠어서였다.
하지만 차준은 계속 그녀를 응시한 채 마저 입술을 떼어 냈다.
“처음엔 참 작다고 생각했어. 그 다음엔 피부가 하얗다고 생각했고…….”
“…….”
“어느 순간부터는 귀여워 보였었던 것 같아. 가끔은 축구하다가도 막 손 흔들고 싶고 그랬다?”
한 마디 한 마디 이어 내는 차준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조심스러웠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나봄은 발끝으로 눈동자를 떨어트렸다.
케케묵은 기억들이 차례로 머릿속에 떠오르긴 하는데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무작정 꺼내 놓기에는 너무 소중한 기억이라 빛이 바랠까 걱정스럽고, 계속 품어 놓고 있기에는 무게만 점점 늘어날 것 같아서 걱정스럽고.
“……그랬었구나.”
결국 꺼내진 대답은 걱정한 것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았다.
그래서 다른 얘기라도 덧붙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그때, 한 번 더 차준의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왜 그렇게 신경이 쓰였나 몰라.”
“…….”
“너무 신경이 쓰여서 어느새 아무것도 못 하겠더라고. 그래서 무턱대고 고백했어.”
“…….”
“그때 니가 얼마나 놀란 표정을 지었는지, 넌 모를걸.”
차준은 말끝에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을 덧붙였다.
나봄은 그를 따라 엷은 미소를 퍼트렸으나, 그건 이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예쁜 추억이 전해 주는 설렘보다 그녀가 해야 할 말의 부담감이 더욱 크기 때문이었다.
나봄은 조심스레 숨을 들이마셨고, 곧 흐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사실…… 말씀 드릴 게 있어요.”
“뭐?”
“오늘 얘기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때 사귀자고 했던 거…….”
“어, 나봄아. 저기 봐!”
그러나 본론이 제대로 꺼내지기도 전에 차준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는 손끝으로 어느 운동장 한구석을 가리켰다.
“저기 기억 나?”
“네?”
“체육 창고. 열려 있나 가 볼까?”
차준은 마냥 신난 얼굴이었지만 나봄은 당황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말하는 체육 창고는 차준과 가장 많이 키스를 나누던 장소였으니까.
“아…….”
그래서 차마 대답을 못 하고 있자, 차준은 배시시 웃으며 그녀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러고는 체육 창고를 향해 달리듯 빠른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끌어당기는 힘이 세지는 않았으나 나봄은 어쩐지 두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느덧 도착한 추억의 장소는 벤치와 달리 변한 것 없이 그대로였다.
그들이 입학하기 전부터 휘어져 있던 유리창 창살, 까만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문, 그리고 너무 녹슬어서 금방 부서져 버릴 것 같았던 문고리까지.
지난 세월이 이곳만 스쳐 가지 않은 모양이다. 덕분에 잠자고 있던 그때의 감정은 점점 더 선명해진다.
차준은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붙잡았다.
“나봄아, 매트리스 뒤로 축구공이 들어가 버렸는데…… 니가 꺼내 줄래?”
그러고서 꺼내 놓는 대사는 벌써 10년도 지나 버린 그들만의 암호였다.
그걸 들은 나봄은 잠시 숨까지 멈추고 눈빛을 일렁였다.
‘나봄아, 매트리스 뒤로 축구공이 들어가 버렸는데, 니가 꺼내 줄래?’
점심시간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 일부러 나봄의 반까지 찾아온 차준은 뒷문을 붙잡고 서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 나봄은 함께 급식을 받으러 가자던 소라를 마지못해 뿌리치고, 차준을 따라 운동장으로 향했다. 두 발자국쯤 뒤처진 걸음으로.
그가 너무 빨리 앞서가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나봄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을 뿐이다.
자박자박 모래알을 밟으며 움직이는 운동화, 바람에 살랑이는 머리카락, 예쁜 곡선으로 뻗어 나온 넓은 어깨.
그와 사랑을 하기 훨씬 전부터 몰래 시선에 담아 왔던 것들.
그렇게 차준의 넓은 등만 바라보고 걷다 보면 어느새 체육 창고 앞이었다.
그는 아직 아무도 나오지 않은 운동장을 빙 둘러보다가, 근처엔 둘밖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체육 창고 안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끼이이익―
녹슨 쇳소리를 내는 문을 조심히 닫고, 교복 재킷을 벗어 이미 흙먼지로 얼룩져 있는 창문을 가려 두고.
‘보고 싶었어.’
차준은 나봄의 얼굴을 감싸 쥐며 속삭였다.
그 순간 나봄의 심장은 이미 터질 것처럼 뛰고 있어서 어떤 대답도 들려주지 못했다.
하지만 차준은 미처 내뱉지 못한 진심까지 전부 들었는지, 예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로 천천히 마른 장밋빛 입술을 끌어 내렸다. 보기에도 탐스러웠던 그 입술은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마저도 달콤했다.
나봄은 다가오는 그를 도저히 제정신으로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꾸욱 두 눈을 감았다.
머지않아 이마에 촉촉한 감촉이 느껴지고, 그 감촉은 선을 그리듯 코끝으로 미끄러져 내려오고.
‘나봄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잠시 떨어지나 싶더니, 이내 제대로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늘 여유롭던 차준은 그때만큼은 조급하게 굴었다.
그래서 나봄은 그와 몇 번이나 키스를 거듭해도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했다. 시작할 땐 언제나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럴 때면 차준은 혀끝으로 나봄의 윗입술을 집요하게 괴롭혔고, 고개를 틀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덕분에 나봄의 입술에 조금의 틈이 생겨나면 그는 망설임 없이 뜨거운 숨결을 불어 넣었다.
부드럽게 엉키는 혀끝. 서로의 뒷목을 끌어안는 손길. 발칙한 욕심이 나는 만큼 밀착되는 가슴.
그리고 이따금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맞닿는 나른한 당신의 눈빛.
당신과 키스를 나눌 때면 체육 창고의 먼지 냄새마저도 향기로웠다.
미처 가려지지 않은 유리창 틈새로 스며드는 햇빛은 우리만을 위한 스포트라이트였고, 숨이 드나들 때마다 들려오는 자극적인 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음악이었다.
당신으로 인해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이곳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너무 행복해서 가끔 불안했고, 영원히 이 순간에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이 마냥 서럽기만 했던.
“기억나?”
차준이 물었다. 대답을 바라는 것처럼 들리진 않아서 나봄은 가만히 멈춰 있었다.
그러자 차준은 입술 새로 흐린 한숨을 내뱉었고, 먹먹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아주 오래 전에 우린 여기 있었어.”
“…….”
“그리고 지금도, 우린 여기 있어.”
철컥―
말을 마친 차준은 붙잡았던 문고리를 돌렸다. 안타깝게도 체육 창고는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문에서 손을 떼어 내지 못했다.
“계속…… 난 여기에 남아 있었어.”
머지않아 꺼내 놓은 말은 자기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처럼 느껴졌다.
나봄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등은 지나온 시간만큼 성숙해져 있었으나, 또 그만큼 낡아 있기도 했다.
꼭 변한 것 하나 없이 그대로지만 그때와 같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이 체육 창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