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좋은 사람이라고 해 줬다.
2017.07.28.
“네, 전데요.”
당당한 한 마디로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은 태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이름을 불러서 대답을 하긴 했지만, ‘러브레터’라는 단어는 그를 혼란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설마, 설마, 진짜 말도 안 돼. 한나봄이 나한테 러브레터 같은 걸 몰래 준비했을 리가 없어.’
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핀트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
‘러브레터가 아니라 앞으로 잘해 보자는 의미겠지. 동료로서.’
어떻게든 편지에 대한 당위성을 찾으려 애쓴다.
그래서 사회자의 손짓에 따라 순순히 무대로 이끌려 가는 걸음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하지만 애초부터 그에게 동료로서의 편지도 쓰지 않았던 나봄은 어떻게든 그의 걸음을 멈춰 보려 했다.
“단태……!”
하지만 그의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사회자의 질문이 먼저 꺼내졌다.
“와, 모델 뺨치게 훤칠하신 남성분이 나왔네요. 혹시 이 러브레터를 누가 썼는지 짐작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자 태오는 잠시 망설이나 싶더니 이내.
“있습니다.”
레스토랑 내부를 훑어보던 태오의 시선이 애매한 위치에, 애매한 포즈로 서 있는 나봄과 딱 마주쳤다.
때를 잡은 나봄은 그에게 아니라는 손짓을 하려 했으나, 태오의 눈동자는 닿기가 무섭게 수줍은 듯 아래로 툭 떨어져 버렸다.
어머나, 난 몰라. 쟤 지금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나 봐.
“어? 저 남자는 뭐야?”
때마침 화장실에서 통화를 마치고 나온 사연의 여주인공이 나봄의 바로 뒤편에서 중얼거렸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사회자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본격적인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태호 씨와 그분은 어떤 사이입니까? 얼핏 듣기엔 알고 지낸 지 무척 오래됐다고 하던데.”
“오래는 됐어요. 무슨 사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그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어요?”
“그냥…… 좋은 사람?”
위화감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인터뷰는 나봄을 난처하게 만들었고, 진짜 주인공을 화나게 했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던 여자는 더는 안 되겠는지 지나가는 웨이터를 붙잡고 따져 물었다.
“저기요. 이벤트 제가 신청했는데, 고백 받아야 할 사람은 저 남자가 아닌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지금 올라가 있는 사람은 생판 모르는 남이라구요. 일 처리를 어떻게 하신 거예요?”
“어머! 저희는 태호 씨 불렀을 때 저분이 당당하게 손을 드시길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나봄은 바짝바짝 입술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저 여자의 고백을 이 이상 망쳐 버리면 곤란해질 텐데. 엄한 데 끼어 있는 단태오를 조심스럽게 끌어 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래, 종이에 써서 알려 주자.”
짧은 고민 끝에 나봄은 제 가방이 있는 자리로 서둘러 달려갔다.
그리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서류 뭉치와 매직을 꺼내 ‘너 아니니까 내려와’라는 메시지를 큼직하게 적으려는데.
“지금은 비록 수년 지기 친구지만 처음엔 태호 씨가 이분을 짝사랑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사회자가 이 이벤트에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사연의 진짜 주인공인 태호라는 남자에겐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나봄이 아는 태오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나…… 나 그거 아니야.’
‘너한테 관심 가졌던 적 한 번도 없어.’
‘너랑 만나기 며칠 전에 딱 2주 사귀고 헤어진 사람이 있었어.’
여기에 대해선 저번에 단태오가 다 얘기해 줬으니까.
어쩌면 이번 기회에 잘못 올라갔다는 걸 눈치챌지도 몰라. 곧 이상한 걸 깨닫고 조만간 알아서 내려올 거야.
나봄은 내심 기대를 품으며 매직펜 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그걸…… 어떻게 알았지.”
의미심장한 단태오의 되물음이 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놀란 나봄의 눈동자가 잠시 종이에서 떨어져 무대 위 태오에게로 옮겨 갔다.
그는 만만찮게 놀란 눈으로 나봄을 내려다보았고, 이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렁이는 눈빛은 진심을 꺼내 놓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분위기에 휩쓸린 나봄은 그를 끌어낼 방법만 연구하다 말고 그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태오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아니라고 거짓말까지 했는데…….”
“거짓말은 왜 하신 거죠?”
“……날 더 피할까 봐.”
욱신―
왜 갑자기 심장이 조여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동안 알고 있던 단태오의 마음을 본의 아니게 엿보게 된 지금, 나봄은 갑자기 그의 모습이 예전과 다르게 보인다.
평소 알던 매사에 당당하고 거침없고 막 나가던 모습이 아닌.
“내 성격이 워낙 오해를 많이 사서…….”
“…….”
“내가 조심해야 되거든요. 겁먹지 않게.”
소심하고 서툴고 겁이 많고, 그래서 나 혼자 오해했던 시간들이 미안해지는 사람.
“단태오…….”
나봄은 늘 찌푸린 미간 속에 감춰져 있던 태오의 본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태오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꼈으면서도 괜히 애먼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서 이어지는 말은 편지에 대한 감동이었다.
“그런데 그거 러브레터는 아닐걸요.”
“그럼 태호 씨 생각엔 이 편지가 무슨 내용일 것 같아요?”
“프로젝트 같이 잘해 보자, 앞으로 잘 부탁한다, 아니면 나 좀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내용?”
“과연 그럴까요?”
“확실합니다. 그래도 뭐…… 나한테는 고마운 일이지만.”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이대로 저 자리에서 끌어 내리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러브레터는커녕, 잘 지내 보자는 상투적인 내용의 쪽지 한 장 쓰지 않은 그녀는 저렇게까지 대답한 그의 체면을 어떻게든 지켜 주고 싶었다.
이깟 이벤트 따위 나도 신청해 버리면 되잖아. 아무것도 모르고 기대해 버린 저 애한테 수치심을 안겨 줄 순 없어.
들고 있던 매직펜을 탁! 내려놓은 나봄은 서류 뭉치 중 맨 마지막 장을 떼어 냈다.
그리고 직원과 함께 태오를 끌어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혼란 가득한 표정의 그녀는 엄한 남자에게 자신의 정성스러운 러브레터가 전해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중이었다.
“저 끝에 앉아 있는 저 남자라고 사회자한테 당장…….”
“저기요.”
“네?”
나봄은 그런 그녀의 어깨에 용감하게 손을 올렸고.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지금은 제 이벤트 차례예요. 아마 그쪽은 다음 차례인가 봐요.”
“아…….”
오직 단태오만을 위한 뻔뻔한 거짓말을 했다. 그건 평소의 소심한 나봄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무대까지 서슴없이 걸어 나간 나봄은 사회자의 러브레터까지 뺏어 들었다.
“그거 말고 이 편지가 제 껀데…….”
“예?”
“마이크 좀 빌려주세요. 제가 직접 읽을게요.”
“한나봄……?”
편지는커녕 백지를 들고 와서 어쩌자는 건지는 그녀 스스로도 몰랐다.
그러나 이왕 던져진 주사위, 갈 수 있는 만큼만 나아가면 그만이었다.
“태오에게…….”
텅 빈 종이 위에 적히지도 않은 첫 문장을 꺼내 놓은 나봄은 마음속으로 다음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그동안 내가 바보같이 아무 것도 모르고 피해 다니기만 했어.”
“…….”
“그래서 미안해.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 이젠 오해받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돼.”
순간 태오의 눈빛이 파르르 떨려 오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녀의 진심은 급조한 것에 비해 제대로 전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에게 정말 전하고 싶은 한 마디뿐.
나봄은 마무리를 하기 위해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태오의 흔들리는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이윽고 떨어지는 입술은 꽉꽉 잠가 놓았던 태오의 감정들을 터트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너도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 나에게는 사랑 고백보다 간절했던 단어.
한참을 돌고 돌아 겨우 그녀의 벽 안에 입성하게 된 태오는 까만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채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러다 이내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동안 억눌러 왔던 만큼 거세게 휘몰아치는 설렘은 그를 숨도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태오는 지금 당장 그녀를 와락 안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아 내고 고른 호흡을 내쉬려 애쓰는 중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눈치 없는 심장은 그녀와의 연애가 시작되던 날보다 더욱 격렬하게 요동친다. 입술을 꽉 깨물어 봐도 소용이 없다.
어떡해.
나 니가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
* * *
지금껏 누구에게나 사랑 받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날 사랑해 주지 않았다.
내 주변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난 그동안 항상 혼자여서 외로웠다.
행복하게 웃고 있었지만 몹시 불행했고, 모든 걸 다 가졌지만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내 삶은 모순 그 자체였다. 그래서 나조차도 죽어 가는 나를 위해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도곡동 타워팰리스.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에서 차준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슨 고민을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를 만큼 복잡해진 머릿속을 깨끗이 비워 버리려 노력하고 있다.
차에 치여 너덜너덜해진 채 숨이 끊어지길 기다리는 사슴.
차준은 꽤 오랫동안 자신이 그런 처지라고 생각해 왔었다. 살아날 희망은 없는데 죽은 건 아니고, 발버둥을 쳐 보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래서 언제나 비참한 꼴인 그는 집에선 줄곧 이런 식이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회사에서의 모습과 달리, 집에 틀어박힌 그는 어둠에 섞여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하아…….”
차준은 고개를 들어 올린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꽉 막힌 목구멍은 좀처럼 편안해지질 않아서 이번엔 마른침을 삼켜 넘겼다.
그리고 한동안 호흡을 멈추었다.
사람은 숨을 멈추고 있을 때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하던데, 이 방법도 지금은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입술 새로 참아 둔 숨을 모두 토해 낸 그는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불 꺼진 집안은 너무 어두워서 눈을 뜨고 있는 건지 감고 있는 건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끼릭― 끼릭―
그래서 지금 귓가를 맴돌고 있는 이 휠체어 소리도 꿈에서 들리는 건지, 진짜로 그가 온 건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이곳에 그가 들어올 수 없다는 건 알지만, 혹시나 정말 그 사람일까 봐 차준은 한 번 떨어트린 시선을 다시 들어 올리지 못하고 있다.
‘10년 전, 내 선택은 모든 걸 너한테 떠맡기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야.’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어.’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 이젠 죽는 것도 혼자 못하는 몸이 되어 버렸지만.’
오늘 그가 회사에 찾아와 갖은 해명을 늘어놓는 동안, 차준은 애써 귀를 닫고 있었지만 사실 하나도 흘려듣지는 못했다.
그가 하는 말은 전부 마음으로 파고들어서 그때 느꼈던 욱신거리는 고통까지도 지금까지 생생했다.
차라리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었다면 너의 해명이 통했을 텐데.
차라리 니가 건넨 짐이 무거워서 이러는 거라면, 너의 위로 몇 마디에 다시 어깨가 가뿐해졌을 텐데.
미련한 넌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그때도 지금도 나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건, 그날 만신창이가 된 너의 모습.
‘형…… 형, 괜찮아?’
‘차준아…….’
온몸이 다 부서진 채 힘없이 내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도와줘…….’
‘형…….’
‘제발…… 도와줘, 차준아.’
그리고 애절한 부탁.
나의 족쇄가 되어 버린, 내가 동경했던 당신의 모든 것.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던 차준은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 되어 준 태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외면하는 집안으로 제 발로 걸어가 그동안 주지도 않았던 불편한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태준의 삶을 대신 살아 나가기 시작했다.
때로 꼭두각시 노릇이 비참하고 역겨워져도, 눈앞에 있는 가여운 형 때문에 힘든 내색 한 번 할 수가 없었다.
차준이 가고 있는 길은 다름 아닌 그의 유일한 가족, 형을 위한 길이었으니까.
그렇게 자그마치 8년을 살다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알게 된 불편한 진실 하나는 그를 끝없는 어둠 속으로 밀어 넣기에 충분했다.
‘형, 내일 취임식에 오면 객석 말고 단상 옆에 있어.’
‘왜?’
‘그야 나한테는 형의 취임식이나 다름없으니까. 형이랑 같이 서고 싶어.’
취임식 전날, 유달리 표정이 좋지 않던 그는.
‘저…… 차준아.’
‘어.’
‘내일이 오기 전에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평소보다 심각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고.
‘사실…… 스스로 떨어진 거야.’
‘스스로 떨어지다니? 뭐가?’
‘7년 전 그날…… 사고가 아니라 전부 끝내 버리고 싶어서 떨어진 거였다고. 죽을 생각으로.’
차준의 7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고백을 했다. 다시 바라본 그에게선 생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걸 들은 차준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하다가, 한참 뒤 의미도 없는 질문을 꺼내 놓았던 것 같다.
‘그럼…… 왜 그때 말하지 않았어?’
그러자 태준은 변명도, 해명도 않고 그저 고개를 떨구며.
‘미안.’
그동안 난 대체 무얼 위해서 모든 걸 내버리고 달려왔던 걸까.
이것이 멈춰 버린 머리로 겨우 꺼내 놓은 생각이었다.
머지않아 눈가가 떨려 올 때쯤 차준은 자신의 희생이 형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사실에 혼란을 느낄 때쯤 모든 일은 그토록 저주했던 집안의 뜻대로 되어 버렸다고 확신했다.
결국 내가 유일하게 믿고 있었던 형은 그 다정한 손을 내밀어 지옥의 밑바닥과 다름없는 이곳까지 날 인도한 것이다.
소름 끼치도록 태연한 얼굴로.
“하아, 하아, 하아…….”
그날의 배신감이 다시 혈관을 타고 흘렀다. 거칠어진 호흡은 쉽게 진정될 것 같지가 않았다.
더 이상 그에 대해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차준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머릿속을 비워 내려 애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선명해지는 원망은 스스로 컨트롤하기 힘들었다.
왜 나를 두고 죽을 생각을 했을까.
그럴 거면 지켜 주겠다는 말은 왜 했던 걸까.
저 때문에 제 발로 집 안에 기어들어 온 날 보며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까.
불쌍했을까. 미안했을까.
……아니면 내가 멍청하게 속아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숱하게 떠오르는 그에 대한 의문들은 곧 원망이 된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차준은 주먹으로 바닥을 쾅! 내리쳤다.
하지만 그래도 역겨움은 사라지질 않아서 그는 필사적으로 진통제와 다름없는 존재를 끄집어냈다.
‘저, 정식으로 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우차준 본부장님! 저는 한봄 도어락 총괄팀장 한나봄이라고 합니다!’
차가운 그의 세상에서 스며든 따스한 온기.
돌아온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자 이제야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질식할 것만 같았던 기억은 흐려지고, 그녀가 전해 준 기쁜 감정들이 텅 빈 마음을 채워 준다.
역시 그녀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첫사랑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그녀를 보면, 나도 내 인생 유일하게 행복했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가라앉아 있는 이곳에 너라도 있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숨을 쉴 수 있도록 내 곁에서 예전처럼 날 사랑해 줬으면 좋겠어.
적나라하게 드러난 차준의 감정은 어차피 내일이면 흔적도 없이 숨겨질 것들이었다.
부서지기 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이런 불안정한 이면이 낯설게 느껴질 테니까.
누군가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선 나도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 보여야 한다.
그래서 기대고 싶은 만큼 홀로 일어서야 하는 나는…….
역시 모순 그 자체인 인간이다. 썩어 가는 삶을 어디서부터 손봐야 할지 모를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