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너는 그러면 안 되지
2017.07.24.
똑똑―
고요한 사무실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서류를 확인하고 있던 차준은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그러자 무거운 나무 문이 열리고 사무실 안으로 불쾌한 기계음이 들려온다.
위이이잉―
발소리를 낼 수 없는 그의 기척.
차준의 눈빛이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차준아, 잘 있었어?”
그는 다정한 인사를 건넸지만 차준은 도저히 화답해 줄 수가 없었다. 서류에서 떨어져 그에게로 향하는 차준의 시선은 당장 꺼지라고 소리치는 듯했다.
태준은 그걸 뻔히 마주보면서도 입꼬리를 들어 올렸고, 나직한 음성을 흘려보냈다.
“요즘 통 얼굴을 못 봐서…….”
“…….”
“잘 지내고 있나 보러 왔어. 오늘 혼자 나올 기회가 생겼거든.”
태준의 말이 끝났지만 차준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싸늘하게 느껴지는 동생은 오늘도 다가가기엔 여전히 멀고 아득한 존재였다.
하지만 태준은 그를 보지 못한 지난 몇 달간 준비해 왔던 멘트를 꺼내 놓기로 했다. 돌아올 대답이 뻔하다고 해도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또 다를지 모르니.
“오늘 저녁에 시간 돼?”
“…….”
“오랜만에 같이 식사하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그와 관계가 틀어진 후로 지금까지 천 번은 권유했고, 만 번은 거절 당했을 거다. 느껴지는 분위기를 보니 이번에도 수락은 해 주지 않을 모양이다.
그래도 태준은 일말의 희망을 담은 눈빛으로 차준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운 한기만 띠고 있는 차준은 길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고, 이내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아직도 뻔뻔하구나.”
“…….”
“내가 잘 지내고 있는지, 너만큼은 보러 오면 안 되지.”
“차준아…….”
“좋은 말로 할 때 내 이름 부르지 마. 당장 꺼져.”
매정한 대답을 쏟아 낸 차준은 다시 책상 위로 시선을 끌어 내렸다. 그로써 태준에게는 보이지 않게 된 두 눈동자는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지금 그가 바라는 것은 하나.
내 인생을 무너트린 존재가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사라져 버리는 것.
하지만 태준은 전혀 들어줄 생각이 없는지, 오히려 차준의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차준은 입술을 꽉 깨물었고, 솟구치는 원망이 드러나지 않도록 악착같이 견뎌 냈다.
“오해를 풀고 싶어. 10년 전, 내 선택은 모든 걸 너한테 떠맡기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야.”
“…….”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어. 무책임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 이젠 죽는 것도 혼자 못하는 몸이 되어 버렸지만.”
허나 그가 늘어놓는 변명은 차준의 이성을 무자비하게 갉아먹는다.
결국 저 깊은 심연에서 일렁이던 분노는 밖으로 폭발하고, 감추고 싶었던 감정은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린다.
“그럼…… 뒈지지 그랬냐.”
“…….”
“그랬으면 차라리 덜 원망스러웠을 텐데…….”
“차준아…….”
“내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난 더 이상 니 동생이 아니야!”
처절하게 터져 버린 차준의 고함은 태준의 죄책감을 짓눌렀다. 온화하던 눈동자에 드리워진 슬픔은 새벽녘의 안개처럼 잔잔하고 짙었다.
그러나 차준은 긴 시간 쌓여 왔던 분노를 멈추지 않고 쏟아 냈다.
“형을 포함해서 모든 집안사람들이 10년 전 그날 형이 옥상에서 떨어진 걸 추락 사고라고 얘기했어! 나한테만!”
“…….”
“그래서 모든 걸 다 포기하고 형을 대신하기로 했던 거야! 그땐 이 자리가 형이 이루지 못한 꿈인 줄 알았으니까!”
“…….”
“그런데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리니까 사실은 자살 시도였다고? 넌 그걸 고해성사라고 지껄이는 거야?”
과거를 회상하는 차준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계속 그를 바라보고 있던 태준도 말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모든 짐을 다 떠맡겨 버릴 만큼 힘든 상황이란 건 이해해…… 하지만.”
“…….”
“형은 그러면 안 되지. 모두가 날 버려도 형은 날 지켜 준다고 했었잖아…….”
증오만이 가득해 보였던 차준의 감정은 다시 확인해 보니 애증이었다. 그가 너무 가여워서 모든 걸 다 잃어도 괜찮다고 위로했던 지난날들에 대한 미련이기도 했고.
차준은 버릇처럼 흐려지는 눈가를 정돈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무릎으로 향해 있던 태준의 눈동자는 단호하게 멀어지는 차준의 뒷모습을 고요히 뒤따랐다.
“꺼져.”
한 번 더 꺼내진 진심 어린 명령과 함께 매정하게 열어젖힌 문.
태준은 눈앞에 펼쳐진 복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초라한 입술을 열었다.
“내가 정말…….”
“사과하지 마.”
그러나 한 마디를 제대로 꺼내기도 전에 내뱉어진 차준의 단호한 목소리는 그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한테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남아 있다면…… 어떻게든 내가 모르게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차디찬 그의 얼굴이 왜 저리도 안쓰럽고 외로워 보이는지.
그래서 함께 있어 주고 싶었던 태준은 부탁 받은 대로 나약한 이 감정을 숨기기로 했다.
모든 걸 잃고 홀로 고군분투하는 그의 원동력은 자신을 향한 거대한 원망이라는 걸, 태준은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차준이 열어 놓은 문 밖으로 휠체어를 움직이며 태준은 이제 또 언제 보게 될지 모를 동생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전엔 내 키가 너무 커서 항상 널 내려다보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너의 키가 너무 커서 죽을 때까지 올려다볼 일만 남았다.
언제 이렇게 자라 버렸을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너의 모습은 영원히 어리고 안쓰럽기만 한데.
“또 올게.”
태준은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혹시라도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 버렸다간, 언젠가 차준의 마음이 아물었을 때 편히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차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태준의 휠체어가 사무실을 빠져나가자마자 매정히 문을 닫았다.
쾅―!
오늘도 그를 배웅해 주는 건 싸늘한 한기밖에 없었다.
그래도 태준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몇 달 동안 도통 보이질 않아 걱정했던 동생은 몇 달 전보다 야윈 것 같긴 해도 아픈 데는 없어 보였으니.
그것만으로도 참 다행이었다.
* * *
드디어.
아직 현실감각은 없지만 어쨌든 드디어, 나봄과의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약속했던 6시에 맞춰 우드레일 본사로 차를 가지고 온 태오는 정문 앞에 정차하기가 무섭게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잘 정돈된 머리카락, 때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헨리넥 셔츠, 세련미를 더하는 피어싱.
모든 것은 가히 완벽에 가까웠다. 지나치게 긴장한 눈빛만 빼면.
“오늘은 망치면 안 돼, 제발.”
태오는 그녀의 앞에선 매번 실수만 일삼는 자신을 타일렀다. 그러고선 나봄이 오기 전에 심호흡으로 떨리는 마음을 다스리려는데.
지이이잉― 지이이잉―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나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태오는 아직 진정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거치대에 있는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
……라니. 6시까지 내가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까 전화했겠지.
―나 본사 앞인데 넌 어디야?
“나도 본사 앞인데.”
―혹시 비상등 켜져 있는 까만 차?
“어, 보여?”
―응. 바로 앞에 서 있었네.
바로 앞 어디? 라고 생각하는 순간, 조수석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태오의 눈동자에 비쳐 들어오는 사람은 개나리색 블라우스가 몹시도 잘 어울리는 나봄이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태오는 혹시나 떨리는 눈빛을 들켜 버릴까 싶어 정면으로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얼른 타. 여기에 차 오래 못 대니까.”
첫 마디가 지나치게 딱딱한 건 태오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여기 오기 전에 차 안에서 계속 연습했던 첫 마디는 ‘어서 와’라는 살가운 한 마디였는데, 왜 준비한 대로 안 나오는 건지.
하지만 살가운 태오보다 이렇게 딱딱한 태오의 모습이 훨씬 익숙했던 나봄은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조수석에 올라 안전벨트까지 야무지게 맨 그녀는 태오에게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 맞다. 내가 말한 돼지고기 집 말이야. 검색해 봤더니 없어진 것 같더라구.”
“그래?”
“응, 그래서 다른 데를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스테이크는 별로야?”
그건 어제 삼겹살 굽는 연습을 한답시고 그가 사 온 장비들을 쓸모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부질없는 회상에 빠져 있느라 제대로 고기를 구워 보지도 못했던 태오는 사이드브레이크를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괜찮아. 너 먹고 싶은 거 먹어.”
“휴우, 다행이다. 마음이 급해져서 예약부터 해 놨는데 니가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했어.”
오늘 저녁 식사를 정하느라 고민했다는 그녀의 말은 꼭 그와의 만남을 특별하게 신경을 쓴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입꼬리가 올라갈 뻔했지만 태오는 가까스로 기쁨을 숨겼다. 데이트가 아닌 이상, 이 이상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곤란했다.
“장소는 여전히 종각이야?”
“아니, 그 옆! 시청역 근처야. 엄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니까 기대해도 돼.”
“나 많이 먹는데 괜찮겠냐? 오늘 재산 다 탕진하겠네.”
“걱정하지 마. 내 카드 한도가 오백만 원인데 그만큼 먹을 건 아니잖아.”
시시콜콜하게 이어지는 대화는 태오의 긴장감을 풀어 주었다. 덕분에 새어 나오는 숨소리는 한결 편안해지고, 핸들을 쥔 손은 느슨해진다.
우리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얘기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더라.
사귀기까지 했었던 예전엔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요즘엔 종종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
“천만 원어치 먹을 건데? 사채 쓸 준비해.”
태오는 그래서 기쁘다는 말 대신, 장난스러운 대꾸를 했다.
그러자 나봄의 강아지 같은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그건 굳이 바라보지 않아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 * *
야경이 아름다운 고급 호텔의 레스토랑.
싱싱한 야채로 가득 찬 시저 샐러드와 나봄이 주문한 티본스테이크, 그리고 태오를 위한 뉴욕스트립이 차례로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마침 잔뜩 굶주려 있던 태오는 먹음직스러운 냄새에 곧바로 포크부터 들었다.
하지만 먼저 고기를 찌르지는 않았다. 휴대폰을 들어 인증샷부터 남기는 나봄을 위해서였다.
“다 찍었어?”
“어? 아, 응! 나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냥 먹어도 되는데.”
“돈 내는 사람이 먼저 먹어야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태오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카운터로 달려가 제 카드를 낼 작정이다.
돈 몇 푼으로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5년 전, 그녀와 달랑 2주 사귀었던 그는 나봄에게 해 주고 싶은 게 참 많았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 와중에 찾아온 오늘 같은 기회는 어찌 보면 태오의 소원 성취나 다름없는 셈.
“음! 진짜 맛있는데?”
제 접시에 놓인 버섯 하나를 입에 쏙 집어넣은 나봄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태오는 그제야 두꺼운 고기를 썰었고, 조심스럽게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각별히 신경 써서 예약했다고 하더니,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만큼 육질이 굉장했다.
“내가 먹어 본 스테이크 중에 가장 맛있네.”
태오의 진심 어린 한 마디에 나봄은 해맑게 웃어 보였다.
“니가 마음에 들어 해서 정말 다행이야.”
“왜?”
“원래 대접이라는 게 받는 사람 마음에 들어야 가치 있는 거잖아.”
내가 바라는 그런 뜻이 아닌 걸 아는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쯤 되면 김칫국 마시는 수준이 망상병 환자 같다.
태오는 동요하는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괜히 고개를 숙였다.
나봄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스테이크를 자르며 개인적인 궁금증을 꺼내 놓았다.
“있잖아, 너 회사 얼마나 다녔지?”
“3년.”
“그럼 혹시 선우태준이라는 이름…… 들어 봤어?”
그 질문을 던지는 나봄의 표정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오늘 의미심장한 첫 만남을 가진 그 남자가 누구와 연관이 있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어서였다.
그러나 그 이름에 대해선 입사 때 딱 한 번 들었을 뿐인 태오는 제삼자처럼 감흥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본부장 친형이라고 들었어. 서재균 회장 손자이자, 서미란 대표 첫째 아들이고.”
“회장?”
“어, 완전 로얄 패밀리.”
“그럼 차준 오빠도 회장님 손자야?”
아, 거기까지는 말하지 말걸.
태오는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니 나봄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차준 오빠한테는 그런 말 들은 적 없는데…….”
“선우태준에 대해서?”
“아니, 집안에 대해서.”
“본인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그걸 말 안 했을 리가.”
“정말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때 얼핏 형에 대해선 얘기했었던 것 같은데, 그 외 다른 가족 얘기는 한 적 없었어.”
잠자고 있던 기억을 뒤적여 보자, 차준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생생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딱 한 번 별생각 없이 가족들에 대해서 물었는데, 그때 돌아온 차준의 대답은 굉장히 단순했었다.
‘다섯 살 차이 나는 형이 있어.’
‘아아, 형이 있었구나.’
‘지금은 미국에서 유학 중인데, 이번 방학에 한국 놀러 오면 너한테도 소개시켜 줄게.’
그 얘길 꺼내는 차준의 표정은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었는데.
그럼 선우태준이라는 사람과는 사이가 좋은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봄의 앞에서 태오는 냉수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나봄은 그의 불편한 기색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맞다. 단태오랑 차준 오빠는 거의 앙숙이었지.’
오늘만큼은 그의 기분을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나봄은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이왕이면 태오가 흥미로워할 만한 주제로.
그래서 뭐가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해 보고 있으니.
“너 본부장이랑 사귀냐.”
무심한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썰던 태오가 난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사귀진 않지만 그에게 그러자는 고백을 받았던 나봄은 놀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응?!”
“반응 보니까 사귀네.”
“아, 아니야! 안 사귀어!”
나봄은 손까지 휘저으며 태오의 어림짐작을 적극 부인했다. 차준과의 관계를 나봄도 확신할 수 없는 마당에 괜한 오해가 생기는 건 위험했다.
하지만 태오는 확신을 한 표정으로 몹시 신경 쓰이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표정에 다 드러나는데, 뭐.”
내 표정이 지금 어떤데?
심히 난처해진 나봄은 제 얼굴을 매만졌다. 분명 뜨거워지진 않았는데 속눈썹이 자꾸만 파르르 떨리는 걸 보니, 동요하긴 한 모양이었다.
“나, 나 잠시만 화장실 좀…….”
당황한 나봄은 표정이라도 정리하고 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준과 태오의 사이가 앙숙이라는 걸 아는 이상, 그에게 더 이상 차준을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친해지고 싶어서 여기까지 불렀는데 이러다가 사이만 더 멀어지게 생겼잖아.
나봄은 뒤통수에 따라붙은 태오의 시선을 느끼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도 거울에 비친 얼굴에 홍조는 없었다. 아까는 그냥 단태오 앞에서 지어 보인 표정이 어색했던 모양이다.
평소에도 표정 관리를 전혀 못하는 나봄은 거울을 보며 부드럽게 웃는 연습을 했다.
그렇게, 오늘만큼은 정말 저 친구를 기분 나쁘게 해선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고 있던 그때.
“어떡해! 나 드디어 고백해! 지금 막 이벤트 시작할 거야!”
어떤 여자가 통화를 하며 수선스럽게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웃는 연습을 하고 있던 나봄은 서둘러 세면대 앞으로 다가가 손 씻는 척을 했다.
하지만 여자는 나봄 따윈 보이지 않는지 나봄의 옆자리에 서서 앞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태호가 좋아할까? 남들이 그러는데 친구에서 연인이 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대. 그래서 일단 기대는 아예 접고 있으려고.”
어머, 오늘 고백을 하려는 모양이구나.
수도꼭지를 잠근 나봄은 그녀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았다. 결 좋은 뺨에 어린 자연스러운 홍조는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이었다.
저렇게 아무 걱정 없이 설레기만 할 때가 가장 좋은 건데, 그녀는 그 사실을 알려나.
나봄은 그런 그녀를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
안에 들어서자, 그랜드피아노가 놓인 레스토랑 무대에선 아까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사회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식사는 맛있게 즐기시고 계신가요? 오늘은 아름다운 밤을 더욱 예쁘게 꾸며 줄 러브레터 한 통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어머, 아까 화장실에서 엿들었던 이벤트가 이제 시작되려나 봐!
나봄은 제 이벤트도 아닌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레스토랑을 둘러본 그녀는 어렵지 않게 홀로 앉아 있는 남자 한 명을 발견했다.
평소엔 눈치가 없는 나봄이지만 이번만큼은 이벤트의 주인공이 그 남자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공간에 남자 하나만 덜렁 앉아 있는 테이블은 그와 단태오. 딱 둘뿐이었으니까.
“자, 우선 태호 씨? 태호 씨, 어디 계십니까? 손 들어 주세요!”
편지를 펼친 사회자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나봄은 기대 가득한 눈으로 그 주인공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는 잠시 좌우를 두리번거렸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 냈다. 그리고 그가 막 손을 들려던 그 순간.
“네.”
엄한 곳에서 익숙한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손을 들고 있는 한 사람.
다름 아닌 단태오였다. 사회자가 들고 있는 러브레터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그는 진짜 주인공보다 더욱 놀란 표정이다.
앞뒤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나봄은 당황한 나머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아, 태호 씨입니까?”
그러자 사회자는 기쁜 미소를 머금은 채 확인 질문을 던졌고, 태오는 조금 더 힘주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전데요.”
너 아니야. 당장 그 손 내리지 못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