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귀인은 회사 앞에서 만난다
2017.07.21.
서울의 한 대형 병원.
“곧바로 진료를 받으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간호사와 짧은 대화를 하고 온 김 실장이 신경외과 앞에 도착한 태준에게 말했다.
태준은 둥글게 눈꼬리를 휘며 웃어 보였고, 그 온화한 분위기와 달리 뼈 있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전 오늘 딱히 스케줄이 없어서,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려도 됐을 텐데요.”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는 사장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제 몸은 괜찮아요. 다리는 조심한다고 해서 나을 것도 아니구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태준의 말은 김 실장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괜히 고개를 돌리자, 태준은 전동 휠체어를 신경외과 밖으로 움직였다.
서 대표로부터 한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는 명을 받았던 김 실장은 곧바로 그 뒤를 따르려 했다.
“어디 가십니까?”
“화장실이요. 설마 따라올 생각은 아니시죠?”
“도움이 필요하면 저한테…….”
“김 실장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많아요. 이런 사사로운 간섭은 안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태준은 나직한 목소리로 김 실장의 걸음을 저지시켰다.
부드럽지만 강인한 면모는 날개가 꺾인 뒤에도 변치 않고 그대로였다.
결국 서 대표의 지시 사항은 잠시 접어 두기로 한 김 실장은 태준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며 대답했다.
“서둘러 돌아오셔야 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표정은 단조로웠지만 그 안에 어린 불안감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태준은 그런 그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고, 그대로 휠체어를 움직였다. 조용한 공간 안을 메우는 기계음은 집에서 타는 낡은 휠체어의 쇳소리보다 생기 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누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던, 신경외과를 빠져나간 태준은 한결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겨우 벗어나게 된 김 실장의 감시.
사실 그는 매번 방문할 때마다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의사 대신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보는 사람들의 눈이 많은 본가에서는 외출이 불가능하니, 서 대표 없이 홀로 나왔을 때 작정하고 발걸음 할 생각이었다.
소식조차 잘 들리지 않는 하나뿐인 동생에게로.
병원 화장실을 지나쳐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엘리베이터 앞까지 다다른 태준은 아래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근처 지하철역을 찾았다. 다행히도 우드레일 본사 건물과 병원은 그리 멀지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한…… 30분 정도면 되려나.”
시간을 확인한 그의 앞에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벌써 사람들이 반절 이상 빽빽이 채워진 내부.
그들은 하나같이 휠체어를 탄 태준에게 ‘자리도 좁은데 정말 탈거냐?’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지만, 태준은 억지스럽게 휠체어를 안으로 들였다.
“죄송합니다. 실례할게요.”
눈치가 보이는 건 상관없었다.
다리가 제 기능을 잃은 뒤 한 가지 얻은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연민과 비난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담담함이었다.
고집스럽게 엘리베이터에 오른 태준은 문이 닫히자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이렇게 무사히 감시를 빠져나와 너에게 간다 하더라도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망설임 없이 출발해 볼 생각이다.
우연찮게 열린 새장은 또 언제 닫힐지 모르니.
* * *
[오늘 본사에 제출할 서류가 있어서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어디서 만날래?]
나봄의 문자가 도착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업무 관련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던 태오의 눈이 곧바로 휴대폰으로 향했다.
그는 답신을 보내기 전 머릿속으로 퇴근 때까지 남은 시간과 해야 할 일을 계산했고, 최대한의 속도를 냈을 때 한 시간 정도 퇴근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좋아. 그럼 본사 앞으로 데리러 가지, 뭐.
[6시까지 본사 앞으로 데리러 갈게.]
나봄에게 답장을 보낸 태오는 비장한 표정으로 어깨를 풀었다. 적어도 다섯 시까지 모든 업무를 마치려면 숨 돌릴 시간도 없이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키보드에 막 손을 올려놓았을 때.
똑똑―
태오의 사무실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확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허유리 파트장이었다.
“무슨 일이야.”
태오는 이메일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사무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유리는 태오를 마뜩잖은 눈빛으로 흘겨보는가 싶더니 책상 위에 서류 하나를 탁 내려놓았다.
“본사에서 확인해 달라고 한 자료야. 내일 오전까지는 처리해 달래.”
“내일 오전까지 줘야 하는 걸 지금 보내?”
“확인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고 했으니까 대충 훑어보기만 해.”
안 그래도 바빴던 태오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이내 용건이 끝났을 텐데도 불구하고 사무실을 나가지 않는 유리에게 눈동자를 옮겼다.
“더 할 말 있어?”
“딱히.”
“그런데 왜 나 쳐다보고 있냐.”
“넌 나한테 할 말 없나 해서.”
유리의 의미심장한 말은 일에만 쏠려 있던 태오의 신경을 앗아 가기에 충분했다.
그는 잠시 지난 일들을 곱씹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유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딱히.”
그래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더니, 유리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구겼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녀는 불만을 토로하려는 모양이다.
“워크숍에서 나한테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부렸던 거 미안하지도 않아?”
“뭐?”
“난 너 걱정돼서 한 마디 해 준 건데, 신경 쓰지 말라는 소리나 지껄이고 말이야.”
“아아, 그날.”
순간 그저 하얗기만 하던 태오의 머릿속에 마음 쓰이는 일 하나가 떠올랐다.
워크숍에서 감정이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던 태오는 눈치 없이 나봄에 대한 얘기를 꺼내 놓는 유리에게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렸던 것 같다.
유리는 그저 요즘 들어 눈에 띄게 감정 기복이 심해진 그가 걱정되어서 그런 것이었을 텐데도.
“그날 섭섭하게 말했던 건 미안. 내가 너무 몰아붙였었다.”
태오는 태연한 목소리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래도 유리의 날 선 눈빛이 풀리지 않자, 그는 백발백중 들어맞는 화해 방법을 쓰기로 했다.
“사과의 의미로 나중에 술 사 줄게.”
“정말?”
역시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유리는 그의 한 마디에 평소의 쿨한 미소를 되찾았다.
그걸 본 태오는 한시름 마음을 놓았고, 다시 이메일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한 번 더 약속했다.
“어.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하는 거 봤냐? 나한테 빈정 상한 일은 술로 갚을 테니까, 지금은 나 일 좀 하게 내버려 둬라.”
어찌 보면 뉘우치는 기색이 전혀 없는 뻔뻔한 태도였지만 유리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회식 때도 좀처럼 참여하는 법이 없는 그는 일할 때 빼고는 함께 어울릴 기회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회사 친구가 나밖에 없지. 뭐, 그렇다고 해서 딱히 널 공유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나 오늘 칼퇴근 할 거야. 끝나고 분위기 좋은 와인바나 데려가 줘.”
유리는 순순히 사무실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일에 몰두하면 그 외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태오를 잘 알고 있는 이상, 약속은 오늘 바로 지키게 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하지만 태오는 그녀 쪽으로 눈길도 두지 않고 단호히 대답했다.
“오늘은 안 돼.”
“응? 왜?”
“약속 있어.”
오늘은 직장인들의 파티와 다름없는 정열적인 금요일 밤.
선약 하나쯤 있는 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지만, 유리는 본능적으로 신경이 쓰였다.
이제 보니 잔뜩 힘을 준 헤어스타일도 그렇고, 불편해 보일 만큼 차려 입은 옷도 그렇고, 유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봄 씨 만나?”
그래서 넌지시 꺼내 놓은 질문.
“어.”
곧바로 돌아온 대답에는 선의의 거짓말을 해 주는 배려도 없었다.
덕분에 겨우 풀렸던 그녀의 입꼬리는 다시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살짝 기뻐지려 했던 마음엔 다시 거대한 폭풍이 인다.
‘조금 더 어른스럽게 굴도록 해요. 나봄 씨 나이에 순진무구한 건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니까.’
‘조언 감사합니다. 앞으로 조심할게요!’
첫 경고를 줬을 땐 분명 순진한 낯짝으로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은데, 벌써 태도를 달리하는 건 나를 엿 먹이려는 의도처럼 느껴진다.
급속도로 살벌해진 유리의 기운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던 태오에게까지 전해졌다.
“무슨 문제 있어?”
그래서 다시 그녀를 흘깃 바라보며 물으니, 유리는 굳어 있던 표정을 애써 풀어내고 어깨까지 으쓱이며 대답한다.
“아니, 아무 문제도 없어. 그럼 술은 다음 주 중에 얻어먹어야겠네.”
머지않아 등을 돌려 태오의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유리는 겉보기엔 정말 아무 문제없는 듯했다. 그걸 확인한 태오는 그녀에게 향했던 조금의 신경까지 모두 끌어모아 업무에 집중시켜 놓았다.
하지만 사무실 문이 닫히고 태오와 완벽하게 분리되고 나자, 유리의 눈빛은 점점 싸늘한 한기가 어리기 시작한다.
아무런 악의도 느껴지지 않아서 더욱 열이 뻗쳐오르는 그 여자의 행동.
거기에 바보처럼 동조해 주는 단태오는 답답해서 미쳐 버릴 지경이다.
한나봄과 선우차준이 심상치 않은 관계라는 건 그들과 가깝지 않은 사람들도 전부 눈치챘는데, 그게 정말 안 보이는 건지. 아니면 자존심이 없는 건지.
그가 잊지 못한 첫사랑 때문에 마음을 접어 둔 그녀지만, 그 첫사랑이 한나봄처럼 눈엣가시 같은 타입이라면 양보해 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가질 수 없는 남자라면 빼앗기지 않는 선에서 욕심내 볼 생각이다.
“단태오…….”
유리는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나봄.”
그리고 그 남자가 바라보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머릿속에 차례로 떠오르는 두 사람의 색깔은 보색처럼 절대 어울리지 않았다.
둘이 인연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헛웃음이 나올 만큼.
* * *
어제, 나봄은 하루 종일 선우차준에 대해 생각했다. 그에 대한 고민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은 복잡해지고, 차준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전혀 모르겠다.
비록 오늘 업무 때문에 본사에 들려야 하는 나봄이었지만 차준은 만나고 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직은 혼란스러운 감정이 정리되질 않았고. 또 아직은 그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았으니까.
“후우…….”
본사 앞에 선 나봄은 습관처럼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봄 도어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압도적인 본사 건물은 항상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한동안은 정식으로 당당하게 출입할 수 있는 몸이니, 발걸음이라도 씩씩하게 내딛어 보려던 그때.
“안녕하세요.”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바로 뒤편에서부터 들려왔다.
왠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 음성이 차준의 것인 줄 알았던 나봄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돌렸다.
“본부장…… 님이 아니시네.”
하지만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얼굴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둥글게 휘어진 눈꼬리, 온화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그와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느껴지는 분위기가 확실히 다른.
“여기 근무하세요?”
다리가 불편한지, 전동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는 나봄에게 손부터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의 반듯한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나봄은 뒤늦게 그 손을 맞잡아 주며 대답했다.
“아, 근무하는 건 아니고 협업 업체에서 왔어요. 도어락 쪽이요.”
“도어락 협업 업체라면, 케이 도어락?”
“아니요, 한봄 도어락이요!”
“그런 업체는 처음 들어 봤는데…… 게스트 출입증은 받으셨나요?”
“네, 그런데 그건 왜…….”
나봄에게 이것저것 캐묻던 남자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 다시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부탁 하나를 건넸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같이 가요.”
“네?”
“최대한 직원들 눈을 피해서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혹시 그 가방으로 얼굴 좀 가려도 될까요?”
그냥 듣기에도 이상한 부탁은 나봄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자, 그는 그녀를 안심시켜 주기 위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도 여기 들어갈 수 있기는 한데, 제가 여기 있는 걸 들키면 안 될 이유가 좀 있어서…….”
그 이유가 대체 뭔데요?
라는 질문은 꺼내지 못했다.
“그럼 가방 좀 쓸게요. 고마워요.”
멋대로 그녀의 손에 들린 가방을 들고 가 버리는 남자 때문에.
나봄이 난처해하고 있는 사이, 그녀의 가방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는 무거운 유리문 앞에 이동했다. 그리곤 고갯짓으로 문을 열어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나봄은 이러면 안 될 것 같다고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사람은 원래 당황하면 당황할수록 순순해지는 법이었다.
“머, 먼저 들어가세요.”
“고마워요.”
그래서 휠체어를 탄 그가 무사히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고, 넓은 로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그를 총총총 뒤따르고 있으니.
“잠시만 출입증 확인이 있겠습니다.”
그 수상한 모습을 놓치지 않은 가드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얼떨결에 외부인을 숨겨 주고 있는 나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아, 저기…….”
“출입증 주시죠.”
“가방에 있는데…….”
나봄은 남자가 들고 있는 가방을 손가락 끝으로 소심하게 가리켰다.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린 그를 내내 주시하고 있던 가드는 매서운 목소리로 물었다.
“같이 오신 분은 왜 얼굴을 가리고 있죠?”
“이분이 수줍음이 많아서…….”
“여긴 장난치는 곳 아닙니다. 똑바로 설명하세요.”
똑바로 설명을 하려고 해도 나봄은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누가 봐도 의심쩍은 이 남자는 불과 몇 분 전 처음 만난 사이였고, 왜 이렇게 얼굴을 가리면서까지 안에 들어가려는지는 그녀조차 알지 못했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잔뜩 움츠러든 시선으로 휠체어에 앉은 남자와 가드를 번갈아 쳐다보는 것뿐.
바로 그때.
“근무한 지 얼마 안 됐나 봐요. 보통은 이 휠체어만 봐도 알아보던데.”
남자가 살벌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나봄을 노려보고 있던 가드의 눈동자가 곧바로 그에게 옮겨 붙었다.
그 안엔 나봄에게 쏘아 보냈던 것처럼 강한 의구심이 담겨 있었으나, 남자가 얼굴을 가렸던 가방을 내림과 동시에 당황스러움으로 바뀌어 버렸다.
“서, 선우태준 대표님…….”
“대표 자리엔 앉은 적도 없어요. 직함은 생략해요.”
선우태준?
심상치 않은 남자의 성은 나봄의 머릿속을 좀처럼 떠나가지 않는 그 사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게이트 열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단번에 경계심을 허물고 닫혀 있던 게이트를 열어 주는 가드의 태도 역시 그녀의 생각에 신빙성을 더했다.
뜻밖의 전개에 놀란 나봄은 유유히 게이트 안쪽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이제 괜찮으니까 들어와요.”
그의 손짓에 퍼뜩 정신을 되찾았다.
그의 뒤를 따라 게이트를 지나치던 순간,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가드는 그녀를 더 큰 혼란에 빠트렸다.
“아, 참고로 제가 여기 왔다는 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예?”
“특히 앞으로 10분 동안은 차준이가 절대 눈치 못 채야 해요. 제 말 이해하셨죠?”
“그,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차준’이란 이름이 그의 입에서 친근하게 불려졌다. 덕분에 그를 바라보는 나봄의 눈빛도 심상치 않아졌다.
하지만 혼란의 장본인인 그는 시종일관 태연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고, 곧바로 내부를 드러내는 엘리베이터 안에 휠체어를 들여 놓았다.
“안 타세요?”
“네? 탑니다!”
나봄이 몸을 싣자마자 그는 다른 누가 탈세라 서둘러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멋대로 뺏었던 나봄의 가방을 돌려주며 물었다.
“몇 층 가세요?”
“홍보부로 가야 하는데…….”
“그럼 16층.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릴게요. 16층 누르는 김에 33층도 눌러 주세요. 보시다시피 손이 안 닿아서.”
“아…… 네, 알겠습니다!”
33층이라면 고위 간부들만 머무는 본사의 로얄 층이었다.
나봄은 순순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주면서도 점점 더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실웃음을 흘려보냈고, 막무가내인 행동과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봄 도어락 쪽 사람이라고 했죠? 이름이 어떻게 돼요?”
“한, 한나봄 입니다.”
“나봄 씨 덕분에 무사히 도착했네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외출하는 건 처음이라서 난관투성이였는데.”
눈가에 어린 미소는 그리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인 모습들을 보면 결코 평범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못하고 있자, 그는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킬 만큼 따듯한 웃음을 흘려보냈다.
“날 만났던 건 나봄 씨도 비밀로 해 줘요.”
“전 그쪽이 누구신지도 모르는데요?”
“그럼 더 잘됐구요. 자, 내릴 준비.”
띵―
그가 가볍게 손짓을 하자, 나봄이 내릴 16층 도착을 알리는 벨이 마법처럼 울렸다.
숱한 의문점들을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나봄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지만, 그가 손을 흔드는 바람에 얼떨결에 몸을 내려 버리고 말았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나봄 씨.”
문이 닫히던 순간 새어 나온 그의 마지막 인사.
그 순간 느껴지던 따스함은 확실히 차준과 많이 닮아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사람보다 더 그 사람 같을지도 모른다.
부드러운 입술에 어려 있는 차준과 닮은 미소는 원래 그의 것이었다고 해도 믿어 버릴 만큼 잘 어울렸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