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남친이 내게 반했다-23화 (23/104)

23. 누구나 상처 하나쯤은 있는 법

2017.07.17.

“우리…… 다시 시작할까?”

“……네?”

예상치 못한 고백이었다.

그걸 들은 나봄은 한동안 입술만 반쯤 벌린 채,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간절했던 첫사랑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한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평소 해 본 적도 없던 고민들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었다.

우리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제대로 된 데이트도 해 본 적이 없는데. 나는 아직 10년 만에 돌아온 그에 대해 아는 것도 하나 없는데.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인연을 다시 시작해도 될까? 내가 그를 다시 사랑해도 될까?

그 찰나의 망설임은 차준을 바라보는 눈빛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녀가 어떤 대답도 쉽사리 꺼내 놓지 못할 거라는 걸 예감한 차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너무 갑작스러웠나?”

“아…….”

“지금 바로 대답해 달라는 건 아니야. 천천히 생각해 보고 말해 줘도 돼.”

“…….”

“오늘은 그냥 너한테 내 마음만 제대로 전했으면 됐어.”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 그의 입가에 어린 천진난만한 미소. 함께 움직이는 사랑스러운 눈물점.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다시 봐도 10년 전과 다를 것 없이 그대로였다. 차준이 그리울 때마다 추억했던 얼굴도, 가끔 꿈에 나와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던 얼굴도 딱 지금 이 순간과 같았다.

하지만 왜 고개가 움직이질 않는 걸까.

그저 내가 한 번만 끄덕여 준다면 그 사람은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내 곁에 머물러 줄 텐데.

왠지 겁이 난다.

그건 현재 심장을 빠르게 두드리고 있는 설렘과 전혀 다른 감정이지만, 비슷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이제 들어가 봐. 피곤하겠다.”

차준은 가만히 얼어붙어 있는 나봄의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얼어붙어 있던 나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꾸벅 고개를 숙여 경직된 인사를 건넸다.

“그,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러자 차준은 공중에서 손을 흔들흔들거리며 달콤한 미소로 화답했다.

“응응, 잘 들어가.”

나봄은 여전히 아이 같은 눈웃음을 짓고 있는 차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섰다. 그 뒷모습은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잔뜩 굳어 있었다.

“하아…….”

그걸 바라보던 차준의 입술 새로 흐린 한숨이 샜다.

외면하려고 해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그녀와의 거리감. 이건 차준의 온 신경을 앗아 가는 최고의 난제였다.

10년 전의 너는 내 앞에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많은 표정을 지어 보였던 것 같은데.

지금의 너는 뭐랄까.

새어 나오는 감정도 애써 틀어막고 있는 것 같다.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고 아무리 고백해 봐도 소용없을 만큼.

우리가 다시 연인 사이로 거듭난다면 좀 나아질 수 있으려나.

생각의 흐름이 거기까지 진행되었을 때쯤, 12년 전 그녀로 인해 처음 가슴 두근거렸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관심과 애정을 받는 일이 가장 쉽고 귀찮았던 소년은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훔쳐보는 소녀를 알아차렸고.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던 어느 날, 의식적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복도를 스쳐 지나가는 그녀를 붙잡고 짓궂게 물었다.

‘너.’

‘저, 저요?’

‘나 왜 자꾸 쳐다 봐?’

‘네?’

‘혹시 나 좋아해?’

그러자 순식간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개지던 그녀의 얼굴.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이내 눈물을 쏟아 낼 듯 그렁그렁하게 젖어 버린 눈동자.

예상치 못한 반응은 차준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붙잡고 있던 여린 어깨를 스르륵 놓아주니,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기,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그녀의 눈에서 투명한 물방울이 툭, 하고 맥없이 떨어졌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전해지는 마음은 차준의 삶에서 처음이었다.

순간 단단하게 굳어 있던 차준의 마음엔 빈틈이 생겨났고, 이내 그의 마음엔 한 번도 느낀 적 없던 감정의 동요가 찾아왔다.

‘아니, 사과 받으려는 건 아니고…….’

‘…….’

‘넌…… 이름이 뭐야?’

사람에겐 별 관심도 없던 차준이 왜 그녀의 이름을 물어봤는지는 스스로도 모르겠다.

‘한나봄…….’

뒤따라 들려오던 작은 목소리가 왜 귀가 아닌 마음으로 파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알 수 없는 감정을 남겨 두고 곧바로 뒤를 돌아 총총총 달려가 버리던 그녀의 뒷모습은 한동안 차준의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딱 그때부터 나는 널 신경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를 훔쳐보는 니가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두근, 두근, 두근―

이젠 서른이 된 차준의 심장이 되새겨진 기억에 다시금 반응했다.

어느새 차준의 입가에 어려 있는 건, 진심에서 우러나온 편안한 미소였다.

차준은 늘 행복해지고 싶을 때면 그녀와 사랑했던 날들을 떠올렸고, 그건 매번 어지간한 진정제보다 효과가 잘 들었다.

아마도 다시 사랑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인 것 같다.

일렁이던 눈동자, 엷게 떨리던 목소리, 뜨겁게 달궈져 있던 숨소리.

오늘 내비쳐진 반응들은 하나같이 그때와 닮아 있어서, 위태롭게 조여 오던 마음이 한결 느슨하게 풀어지는 기분이다.

* * *

대형 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평창동 저택.

앤티크한 수제 가구와 목재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움을 더하는 집 안에 서 대표가 들어섰다.

오전 내내 치열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잔뜩 날이 선 상태였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오늘 아침 말씀하셨던 대로 에스테틱 관리사를 불러 두었습니다.”

가정 관리사의 인사를 가뿐히 무시한 그녀는 드넓은 응접실을 지나 긴 복도로 들어섰다.

또각 또각 또각―

그녀의 발걸음은 규칙적이었지만 흔들리는 눈빛은 몹시도 불안정했다. 이 복도를 걸을 때마다 벌어지는 그녀의 상처 때문이었다.

망가진 지는 벌써 10년째. 그 사실을 받아들인 것도 벌써 5년째.

하지만 받아들였다는 게 아물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심장을 찢어발기는 고통을 내색하는 것조차 지쳐 버려서, 그녀는 이 복도를 걸을 때마다 애꿎은 주먹만 꽉 쥐어 본다.

솟구치는 감정을 그렇게라도 삼켜 보기 위해.

서 대표는 복도 맨 끝 쪽에 위치한 방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흔들리던 그녀의 눈빛은 이제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화려한 액세서리로 꾸며진 손을 들어 똑똑― 방문을 노크했을 때쯤, 서 대표의 얼굴에선 부정적인 감정들이 모두 물러가고 오직 처연한 미소만이 남았다.

그 미소는 차준의 앞에선 단 한 번도 지어 본 적 없던 것이었다. 그에게는 딱히 내비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기에.

“들어오세요.”

머지않아 방 안쪽에서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성은 그녀를 다시 나약해지게 만드는가 싶었지만, 서 대표는 애써 안정을 되찾았다.

끼익―

그녀는 차가운 문고리가 돌려 닫힌 문을 열었고, 잔인하고 끔찍한 상처를 지그시 마주했다.

“오셨어요?”

“…….”

“어머니.”

먼저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아들, 선우태준은 망가진 다리가 무색할 정도로 한없이 태연하고 평온하기만 했다.

그럴수록 서 대표는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으나, 그녀는 비참한 심정을 애써 감춘 채 웃음기 어린 말을 건넸다.

“오늘 하루는 어땠니? 어제 오랫동안 밖에 나가 있어서 감기라도 들었을까 봐 걱정했는데.”

“몸은 괜찮아요.”

“그래도 주치의를 불러서…….”

“정말 괜찮다니까요, 어머니.”

온화한 미소를 띤 태준은 대답을 반복하며 서 대표에게로 다가왔다.

끼릭― 끼릭―

가슴을 후벼 파는 휠체어 소리는 여전히도 듣기 힘겨웠다.

하지만 조금도 신경 쓰이는 티를 내지 않고 있으니, 태준은 이내 먹구름 하나 없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어제 차준이가 본가에 안 올 거라는 거…… 혹시 알고 계셨나요?”

“…….”

“어머니는 들으셨던 거죠?”

거짓을 말해 봤자 언젠가는 태준의 귀로 들어갈 진실이었다. 그래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목소리엔 조금 더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 저한테는 왜 말을 안 해 주셨어요?”

“너도 그 애 성격 알잖니. 제 발로는 절대 찾아올 리가 없어.”

“그래서 저를 이용하시는 거예요?”

“이용이 아니라 너를 위한 일이었어. 넌 항상 그 애와 예전 관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니까, 그럴 빌미를 어떻게든 마련해 주고 싶었을 뿐이야.”

해명을 하는 서 대표의 눈빛은 제법 절절했다.

그걸 마주한 태준은 깊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크게 오해하고 계시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제 욕심이에요. 소원이 아니라.”

“…….”

“그러니까 들어주시려고 애쓰실 필요 없어요. 그래서도 안 되구요.”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는 경고성이 가득 서려 있었다.

태준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를 수 없었던 서 대표는 그보다 더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니, 선우차준 고집은 회장님 깨어나시기 전까진 반드시 꺾어 놔야 해. 그 애가 완벽하게 너의 역할을 해내야 회장님이 널 용서하실 거야.”

그리 말하는 서 대표의 눈빛에선 집착이 불러온 독기까지 느껴졌다.

그녀에게 ‘선우태준’이란 사람은 모든 걸 다 바쳐 구해 내고 싶은 간절한 존재였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직 사랑만을 위해 한 초혼.

태준은 그 사람이 결혼한 지 2년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겨 주고 간 선물이었고, 그녀의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게 도와준 유일한 등불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그 사람과 꼭 닮은 성인으로 성장하는 걸 보며 얼마나 기뻤는지.

처음엔 태준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그녀를 억지로 재벌가와 재혼시켰던 서재균 회장도,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태준을 후계자 감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얻은 거라곤 원치 않았던 생명 하나밖에 없었던 두 번째 결혼 생활을 순순히 청산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서 회장의 마음을 백 프로 충족시켜 준 태준 덕분이었다.

그러니 너는 내 인생의 구원자. 하나밖에 없는 완벽한 나의 아들.

또 다시 널 잃을 순 없어. 그러면 내가 하루도 살지 못하고 미쳐 버릴 거야.

새까맣게 타 들어가는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태준이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어머니, 저는 이 집안에서 쫓겨나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는 게 더 끔찍하거든요.”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사람처럼 지어 보이는 그 미소는 언제 봐도 가슴 아팠다.

서 대표는 그런 태준에게로 가까이 다가섰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회장님이 널 용서해 주신다면 기회는 반드시 너에게로 올 거야.”

“…….”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 엄마는 이 손을 놓아 버리는 일, 절대 없을 테니까.”

차가운 서 대표의 손끝에 강한 힘이 실렸다.

태준은 한동안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꺼내 놓는다.

“그때가 되면 차준이는요?”

“…….”

“어머니한테 차준이는…… 대체 어떤 존재인 거예요?”

두 개의 질문은 같은 의미였으나, 서 대표는 단 한 마디 대답도 되돌려 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애틋하고 가여운 그 애를 떠올리며, 태준은 지친 목소리를 냈다.

“그 애가 돌아올 자리를 만들어나 주시고 부를 생각을 하세요.”

“…….”

“저는 차준이한테 쥐덫에 놓인 미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요.”

그건 차준조차 알아주지 않는 태준의 진심이었다. 서 대표가 알고 있는 완벽한 태준의 하나뿐인 단점이기도 했고.

너는 마음이 여리고 선한 것까지 그 사람을 닮아서, 쓸데없는 잔정에 너무 휩쓸린다.

그렇게 하염없이 쓸려 가고 쓸려 가다 도착한 곳이 이 집안 구석 자리에 위치한 방 한 칸이라는 사실이 몹시도 가슴 아플 뿐이다.

“내일 병원 가는 거 잊지 마. 난 며칠간 해외 출장이 있어서 같이 가 주진 못할 거야.”

“어머니…….”

“대신 김 실장이 동행해 줄 거니까 뭐 불편한 거 있으면 그 사람한테 미리 얘기해.”

서 대표는 자꾸만 그를 나약하게 만드는 이름을 아예 거론된 적 없던 것처럼 묻어 버리고, 전혀 상관없는 주제를 꺼내 놓았다.

이로써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느낀 태준은 다시 입을 닫아 버렸다.

누가 무엇을 포기해야 하느냐로 논쟁하느라 썩을 대로 썩어 버린 관계.

‘형? 니가?’

‘차준아…….’

‘내 이름 부르지 마, 개새끼야.’

문득 그 애가 처음으로 등을 돌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미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옥죄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어차피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죗값이라 아프다는 내색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일 년에 몇 번 보지도 못하는 너는 점점 부서져 가고 있는 것 같아서, 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 한편이 쓰라리다.

* * *

해가 다 저물어 버린 어두컴컴한 저녁.

비장한 표정의 태오가 삼겹살 반 근을 품에 안고 집 안에 들어섰다.

평소 집에선 냄새가 밸까 봐 요리를 안 하는 그였지만, 오늘은 반드시 프라이팬을 꺼내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너 삼겹살 좋아해? 종각 쪽에 내가 제일 자주 가는 돼지고기집이 있는데 거기 갈래?]

퇴근 직전, 나봄에게서 도착한 첫 번째 메시지.

그걸 본 즉시 태오는 ‘그래’라는 군더더기 없는 답변을 보냈으나, 사실 머릿속은 답변처럼 깔끔하지 못했다.

‘와, 나 내일 진짜 한나봄이랑 단둘이 저녁 먹나 봐.’

라는 기쁨부터 시작해서.

‘그런데 나 고기 잘 굽는 편이었던가?’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쓸데없는 고민을 거쳐.

‘잘 못 구워 버리면 나랑 먹어서 맛없게 느껴지는 줄 알 텐데. 다신 둘이 식사하자는 말 안 꺼내면 어떡하지.’

현실에선 일어나지도 않을 비극을 심각하게 염려하기까지.

하염없이 올라갔다가 순식간에 푹 꺼져 버리는 태오의 감정은 자이로드롭을 방불케 했다.

이러다간 평소 하지도 않을 실수까지 저질러 버릴 기세였다.

자신의 문제가 바로 이 습관적 긴장감 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는 우선 오늘 밤엔 마음부터 가라앉혀 보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달밤에 고기 굽는 연습.

시작은 그냥 한번 굽는 솜씨라도 점검해 보자였지만 삼겹살집에서 쓰는 네모난 철판부터 적외선 온도계, 타임워치, 휴대용 가스레인지, 부탄가스까지 사고 나니 스케일이 제법 커져 버렸다.

누가 보면 삼겹살 굽기 세계 대전이라도 출전하는 줄 알겠다.

“이게 혼자 뭔 난리냐…….”

태오는 한숨 섞인 혼잣말을 하면서도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곧장 주방으로 직행했다.

식탁에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새로 산 물건들을 세팅해 놓고. 고기까지 쟁반에 담아 준비해 두자 제법 동네 삼겹살집 분위기가 났다.

이십만 원이 거의 다 되는 돈을 지불할 때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는데, 그럴싸한 연습 공간을 마련하고 나니까 불안감은 좀 덜하네.

태오는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하기 위해 식탁 의자를 당겼다.

하지만 제대로 앉기 직전,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자신의 진짜 문제는 사실 고기를 잘 굽고 말고가 아니라, 나봄의 앞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한나봄…… 한나봄이 필요한데.”

잠시 고민하던 태오는 제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머지않아 다시 식탁 앞에 등장한 태오의 손엔, 평소 침대에서 책을 읽을 때 등에 받쳐 놓는 긴 베개가 들려 있었다.

그걸 제 맞은편 의자에 놓아두고, 뭔가 더 부족한 것 같아 그 베개 앞에 수저를 놓아두고.

태오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한나봄, 안녕.”

순간 온몸에 개미가 기어오르는 듯한 징그러움 느낌에 태오는 벌써부터 얼굴이 열이 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이제부터 내가 너한테 삼겹살을 구워 줄까 해. 기름 튀니까 얼굴 저리 치워…….”

는 안 되고.

“기름 튀니까 얼굴 조심해. 그래, 얼굴 조심해.”

연습 안 해 봤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녀를 걱정해 주는 다정한 말투는 미리 생각해 두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게 튀어나와 줄 리가 없었다. 혼자 날뛰는 마음이 들킬까 무서워, 사춘기 10대 소년처럼 삐딱한 말만 내뱉곤 했으니까.

나름 괜찮은 인트로를 정한 태오는 본격적인 고기 굽기 연습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미처 챙겨 오지 못한 집게를 가져오려,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는데.

‘아니, 나 너랑 커피 마시러 온 거 아니야.’

절대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럼 뭐하러 여기 들어왔는데.’

‘헤어지자는 말…… 하려고.’

5년 전, 카페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그녀가 꺼내 놓았던 이별의 순간이었다.

그때 난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무슨 말을 했더라.

‘왜, 오늘 약속 있어?’

현실도피.

그래, 나는 현실도피를 했어. 꼴만 사나워지게.

그런 나에게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우리 만나기로 했던 거 말이야. 그거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

‘없었던 일로 하자니.’

‘조금 더 만나 보고 판단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너랑 나는 너무 안 맞는 것 같아. 내 마음이 누굴 만날 준비가 안 되어 있기도 하고.’

‘…….’

‘그러니까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을 때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을 때.

그 말이 난 왜 그리도 화가 나고 억울하던지.

그렇게 이성을 잃어버린 난 그녀를 향해 내 모든 감정을 적나라하게 내비쳤다.

‘한나봄, 넌 원래 인생 그렇게 사냐?’

‘……어?’

‘준비도 안 되어 있으면서 사람은 왜 만나. 내가 니 기분에 따라 놀아 줬다가 버려졌다가 하는 장난감인 줄 알아?’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그때부터 잔뜩 움츠러들기 시작했지만, 나는 솟구치는 분노를 스스로 멈추지도 못했다.

‘화, 화났다면…….’

‘미안할 짓하면서 미안하다는 소리 꺼내지도 마. 듣기도 싫으니까.’

결국.

‘다시는…….’

‘…….’

‘다시는 내 눈앞에 띄지 마.’

기어이 새어 나와 버린 평생을 두고 후회하게 될 말.

한 번만 더 생각해 봐 달라고 할걸. 그게 안 되면 친구로라도 지내자고 할걸.

그것도 싫으면 그냥 그날만큼은 아무 말 없이 고이고이 보내 줄걸.

내가 생각해도 그날의 나는 니가 돌아올 수 있을 만한 일말의 여지도 남겨 두질 않았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똑같이 그랬을 것이다. 난 점점 젖어 가는 목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았거든.

그래서 내가 먼저 성질대로 박차고 일어나 버린 그날의 자리.

5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 순간에 머물러 있는 태오는 일으키려던 몸을 도로 앉혀 두었다.

그리고는 긴 베개가 아닌, 잔뜩 겁먹은 그날의 나봄에게 당시엔 미처 하지 못한 고백을 꺼내 놓았다.

“좋아해.”

넌 시작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난 널 이미 많이 좋아해.”

마지막 순간 그리 말했더라면 우리의 이야기는 지금과 달라질 수 있었을까.

다 늦어 버린 고민을 하며 태오는 기억 속 나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쁜 가시나.”

머지않아 따라 나오는 욕설엔 원망이나 미움이 담겨 있지 않았다. 이젠 지병처럼 달고 사는 미련만 가득할 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