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우리 다시 시작할까?
2017.07.14.
이상하게 손목이 자꾸 쑤셨다. 어제는 그냥 거슬리는 정도더니 오늘은 푸른 멍 자국까지 생겨 버렸다.
“아…… 거슬리네.”
제 손목을 만지작거리던 태오는 사무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을 열었다. 하도 자잘한 부상이 잦아서 준비해 둔 구급상자가 그를 반겼다.
하지만 막상 꺼내려고 보니 파스를 찾아 붙이는 일도 귀찮게 느껴졌다.
붙여놔 봤자 뗄 때 아프기만 하지, 별 효과도 없는 것 같더라.
태오는 짧은 고민 끝에 열었던 서랍을 다시 닫아 두었다. 그러고선 아직 확인하지 못한 자료들을 본격적으로 훑어보려 하는데.
“와아, 드디어 서울 도착이네!”
대형 버스 엔진 소리와 함께 김 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워크숍에 갔던 팀원들이 이제야 회사로 도착한 모양이었다.
“나봄 씨 수고 많았어요! 같이 와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김 대리님! 덕분에 정말 즐거웠어요!”
머지않아 들려오는 그녀의 음성은 태오의 신경을 앗아 갔다.
어제 홀로 씁쓸하게 발걸음을 돌린 뒤로 계속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무사히 나와 별 탈 없었나 보다.
태오는 곧바로 마중 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의식적으로 모든 동작을 멈춰 버렸다.
오늘은 그녀를 마음에서 떠나보내야겠다고 결심한 지 겨우 이틀째.
아직 그녀에 대해 냉정해지지 못했으니, 한동안 마음이 시키는 것에 반대로 행동할 생각이었다.
보고 싶으면 고개를 돌리고, 다가가고 싶으면 멈추고.
“나봄아, 집에 데려다줄게. 내 차에 타.”
“아니에요, 본부장님! 힘드실 텐데 저 혼자……”
“내가 데려다주고 싶어서 그래. 짐도 무겁잖아.”
“아……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폭발하면 폭발할수록, 제삼자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모든 신경을 꺼 버리고.
“……대패질이나 해야지.”
평화롭던 마음이 단번에 복잡해진 태오는 머리를 써야 하는 서류 작업 대신, 몸을 써야 하는 단순 작업부터 착수하기로 했다.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고민들을 잊는 데는 역시 기계처럼 나무나 다듬는 것이 최고였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태오는 입고 왔던 깨끗한 티셔츠부터 벗었다. 그리고는 긴 캐비닛 앞으로 걸어가 낡은 작업복을 꺼내 들었다.
땀 냄새가 밴 남색 점프 슈트의 냄새가 안정감을 되찾아 주는 듯했다.
역시 평생 일이나 하다가 죽어야 할 팔자인가.
태오는 점프 슈트에 긴 다리를 집어넣고, 옷을 골반까지 끌어 올렸다. 그러다 안에 민소매 티라도 입어야 할 것 같아, 세탁해 둔 게 있는지 캐비닛 안을 뒤지고 있던 그때.
끼이이익―
갑작스럽게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헐벗은 상반신을 미처 가리기도 전에 불쑥 고개를 내미는 건, 그의 앞에 결코 나타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었다.
“저기, 단태오…….”
“아, 깜짝이야.”
한 번 시야에 들어오면 온 신경을 앗아 가 버리는 탓에, 그저 피하고만 싶었던 한나봄.
예상치 못했던 그녀의 등장에 태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만만찮게 커다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나봄은 누가 일시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굳어 있었다.
태오는 당황감을 숨기지 못하고 한동안 얼어붙어 있다가, 뒤늦게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미묘하게 어긋났다 싶은 그 시선의 종착지는 아몬드색 피부와 올록볼록한 잔근육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맨가슴.
중학교 이후로는 엄마에게도 보여 준 적 없던 철벽남 단태오의 은밀한 속살.
꿀꺽, 마른침을 삼켜 넘긴 태오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빨개졌다.
하지만 너무 놀란 나머지, 머릿속이 새하얘진 나봄은 쉽사리 눈을 돌리지 못했고.
“지, 지금 어딜 보냐!”
결국 태오의 언성은 다시 무섭도록 높아져 버리고 말았다.
“꺄악! 미안해!”
친밀하고 좋은 사이로 거듭나기 위해 파스와 비타민 음료까지 사들고 왔거늘.
새로운 스타트부터 정말 최악이었다.
.
.
.
쾅―!
하고 닫혔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이제 들어와도 돼.”
아직 얼굴의 열이 가라앉지 않은 태오는 나봄의 눈을 애써 피하며 말했다. 방금 전 사태를 수습하지도 못하고 쫓겨나야 했던 나봄은 주눅 든 목소리로 사과부터 했다.
“미안, 사무실에 있는지 몰랐어. 미소 씨가 아직 출근 안 했을 거라고 하셔서.”
“나 없는 사무실엔 왜 들어왔는데.”
“아! 전해 줄 게 있거든!”
그 말과 함께 나봄은 메고 있던 작은 크로스백을 뒤적거렸다.
얼굴의 홍조를 감추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아붓고 있던 태오는 그때까지만 해도 나봄을 외면하고 있다가, 이내 그녀가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자 은근슬쩍 눈길을 주었다.
“뭐야, 이건.”
“물파스랑 비타민 음료. 약국에서 타 왔어.”
“물파스는 왜.”
“손목…… 아플 것 같아서.”
나봄은 그 말을 하며 그의 손목을 흘끔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저 붉게 부어오르기만 한 상태였는데, 오늘은 결국 짙은 멍이 들어 있다.
나봄의 시선을 느낀 태오는 서둘러 반쯤 걷어붙였던 작업복 소매를 끌어 내렸다. 그리고는 특유의 까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손목 너 때문에 다친 거 아니야.”
“어제 엘리베이터 안으로 무리하게 집어넣어서 그렇게 된 거잖아. 위치가 딱 거긴데, 뭐.”
“원래 다쳤었다고. 며칠 전에…… 그 뭐냐, 서랍장 문에 찧어서.”
비록 엘리베이터 사고가 있기 전에 태오의 손목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봄은 단번에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애먼 곳으로 피하는 눈동자와 쓸데없이 구긴 미간은 그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때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이젠 제법 그에 대해 파악하게 된 나봄은 굳이 거짓말을 눈치챘단 사실을 티내지 않았다.
그저 괜스레 다친 팔목만 만지작거리는 그의 다른 쪽 손을 억지로 펼쳐, 오늘 아침 눈뜨자마자 달려가서 사 온 감사의 선물을 살포시 들려 줄 뿐.
“원래 다쳤었던 거면 더 큰일이지. 문틈 사이에 끼어서 더 악화됐을 거 아냐.”
“필요 없다니까…….”
“물파스는 통증 가라앉을 때까지는 챙겨 바르고, 비타민 음료는 그냥 너 피곤할 때 마셔.”
“…….”
“아, 그리고 이왕이면 시간 내서 병원도 가 봐. 넌 손목도 많이 쓰잖아.”
원래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타입은 아닌데.
나봄은 태오의 앞에만 서면 어쩐지 말투가 딱딱해졌다.
처음엔 그냥 그가 불편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친해지고 싶은 지금도 이러는 걸 보면 단태오한테 옮은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마지막엔 입꼬리를 들어 올려 편안한 미소를 지어 주며, 최대한 진심을 담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 너 아니었으면 그 안에서 기절이라도 했을 거야.”
그의 마음을 또 간지럽게 만드는 말.
하지만 이런 감정에 휩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태오는 삐딱한 대꾸만 꺼내 놓았다.
“고맙다는 말만 몇 번을 하냐.”
“그리고 미안해!”
“뭐?”
“그동안 너한테 너무 불편한 티만 냈었던 것 같아. 넌 해코지한 것도 없는데 괜히 나 혼자 겁먹고…….”
확실히 미안하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긴 했다.
5년 전, 두 번째 데이트가 시작된 지 단 10분 만에 그녀의 입에서 이별의 말이 나왔던 순간에도.
고맙다는 말도 버거운 와중에, 미안하다는 사과는 더욱 더 그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대체 어떤 표정으로 화답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겠다.
괜찮아, 라고 말해 버리면 넌 또 나한테 뭘 해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아서.
그렇다고 해서 어색하게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태오는 잘 떨지도 못하는 너스레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정 성은이 망극하면 보답을 해 주든가. 말만 고맙고 미안하면 뭐해.”
쿵쾅쿵쾅 요동치고 있는 심장에 비해 말투는 제법 자연스러웠다.
이제 그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걸 어려워하는 나봄이 멋쩍게 웃어 보이기만 하면, 태오도 괜한 소리 할 시간에 밖에서 기다리는 본부장한테나 가 보라며 그녀를 돌려보낼 참이다.
그러나 잠시 고민하던 나봄은 반짝이는 눈동자를 태오에게로 고정시켰고.
“그래! 내일 저녁에 시간 되니?”
복숭아 빛 입술을 움직여 그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다.
덕분에 파르르 떨려 오는 건 펼쳐진 현실을 믿지 못한 태오의 동공이었다.
“내, 내일 저녁에 내가 시간이 되면 어쩔 건데.”
“저녁 사 줄게. 그동안 신세 진 거 갚는 의미도 있고, 앞으로 잘해 보자는 의미도 있고.”
“너 밥 먹다가 얹힐 일 있냐.”
“이젠 불편한 내색 안 할 거라니까. 우리가 좋게 끝난 사이는 아니지만 계속 원수처럼 지낼 것도 없잖아.”
그건 태오가 도망만 다니는 그녀에게 전부터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이었고, 그녀가 꼭 알아줬으면 했던 말이었다.
그걸 하필 이 타이밍에 꺼내 놓는 한나봄은 이쯤 되면 내 머릿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훼방을 놓는 것만 같다.
더 이상 그녀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던 태오는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한나봄이라는 여자는 항상 닿고 싶었던 사람이지만 지금의 그에겐 그녀를 향해 손을 뻗을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태오는 늑대처럼 날이 선 눈빛으로 토끼 같은 나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고, 짧은 시간 동안 아주 매정한 멘트들을 준비했다.
‘난 내일 저녁에 스케줄이 잡혀 있어서, 너랑 한가하게 밥이나 먹고 앉아 있을 여유가 없어.’
‘원수질 사이는 아니지만 우리가 마주 보고 저녁 먹을 사이도 아니잖아?’
‘괜히 나한테 시간 버리지 말고 저녁 시간은 본부장이랑 보내.’
이제 이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 놓기만 한다면 그녀는 다가오는 걸음을 도로 멈춰 둘 것이다. 어쩌면 이 기적 같은 호의가 무색할 정도로 멀리 물러나 버릴지도 모른다.
소의 힘줄보다도 질긴 짝사랑 청산을 위하여, 그는 해야 할 말을 똑바로 내뱉기로 했다.
“난 내일…….”
그래서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첫 마디를 꺼냈으나.
“왜? 시간 안 돼? 다른 날로 잡을까?”
이미 그녀를 만나기 전, 본인이 하고 싶은 일에 딱 반대로만 하겠다고 결심해 버린 태오는.
“난 내일 한가해. 저녁 시간도 괜찮고.”
거절하고 싶은 만큼 쉽게 수락했고.
“금요일 저녁은 번화가 쪽 복잡하니까 너희 집 근처에서 먹어도 돼.”
밀어내고 싶은 만큼 적극적으로 다가섰고.
“아, 그리고…… 너무 피곤하면 무리하지 말고 연락해. 다른 날로 미루게.”
매정하게 굴고 싶은 만큼 부드럽게 녹아 버렸다. 이게 아닌데, 바보같이.
삐딱한 태오의 표정을 보며 분명 거절의 말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던 나봄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이내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식당 예약하고 연락할게.”
“내 번호는 있어?”
“저번에 명함 받지 않았나? 그거 보고 저장해 뒀을 텐데, 잠깐만 주소록을…….”
“준 적 없어. 대학교 때 번호 안 바뀌긴 했는데…….”
“아…….”
“기다려. 그냥 내 명함 꺼내 줄게.”
세상 처음 만난 사람보다 어색한 대화가 오고 갔다.
이런 주제에 내일 어떻게 단둘이서 저녁을 먹나 싶지만…….
“자, 여기 명함.”
“고마워. 내 명함도…….”
“니 번호는 있어.”
“그래?”
“원래는 없었는데 저번에 협업 제안서에 있길래…… 어쨌든 내일 봐.”
“응, 내일 보자!”
너무 걱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한껏 긴장해서 준비했다가 삐끗해서 폭삭 망하는 건 첫 데이트 때 실컷 해 봤으니까.
용건을 끝마친 나봄은 곧바로 태오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얀 벤츠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서럽지 않았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모든 기대를 내려놓은 덕분인가 보다.
* * *
나봄의 작은 이층집 앞에 하얀 벤츠가 멈춰 섰다.
사이드브레이크를 걸어 둔 차준은 곧바로 차에서 내려, 나봄이 앉아 있는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내리시죠, 한나봄 팀장님.”
다정한 그의 미소는 햇살 아래서 유독 빛이 났다.
나봄은 그 얼굴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보다가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되게 빨리 도착했네요.”
“지하철보다 훨씬 낫지?”
“그러게요. 하하.”
“조심히 내려. 밑에 턱 있다.”
차준의 에스코트를 따라 몸을 빼낸 나봄은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를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집까지 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그녀의 눈가에 어려 있는 해맑은 미소는 언제 봐도 기분이 좋았다. 차준은 그런 나봄을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점심이라도 같이 먹고 싶은데, 오늘까지 급히 넘겨야 할 서류가 있네.”
“괜찮아요. 바쁘시면 가 보셔야죠.”
“혹시 내일 저녁 시간 괜찮아?”
그리 묻는 차준은 벌써 머릿속으로 그녀와 함께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몇 군데 떠올렸다.
지난 데이트 때는 본의 아니게 근사한 식사 한 끼 대접해 주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만회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봄은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의외의 대답을 했다.
“내일은 안 될 것 같아요.”
“그래?”
“네, 아까 선약을 잡았거든요.”
아까라면 버스에서 내린 뒤 잠시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건물 안으로 사라졌을 때를 말하는 것일 텐데.
순간 결코 달갑지 않은 존재 하나가 차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제부터 자꾸 신경을 거슬리는 그 사람은 그의 평온하던 눈동자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 약속…….”
혹시 단태오랑 잡아 놓은 거야?
진짜 묻고 싶은 질문은 튀어나오기 직전 가까스로 삼켜 넘겼다. 그녀의 앞에선 불안정한 모습을 내비치지 않고 싶어서였다.
대신 그는 이성적으로 사고했고, 이내 의도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그럴싸한 뒷말을 생각해 냈다.
“……중요한 건가 보지?”
“단태오 팀장님한테 저녁 사드리기로 했어요. 프로젝트도 같이 진행해야 하는데, 그동안 너무 서먹하게 군 것 같아서…….”
“아…….”
“앞으로 조금씩이라도 친해져 보려구요.”
기어이 궁금증은 풀렸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예상했던 그 남자와 만난다는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어제에 이어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확인한 차준은 마른침을 삼켜 넘겼다. 그리고는 뒤엉키는 감정과 달리 차분히 정돈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행이네. 사이가 너무 안 좋아 보여서 걱정했는데.”
그 말에 순한 눈웃음으로 화답하는 나봄은 차준의 불안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건 무척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야 지금 내가 건네려는 고백이 순결함을 되찾을 수 있으니.
“나봄아.”
차준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고, 나봄은 대답 대신 가만히 시선을 마주했다.
아직, 지금은 안 돼. 너의 머릿속은 나로 가득 채워지지 않았어.
그는 그녀의 두 손을 붙잡았다. 어제처럼 힘주어.
그러자 일렁이기 시작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이제야 온전히 그에게 집중하고 있다.
지금이 바로 너의 마음을 나로 가득 채워 넣어야 할 때.
차준은 긴 호흡을 들이마셨고.
“우리…….”
“…….”
“다시 시작할까?”
모든 불안을 잠재울 한 마디와 함께 흘려보냈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살던 나봄이 10년 동안 꿈에서만 그려 왔던 질문.
“……네?”
그걸 똑똑히 들어 놓고도 되물을 수밖에 없었던 건.
한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워 버리는, 그녀 스스로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 낯선 감정들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