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남친이 내게 반했다-21화 (21/104)

21. 나는 널 당황시키는 게 좋아.

2017.07.10.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 갇혔던 건 한순간이지만 빠져나오는 데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겨우 문이 열리자 차준은 힘없이 주저앉아 있던 나봄에게 가장 먼저 손을 뻗어 주었고.

“나봄아, 무서웠을 텐데 정말 잘 참았어.”

다정한 목소리로 칭찬을 건네며 그녀를 밖으로 꺼내 주었다.

그래, 내가 나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 사람 덕분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꺼내려던 순간, 갑자기 입술이 굳어 버렸던 건.

찰나의 순간 마음속에 돋아났던 건 그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뾰족한 가시였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한 나봄은 어떤 인사 대신 어색하게 웃어 보였고, 자연스레 다가오던 차준의 손길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났다.

“데려다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잠깐 방에 들어가서 쉴게요.”

“아…… 그럴래?”

“이따 뵙겠습니다, 본부장님.”

부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하는 나봄의 미묘한 이질감은 눈치 빠른 차준에게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곧바로 등을 돌려 버린 나봄이 그에게 어떤 말을 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것이기도 했고.

“나봄 씨! 괜찮아요?! 엘리베이터에 갇혔었다면서!”

숙소로 돌아온 나봄에게 화장을 고치고 있던 팀원 한 명이 소란스레 물었다. 나봄은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는 괜찮아요. 본부장님이 곧바로 관리자 분들 불러서 문 열어 주셨어요.”

“역시 본부장님! 가만 보면 나봄 씨만 유달리 챙긴다니까?”

“아, 아니에요. 갇힐 때 바로 옆에 계셔서…….”

“그러니까 항상 나봄 씨 옆에 있잖아. 나봄 씨 워크숍 온다고 하니까 바로 따라와 버린 것도 그렇고.”

그리 말하는 팀원의 얼굴엔 확신이 차 있었다. 올해로 입사 3년 차인 그녀는 지금껏 누군가에게 그 정도로 살갑게 대하던 차준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차준에 대한 나봄의 믿음은 그녀가 확신하는 것만큼 견고하지 못했다.

항상 따듯한 미소를 건네주고, 다정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고마운 손길을 내밀어 주는 그 사람이지만.

아주 가끔씩 여전히 그가 등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껏 그녀를 설레게 했던 말들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 그래도 심란한 와중에 더 이상 차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나봄은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어차피 그녀는 지친 몸을 눕히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저기…… 단 팀장은 어느 방에 계시나요?”

밖으로 나오자마자 태오의 손목부터 확인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던 나봄은 넌지시 그를 찾았다.

팀원은 잠시 눈썹을 구긴 채 곰곰이 기억을 더듬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단태오 팀장님? 글쎄, 회의 이후로 안 보이시던데. 파트장님! 단 팀장님 보셨어요?”

그녀는 태오와 가장 친밀한 유리에게 나봄의 질문을 넘겼다.

순간 구석에서 조용히 옷을 정리하고 있던 유리는 잠시 옅은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일 있다고 갔어.”

머지않아 딱딱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그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한 나봄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내가 나봄 씨한테 쓸데없는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여요?”

나봄이 중얼거린 혼잣말엔 별 뜻이 없었지만 유리는 과하게 날 선 반응을 보였다.

누가 봐도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 모습에, 나봄은 작은 목소리로 사과부터 했다.

“아, 거짓말하신다는 건 아니고……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원래 허유리 파트장님이 저런 분위기였던가. 꼭 잘 갈아 놓은 칼날 같네.

나봄은 눈에 띄게 어깨를 움츠린 채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소라가 빌려준 가방 옆에 두고 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태오에게 전화를 걸어 손목의 상태라도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전화번호를 제대로 찾아보기도 전에, 유리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려 말했다.

“지금 태오 운전 중일 거예요. 내일 낮에 연락해 보지 그래요?”

“아…… 차를 가지고 왔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그렇겠지. 나봄 씨는 유독 태오한테만 배려가 없잖아.”

확실히 지금 유리의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 감추려 해 봐도 그녀의 이질감은 이 공간을 차갑게 만든다.

오늘따라 묘하게 날이 선 유리를 의아하게 여긴 팀원은 속삭이듯 물었다.

“파트장 님, 혹시 단 팀장님이랑 또 싸웠어요?”

“내가 뭐.”

“단 팀장님 얘기 나오니까 갑자기 까칠해진 것 같아서. 파트장님 성격 버리는 사람은 태오 씨밖에 없잖아.”

팀원의 날카로운 지적에 유리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팀원이 저리 아무것도 모르듯, 한나봄도 내가 왜 이리 혼자 열을 내고 있는지 전혀 모를 텐데.

괜히 그동안 쌓아 놓은 쿨한 이미지만 버리게 생겼다.

회사 사람들에게는 성격 좋고 호쾌한 여자처럼 보이고 싶었던 유리는 질투로 얼룩진 마음을 잠시 숨겨 두기로 했다.

“그래, 싸웠다. 미안해요, 나봄 씨. 나도 모르게 애꿎은 나봄 씨한테 화풀이를 해 버렸네.”

그래서 짧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허울 좋은 사과부터 했더니, 나봄은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단 팀장님 얘기가 불편하셨을 수도 있죠!”

아기 양처럼 순한 그녀의 눈빛.

아마 단태오는 저 지켜 주고 싶은 분위기에 목매다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건 확실히 유리에게 없는 것이었고, 별로 흉내 내고 싶지 않은 부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다시는 그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내가 저 내숭을 없애 주는 수밖에.

“나봄 씨.”

유리는 언제 까칠하게 굴었냐는 듯 살갑게 나봄을 불렀다.

“네?”

나봄은 한껏 경직된 표정으로 대답했으나, 그럴수록 유리는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방금 예민하게 굴었던 거 정말 미안해요. 우리가 원래 이래요. 싸우고 화해하고, 또 싸우고 또 화해하고.”

“그래도 사이는 좋으신 것 같던데…….”

“그런가? 뭐, 태오한테는 내가 제일 가까운 사람이긴 하죠. 나봄 씨는 대학 동기인데도 안 친하다고 그랬죠?”

“네? 아, 네.”

“걔가 가까워지기 어려운 타입이긴 하지.”

지금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나봄은 유리의 입에서 나오는 태오 이야기를 들으며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차마 티는 내지 못하고 잠자코 있으니, 유리는 그제야 의도가 분명한 말을 꺼내 놓았다.

“태오는 누가 자기 신경 쓰이게 하는 거 싫어해요. 나봄 씨도 일을 하면서 그 부분은 꼭 알아 둬야 할 거야.”

“신경 쓰이게 하다니요?”

“나봄 씨는 태오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런지, 곧잘 신경 쓰이게 만들잖아. 괜히 잔짜증을 부린다거나, 일부러 걱정하게 만들거나.”

“저는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려던 순간, 태오의 붉게 부어오른 손목이 떠올랐다.

지난 주말, 차준에게 상처 입고 무턱대고 빨간 불을 향해 달려가던 그녀를 필사적으로 붙잡아 주었던 그의 모습도 새삼 기억이 났다.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어쩌면 나봄은 태오의 신경을 자꾸 건드렸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그녀는 태오에게 항상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벌렸던 입술을 도로 닫아 두니, 유리는 너털웃음과 함께 잠시 멈춰 두었던 뒷말을 이었다.

“조금 더 어른스럽게 굴도록 해요. 나봄 씨 나이에 순진무구한 건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니까.”

그 얘기는 나름 태도를 똑바로 하라 눈치를 준 것이었지만 나봄은 조금도 불쾌하게 듣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껏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깨달음을 얻었을 뿐.

‘하긴. 내가 단태오한테만 너무 감정적으로 굴긴 했어. 매번 야생 늑대라도 맞닥뜨린 것처럼 지레 겁먹고 피해 다녔잖아.’

확실히, 그건 잘못된 행동이었다.

아마 유리도 지난번 점심 식사 때 자신이 그를 불편하게 대했던 걸 기억하고, 앞으로의 협업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했던 모양이다.

유리의 적의를 호의로 받아들인 나봄은 그동안 태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던 스스로를 반성하며 진심을 다해 대답했다.

“조언 감사합니다. 앞으로 조심할게요!”

그리고 결심했다.

오늘 고마웠던 일도 있으니, 앞으로는 그에게 조금씩이라도 마음을 열어 보겠다고.

지난 악연으로 물든 색안경은 벗어 버리고, 새롭게 그에 대해 알아 가겠다고.

어쩌면 인간적으로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건 유리의 뜻과는 반대되는 결과였으나, 유리는 그걸 까맣게 모른 채 살가운 미소를 퍼뜨렸다.

“고마워요. 걔가 뭐 하나 신경 쓰면 나한테 화풀이해서 그래요. 앞으로 나봄 씨가 잘 행동해 주세요.”

“네!”

그렇게 본의 아니게 시작되어 버린 나봄의 서툰 발걸음.

그건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기대를 접어 두기로 결심한 태오로서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변화의 시작이었다.

* * *

[오늘 집에 갈 일 없어. 개수작 부리지 말고 방에나 처박혀 있어.]

오래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차디찬 문자 한 통을 보냈다.

답신은 별로 받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휴대폰을 껐다. 어차피 그는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청승을 떨 사람이었다.

“하아…….”

그러고 나니 드디어 꽉 막혀 있던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물론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 버린 기분이지만, 그래도 이만한 게 다행이었다.

적어도 불쌍한 그에게 휘말려 마음이 약해지진 않았으니.

가까스로 선우태준과의 문제를 일단락 시킨 차준은 휴대폰을 다시 재킷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제야 편히 나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엘리베이터 사고를 겪은 그녀는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홀로 돌아갔었다.

그 모습에선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던 터라, 차준은 가만히 넘길 수가 없었다.

겨우 수습해 놓은 관계를 다시 멀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차준은 더 늦어 버리기 전에 나봄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리조트의 긴 복도를 가로지르는 그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어두웠다.

하지만 그녀가 지내는 숙소 앞에 다다라서는 의식적으로라도 입꼬리를 풀어 내었고, 가라앉아 있을 목소리를 가다듬고.

똑똑똑―

그는 나봄의 숙소 문을 두드렸다.

“네, 누구세요!”

머지않아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그녀의 것이었다.

“나봄아, 나야.”

“아…… 본부장님?”

“몸은 괜찮은지 보러 왔어.”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에게 건네진 차준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나봄은 잠시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신발장 쪽으로 달려와 잠긴 문을 벌컥 열어 주었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많이 놀란 것 같던데, 진정은 됐어?”

“네, 이젠 괜찮아요. 다친 곳도 없는걸요, 뭐.”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나봄은 평소처럼 웃는 낯으로 살갑게 대답했다. 그러나 쉽사리 그를 방 안으로 들여보내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서 확실히 다른 무언가를 느낀 차준은 안쪽으로 고갯짓을 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들어가도 돼?”

“네? 아…… 네, 들어오세요!”

순간 나봄이 보인 찰나의 망설임. 그건 분명 부정적인 신호였다.

차준은 그때부터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한다. 나봄은 감정에 솔직한 편이 아니지만, 결코 피어나는 감정을 숨기지는 못할 사람이니.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차준이 문을 닫고 그녀의 숙소 안으로 들어서자, 나봄은 주방에서 컵을 꺼내 들며 물었다. 완전한 손님처럼 대하는 그 태도는 그와 거리를 두고 싶다는 것을 뜻했다.

차준은 그럴수록 환하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 허유리 파트장님이랑 미나 씨랑 방 같이 쓴다고 했나?”

“네.”

“많이 친해졌어?”

“아…… 대화를 나눌 시간이 많이 없었어요. 제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뒤풀이 가시는 바람에.”

“그럼 불편하겠네. 넌 낯도 많이 가리는 성격이잖아.”

“괜찮아요. 앞으로 차차 가까워지면 되죠.”

분명 커피는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나봄은 주방 앞에 서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차준은 별말 하지 않고 베란다 쪽 커피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 뒤로 이어지지 않는 대화는 나봄의 감정이 상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현재 나의 어떤 점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

“아깐…… 미안했어.”

우선 더 이상 멀어지지 않도록, 그는 짧은 망설임 끝에 사과 한 마디부터 꺼내 놓았다. 순간 잠시 멈칫하는 그녀의 손은 그의 짐작이 맞았다는 증거였다.

그때부터 차준은 지난 시간들을 곰곰이 곱씹어 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그녀의 온도가 식었는지. 어느 시점에 그녀의 눈빛이 굳었는지. 내 마음이 그녀를 돌보지 못했던 때는 언제인지.

‘그냥 여기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혼자 있기 너무 무서워서…….’

머지않아 떠오르는 기억 하나는 엘리베이터 문의 좁은 틈새로 뻗어 나왔던 나봄의 손이었다.

겁먹은 그녀의 애타는 목소리를 듣고 나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무서워도 조금만 참아. 금방 다녀올게.’

그게 정답이라는 걸 알려 주듯 차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힘없이 떨어졌던 그녀의 손끝은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부터는 좀처럼 닿지 않으려 했다.

내가 먼저 놓아 버린 너의 손.

바로 그거였구나. 너의 마음이 나로부터 상처 입었던 순간이.

문제를 깨달았으니 다음에 이어 내야 할 말은 답안지처럼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정돈된 목소리를 꺼내 놓으려던 그때.

“단태오 팀장님이 같이 있어 줘서 그렇게 무섭진 않았어요.”

“……단태오?”

예상치 못한 이름 하나가 튀어나왔다. 한 번도 그 사람을 편히 언급한 적이 없던 나봄이었기에, 차준의 눈동자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정말 괜찮아요.”

뒤따라 흘러나오는 나봄의 말은 진심이 분명했다. 그녀의 눈가에 어린 건 정말로 괜찮아 보이는 미소였으니까.

그 뒤에 자연스럽게 건네져야 할 대답은 ‘니가 괜찮으니 다행이다’라는 안도의 한 마디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입술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녀를 괜찮도록 만들어 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에게 전혀 다행인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자, 나봄은 특유의 해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전 뒤풀이에서 얼굴이라도 비쳐야 할 것 같은데, 본부장님은 안 내려가세요?”

다시 똑바로 바라본 그녀의 얼굴엔 이전의 거리감이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언제나 훤히 드러나 있던 그녀의 미묘한 감정선이 어쩐지 흐려진 것 같아서.

차준은 가라앉은 시선을 나봄에게 고정시켰고, 웃고 싶지 않은 만큼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차준의 향기에 나봄의 눈동자가 둥그레졌다.

“싫어, 여기서 너랑 놀래.”

“네?”

“오늘 밖에선 다른 사람들 때문에 얘기도 제대로 못 했잖아.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나랑만 놀아 줘.”

“놀아 달라니 어떻게…….”

“글쎄, 뭘 하든 난 너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천천히 뻗어 나온 차준의 손이 나봄의 따듯한 손을 붙잡았다. 바보처럼 놓쳤었던 만큼 꽉.

그러자 바람 앞에 있는 촛불처럼 일렁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평소와 같았다.

월식이 찾아온 듯 새까맣던 너의 하늘에 다시 나라는 달이 채워지고 있다.

그제야 얼어붙었던 호흡은 따듯해지고, 굳었던 입꼬리는 힘을 더하지 않아도 휘어 올라갔다.

나는 널 당황시키는 게 좋아. 니가 나한테 반응하는 게 좋아.

톡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은 너의 마음이 좋아.

그러니까 조금의 공간도 남겨 두지 마. 넌 나로 인해 가슴 벅차 해야 해.

“포켓볼 치러 갈래? 지하에 있던데.”

“아…… 그, 그거 잘 못 쳐요.”

“괜찮아. 내가 가르쳐 주면 되잖아.”

차준은 간절히 붙잡은 그녀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당황하면서도 순순히 따라와 주는 건 10년 전과 똑같았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차준은 드디어 진심 어린 말을 건넸다.

“오늘 정말 다행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무사히 나온 거요?”

“응응.”

뭐든, 결국엔 전부 다 다행이야.

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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