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지금 내 곁에 있어 주는 사람
2017.07.07.
“나봄아! 괜찮아?”
“차, 차준 오빠…….”
갑작스럽게 벌어진 엘리베이터 사고는 차준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들고 있던 휴대폰까지 떨어트린 그는 곧바로 나봄에게 달려갔고, 닫힌 문을 어떻게든 벌려 보려 했다.
그러나 온 힘을 쏟아부어도 꿈쩍하지 않는 엘리베이터 문은 나봄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안 열려요?”
“하아…… 아무래도 관리자를 불러와야 할 것 같아. 나봄아, 그 안에 경비실 호출 버튼 있어?”
“어두워서 보이지가 않는데…… 잠시만요.”
나봄은 차준이 시킨 대로 버튼을 찾기 위해 조작판을 살폈다. 하지만 빛이 들어올 틈새가 너무 좁았던 탓에 버튼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기억을 더듬어 겨우 비상 버튼을 찾아 누르니.
삐이이익―
날카로운 기계음이 엘리베이터 내부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장담하건대 이 소리는 결코 경비실과 연결되는 신호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다 먹통인 것 같아요…….”
나봄은 다시 틈새 앞으로 다가가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차준은 그런 나봄을 진정시키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이성적으로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먹통이 되어 갑자기 멈춰 버린 지금.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도, 밖에서 도와줄 수 있는 일도 없다.
시간을 끌어 봤자 더 위험한 2차 사고가 발생할지도 모르니…….
‘그래, 지금 당장 관리자부터 불러와야 해.’
늘 그렇듯 행동 지침부터 정리한 차준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를 입술 밖으로 꺼내 놓았다.
“나봄아,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네? 어, 어디 가려구요?”
“관리자 불러오려고. 그동안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벽에 기대 서 있어야 돼.”
차준의 말을 들은 나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깜깜한 엘리베이터 내부와 고막을 찢는 듯한 기계음은 이미 견딜 수 없을 만큼 무서운데, 이 상황에 차준마저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패닉에 빠져 버릴 게 분명했다.
그의 존재가 필사적이었던 나봄은 좁은 틈새로 작은 손을 뻗었다.
“오, 오빠! 잠시만……!”
차준에게 닿은 그녀의 손은 몹시 차가웠다. 차준의 시선이 동요하듯 흔들렸다.
“그냥 여기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
“혼자 있기 너무 무서워서…….”
나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에게 부탁했다.
그제야 새삼 떠오르는 그녀의 약점.
나봄은 예전부터 어둠을 참 무서워했었다.
1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그녀 혼자 있는 집에 정전이 났다 그러기에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달려갔더니 어찌나 겁에 질린 얼굴로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던지.
그래도 그녀는 내가 보자마자 울음을 그쳤었다. 내가 와 줬으니 이젠 다 괜찮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나는 너를 괜찮도록 만들어 줘야 해.
니가 어둠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만큼, 이 상황은 내가 반드시 해결해 줘야 해.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래도…….”
“무서워도 조금만 참아. 금방 다녀올게.”
그가 말했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조금만 참으라고.
그리고 나봄의 손을 떼어 냈다.
순간 틈새로 비치는 나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버렸으나, 차준은 그럴수록 서둘러 비상구로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차준의 뒷모습. 작아지는 차준의 숨소리.
흐려지다 흐려지다 결국엔 사라져 버린 차준의 포근한 향기.
그녀의 불안을 잊게 만들어 주는 것들은 그렇게 한순간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제 남은 거라고 좁은 틈새로 보이는 차준의 휴대폰뿐.
“아…….”
그제야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는 걸 직감한 나봄은 스르륵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차준의 말대로 벽 쪽에 몸을 붙이고 싶은데, 겁에 질린 두 다리는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봄은 그의 말대로 두려움을 참아 보기 위해 두 눈을 꾹 내리감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 감은 눈 때문에 생긴 거라고 믿으면, 심장을 옥죄는 공포가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싶어서였다.
바로 그때.
덜컹―!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흔들렸다.
“꺄악!”
놀란 나봄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바깥쪽 바닥이 엘리베이터 내부 바닥보다 높아진 걸 보니, 아무래도 살짝 내려앉은 모양이었다.
그걸 확인한 나봄의 불안감은 극도로 거대해졌다.
차준의 말대로 아무 일도 없을 거라 믿고 싶은데, 이대로라면 아래로 추락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대로 죽게 되는 걸까.
“차준 오빠…….”
나봄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차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멀어져 버린 그를 깨달았다.
아무리 목이 터져라 불러도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나가는 누구라도 곁에 머물러 주길 바라는 수밖에.
“도와주세요…….”
나봄은 문 틈새로 들어오는 빛에 의존한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 시각, 몇 칸씩 한 번에 뛰어내려 빠르게 1층으로 향하고 있던 차준은 그런 나봄의 상태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그래서 점점 더 빠르게, 그리고 필사적으로 그녀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그녀를 위해서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한 사실이지만.
* * *
“돌아가자.”
라는 결심을 내린 태오의 표정은 비장했다.
그리고 아주 공허했다.
처음부터 참가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녀와 차준이 함께 앉아 있는 사진을 보고 홧김에 찾아와 버린 워크숍.
태오는 그녀에게 닿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달려가다가도 겁에 질려 걸음을 멈춰 버리는 나는 애초부터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더 비참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태오는 회의실 맞은편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고선 숙소가 있는 위층이 아닌 주차장으로 향하는 아래층 버튼을 망설임 없이 눌렀는데.
“꺄악!”
저 멀리 떨어진 비상구 쪽에서부터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란 태오의 시선이 단번에 틀어졌다.
“뭐야.”
태오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여자의 비명 소리가 또 다시 들려오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느낌이 쎄한 것이, 저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 분명했다.
결국 태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말고 비상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선택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듯, 멀찍이 떨어져 있을 땐 들리지 않았던 가녀린 울음소리가 갈수록 선명해졌다.
위기를 확신한 태오는 비상구 쪽 코너를 돌자마자 물었다.
“거기 무슨 일 있습니까.”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비상계단 입구와 전원이 꺼진 엘리베이터 하나뿐.
울음소리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예상 밖의 정적에 태오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잘못 들었나.”
그래서 등을 돌리려던 그때.
“도와주세요…… 사람이 갇혔어요.”
멈춘 엘리베이터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아닌 심장부터 철렁 내려앉으며 반응하는 걸 보면 이건 나봄의 음성이 분명했다.
“한나봄?”
태오는 곧장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갔고, 반뼘쯤 되는 너비의 틈새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비치는 나봄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태오의 눈빛이 파르르 떨려 왔다.
“너 왜 그러고 있어.”
“단…… 태오?”
“거기 갇힌 거야?”
뻔한 질문을 물어보는 건 몹시 당황스러워서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차준이 시도했던 것처럼, 문부터 붙잡았다.
“기다려. 내가 꺼내 줄게.”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그녀가 나올 수 있을 만큼 틈새를 벌려 보려 했다. 하지만 어디에 단단히 걸렸는지, 이번에도 무거운 문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엘리베이터가 덜컹 내려앉을까 불안했던 나봄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태오를 말렸다.
“그렇게 해도 안 열려. 벌써 해 봤어.”
“경비는……”
“내가 어떻게 불러. 버튼도 다 먹통인데…….”
울음기 섞인 나봄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그녀의 겁에 질린 모습은 많이 봤다고 자부할 수 있는 태오였으나, 이 정도로 떨고 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태오는 그런 나봄을 위해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을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비상 버튼까지 먹통이 됐다면 지금 당장 관리실로 내려가서 사람을 불러와야 할 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상황은 1분 1초가 급박했다. 그래서 곧바로 발걸음을 떼어 내려던 그때.
“무서워…….”
엘리베이터 틈새 안에서 그녀의 혼잣말이 흐리게 들려왔다.
깜깜한 내부, 알 수 없는 기계음, 그리고 그녀의 떨리는 눈동자와 맞물려진 그 음성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안쓰러웠다.
순간 이성적인 사고가 멈춰 버린 태오는 앞으로 향하려던 발길을 중단시키고 다시 나봄에게로 눈길을 두었다.
내가 미친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내 바람이 불러온 망상일지 모르겠지만.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는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가지 말라고. 곁에 있어 달라고.
“……많이 무서워?”
이내, 태오의 입에서 흘러나온 질문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나봄은 말없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고,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태오를 올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선 함께 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술이 차마 떨어지질 않았다.
허망하게 그녀에게서 벗어나 버렸던 차준의 손이 자꾸 생각나서. 무서워도 혼자 참아 보라고 했던 그의 마지막 말이 자꾸 떠올라서.
“혼자 못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이어지는 태오의 두 번째 질문엔 고갯짓으로조차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태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알았어, 같이 있어 줄 테니까 무서워하지 마.”
비상구 쪽으로 돌렸던 문을 다시 그녀에게로 고정시켰다.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배려에 나봄의 눈빛이 다른 의미로 휘둥그레졌다.
“어디…… 안 가게?”
“뭐? 내가 어딜 가.”
“아…… 아니야.”
마음속으로 삼킨 대답을 듣기라도 한 걸까.
태오는 나봄을 안심시키려는 듯 아예 문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좁은 틈새에 얼굴을 가까이 붙여, 차분히 엘리베이터 내부를 확인했다.
“어디 보자…… 전원이 완전히 나간 걸 보니까 어디 퓨즈가 끊긴 것 같은데.”
“그럼 떨어지는 거야?”
“비상 안전장치 되어 있어서 안 떨어져, 바보야.”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 아버지가 엘리베이터 업체 다녀서 안다. 왜.”
불안한 나봄의 질문에 대답하는 태오의 표정은 별거 아닌 사고라는 듯 가벼웠다.
그건 어둠을 무서워하는 나봄의 마음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태도였으나, 이상하게도 그녀를 좀먹던 공포심은 그 태연자약함을 따라 한결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눈물을 뚝 그친 나봄에게 태오는 피식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설마 추락할까 봐 운 거냐?”
“아까 갑자기 내려앉았단 말이야…….”
“그리고 다시 멈췄잖아.”
“응, 그렇긴 한데…….”
“봐봐, 내 말이 맞네. 안전장치가 못 떨어지게 잘 잡아 줬으니까 이제 한시름 놔도 되겠다.”
태오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패닉에 빠져 있던 자신이 스스로도 유난이었다 생각될 정도로.
그래서 울음을 뚝 그치고 젖은 눈을 소매로 훔치자, 태오는 손사래를 치며 핀잔을 주었다.
“야야, 옷에 화장 다 묻는다. 하얀 옷 입고 왜 그러냐.”
“지금 옷이 중요해?”
“옷도 중요하지. 꼬질꼬질하게 하고 있다가 본부장한테 뭔 소릴 들으려고.”
태오가 불쑥 꺼낸 차준에 대한 이야기는 나봄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 차준을 지금 이 상황에 떠올려 봤자 그때의 불안감만 되살아날 뿐이었다.
나봄은 대화 주제를 돌리기 위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깜깜한 데 갇히는 거에 트라우마 있단 말이야.”
“무슨 트라우마.”
“아주 어렸을 때, 아빠 놀라게 한다고 옷장에 숨었다가 옷장이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갇혔었거든. 그때가 하필 아빠 회식 날이라서 네 시간 동안 나오질 못했어.”
“그 장면 공포 영화에 나왔던 것 같은데.”
“응, 그 영화가 트라우마 되는 데 쐐기를 박았지.”
나는 지금 왜 이 녀석한테 그 사람에게도 하지 않은 얘기를 털어놓는 건지.
나봄은 태오에게 말하면서도 의아했다.
하지만 잠자코 듣고 있던 태오는 이내 입고 있던 남방의 소매를 접어 올리며 말했다.
“나도 그런 거 있었어. 예전에 물에 빠져 죽을 뻔한 뒤로 목욕탕도 무서워서 못 들어갔었지.”
“물 공포증이야?”
“어, 그런데 지금은 수영도 잘해. 어떻게 극복했는지 알려 줄까?”
“어떻게 했는데?”
나봄이 그리 물어본 순간 태오는 끝까지 소매를 걷어붙인 팔을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나봄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예상치도 못했던 온기를 머금은 손은 그녀를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뭐, 뭐하는 거야.”
나봄은 당황스러움에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힘을 더해 가는 손끝은 왠지 모를 절실함을 품고 있었다.
여전히 문틈 새로 보이는 그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한데도, 어쩐지 묘한 불안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나봄이 손길을 피하지 못하고 가만히 멈춰 있는 사이, 태오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중학교 2학년 때, 바다로 가족 여행을 갔는데 엄마가 목욕탕도 못 들어가는 놈이 바닷가는 오죽 무섭겠냐면서 계속 손을 붙들고 있었어.”
“뭐?”
“다 큰 놈이 엄마 손 잡고 다니는 게 너무 쪽팔려서 그 뒤로 물 같은 건 무섭지도 않게 됐어.”
“…….”
“더 안 좋은 기억이 생겨 버렸지만 어쨌든 해피 엔딩.”
태오가 꺼낸 소소한 이야기와 갑작스러운 스킨십은 이제야 의미가 맞물려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을 파악한 나봄은 한쪽 눈썹만 살짝 구긴 채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지금 더 안 좋은 기억을 만들어 주겠다는 거야?”
그 말에 태오는 잠시 시선을 피하는가 싶더니 이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일단 내 의도는 그래.”
위험한 상황에 꺼내진 그 소리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려보내자,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확인한 태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 또 울어?”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우리 아버지가 엘리베이터 회사 근무하셔서 잘 아는데…….”
“진짜 우는 거 아니라니까. 하하.”
다시 첫 단계로 돌아가 그녀를 달래려는 태오에게 편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에게는 좀처럼 웃어 준 적이 없던 그녀였기에, 태오의 눈동자가 의아함을 담아 휘둥그레졌다.
냅다 뿌리치지만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싫지는 않은 건가.
한참을 아이처럼 웃던 그녀는 잡히지 않은 손끝으로 눈가를 닦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이 난다고 하던데, 너 때문에 큰일이야.”
그 모습이 왜 가슴 두근거릴 만큼 예뻐 보이는지, 태오는 제 마음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산산이 부서졌던 마음은 그녀의 미소 한 번에 다시금 원상 복구 되어 버렸다 보다.
이러다 그녀가 갇혀 있던 엘리베이터에서 나오고, 다시 차준에게로 가 버리게 된다면 또 처음 다쳐 본 사람처럼 새삼 상처 받을 거면서.
“웃지 마. 정 들어.”
태오는 괜한 핀잔과 함께 애먼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수록 더 둥글게 강아지 같은 눈을 휘어 보이며, 그에게 진심을 담은 한 마디를 건넸다.
“고마워. 같이 있어 줘서.”
힘든 상황에 함께해 줘서 고맙다는 말.
이건 두 번째 듣는 말인데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쉬지 않고 돌아가던 머릿속은 새하얘지고, 아깐 잘만 움직이던 입술이 꾹 닫힌 채 좀처럼 열릴 생각을 않는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무슨 화답이라도 꼭 돌려주고 싶었던 태오는 가까스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앞으로도…….”
“나봄아!”
그 순간, 최악의 타이밍으로 그녀의 남자 주인공이 등장했다.
갑작스러운 기척에 놀란 태오는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다급해 보이는 차준, 그리고 그가 데리고 온 엘리베이터 업체 정비사들.
늘 정갈하던 넥타이가 잔뜩 흐트러져 있는 걸 보니, 그는 나봄을 구출해 내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 모양이었다. 아직 정돈되지 못한 격한 숨도 그가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준다.
“단 팀장님이 왜 여기…….”
한 템포 늦게 태오를 발견한 차준이 흐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시선이 내려앉은 곳은 엘리베이터 틈새 안을 비집고 들어간 태오의 손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더욱 보란 듯이 잡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건 태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가만히 멈춰 있는 동안 그녀를 구출해 낼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온 사람이니까.
끼어들 자격도 없는 나는 이쯤에서 오해가 더 커지기 전에 빠져 주는 게 맞는 거겠지.
태오는 꼭 잡고 있던 나봄의 손을 힘없이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리자 불러오신 겁니까.”
“네, 이제 엘리베이터 문은 이분들이 열어 주실 테니 물러나 계셔도 됩니다.”
차준의 건조한 목소리에 태오는 엘리베이터에서 마지못해 물러났다.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었던 그의 손목은 붉게 부어오른 상태였다.
그건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나봄의 시선에도 적나라하게 비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문 틈새는 내 손목에 딱 맞았으니까, 나보다 뼈가 굵은 단태오는 아팠겠다.
내 손을 잡아 주겠다며 억지로 집어넣고 있는 내내.
“나봄아, 문 금방 열어 주실 거니까 걱정 말고 기다려.”
나봄의 눈동자가 향해 있는 태오를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차준이 가려 버렸다.
그제야 돌아온 차준을 의식한 나봄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차준이 불러온 정비사들이 고장 난 엘리베이터 문을 여는 작업에 착수하고, 현장에서 동떨어진 태오는 쓸모없어져 버린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돌아온 남자주인공 덕분에 그는 단숨에 엑스트라로 전략해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심사가 뒤틀리더라도,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관리자부터 불러온 차준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현명했다.
그에 비해 태오는 문제 해결보다는 거짓말만 늘어놓기 급급했던 것 같다.
갇힌 나봄보다 불안했던 와중에 지어 보였던 태연한 표정도 거짓말.
아버지가 엘리베이터 회사에 다녀서 잘 아는데 이건 별일 아니라는 설명 역시도 거짓말.
그래도 안 좋은 기억을 더 안 좋은 기억으로 덮어 버렸다는 경험담은 진실이었다.
자신에게 효과가 있었던 그 방법이 나봄의 미소를 되찾아 준 건 전혀 뜻밖이었지만.
“안에 계신 분! 괜찮습니까? 다친 곳은 없나요?”
“네! 저는 괜찮아요!”
“금방 꺼내드리겠습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계세요.”
이젠 정말 겁먹은 기색 하나 없이 씩씩해진 나봄을 확인한 태오는 남들은 듣지 못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잠시 제 발끝을 바라보다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정비사들을 지켜보다가.
“나봄아, 여기 손전등이야. 무서우면 비추고 있어.”
“아…… 고맙습니다.”
그녀 곁에서 사고 수습에 여념이 없는 차준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야 멈춰 있던 걸음을 슬그머니 떼어 냈다.
내 역할은 모두 끝났으니, 이젠 미련 없이 돌아가 볼 생각이다.
내가 있어도 되는 곳으로.
태오는 느린 발걸음을 옮겨 그들에게서 벗어나는 동안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에게 상처 받기 전에 스스로 허물어 버린 마음이 또 다시 자라날까 싶어서였다.
그래서 차마 알아채지 못한 시선 하나.
“단태오…… 잠깐……”
그 시선은 욱신대는 그의 손목을 따라 움직였고, 이내 그가 코너를 돌아 완전히 사라져 버리자 아쉬움을 가득 머금었다.
얼굴 마주 보고 한 번 더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었던 건지, 그럴 기회가 없었던 건지 모르겠다.
나봄은 그저 멀어져 버린 태오의 뒷모습이 꼭 갑작스레 도망치는 것처럼 보여서 의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