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남친이 내게 반했다-19화 (19/104)

19. 나는 안 돼

2017.07.03.

“아…….”

태오의 입술 새로 흐린 신음이 흘렀다. 예상치 못한 키워드는 그의 모든 사고 회로를 정지시켜 놓았다.

“자, 모두들 준비!”

“…….”

“단 팀장님! 준비라고요, 준비!”

“…….”

“단 팀장님?”

그래서 심판을 맡은 팀원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종이쪽지에 두 눈동자만 고정시킨 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자.

“나오면 안 될 키워드라도 나왔어요?”

차준이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입가에 어린 부드러운 미소는 흐려졌던 정신도 다시 곤두서게 만들었다.

“……아닙니다.”

덕분에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은 태오는 스타트라인 앞에 선 다른 사람들처럼 달릴 준비를 했다.

한 발을 앞으로 내밀고, 상체를 숙이고.

시선을 오직 한 사람, 나봄에게 고정시키자 머릿속에 각인되어 버린 키워드가 더욱 선명해졌다. 안 그래도 긴박함에 빨리 뛰던 심장은 이제 곧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애초부터 키워드는 중요한 게 아니었어. 무조건 내가 먼저 닿아야 돼.’

가진 게 오기뿐인 태오는 무너질 뻔했던 각오를 억지로 다졌다.

그사이 심판 팀원은 들고 있던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고, 온 힘을 다해 숨을 내뱉었다.

휘익―!

요란한 출발신호와 함께 여섯 명의 참가자들이 본격적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의 방향은 제각각이었으나, 차준과 태오가 향해 가는 곳은 정확히 일치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늘막에 앉아 쉬고 있는 한나봄.

두 사람은 지금 그녀에게 달려가고 있다. 늘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그녀를 오늘만큼은 확실히 붙잡아 볼 작정이다.

고등학교 시절, 육상부에 몸담았던 차준은 단연 눈에 띄게 빠른 속도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운동신경이라면 누구에게 뒤쳐진 적이 없던 태오도 만만치는 않았다.

차준이 겨우 앞서가는가 싶으면 금세 따라붙고, 다시 앞서는가 싶으면 다시 따라붙는 게 집념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보면 더욱 우위를 가릴 수 없는 두 남자의 레이스.

“나봄 씨, 저기 두 사람 나봄 씨한테 오는 것 같은데?”

“네?”

나봄의 곁에 앉아 한가로이 경기를 구경하고 있던 한 팀원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제야 나봄은 신발코에 붙어 있던 나뭇잎에서 관심을 떼어 내고, 잔디 구장 쪽으로 눈길을 두었다.

“저…… 한테요?”

“응, 확실해. 얼른 마중 나가 있어.”

“아앗.”

팀원은 뜻밖의 전개가 재미있는지, 나봄의 어깨를 막무가내로 떠밀었다.

당황한 나봄은 그대로 소심한 걸음을 옮겨 맨 앞쪽까지 진출했고, 달려오는 두 남자의 시선이 닿는 곳에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태오의 다리에도 더욱 스피드가 붙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돌진하는 몸이 얼마나 빠른지, 한계를 넘어선 그의 속도는 단거리 레이스에선 한 번도 져 본 적 없던 선우차준도 제쳐 버릴 정도였다.

‘반드시 잡을 거야. 지금껏 나에게서 도망치기만 했던 너지만, 오늘만큼은 니가 멀어지기 전에 내가 먼저 닿고 만다.’

오랜 시간 묵혀 온 그의 욕심은 이 기회를 틈타 미련 없이 불타올랐다.

차준과의 거리도 점차 벌어지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나봄은 태오의 손에 잡히게 될 게 분명했다.

아직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승리를 거머쥔 기분.

그러나 그 반가운 희열을 미처 다 누려 보기도 전에.

‘한나봄, 내 말 좀 들으라고!’

‘왜, 왜 들어오는 거야! 나가 줘!’

그의 눈앞을 깜깜하게 만드는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아주 잠깐이지만 나봄이 그의 마음을 눈치챘던 순간,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경계심을 띠고 있었다.

‘너한테 관심 가졌던 적 한 번도 없어.’

‘뭐?’

‘정말이야. 너랑 만나기 며칠 전에 딱 2주 사귀고 헤어진 사람이 있었어.’

‘그럼…… 허유리 씨가 얘기한 사람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란 소리야?’

‘생각을 해 봐. 진짜 좋아서 고백했을 리가 없잖아. 너랑 난 모르는 사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래서 소중하게 품고 있었던 진심을 스스로 깎아내리고, 허물어 버리고, 무너트리자.

‘아, 알았어. 오해는 안 할게…….’

그제야 편안해지던 너의 눈빛은 다시 떠올려 봐도 참 잔인했다. 그 순간의 내가 얼마나 서러웠는지, 넌 죽을 때까지 모를 거다.

태오는 어느새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진 나봄과 일그러진 눈빛을 마주했다.

내가 붙잡아야 할 사람은 한나봄. 키워드에 적힌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는 사람도 한나봄.

그래서 손을 뻗어선 안 될 사람 역시 너였다.

나는 영원히 닿지 못할 사람.

‘한나봄…….’

부르고 싶은 그녀의 이름은 끝내 입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지치지도 않고 내달리던 다리는 어느새 현저히 느려져 버리고, 금방이라도 뻗어 나갈 듯 했던 팔엔 힘이 쫙 풀린다.

그 찰나의 순간 빠르게 태오를 스쳐 지나온 차준은 나봄에게 하얀 손을 내밀었다.

“나봄아!”

“본부장님……?”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평소처럼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래서 나봄이 얼떨결에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자.

“하아, 하아…… 곁에 두고 싶은 사람.”

“네?”

“나 지금, 곁에 두고 싶은 사람 찾아온 거야.”

차준의 마른 장밋빛 입술 사이로 가쁜 숨과 함께 고백과 다름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순간 강아지 같은 나봄의 눈동자는 깜짝 놀랄 만큼 휘둥그레졌다.

“저, 저요?”

“응, 너.”

그녀의 흐린 되물음에 확답까지 마친 차준은 결승선을 향해 나봄을 이끌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뒷모습은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을 기세로 굳건했다.

다 왔는데.

이번엔 정말 내가 먼저 닿을 수 있었는데…….

결국 잡지 못했다. 그 사람처럼 내 마음을 당당하게 꺼내 보일 자신이 없어서.

홀로 남은 태오는 쓰디쓴 감정을 삼키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뒤늦게 미처 옮기지 못한 세 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힘없이 멈춰 서 버린 자리는 그녀의 흔적만 남아 있는 공허한 빈자리였다.

태오는 고개를 들었고, 어느새 결승선에 도달한 두 사람을 일렁이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뒤늦게 깨달은 치명적인 사실 한 가지.

지금껏 겁이 많은 그녀가 나를 너무 두려워해서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정말 바보 같을 만큼 겁을 내고 있는 건, 니가 아니라 내 쪽이었다.

나는 너의 시선에 담길 내 모습이, 그걸 보며 생겨날 너의 감정이, 그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여실히 드러내 버릴 너의 표정이.

정말 죽을 만큼 무서워.

너무 무서워서 한 걸음도 다가가지 못할 것 같아.

그래서 긴 세월 동안, 너에게 내려앉지 못하고 달처럼 빙빙 맴돌기만 해 온 것이겠지만…….

‘나는…… 안 돼.’

주제를 제대로 파악한 순간, 태오의 머릿속을 강타하는 결심은 포기였다. 지금껏 수만 번도 넘게 다짐했으나, 한 번도 해내지는 못했던 헛된 꿈.

하지만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기대를 접었고, 희망을 무너트렸다.

물론 멀리 떨어진 그녀의 실루엣만 봐도 그의 마음은 다시 좀비처럼 살아나겠지만, 그때마다 스스로 부수고 또 부수다 보면 언젠간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아질 거라고 확신한다.

그때가 되면 나조차도 내 마음을 모르고 살 수 있을 거다.

바라건대…… 아마도.

* * *

회의 내내 단태오는 표정이 없었다.

그저 메두사와 눈이 마주쳐 굳어 버린 석상처럼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유리는 속이 뒤집어지는 듯했다.

마음에 가득 찬 의심은 있는데, 그걸 물어봤자 단태오가 솔직하게 대답해 주진 않을 테고.

하지만 신경을 꺼 버리기에는 그녀의 마음이 너무도 불편했다.

최근의 그는 기를 쓰고 친해져서 알게 된 모습과 180도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상으로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워크숍 정기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모두 숙소로 이동해 주세요.”

때마침 형식적인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누구보다 먼저 가방을 챙긴 유리는 아직도 자리에서 미동을 않고 있는 태오에게 곧장 달려갔다.

“단 팀장, 나랑 담배 피우러 가자.”

담배 타임은 그와 친해지고 싶은 관계일 때도 써먹던 좋은 핑계거리였다.

그러나 태오는 누가 봐도 저기압인 얼굴로 무심히 대답했다.

“담배 끊었어.”

“뭐? 언제부터!”

“좀 됐다, 왜.”

말 같지도 않은 대답은 유리의 의심에 확신을 더했다.

이렇게까지 대화를 거부한다는 것은 최근 아주 짜증나는 일이 있었다는 뜻이고, 그건 야외 레크리에이션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마지막 키워드 레이스 때 한나봄에게로 망설임 없이 달려오던 단태오는 갑자기 우뚝 걸음을 멈췄고, 그 뒤 어딘가로 사라져 한참 동안 보이질 않았으니까.

태오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유리는 더 이상 그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다.

이건 그녀가 아는 단태오가 아니었고, 그녀가 바라는 단태오의 모습도 아니었다.

“한나봄 씨 때문이야?”

그래서 되는 대로 내뱉어 버린 그녀의 이름.

그게 정답임을 말해 주듯, 태오의 눈동자가 일순 굳었다.

“무슨 개소리야, 그거.”

하지만 이내 가라앉은 음성으로 꺼내 놓는 대답은 괜한 억지가 잔뜩 섞여 있었다.

떨리는 시선은 진실을 숨기지 못하는데, 그 혼자만 고군분투 중이다.

바보같이.

“한나봄 씨구나. 대학교 때 첫사랑이자…….”

“…….”

“니가 아직까지 못 잊고 있는 여자.”

한번 술에 취해서 주절주절 꺼내 놓은 이야기가 오늘까지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그녀의 얘기가 이런 식으로 언급되는 게 싫었던 태오는 인상을 쓴 채 사납게 되물었다.

“니가 그걸 왜 신경 쓰고 앉아 있는데.”

“니가 신경 쓰이게 하니까 그러지.”

“그러니까 니가 뭔데 이러냐고.”

태오가 내뱉는 대답은 하나같이 유리를 섭섭하게 하는 말들뿐이었다.

그래서 두 눈에 원망을 가득 담아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태오는 아랑곳 않고 매정한 대꾸를 이어 나갔다.

“신경 꺼.”

“…….”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든 니가 알 바 아니잖아.”

내 알 바가 아니라니.

팀에서 자꾸 겉도는 널 챙겨 주는 건 나밖에 없는데, 내 알 바가 아니라니.

그건 단태오가 꺼내선 안 되는 얘기였다.

또, 시종일관 누구도 다가오지 말라는 분위기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아, 이런. 불이 없네…….’

‘이리 와요.’

‘어?’

‘내 불 나눠 주게.’

갑작스럽게 가져온 담뱃불만큼이나 뜨거운 감정을 선사하고 간 그에게만큼은 절대 듣고 싶지 않은 얘기이기도 했다.

주먹을 꽉 쥔 채 멀어지는 태오의 모습을 지켜보던 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머지않아 시선 끝에 걸려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고 있는 나봄의 얼굴이었다.

순간 유리의 눈빛엔 미처 숨기지 못한 날카로운 가시가 튀어나와 버렸다.

너였구나.

‘단태오, 고백할 게 있어.’

‘너 술값 없냐.’

‘아니, 그런 거 말고 진짜 진지한 고백이야. 결심한 지는 꽤 오래됐어.’

1년 전, 그에게 술기운을 빌려 꺼낸 내 고백을.

‘그게 내가 생각하는 쪽 고백이라면 그만둬라.’

‘……어?’

‘난 주인이 따로 있어. 그래 봤자 2주 만에 무책임하게 버리고 간 내 인생의 쌍년이지만…….’

제대로 풀어놓기도 전에 쓸모없게 만들어 버린, 그 사람 인생의 쌍년이.

의심하던 바가 사실로 확인되자, 유리의 가슴엔 거센 불길이 일었다.

그건 태오의 마음속에 번진 태양과 같은 붉은색이 아닌, 고요한 한기를 띤 시퍼런 색이었다.

나는 그가 자길 버리고 간 주인을 잊지 못한다는 걸 안 뒤로 친구 이상 욕심내 본 적이 없지만.

아니, 욕심이 나도 드러내지 못하고 처참하게 파묻고 살았지만.

상대가 너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나봄 씨, 숙소 어디예요?”

“아, 저 본부장님이랑 같은 층 3호요!”

“그럼 같이 올라가면 되겠네요.”

넌 니가 무책임하게 버리고 간 단태오를 돌아봐 줄 생각도 없잖아.

잔인하도록 눈앞에서 얼쩡거리며, 마음대로 잊지도 못하게 할 뿐.

* * *

“우드레일 회의는 항상 시간이 오래 걸리네요. 정해야 할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뒤풀이가 시작될 숙소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나봄이 곁에 선 차준에게 말했다.

차준은 그녀의 말에 깊은 공감을 표하듯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워크숍이라 안건이 더 많았을 거야.”

“아, 그렇구나. 원래 워크숍 때는 올해의 전반적인 계획을 다 세워 놓나 봐요.”

“아마도 그럴걸? 난 제대로 참석한 게 이번이 처음이라 모르겠지만.”

차준의 가벼운 대답은 잊고 있던 나봄의 궁금증을 다시 일깨웠다. 생각해 보면 차준은 굳이 현장팀의 워크숍에 참석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여긴 왜 오신 거예요? 다른 일로도 한창 바쁘실 텐데…….”

그래서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으니, 차준은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왜 왔을 것 같은데?”

“네?”

“질문을 바꿔 보자면, 누구 때문에 따라왔을까.”

그에 관한 대답은 굳이 내뱉는 게 민망할 정도로 너무나도 뻔했다.

슬슬 얼굴에 후끈 열이 오르는 것을 느낀 나봄은 그저 작은 웃음만 흘려보낼 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차준은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설레는 말을 이어 나갔다.

“아까 쪽지에 쓰여 있던 키워드, 진심으로 너야.”

“아, 그거…….”

“한시도 내 곁에서 떨어트려 놓고 싶지 않아서 여기까지 와 버렸어.”

차준의 태도는 오늘도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나비의 살랑이는 날갯짓으로 인해 파들파들 흔들리는 여린 꽃잎처럼.

나봄은 복잡한 머릿속에서 무슨 대꾸라도 꺼내 놓으려 입술을 열었다.

“저…….”

그때.

지이이잉― 지이이잉―

차준의 재킷 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폰이 전화 수신을 알렸다. 별생각 없이 휴대폰을 꺼내 든 차준의 얼굴이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자 한순간에 굳어 버렸다.

“왜 그러세요? 안 좋은 전화예요?”

“어? 아니, 본사야.”

나봄에게 거짓말까지 해 가며 숨기는 발신인은 ‘선우태준’, 차준의 친형이자 서미란 대표의 첫 번째 꼭두각시 인형.

순간 서 대표를 상대할 때와는 다른 느낌의 역한 기운이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꾸역꾸역 올라왔다.

차준은 서 대표까지도 무시해 버릴 수 있었지만, 형인 태준만큼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온 힘을 다해 휴대폰을 꽈악 쥔 차준은 전화가 끊어질 때까지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차준아, 오고 있어? 난 지금 대문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야.]

그러자 곧바로 도착한 그의 문자는 오늘도 어김없이 비참한 모양새였다.

내용을 보아하니, 서 대표는 차준이 미리 말해 둔 저녁 식사 불참 의사를 그에게 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 대표가 이러는 이유는 차준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차준이 온다고 믿는 이상 태준은 밤이 새도록 그를 기다릴 것이고, 그 불쌍한 꼴은 모두 차준의 죄책감으로 자리 잡아 버릴 테니까.

지금 서 대표는 차준의 죄책감이 무거워지길 기다리고 있다.

죄책감이 발에 묶인 족쇄처럼 무거워지고 무거워져서, 영원히 제 손바닥 안에서 움직이지 못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아…….”

차준은 나봄이 듣지 못할 작고 흐린 한숨을 내쉬었다.

띵―

그때, 마침 그들이 있는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는 무거운 문을 열어 내부를 드러냈고, 나봄은 먼저 가볍게 몸을 실었다.

“본부장님, 얼른 타세요.”

“…….”

“본부장님?”

그러나 차준은 그녀를 쉬이 따라가지 못했다.

지금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픈 손가락을 모질게 잘라 버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봄아, 난 잠깐…….”

차준은 나봄을 먼저 올려 보내기 위해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 냈다.

하지만 그 순간.

“응?”

엘리베이터 내부 조명이 한 번 불안하게 깜빡였고.

끼이이익―!

이내 소름 끼치는 쇳소리와 함께 문이 저절로 닫히기 시작했다. 그녀가 빠져나올 시간도 주지 않고 벌어진 돌발 사고였다.

“나봄아!”

“앗, 이게 왜 이러지? 나 열림 버튼 누르고 있는데!”

결국 당황하는 나봄을 가둔 채, 주먹 하나도 제대로 못 들어갈 정도로 좁은 틈새만을 남겨 두고 모든 동작을 멈춰 버린 엘리베이터 문.

고장을 알리듯 엘리베이터 조명이 빠르게 점멸하다가, 이내 어두컴컴하게 꺼져 버렸다.

“나봄아! 괜찮아?”

“차, 차준 오빠…….”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빛 한 줄기로 겨우 비친 나봄의 눈동자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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