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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남친이 내게 반했다-18화 (18/104)

18. 내가 먼저 닿고 싶어

2017.06.30.

“세상에! 어떤 놈이 축구공을……! 어머, 단 팀장님?”

“뭐? 단 팀장님이 오셨다고?”

뜻밖의 손님이 갑작스레 등장했다.

그의 존재를 쉽사리 믿을 수 없었던 팀원들은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태오를 바라보았다.

“김 대리님…… 괜찮습니까?”

오자마자 본인이 때려눕힌 김 대리의 안위부터 물어보는 이 남자는 요리 봐도 조리 봐도 누가 봐도 단태오.

같이 가자고 애걸복걸 매달려도 딱 잘라 싫다고 거절했던, 불도저급 마이웨이 단태오 팀장.

“단, 단 팀장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김 대리의 눈이 귀신이라도 본 듯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단태오가 단체 행사에 참여한 건 입사 때 오리엔테이션이 전부였다.

“드디어…… 우리 팀원들이랑 화합을 하시러 오신 겁니까?”

그래서 아픈 와중에도 감동을 담아 묻자, 태오는 머쓱했는지 애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서프라이즈 이벤트입니다.”

“와아, 살다 보니 이런 일이!”

그의 이런 모습을 본 적 없던 김 대리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그러자 다른 팀원들도 하나둘씩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 태오의 합류를 반기기 시작했다.

“잘 오셨어요! 단 팀장님!”

“올해도 팀장님이랑 못 친해지는 줄 알고 얼마나 섭섭했는데요!”

“팀장님! 우리 재미있게 놀아요!”

하지만 모두가 들뜬 분위기에서 오직 한 사람, 차준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오늘은 눈에 좀 안 띄나 했더니, 여기까지 따라온 걸 보면 오늘도 어김없이 신경을 자극할 모양인가 보다.

이미 나봄과 분위기도 좋아진 마당에,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그의 등장에 당황한 건 나봄도 마찬가지였다.

“단, 단태오? 너 안 온다고 들었는데…….”

“다시 가?”

“으, 응? 아니, 그건 아니고…….”

그녀는 딱히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애초부터 그런 건 신경 쓰지도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봄을 꼭 붙잡고 있던 차준의 손이 어느새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여기까지 내려온 목적의 절반은 이루었다.

어수선했던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태오는 넘어진 김 대리를 일으켜 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 뭐냐…… 손 잡고 달리는 거 하려는 모양인데, 제비뽑기 다시 하죠. 나 합류했으니까.”

난데없이 끼어들어 왜 이리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건지.

모두가 태오를 반기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유리만큼은 의문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단태오라는 사람은 언제나 사무적으로만 지내 오던 팀원들에게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열어 줄 사교성도, 스스로 게임에 참여할 적극성도 없었다.

“단 팀장, 너 워크숍 같은 건 절대 안 온다며 여긴 어쩐 일이야?”

그래서 태오에게 팔짱을 끼며 은근슬쩍 작은 목소리로 물으니.

“보면 몰라? 친목 다지러 왔다.”

“니가?”

더욱 탐탁지 않은 대답이 되돌아왔다. 유리의 눈에 어린 의심이 한층 더 짙어졌다.

하지만 태오는 그녀의 손을 팩 떼어 내 버리고 박수까지 짝짝 치며 게임을 진행시켰다.

“자, 빨리 제비뽑기 다시 합시다.”

“아!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뽑았고, 본부장님은 특별권한으로 파트너 선정한 거예요!”

“게임에 특별권한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가 무슨 왕권 시대도 아니고.”

그리 말하며 태오는 날카로운 시선을 차준에게 고정시켰다.

그러자 차준은 사람 좋은 미소를 입가에 퍼트리며 최대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드셨을 텐데, 단 팀장님은 첫 게임 쉬시지 그러세요.”

내 걱정해 주는 척하기는.

태오는 뒤틀리는 심사를 애써 숨긴 채 차준의 말을 받아쳤다.

“정 시간 아까우면 뒤늦게 합류한 저랑 특별권한 사용한 두 분만 다시 뽑죠. 한 명은 깍두기로 남고, 나머지 둘이 같이 뛰는 겁니다.”

거역하면 큰일 날 듯한 단태오의 단호한 태도.

김 대리는 하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이 쓴 제비뽑기 패 중에 네 장을 골라 통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분위기가 더 싸해지기 전에 서둘러 세 사람만의 제비뽑기를 진행시켰다.

“자, 자! 뜻밖의 선수가 추가된 관계로 제비뽑기를 남은 세 분만 다시 하겠습니다! 같은 숫자가 나온 사람들끼리 이인삼각 레이스 파트너가 되는 겁니다!”

순간 태오의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렸으나, 차준의 눈동자는 급속도로 차가워지고 말았다.

단순 무식한 단태오에게 더는 휩쓸리고 싶지 않은데, 그는 매끈한 도로 위 과속방지턱처럼 턱턱 걸려 들어온다.

“본부장님부터 뽑으시죠. 하하.”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아는지 모르는지.

김 대리가 차준에게 먼저 제비뽑기 통을 내밀었다.

차준은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려 미소로 화답했고, 태오에게 날 선 눈동자를 고정시킨 채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을 뽑아 들었다.

평소에도 워낙 운이 좋은 편이니 나봄과 한 팀이 될 자신은 충분히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홀로 버려진 단태오 앞에서 당당하게 나봄을 독차지하는 것뿐.

“1이 나왔네요.”

뽑은 종이를 펼쳐 본 차준이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네, 선우차준 본부장님은 1번을 뽑으셨답니다! 다음 차례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를 단태오 팀장님!”

김 대리는 불필요한 수식어를 붙여 가며 태오에게 운명의 제비뽑기 통을 넘겼다.

태오는 그런 김 대리를 노려보며 통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차준이 1번을 뽑았다고 하니, 그가 뽑아야 할 숫자는 1이 아닌 다른 숫자.

‘제발. 아무리 운이 지지리 없는 나라도 제발 이번만큼은 한 건 해 보자, 좀.’

남몰래 간절한 소원을 빌고 나서야 태오는 남은 종이 두 장 중 하나를 집었다.

맨질맨질하고 어딘지 모르게 따듯한 온기가 어려 있는 게, 지금 이 패가 나봄과 연결된 패라고 말해 주는 듯했다.

“난 이거. 이걸로 하겠습니다.”

태오는 비장한 음성과 함께 잡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차준을 향해 비웃음까지 지어 주며 당당히 자신의 패를 펼쳐 보였다.

“와! 정말 안 어울리는 조합이군요!”

태오의 숫자를 먼저 확인한 김 대리의 반응으로 봐선 다른 숫자가 분명해.

다른 사람들이 입 모아서 나랑 안 어울린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나봄 한 사람밖에 없어.

슬픈 진실은 이번만큼은 희망이었다. 그래서 단태오답지 않은 수줍은 미소까지 지어 보이려던 그때.

“단태오 팀장님도 숫자 1을 뽑았군요! 이로써 본사의 꽃미남 선우차준 본부장님과 현장팀의 모델 페이스 단태오 팀장님이 한 팀으로 뛰게 되었습니다!”

“뭐……?”

“참고로 이 파트너는 커플 레이스 다음으로 이어질 빼빼로 게임까지 같이해야 하는 거 아시죠?”

믿기지 않는 결과가 김 대리의 입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당황한 태오는 귓가에 들리는 번호를 쉬이 믿지 못하고 불쾌한 눈빛으로 종이를 확인했다.

까만색 사인펜으로 곧게 휘갈겨진 숫자는 아무리 봐도 ‘1’. 선우차준이 들고 있는 종이와 똑같은 모양으로 쓰여진 ‘1’.

“미치겠네…….”

현실을 깨달은 태오는 자신도 모르게 한탄을 내뱉었다.

그리고 불안한 시선을 그대로 차준에게 고정시키니, 만만찮게 거친 눈빛을 쏘아 보내며 차준이 물었다.

“이제…… 원하는 대로 되셨나요?”

“아…….”

“나랑 손잡는 것도 모자라서 빼빼로까지 물게 생겼네요.”

고개를 끄덕일 수도, 저을 수도 없게 된 태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차라리 나봄과 차준이 한 팀이 되었더라면 죽도록 인정하기 싫더라도 제 불운을 탓하며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선우차준과 딱 붙어 뭘 같이 해야 하는 건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고문이었다.

결국 이 상황에서 태오가 할 수 있는 건 방금 전의 적극적인 모습이 무색할 만큼 뻔뻔하게 도망치는 것뿐.

“차에 두고 온 게 생각났습니다.”

“네?”

“달리기는 여러분들끼리 하시죠.”

태오는 일방적인 작별 인사와 함께 서둘러 그들에게서 벗어났다.

순간 팀원들의 표정에는 의아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어렸으나, 차준의 미소는 더욱 더 깊어졌다.

태오가 빠졌다면 나봄은 다시 그의 파트너가 될 테니.

“단 팀장님이 빠지셨으니 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을 핑계로 대기도 전에.

“저기…… 그래도 저 깍두기 맞죠? 달리기를 너무 못해서 괜찮다면 구경만 하고 싶은데.”

가까스로 피한 달리기를 다시 해야 할까 봐 겁내는 나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시절에도 체육 수업을 질색하던 그녀였다.

그 사실을 떠올린 차준은 함께하고자 하는 욕심보다, 보드라운 그녀의 손을 잡고 싶단 마음보다, 불안해하는 그녀를 달래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커졌다.

“저도 물 좀 마시고 오겠습니다. 파트너도 사라졌으니 이번 프로그램은 쉬어야겠네요.”

그래서 태오를 따라 물러난 걸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나봄의 모습은 퍽 아쉬웠다.

그럴수록 꼴 뵈기도 싫어지는 건 모든 걸 망쳐 놓고, 무책임하게 사라져 버린 단태오였다.

하지만 사사건건 들이받는 그를 상종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차준은 끝까지 무시해 줄 작정이다.

우린 싸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단태오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 * *

동료애 상승을 위한 커플 게임이 모두 지나가고, 마지막 프로그램만이 남았을 즈음.

“단 팀장님 돌아오셨네요! 게임 거의 다 끝났는데!”

“업무 전화가 와서요.”

파트너로부터 피신해 있던 단태오가 뻔뻔하게 돌아왔다. 그런 그에게 유리는 대놓고 눈부터 흘겼다.

“넌 열심히 다 할 것처럼 굴더니 어딜 갔다 이제 와?”

“바이어랑 통화하고 왔다니까.”

“통화는 무슨. 내가 계속 전화했을 때마다 통화연결음 잘만 가더라.”

유리의 날카로운 질책에 대해선 태오도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애꿎은 곳으로 시선을 돌려 버리던 차에.

“나봄 씨, 물 마실래요?”

“아, 제가 가지고 올게요, 본부장님!”

“앉아 있어요. 내가 다녀올게.”

전보다 화기애애해진 것 같은 나봄과 차준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정말 언제 봐도 적응 안 되게 꼴사나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까처럼 달려들어 난리를 쳐 놓을 수 없었던 태오는 유리에게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둘은 언제부터 저러고 있어?”

“원래부터 사이좋았잖아. 곧 사귈 분위기던데, 뭐.”

“말이 되는 소리를……! 프로젝트가 장난이야? 누구 연애질하라고 벌려 놓은 판인 줄 알아?”

“물어봐서 사실대로 대답해 준 건데 왜 성질이야? 단 팀장, 요즘 너 정말 이상해.”

니가 저 재수 없는 선우차준의 눈웃음을 봐. 성격 안 이상해지게 생겼나.

곧바로 털어 내고 싶은 대답은 너무 속이 비칠까 봐 참았다. 대신 싱그럽게 웃고 있는 나봄의 얼굴만 서러운 마음을 가득 담아 바라보고 있자.

“단태오 팀장님! 어디 갔다가 이제 왔어요! 걱정했잖아요!”

레크리에이션 진행자 김 대리가 아까 제비뽑기 때 썼던 통을 들고 태오에게 다가왔다.

그 통에서 이미 한 번 불운을 경험했던 태오는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대꾸했다.

“그건 또 왜 내미시는 겁니까?”

“마지막 게임 시작하려구요. 여기서 키워드를 뽑아서 거기 해당되는 사람을 데리고 결승선까지 골인하는 겁니다. 대리들끼리의 피 튀기는 레이스예요.”

“피 튀기는…… 뭐요?”

“팀장님은 당연히 출전하실 거죠? 팀장님도 직함은 팀장이지만, 직위는 대리니까.”

김 대리는 의욕에 불타 말했지만 태오는 별 감흥이 없었다. 선우차준이 계속 눈에 걸리는 이상, 뭘 할 기분도 아니었고.

“안 합니다. 피 튀기는 거 싫어합니다.”

그래서 단칼에 거절하자 김 대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이왕 오신 거, 하나는 참여하지 그러세요.”

“어차피 제가 또 1등할 것 같아서 빠져 주는 게 예의인 듯싶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게 뭐예요? 또 제비뽑기 게임 하는 건가요?”

바로 그때.

물병 두 개를 손에 든 차준이 그들에게 다가와 호기심을 내비쳤다.

반응 없는 태오에게 질린 김 대리는 곧바로 차준을 향해 몸을 돌려 룰을 설명했다.

“키워드 레이스라고 해서, 키워드에 해당되는 사람을 결승점까지 데리고 오는 겁니다. 대리들끼리의 경쟁이죠.”

“키워드? 궁금한데 하나만 펼쳐 봐도 돼요?”

“아, 그러시죠. 보면 감이 오실 거예요.”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은 차준이 통 안에 손을 넣었다.

태오는 뭘 하든 좋으니 제발 내 앞에서 이러지 말라는 뜻으로, 미간에 잡힌 주름을 풀어 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랑곳 않고 종이 한 장을 뽑아 든 차준은 이내 내용을 펼쳐 읽고는 싱그러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또 뭔 꿍꿍이가 생긴 건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저도 이 레이스 참가해도 되나요? 대리는 아니지만.”

차준이 손에 들린 쪽지를 꼭 쥐며 의미심장한 대답을 꺼내 놓았다. 예리한 촉이 곤두선 태오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당연하죠! 안 그래도 여쭤 보려고 했습니다! 하하!”

허나 아무것도 모르는 김 대리는 화색이 된 얼굴로 차준의 참가를 반겼다.

“재미있겠네요.”

살랑살랑 손까지 흔들어 가며 멀어지는 걸 보니 속은 뒤틀리는데, 저 걸음을 멈출 방법은 없고.

“나봄 씨, 여기 물.”

“고맙습니다.”

“그리고 있잖아요. 이따 내 눈에 잘 보이는 데 서 있어요.”

“왜요?”

“그냥.”

그가 뽑은 키워드를 보지는 못했지만 나봄에게 하는 말을 보니 대충 알 것 같긴 하고.

그렇다면 태오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였다.

‘니가 하면 나도 한다.’

“김 대리님, 잠깐.”

태오는 떠나려는 김 대리를 붙잡아 통 안에서 종이 한 장을 뽑았다. 그러나 차준처럼 굳이 펼쳐 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무슨 키워드를 뽑았든지 간에 그가 붙잡을 사람은 한나봄 한 사람이었다.

“자자! 대리님들! 그리고 본부장님! 레이스 시작합니다! 모두 스타트라인에 서 주세요!”

이윽고 시합을 알리는 김 대리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즉시 움직이는 참가자는 총 여섯 명이었으나, 진짜 피 튀기는 경쟁을 준비하는 참가자는 단둘뿐이었다.

나봄에게 가벼운 손 인사를 건네며 스타트라인으로 향하는 선우차준과 세상을 구할 용사와 같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떼어 내는 단태오.

“단 팀장님은 흥미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잔디 구장에 나 있는 하얀 선 앞에서, 차준이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태오에게 물었다.

태오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려 노골적인 비웃음을 지어 보였고, 까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괜찮은 키워드를 뽑아서 말입니다.”

“…….”

“딱 한 명, 해당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건 차준을 도발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차준은 조금도 휘둘리지 않은 태연한 표정으로 즐거운 듯 대꾸했다.

“단태오 팀장님의 유일한 사람이라면 누군지 알 것도 같은데…….”

“그러십니까.”

“저 고등학교 때까지 육상부였어요. 단거리 전문이었으니까 긴장하는 게 좋을 거예요.”

상큼한 미소와 함께 따라온 경고성 짙은 한 마디.

태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차준을 노려보았다. 차준 역시 웃는 얼굴이 무색할 만큼 차디찬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미묘한 기류는 팀원들이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이진 않았다.

“왜 저렇게 목숨 건 것처럼 보이지……?”

오직 그들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는 나봄의 눈에만 심상찮게 비칠 뿐.

“난 가장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 데리고 와야 하는데 본부장님 손을 붙잡으면 너무 속이 보일까?”

“본부장님도 레이스 참가하시는데?”

“아, 그럼 제외! 본부장님 다음으로 인물 훤칠한 건 난데…….”

“무슨 소리야, 너보단 내가 낫지. 하하하.”

시답잖은 잡담을 주고받으며 마지막 레이스에 참전하는 대리들이 일렬로 섰다.

태오와 차준은 그중 가장 끝 라인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스타트라인에 모두 모인 다섯 명의 대리와 한 명의 본부장.

다른 사람들은 누굴 데려와야 재미있을까 고민하고 있었으나, 차준과 태오는 같은 목표를 노리고 있는 만큼 스피드가 가장 중요했다.

온 힘을 다해 달려가서 나봄의 손을 먼저 잡는 사람만이 이 싸움의 진정한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었다.

태오는 잔뜩 긴장한 시선을 그늘 아래 앉아 있는 나봄에게 두었고, 깊은 심호흡을 내쉬며 심기를 다졌다.

그때.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

“…….”

“내 키워드는 그건데…… 단 팀장님은 뭔가요?”

차준이 갑작스러운 실토를 하며 태오의 키워드를 물었다. 애초부터 키워드가 뭔지도 모르고 참가했던 태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날 선 대꾸를 했다.

“그걸 꼭 밝히고 시작해야 합니까?”

“또 오기 부리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

“단 팀장님이 말도 없이 여기까지 내려온 이유도 날 훼방 놓기 위해서가 아니었나요?”

그리 말하는 차준의 목소리엔 한기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태오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드러냈다.

“오기 부리는 거 맞고, 훼방 놓는 거 맞습니다.”

“…….”

“그러니까 무슨 키워드가 나오든 전 한나봄한테 갑니다.”

선전포고를 들은 차준의 눈동자에 거센 불이 붙었다.

이렇게 노골적인 경쟁 상대는 참 오랜만이었던지라, 그의 마음속에선 왠지 모를 희열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재미있겠네요.”

간단한 그 반응을 끝으로 차준은 멀리 떨어진 나봄을 주시했다.

태오는 그런 차준을 노려보다가, 그제야 이내 아직 보지 못한 쪽지를 남몰래 꺼내 보았다.

상종하기 싫은 사람, 전생에 원수졌던 것 같은 사람, 첫 인상이 가장 안 좋았던 사람.

아무리 부정적인 키워드가 나온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수습이 되든 안 되든, 태오는 단 1초라도 먼저 그녀에게 닿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윽고 그의 눈동자에 읽혀 들어온 가지런한 글씨는 이런 각오를 모두 헛것으로 만들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던 사람’

너무 진심과 일치해서 오히려 다가갈 수 없게 만드는 명령어.

그걸 확인한 태오의 숨이 한순간에 멎어 버렸다.

벌써부터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게…….

이대로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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