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남친이 내게 반했다-17화 (17/104)

17. 깨진 컵이라서 더 소중해

2017.06.26.

“유리 씨! 삼겹살은 냉동실에 넣어 둘까요?”

“몇 시간 뒤에 먹을 건데, 냉장고에 넣어 둬도 될 것 같아.”

“야채는 어느 박스에 있지? 통 보이질 않네.”

“아, 그거 제일 먼저 꺼내서 냉장고 야채 칸에 넣어 놨지.”

워크숍 장소인 리조트에 도착한 현장팀은 몹시 분주했다.

회의 준비조와 야외 레크리에이션 준비조, 그리고 음식 담당조 중에서 그나마 할 일이 있을 것 같은 음식 담당조를 선택한 나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회용 접시랑 수저는 한곳에 모아 둘게요.”

“손님으로 초대한 거니까 나봄 씨는 쉬고 있어도 돼요.”

“아니에요, 저도 돕고 싶어요.”

유리는 일을 거드는 나봄을 말리려 했지만 나봄으로선 뭐라도 하고 있는 쪽이 편했다.

가만히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건 어색한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만 더욱 실감나게 할 뿐이었다.

“파트장님! 큰일 났어요! 우리 쌈장 안 챙겨 왔어요!”

그때 냉장고를 정리하던 팀원 중 한 명이 아연실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바비큐 파티의 필수품인 쌈장이 빠졌다는 걸 안 유리는 제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아아! 그거 사무실 창고에 넣어 놨었는데 아무도 못 봤구나!”

“어쩌죠?”

“뭐, 하는 수 없지. 리조트 지하에 가면 마트 있을 거예요. 거기 가서 사 오자. 뭐 또 빠진 거 없는지 잘 살펴봐 주세요.”

난처한 상황을 능숙하게 정리하는 유리는 여자들의 대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쿨한 말투와 시원한 미소, 그리고 뛰어난 리더십은 모든 사람을 통솔하기에 충분했다.

‘저런 사람이니까 주변에 사람도 많은 거겠지.’

나봄은 자신과 다른 성격의 그녀를 동경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그러고선 이내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틀어 짐 정리에 열중하려던 그 순간.

“실례합니다.”

많이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나봄의 신경을 사로잡았다.

소리가 난 신발장 쪽으로 시선을 틀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서 있는 사람은 선우차준 본부장이었다.

높아도 너무 높은 상사의 등장에 음식 담당조는 순식간에 경직되어 버리고 말았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어서 오세요!”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신지…….”

팀원들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 벌떡 서서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차준은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퍼트린 채 편안히 말했다.

“너무 격식 차리지 않아도 돼요. 여긴 회사도 아니잖아요.”

“에이, 그래도…….”

“전 여러분과 재미있는 시간 보내고 싶어서 따라왔어요. 1박 2일 동안은 다른 팀원들처럼 편하게 대해 주세요.”

차준의 진심 어린 부탁은 사람들의 경직된 마음을 느슨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모두 긴장을 풀었다고 하더라도 나봄은 좀처럼 불편한 기색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에게 차준은 높으신 직장 상사이기 이전에, 애매한 관계가 되어 버린 전남친이었으니까.

“유리 씨! 쌈장 없다고 했죠? 제가 내려가서 사 올게요!”

차준이 왜 이곳을 찾아왔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나봄은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부르기 전에, 서둘러 이 공간을 벗어나기로 했다.

두 사람의 미묘한 기류를 알아채지 못한 유리는 마침 반갑다는 듯 흔쾌히 회사 카드를 내밀었다.

“그래 주면 저야 고맙죠! 부족하지 않게 넉넉히 부탁해요.”

“다른 거 또 필요한 건…….”

“아, 쌈장만 있으면 될 것 같아요.”

“네! 그럼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나봄은 그녀에게 살짝 고갤 숙이고는 신발장 쪽으로 다가섰다.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차준의 시선은 그녀에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나봄은 신경 쓰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를 스치는 순간 포근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더라도. 나른하게 흘려 나오는 숨소리가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더라도.

“잠시만 지나가겠습니다.”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나봄이 낸 목소리는 그녀답지 않게 딱딱했다.

그게 무리하는 모습이라는 걸 알고 있는 차준은 남몰래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자신을 밀어낸다 하더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기까지 따라온 이상 물러설 수는 없는 법.

차준은 살짝 굳었던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남아 있는 팀원들에게 물었다.

“혹시 지금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 사람?”

“본부장님이 사 주시는 건가요?”

“당연하죠. 이렇게 도착하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고생하는데 이 정도는 해드려야지.”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사 주신다면 맛있게 먹겠습니다!”

다행히 그들 중 차준의 호의를 거절하는 사람은 없었다.

계속 도망치기만 하는 그녀에게 이렇게라도 다가갈 건수를 만든 차준의 눈에 안도의 눈웃음이 어렸다.

.

.

.

저벅 저벅 저벅―

마트로 향하는 통로, 몇 발자국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나봄의 신경을 거슬렀다. 아까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봄을 쫓아오는 발소리는 누가 봐도 차준의 것이었다.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는 그의 존재감은 양같이 순한 나봄도 욱하게 만들었다.

은근히 멀어지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를 않으니, 다가오지 말아 달라고 대놓고 딱 잘라 얘기하는 수밖에 없잖아.

나봄은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두 발을 우뚝 멈춰 세웠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뒤따르던 차준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녀를 따라 걸음을 멈춘 차준은 이제야 자신을 봐 주는 그녀를 향해 싱긋 미소부터 지어 보였다.

바로 이 천연덕스러운 눈웃음.

이거 때문에 몇 번이고 무너질 뻔했던 나봄은 목소리에 힘을 실어 단호하게 얘기했다.

“본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잘됐네요. 나도 할 말이 있어요.”

그러자 곧바로 돌아오는 차준의 대답은 나봄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같이 대화할 생각은 없는데 차준은 그녀에게 마음 약해지는 말을 또 꺼내 놓을 모양인가 보다.

그러나 나봄은 굳게 마음먹은 대로 먼저 제 얘기를 시작했다.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우리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해선 안 될 것 같아요.”

“…….”

“한 번 깨진 컵은 또 깨지기 쉽다는 말이 있잖아요. 아무리 예전 감정이 떠오르더라도 우리 사이를 그때로 되돌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

“그러니까…… 조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회사에선 특히.”

평소엔 버릇처럼 더듬던 말이 이번엔 한 번도 꼬이지 않고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그의 앞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처럼 일렁이던 목소리도 오늘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성공적으로 끝낸 나봄은 또렷한 눈동자를 차준에게 두었다.

항상 울렁대던 그녀의 마음은 용케 태연했다.

다른 때와 달리 씁쓸하게 굳어 있는 차준의 표정을 마주하기 전까진.

“…….”

“기분…… 나쁘게 해드렸다면 죄송해요.”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나봄은 곧바로 그에게 사과를 건넸다.

누군가에게 칼같이 구는 게 어려웠던 그녀는 자신이 너무 심하게 말한 건 아닌가 걱정스러워졌다.

하지만 굳어 버린 차준의 입술 새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흐렸다.

“그래, 내가 깨트렸어…….”

“네?”

“깨트리고 나서 얼마나 많이 날 원망했는지 몰라.”

나봄에게 머물러 있던 차준의 시선이 바닥으로 힘없이 내려앉았다.

좀처럼 그녀 앞에서 보이지 않았던 모습에 나봄의 눈동자가 여리게 떨려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한텐 깨졌던 컵이라서 더 소중해. 다신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평생 손에 쥐고 내려놓지 않을 자신도 있어.”

“…….”

“그러니까 내 앞에서 그런 표정 짓지 마.”

“…….”

“널 다시 놓쳐 버릴 것 같아서…… 너무 불안해.”

이윽고 차준이 꺼내 놓는 말은 멀어지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고, 만회할 기회를 바라는 애원이었다. 불안하다는 그 감정 표현은 나봄도 놀랄 만큼 솔직했다.

그런 그에게 나봄은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굳이 기를 쓰고 수습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그가 방금 전 어렵게 보여 준 진심에 대해 마찬가지로 어렵게 고민하고 있다.

울컥 치솟는 아린 감정을 소화시킬 수 있을까.

받아들인 뒤에 남은 상처들 때문에 아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말처럼 우리의 관계가 다시 서로에게 소중해질 수 있기나 할까.

“미안해.”

“…….”

“널 떠났던 건 내 인생 최악의 실수였어.”

한 번 더 흘러나온 차준의 사과는 끝없이 반복되는 나봄의 물음표에 마침표를 찍어 주었다.

사실 그의 속마음을 엿보기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진실.

그녀는 그를 미워하지 못한다. 이건 달이 지구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절친 소라의 조언대로 아등바등 멀어져 보려 하지만 결국 그 사람의 인력에 힘없이 딸려가 버리는걸.

“하아…….”

나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선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매점…… 같이 갈래요?”

이윽고 흘러나오는 말은 조심스럽게 차준을 다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그녀의 가슴이 다시금 출입을 허락한 순간, 그제야 차준은 꽉 막혀 있던 숨을 내쉬었다.

캄캄하던 눈앞에 빛이 보였다.

그 빛만 바라보고 걸음을 옮기면 어떤 광경이 펼쳐지든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대체 E동이 어디야…….”

우드레일 워크숍이 진행되는 리조트 주차장.

태오의 까만 차는 그 넓은 곳을 몇 바퀴째 빙빙 돌고 있었다.

다른 건 다 잘하지만 길 찾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는 태오는 리조트 E동의 위치를 알려 주는 표지판 하나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상한 길로 접어들어 버린 탓에.

“아, 왜 운동장이 나와.”

지금 도착한 곳은 숙박 건물들과 가장 동떨어진 잔디 구장.

태오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이런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버리는 사이에 두 사람의 진도는 어디까지 진행되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휴대폰 내비게이션은 계속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말만 할 뿐 그들이 있는 곳을 알려 주지 않는다.

“후우…….”

이미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태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성질대로 때려치울 수는 없어서 다시 운전대를 붙잡아 보던 그 순간.

“다들 이리 와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가져가시죠!”

“와, 본부장님! 감사합니다!”

속을 박박 긁어 놓는 재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잔디 구장 쪽을 살펴보니,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현장팀원들 사이에서 가장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건 역시 선우차준 본부장이었다.

몇 발자국 뒤에서 따라 걷는 나봄 또한 상상했던 것처럼 두 뺨이 불긋불긋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태오는 불만 가득한 혼잣말을 내뱉으며 잔디 구장 근처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차 문을 열고 분에 찬 걸음을 내딛었다.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방해꾼이 없어 마냥 행복한 그들에게 모래알 같은 불편함을 선사하는 것.

얼핏 보기엔 집착처럼 보이겠지만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단태오는 한나봄을 얻고 싶은 게 아니라, 한나봄 옆에 선우차준을 두고 싶지 않은 것이었으니까.

“좋은 날 다 지나간 줄 알아라.”

태오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잔디 구장 안으로 들어섰다.

야외 레크리에이션을 하려는 모양인지, 팀원들은 프로그램 준비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태오가 기억하기로 가장 첫 번째로 할 프로그램은 두 명이서 짝을 지어 손을 잡고 달리는 ‘커플 레이스’.

아니나 다를까.

차준이 해맑게 웃으며 나봄의 손목을 잡았다.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니 아무래도 둘이 한 팀이 되어 움직일 생각인 듯했다.

분명 파트너는 제비뽑기로 정하기로 했을 텐데. 저게 바로 권력 남용이라는 건가.

순간 태오의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열 뻗치는 상황이 영화처럼 펼쳐졌다.

‘저 넘어질 것 같아요! 차준 오빠!’

‘걱정 마, 내가 꼭 끌어안아 줄게.’

‘어머! 오빠 품은 정말 따듯하네요!’

‘영원히 안겨 있어도 돼. 너라면…….’

꼭 껴안은 두 사람의 모습을 상상했을 뿐인데 태오의 분노는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지구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저 둘이 붙어 있는 꼴은 못 본다.

굳은 결심을 한 태오는 온 힘을 다해 너른 잔디 구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제비뽑기해! 제비뽑기하라고!”

그는 저 멀리서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지만,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는 현장팀원들은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사이 차준과 나봄은 레크리에이션 진행자 김 대리의 지시를 따라 레이스 시작점에 섰고, 태오의 머릿속은 온통 둘을 멈춰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뒤덮여 버렸다.

“형아! 이쪽으로 패스해!”

“알았어! 잘 받아야 돼!”

그때 마침 태오의 눈에 들어온 건 꼬마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축구공.

“자! 간다!”

태오의 반 토막만 한 아이가 제 동생에게 축구공을 넘겨주던 순간.

“응!”

그보다 더 작은 동생이 두 눈을 반짝이며 형의 공을 마중 나가던 찰나의 순간.

이성보단 본능을 따르고 있던 태오는 긴 다리를 거침없이 휘둘렀고.

“제비뽑기! 이것들아!”

뻐엉―!

뒷일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마침 제 앞으로 다가온 축구공을 팀원들이 몰려 있는 쪽으로 냅다 걷어차 버렸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는 축구공은 마치 장갑차에서 발사된 대형 포탄 같았다.

“응? 뭐 날아오는데?”

그제야 단태오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발견한 김 대리는 출발 호루라기를 불려다 말고 멈추었다.

그건 태오가 원하던 결과였으나, 사냥감을 발견한 독수리처럼 매섭게 날아간 축구공이 어째 불안한 각도로 떨어진다 싶더니.

“아악!”

결국 애꿎은 김 대리의 머리를 강타해 버린 것까지는 결코 바란 적이 없던 뜻밖의 사고였다.

머리를 붙잡고 쓰러진 김 대리를 확인한 태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머! 뭐야! 김 대리님, 괜찮으세요?!”

“세상에! 어떤 놈이 축구공을……! 어머, 단 팀장님……?”

“뭐? 단 팀장님이 오셨다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합류하고 싶었건만 요란하게 등장해 버린 지금.

“아저씨 뭐예요! 우리 공 내놔요!”

“아빠한테 이를 거야! 으아아앙!”

설상가상으로 공을 빼앗긴 아이들이 태오의 옷깃을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눈앞도 깜깜하고, 귀도 시끄럽고, 머릿속도 복잡한 이 상황은 그야말로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아, 진짜…….”

태오는 허탈한 한탄과 함께 애먼 곳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쥐구멍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는 너의 눈앞에서 완벽하게 사라질 수 있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