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단태오 주의보
2017.06.23.
나봄의 건너편에 있는 절친 채소라의 집.
회사 워크숍을 위해 여행 가방을 빌리러 온 나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소라의 어마어마한 옷들 때문이었다.
나봄은 방의 네 귀퉁이를 따라 진열된 행거를 훑어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아, 너 진짜 옷 엄청 많다.”
그러자 여행 가방을 찾기 위해 옷장을 뒤적이던 소라는 코웃음을 쳤다.
“니 옷장이 너무 초라한 건 아니고?”
“나도 나지만 넌 정말 많아. 청재킷만 해도 이게 다 몇 벌이야.”
“이런 친구 둔 덕분에 필요한 아이템 있으면 이렇게 다 빌려 가잖아. 맞아, 아니야?”
“그건 그래. 하하.”
정곡을 찔린 나봄은 소라에게 멋쩍게 웃어 보이고는 복잡한 방 한가운데 겨우 놓여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근처에 놓인 적당한 크기의 가방을 발견하곤 반갑게 소리쳤다.
“어! 찾았다! 여행 가방!”
“뭐? 저거? 에이, 저건 안 되지.”
“사이즈 적당해 보이는데 왜.”
“사이즈가 문제야? 다른 회사도 아니고 우드레일에서 주최하는 워크숍인데 명품 가방 정도는 들고 가 줘야 기가 안 죽지!”
이제 보니 넌 명품 가방을 찾고 있었구나. 단순한 여행 가방이 아니라.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나봄은 방금 전 찾은 가방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소라는 그 뒤로도 자신이 가진 가방 중 가장 예쁘고 값나가는 가방을 열심히 찾아 헤맸고, 그러다 지쳤는지 나봄에게로 홱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아니, 그나저나. 우드레일 워크숍을 니가 왜 따라가는 거야?”
“그야 오라 그러니까 가지. 대형 프로젝트도 함께 진행해야 하는 사이인데 친해져서 나쁠 거 없고…….”
“선우차준도 가?”
“아니, 차준 오빠는 아예 다른 부서야.”
“에이, 좋다 말았네.”
나봄의 대답을 들은 소라는 곧바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1박 2일의 워크숍은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썸을 타기 좋은 기회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최근 차준의 연락을 피하고 있는 나봄 입장에서는 그가 함께하지 않는 게 무엇보다 다행이었다.
회의 때 잠깐 마주쳤을 때도 숨이 멎을 것 같았는데 1박 2일이나 함께하게 된다면 분명 또 예전 감정에 휘둘릴 게 뻔했다.
‘지금 내가 별것도 아닌 일로 오버하고 있는 걸까?’
요즘들어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는 고민이 다시 떠올라 버린 나봄은 슬슬 소라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옷장을 뒤적이느라 여념이 없는 틈을 타 은근슬쩍 제 얘기를 꺼내 놓았다.
“있잖아, 소라야. 이건 아는 사람 얘긴데…….”
“니 얘기구만.”
눈치 빠른 지지배.
“내 얘기 아니야! 요즘에 친해진 회사 언니 얘기야!”
나봄은 순간 뜨끔했지만 두 손까지 저어 가며 발뺌을 했다. 최고의 의리녀로 소문난 소라는 나봄의 일에 관해서라면 팔이 무조건 안으로 굽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남의 얘기처럼 얘기해서 객관적인 판단을 듣는 수밖에.
나봄은 작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고, 조심스럽게 본론을 시작했다.
“그 언니랑 잘되어 가는 남자가 있는데, 얼마 전에 데이트를 한 모양이더라구.”
“응.”
“근데 데이트 때 남자가 잠깐 회사 좀 다녀오겠다면서 자리를 비웠나 봐. 그래서 그 언니는 두 시간 넘게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정도로 오래 걸릴 일인데 무턱대고 기다리라고 했단 말이야? 진짜 이기적인 놈이네.”
소라의 톡 쏘는 멘트는 나봄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직 가장 중요한 사건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잔뜩 좁혀진 그녀의 미간은 이미 탐탁지 않아 보였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나봄은 훨씬 작아진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어, 뭐…… 근데 알고 보니까 그 남자가 회사를 간 게 아니라 맞선을 보러 나간 거였더라구.”
“뭐어?! 미쳤나!”
“아! 자기가 좋아서 나간 건 아니고! 집안에서 억지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억지로……!”
“자의였냐 타의였냐가 중요해?! 여자를 물 먹인 거 아니야!”
예상했던 대로 소라의 언성이 버럭 높아졌다. 나봄은 마치 자신이 혼나는 것처럼 양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데이트 날 집안일 끌어들이는 남자는 볼 것도 없어! 게다가 얼마나 개념 없는 집안이면 맞선을 강압적으로 내보내냐!”
“그, 그렇지?”
“그런 집에 시집가면 평생 시댁 간섭에 휘둘리면서 살아야 할걸? 등 떠밀었다고 해서 순순히 나가는 꼴을 보니까 남자가 중재해 주기는 글러 먹었다.”
소라 입에서 쏟아져 나온 험담은 하나같이 맞는 소리였다. 그래서 더 듣고 있기에 마음 아픈 말들이기도 했고.
소라는 쐐기를 박듯, 나봄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가서 그 언니한테 똑똑히 전해. 팔자 망치고 싶지 않으면 당장 헤어지라고.”
“사귀는 사이는 아니야…….”
“그럼 더 잘됐네. 끝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상종을 안 하면 되니까.”
상종을 안 한다라…….
정말 그래야 하는 걸까. 10년 동안 그리워만 하다가 겨우 다시 만난 사람이잖아.
게다가 협력 업체 회사 윗사람이라서, 이렇게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 안 될 것 같은데…….
“찾았다! 내 사랑 루이비똥!”
나봄이 남모를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소라가 구석에 처박혀 있던 귀하디귀한 가방을 꺼냈다.
그리고는 언제 인상을 구겼었냐는 듯 마냥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여기! 내 가방도 빌려줬으니까 당당하게 다녀와. 알았지?”
“기 안 죽어.”
“너 신경 거슬리게 하는 사람 있으면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 말고 들이받아 버려! 알았어?!”
소라는 순하디순한 나봄이 걱정인지 재차 주의를 주었다.
나봄은 그런 그녀를 위해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을 꺼내 놓으려 했지만, 정작 신경 거슬리게 하는 사람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입술이 굳어 버렸다.
계속 그를 피해 다닐 수는 없을 텐데 아예 상종을 안 해야 한다니.
걱정이 태산이다, 정말.
* * *
“자, 가방 이리 주세요! 버스 밑에 집어넣게!”
“동수 씨, 음료수 챙겼어요?”
“네네, 맨 앞자리에 올려 놨습니다.”
40인승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는 몹시 분주한 분위기였다.
놓쳐 버린 지하철 때문에 출발 시간이 다 되어서야 회사 앞에 도착한 나봄은 허둥지둥 버스 앞으로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사과부터 건네는 그녀는 어젯밤 당당하게 굴라는 소라의 충고가 무색할 만큼 긴장한 상태였다.
그런 나봄을 위해 버스 트렁크 앞에서 바삐 짐을 싣고 있던 김 대리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안 오는 줄 알고 놀랐잖아요. 가방 실어 줄게요. 이리 줘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저…… 가시는 동안 드시라고 집에서 쿠키를 구워 왔는데…….”
“세상에나, 이런 거 준비 안 해도 먹을 거 많은데!”
김 대리는 나봄이 쭈뼛거리며 건네는 쿠키 상자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서글서글한 그의 눈웃음은 언제 봐도 사람이 좋아 보여서, 나봄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듯했다.
그래서 움츠려 있던 어깨도 풀어 내고 싱긋 웃어 보이니.
“어! 한나봄 씨!”
뒤편에서부터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환히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오피스 가구 파트장 유리였다.
“안녕하세요! 유리 씨!”
“우리랑 워크숍 같이 간다면서요? 태오도 없는데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단 팀장님이랑 사적으로 친한 사이는 아니거든요.”
“그래요? 하긴, 뭐. 나봄 씨는 그분이 잘 챙겨 주실 테니까.”
“그분…… 이요?”
“먼저 들어가 있어요. 저는 챙겨야 할 게 더 있어서.”
무언가 휙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유리는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고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려 버렸다.
단태오도 불참인 마당에 날 챙겨 줄 사람은 더 이상 없을 텐데, 혹시 성격 좋은 김 대리님을 말하는 건가?
의아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유리를 지켜보던 나봄은 슬그머니 버스 안으로 몸을 실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멍하니 서 있기 민망해서였다.
“안녕하세요. 기사님.”
버스에 오르자마자 나이가 지긋한 기사에게 공손히 인사부터 하고, 수많은 빈자리 중에서 가장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을 중간 자리에 자리를 잡고.
나봄은 차창 밖으로 물끄러미 눈길을 두었다. 시야에 가득 차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낯설어서 그녀는 습관적으로 불편해졌다.
이렇게나 어색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게 싫어서 대학 때도 MT는 가지 않았는데, 어색한 것도 모자라 어렵기까지 한 업체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으려나.
그렇게 홀로 멍하니 앉아 이젠 부질없어진 걱정만 하고 있는데.
“저…… 옆자리에 앉아도 돼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제 생각에 집중하고 있던 나봄은 재빨리 정신을 다잡고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네, 얼마든지…….”
하지만 얼굴을 확인한 순간 말끝은 대책 없이 흐려지고 말았다.
따듯한 봄바람을 머금은 듯한 미소, 너무 달콤해서 녹아 버릴 것 같은 눈빛, 햇볕에 잘 말린 수건처럼 포근한 향기.
휘어지는 눈매를 따라 장난스럽게 움직이는 눈물점까지 아름다운 그대가 바로 내 눈앞에 있었으니.
“차준…… 오빠?”
나봄은 보고도 믿기지 않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차준은 의자를 붙잡은 채 얼굴을 더 가까이했고, 은은한 웃음기를 머금은 입술을 움직였다.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마음 아프게 안 할 테니까…….”
“…….”
“한번만 더 나봄 씨 옆자리에 앉게 해 주세요.”
여우를 닮은 차준의 눈망울은 오늘따라 안아 달라 애원하는 강아지 같았다.
그런 그를 마주하고 있는 나봄은 지난밤 굳게 먹었던 마음이 전부 허물어져 버리는 듯했다.
나봄은 애써 이성을 다잡기 위해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안 돼. 또 휘둘리면.’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심장은 왜 이리 조여드는지.
차준은 오늘도 어김없이 그녀를 쥐고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나봄은 숨조차 편히 쉴 수가 없다.
“자자, 모두 빠르게 자리에 앉아 주세요! 조금 있으면 출근 시간이라 차 막힙니다!”
때마침 터져 나온 김 대리의 외침과 함께, 짐을 모두 실은 직원들이 하나둘 버스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덕분에 더 이상 통로를 가로막고 서 있을 수 없게 된 차준은 나봄이 아직 허락하지 않은 옆자리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진짜 이렇게 넘어가 버리면 안 되는데…….
생각과 달리 나봄의 손은 곁에 앉은 차준을 밀어내지 못했다.
그사이 버스의 빈 좌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나봄의 심정도 모르고 재잘대기 시작했고.
“여러분! 출발하기 전에 잠깐 이쪽 좀 봐 주세요! 단체 사진 찍을게요!”
“네! 필터 예쁜 걸로 찍어 주세요!”
“저는 눈 좀 크게 보정 부탁해요!”
“하하, 그래 봤자 호박이 수박 될 일은 없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기어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얼굴로 차준만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사진기에 담아 버렸다.
아무리 세상만사가 내 맘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정말 정도가 너무 심한 것 같다.
선우차준과 관련된 일이라면 단 하나도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잖아.
* * *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차분한 무채색 톤으로 꾸며진 태오의 침실에 요란한 알람 소리가 울렸다.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태오는 오만 가지 인상을 쓴 채 손을 더듬거렸고, 손에 붙잡힌 알람 시계를 부술 기세로 내리쳤다.
띠리……!
한순간에 찾아온 고요.
하지만 태오는 하루를 시작해야만 했다.
비록 다른 직원들은 모두 워크숍을 떠났다고 하더라도, 그는 회사에 남은 잔업을 모두 처리하겠다는 조건하에 불참할 수 있었던 거니까.
“으으…….”
신음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 태오는 지난밤 놓아두었던 물부터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리고는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들어 제 앞으로 도착한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현장팀을 총괄하고 있는 만큼 외부 업체와도 교류가 잦은 태오의 첫 스케줄이었다.
다행히 간밤 새에 별일은 없었고, 오늘 주문한 목재들도 무사히 도착할 듯했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출근을 해야 할 때.
태오는 메시지 창을 껐다. 그리고 휴대폰을 다시 침대 위에 내려놓으려 하는데.
‘김민구님이 새로운 사진 1장을 추가했습니다.’
김 대리 SNS의 업데이트 소식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평소엔 누가 뭘 올리든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 태오였지만, 오늘은 어쩐지 호기심이 일었다.
“아, 출발은 잘했나.”
태오는 감흥 없는 손가락을 무의식적으로 움직여 그의 게시글을 클릭했다.
유독 크게 나온 김 대리의 얼굴과 즐겁게 웃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 그리고 맨 앞자리 좌석을 차지하고 있는 무지막지한 간식들.
겉보기엔 지극히 평범한 팀원들의 단체 사진이었으나.
“뭐야…….”
중간쯤에 스포트라이트라도 받은 것처럼 확 눈에 띄는 두 얼굴이 태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믿기지는 않지만, 믿을 수도 없지만.
익숙해도 너무 익숙한 그들은 특유의 재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선우차준과 그런 그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봄이었다.
“저기가 어디라고 감히…….”
돌아가는 상황을 깨달은 태오의 얼굴에 한순간 분노가 드리워졌다.
대체 이들이 왜 이 사진에 끼어 있는 건지. 왜 자연스럽게 같이 붙어 앉아 있는 건지.
태오는 전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아! 돌아버리겠네! 진짜!”
사나운 짐승처럼 소리친 태오는 휴대폰을 냅다 집어 던지고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는 성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제 방을 빠져나가, 부엌 식탁에 놓여 있던 차키를 거칠게 집어 들었다.
그의 두 눈에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질투심과 분노.
그건 꼭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듯이 거셌으나, 한편 이를 모른 채 리조트에 내리고 있던 나봄은 오직 차준에게만 온 신경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여기서는 본부장님이라고 부를게요. 본부장님도 저를 사적으로 대하진 말아 주세요.”
“…….”
“보, 본부장님?”
“……어?”
“혹시 기분 나쁘셨어요?”
“아니 아니, 갑자기 한기가 돌아서.”
물론 평소에도 쓸데없이 촉이 좋은 차준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할게. 대신 이제 나 미워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미워하는 건 아니었는데…….”
“거짓말. 나 그저께도 니가 쌀쌀맞게 등 돌려 버려서 얼마나 속상했는데.”
그마저도 눈앞에 있는 나봄 때문에 금세 찰나의 의아함으로 넘겨 버렸다.
바야흐로 어마 무시한 폭풍을 불러올 단태오 사태, 3시간 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