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너 누군가한테 진심이었던 적 없지?
2017.06.19.
우드레일 본사 옥상정원에 유달리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워낙 높은 건물이라 평소에도 온도가 서늘하긴 했지만, 오늘은 옥상정원 흡연 구역에서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두 남자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차준은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들었고, 조용히 불을 붙였다.
필터를 빨아들이는 순간 그의 눈동자는 태오에게 흘긋 향했으나, 태오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만만찮게 날이 선 시선으로 차준을 마주하고 있을 뿐.
“내가 신경 쓰여요?”
그런 태오에게 차준이 나른한 목소리로 가장 먼저 꺼낸 질문은 도발이었다. 태오는 입술 새로 실웃음을 터트렸고,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래 보입니까?”
“네, 나 신경 쓰느라 애꿎은 사람 난처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 얘기를 본부장님이 꺼낼 입장은 아니죠. 애꿎은 사람 데이트랍시고 불렀다가 난처한 상황에 빠트린 게 누군데.”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태오의 기는 역시나 거칠고 드셌다.
이런 그의 성격은 호불호가 많이 갈렸지만, 차준은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래야 나도 속 시원하게 할 말 안 할 말 다 내던질 수 있잖아.
차준은 눈꼬리를 둥글게 휘어 눈웃음을 지었고, 조곤조곤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날 일을 왜 단 팀장님이 나무라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굳이 따지자면 완벽한 제삼자잖아요.”
그건 잔인하리만큼 가차 없이 정곡을 노리는 말이었다. 차준의 말대로 태오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사사로운 문제까지 신경 쓰고 살았다면 애초부터 그들의 데이트 장소에 들이닥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다.
나봄을 짝사랑한 9년 동안 질리도록 해 온 건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는 일이었던지라, 이제 와서 새삼 상처받을 것도 없다.
태오는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올려 노골적인 비웃음을 건넸다.
“그러니까 제삼자까지 끼어들어서 수습할 일을 왜 만드셨습니까.”
“…….”
“신경 꺼 달라는 얘기는 피해자나 할 수 있는 말이지, 가해자가 할 소린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날을 세운 태오의 말에 차준의 온도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물론 계속 웃는 낯을 유지한 덕분에 대놓고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차준은 곧바로 받아치는 대신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들이며 태오를 살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눈동자, 물불 가리지 않고 물어뜯는 성질머리, 쉽사리 진정될 것 같지 않은 거친 분위기.
단태오가 가진 특성들은 신경 쓸 게 오직 제 마음밖에 없는 평탄한 삶이기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런 그와 달리 내 인생이 맞나 싶을 정도로 복잡한 삶을 살고 있는 차준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구는 태오가 우습기만 했다.
나도 나만 조심하면 되는 문제였으면 좋겠어. 내 감정만 쫓아다니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잖아.’
순간 차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건, 힘없이 앉아 있는 휠체어 위의 뒷모습이었다.
볼 때마다 비참한 그 꼴은 숨 막히는 감옥에서 탈출한 사람이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불행하게 느껴졌다.
그러니 이젠 도망칠 생각조차 접어 버린 차준은 제게 주어진 현실도, 놓치고 싶지 않은 인연도 모조리 붙잡고 있어야만 했다.
막중한 무게감에 온몸이 부서지더라도. 겨우 무뎌진 마음에 고통이 피어난다 해도.
차준은 매캐한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닫아 두었던 입술을 열었다.
“난 단태오 씨가 우습게 볼 인연이 아니에요.”
“저도 그렇습니다.”
“아니요, 그쪽과는 완전히 다르죠. 태오 씨는 할 수 있는 게 오기로 매달리는 것밖에 없잖아요.”
“…….”
또 다시 현실을 꼬집는 차준의 표정은 이전과 다르게 웃음기가 없었다. 노골적인 차준의 경고에 여유롭던 태오의 입꼬리는 딱딱해졌다.
하지만 그런 태오의 분위기와 상관없이, 차준은 태오가 절대 참지 못할 말을 서슴없이 이어 붙였다.
“아무리 천성이 이기적이더라도 가끔은 매달고 있는 사람 입장도 생각해 줘요. 내가 본 나봄이는 단 팀장님이 어렵고 불편해서 못 견디겠는 모양이던데…….”
“…….”
“원치 않는 감정을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아요?”
원치 않는 감정.
9년이나 매달려 온 태오의 마음에 대한 차준의 정의는 지독히도 냉정했다. 태오는 순간 관자놀이에서부터 뜨거운 열이 솟구쳤지만 반박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허나 이제 시작이라는 듯, 차준은 잔혹한 독설을 이어 나갔다.
“말이 좋아 짝사랑이지, 상대방 입장에서 보면 부담이고 민폐예요. 그러니까 괜한 짓하지 말고 혼자 만든 감정은 혼자 정리해요.”
“…….”
“계속 바라보다 보면 언젠가는 나를 발견해 주겠지, 하는 그거. 현실하고 동떨어진 질병 수준의 망상이잖아.”
휘말리지 말아야지 생각을 하면서도, 차준이 그 말을 건네는 순간 며칠 전 내 모습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오늘 붙잡아 줘서 고마워. 차에 치여 죽을 뻔했는데.’
‘이것저것 안 물어봐준 것도 고맙고…….’
‘잘 가, 회사에서 보자.’
처음으로 건네진 그녀의 따듯한 작별 인사에, 어쩌면 가까워진 걸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은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건 대체 왜일까.
태오는 한동안 입술을 꾹 닫은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차준은 그런 태오를 바라보다가 아직 조금밖에 태우지 않은 장초를 지져 껐고, 휴지통 안에 꽁초를 던져 넣으며 마무리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내 얘긴 다 끝났으니까 먼저 일어날게요.”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은 당당했다. 앞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걸음도 흐트러진 기색 없이 정갈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과 정반대로 태오의 눈빛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흡연 구역을 벗어나려는 차준을 매섭게 노려보았고, 이내 살벌하고 거친 목소리를 내뱉었다.
“너…….”
“…….”
“누군가를 진심으로 원해 본 적 없지.”
다시 태오 쪽으로 돌아선 차준의 눈빛에 당혹감이 어렸다.
이만하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논점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걸 보면 여간 고집스러운 성격이 아닌 게 분명했다.
차준은 태오의 미련을 보다 제대로 잘라 놓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태오는 그가 입을 떼어 낼 틈도 주지 않고 뒷말을 이어 나갔다.
“한나봄 포함해서, 간절하게 바라봤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구나. 그러니까 내 꼴이 매달리는 걸로 보이지.”
태오의 말은 차준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한나봄에게만큼은 확실한 진심이었던 차준은 태오의 평가가 억지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나 태오는 고집을 부리듯 발악하는 게 아닌, 단호하고 또렷한 목소리를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내뱉었다.
“나는 매달리는 게 아니야. 못 헤어 나오는 거지.”
“…….”
“그 사람한테 내 마음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 그 사람 마음을 강요하는 중이고, 내가 바라는 건 그 사람이 나를 돌아봐 주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그 사람한테서 돌아서는 거야.”
“…….”
“정말 간절히 원하는 사람한테는 절대 내가 무언가를 요구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어. 그것도 모르는 넌 이런 얘기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말을 마친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그러져 있는 그의 눈빛은 분노보다는 절망이 가득해 보였다.
차준은 그런 태오를 가만히 바라보았고, 어떤 대답을 하는 대신 옅은 숨을 내쉬었다.
“사적인 얘기라 무례하게 말씀드린 점,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
“다음 회의 때 뵙겠습니다.”
태오는 사무적인 인사를 끝으로 지친 걸음을 옮겼다.
차준은 다가오는 그를 물끄러미 주시하다가 그가 제 어깨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살짝 몸을 틀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그의 뒷모습은 승자처럼 보이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패잔병 같지도 않았다.
굳이 정확히 표현해 보자면 구천을 떠도는 지박령.
그래, 딱 지박령과 같은 당신의 처지는 확실히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신경 써야 할 존재인 것은 분명했다.
오늘 내게 털어놓은 당신의 진심을 그 사람에게도 말한다면, 그 진심 어린 절절함에 아무리 감정이 없던 그녀라도 마음이 흔들리고 말 테니.
“하아…….”
차준의 입술 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답답함과 혼란이 뒤섞인 한숨은 평소보다 씁쓸했다.
이렇게 일을 키워 놔서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생겨 버린 미묘한 감정의 균열을 이제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모르겠다.
홧김에 상대가 누군지도 살펴보지 않고 무턱대고 터트려 버린 마음.
그래서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내 마음은 나조차도 모르겠다.
그냥 모든 게 다 뒤죽박죽 엉켜 버린 기분이다.
* * *
“꽤 오래 걸리네…….”
우드레일 본사 로비.
오고 가는 사람들이 한 눈에 보이는 자리에서 나봄은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바로 심상찮은 기운으로 사라진 선우차준과 단태오였다.
‘나봄아, 오늘 수고했어. 나중에 연락할게. 꼭 받아.’
비록 회의실을 빠져나가며 인사하던 차준은 그리 어두운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를 따라 나서던 태오였다.
눈빛이 아주 이글이글한 것이 꼭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 같았지.
나봄은 그 두 사람 중 하나라도 무탈하게 빠져나오는 걸 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회의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본사를 떠나지 못한 채 로비를 서성이고 있는데.
“어! 한나봄 씨!”
한 남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나봄은 곧바로 그에게 시선을 두었다.
손까지 휘휘 저으며 반갑게 달려오는 사람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낯선 얼굴이었다.
나봄은 당황감 가득한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네, 저 맞는데 누구신지…….”
“저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유통팀 김민구 대리라고 합니다! 저번 주에 회사 오셨을 때 나봄 씨가 부순 주차 팻말, 그거 제가 치웠는데 기억 못 하시는 구나!”
안 그래도 심란한 와중에 본의 아니게 신세를 진 사람이 나타나다니.
“아아! 이제 기억나요! 그때는 괜한 일거리 만들어드려 정말 죄송했습니다!”
한순간에 난처해진 나봄은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성격 좋은 김 대리는 목젖이 보이도록 호탕하게 웃었고, 특유의 넉살 좋은 말투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오늘 정기 회의 때문에 왔죠? 지금 끝난 거예요?”
“아니요, 끝난 지는 삼십 분쯤 됐는데 일이 좀 있어서요.”
“단 팀장님은요? 같이 있지 않았나요?”
“같이 있었긴 했는데…….”
선우차준 본부장님이랑 한바탕 물고 뜯고 싸울 기세로 옥상에 올라갔어요.
라는 말을 쉽게 꺼내 놓아도 될까. 업무적인 일 때문에 그러는지, 사적인 일 때문에 그러는지도 잘 모르는데.
나봄은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김 대리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는지 곧바로 다른 주제로 돌렸다.
“마침 잘 만났네요. 안 그래도 단 팀장님한테 나봄 씨 연락처 물어봤는데, 전화를 안 받아서 말이죠.”
“제 연락처는 왜…….”
“아, 다름이 아니라 이번 주 수요일에 회사에서 1박 2일로 워크숍을 가는데 별 스케줄 없으시면 같이 가요. 업무 회의도 할 겸.”
“우드레일 워크숍을요?”
“네, 긴장은 하지 마요. 우리는 워크숍 가면 대학교 MT처럼 정신없이 노는 분위기니까.”
대학교 때도 MT는 가 본 적이 없는데, 그런 데서 정신없이 노는 건 어떻게 노는 거지.
그의 제안이 갑작스러웠던 나봄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끼어도 되는 자리인지 모르겠어요. 숙소도 인원수에 맞춰서 예약해 놓으셨을 텐데.”
그건 혹시나 무리해서 그녀를 집어넣는 거라면 그걸 빌미로 거절하기 위한 밑밥이었다.
그러나 김 대리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호탕하게 말했다.
“인원수라면 걱정하지 마요! 일부러 넉넉하게 예약해 놓은 데다가, 비협조적인 단태오 팀장까지 빠져서 나봄 씨 들어올 자리는 충분해요!”
단태오가 안 간다고?
비록 그는 나봄의 유일한 아는 얼굴이긴 했지만, 불참 소식이 더욱 반갑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난 주말에 그를 조금 다시 보게 된 사건이 있었다고 해도, 아직은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보다도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였으니까.
“그럼 갈게요. 시간은 괜찮을 것 같아요.”
나봄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김 대리에게 대답했다.
김 대리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고, 메고 있던 백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주었다.
“이건 워크숍 일정표니까 집합 장소나 시간 같은 거 참고해요. 혹시 그날 한나봄 팀장님한테 일 시킬지도 모르니까, 우리랑 같이 워크숍 간다고 본사에 말해 놓을게요.”
“네, 감사합니다.”
“장담하는데 진짜 재미있을 거예요. 아마 내년에 워크숍 또 오고 싶어서 프로젝트 하나 더 같이 하자 그럴걸요?”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나봄은 동의하는 것처럼 하하 웃었다.
바로 그때.
“어, 단 팀장이다.”
김 대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린 태오를 발견하고는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나봄은 김 대리가 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성큼성큼 로비로 나오는 그를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잔뜩 일그러진 미간, 활활 타오르는 눈빛, 그리고 불만 가득해 보이는 꾹 깨문 입술.
대충 훑어봐도 지금 등장한 단태오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살벌했다.
그로써 차준과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직감한 나봄은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하지만 막 한 발을 떼어 내기 직전.
“와아, 단태오 오늘 완전 열 받아 있네. 개미 한 마리도 무사하질 못하겠구만.”
김 대리가 별 뜻 없이 중얼거린 한 마디가 나봄의 걸음을 붙들어 놓았다.
평소에도 컨디션이 딱히 좋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저 상태는 그보다 더 심각한 모양이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켜 넘긴 나봄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저거…… 많이 화난 건가요?”
그러자 곧바로 튀어나온 김 대리의 대답은 지나치게 솔직했다.
“화난 거라기보단 재앙에 가깝지.”
“재, 재앙이요?”
“일 년에 한두 번쯤 밖에서 개 같은 경우를 맞이했을 때 저런 상태가 되는데, 그땐 무조건 피하는 게 상책이에요. 괜히 말 걸었다가는 다다다다 쏘여서 벌집 된다니까요.”
“아아…….”
그 말을 들은 나봄은 앞으로 내딛으려던 걸음을 뒤로 옮겼다.
그리고는 태오가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서둘러 김 대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엄청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러세요? 단 팀장님이랑 따로 말씀하실 건 없으시고요?”
“예, 굳이 오늘 안 해도 될 것 같네요.”
“뭐, 지금 분위기로 봐선 그게 현명한 선택이긴 하죠.”
김 대리는 떠나려는 그녀를 붙잡지 않고 순순히 보내 주었다.
나봄은 위험을 미리 귀띔해 준 그에게 고마움을 담아 꾸벅 고개를 숙였고, 맹수를 피해 도망치는 산토끼처럼 총총총 정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로비에 있던 김 대리를 발견한 태오는 성난 걸음을 그에게로 틀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그의 살기는 김 대리가 그동안 느껴 왔던 것들 중에서도 제일 거셌다.
그래서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온 태오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자.
“단태오 대리…… 아니, 단 팀장. 워크숍 말인데 진짜 참석 안 할 건지…….”
훽―
내리꽂힌 그의 사나운 눈빛은 김 대리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머지않아 흘러나오는 낮은 목소리는 귀가 아닌 머릿속에 다이렉트로 꽂혀 들어왔다.
“불참한다고 몇 번이나 더 말씀 드려야 되겠습니까.”
“아, 아…….”
“그날 회사에 처박혀서 잔업이나 할 테니까 제 이름 명단에 넣지 마십쇼.”
그 살벌한 기세에 눌린 김 대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서둘러 그가 원하는 대답을 빠르게 꺼내 놓았다.
“아, 알겠습니다. 절대 넣지 않도록 하죠.”
그제야 김 대리를 잡아먹을 듯 했던 태오의 사나운 눈동자는 다른 곳으로 벗어났고, 그의 발걸음은 매정히 정문 쪽으로 떨어졌다.
“이따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아, 예! 단 팀장님!”
그래도 마무리 멘트 정도는 붙여 주는 걸 보니 다행히 김 대리에게 불똥이 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분명 단태오는 김 대리보다 6개월이나 늦게 들어온 후임인데, 어째서 느껴지는 포스는 회장님급으로 드센 건지.
하지만 그 감당하기 힘든 성격이 저보다 빠른 태오의 승진을 순순히 납득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어차피 단태오 같은 스타일은 차라리 위로 모시고 있는 게, 밑에 두는 것보다 편했다.
김 대리는 태오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남몰래 한숨을 돌렸다.
“휴우, 잡아먹히는 줄 알았네…….”
대체 오늘 얼마나 개 같은 일이 있었던 건지.
거의 끝난 프로젝트 물먹었을 때에도 저렇게 날 서 있지는 않았는데, 오늘은 곧 폭발할 활화산처럼 펄펄 끓는다.
한동안은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임직원 모두가 그의 앞에서 몸을 사려야 할 것 같다.
* * *
“아, 끝났다…….”
늦은 시간까지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차준이 뻐근한 눈을 마사지하며 지친 목소리를 냈다.
오늘 태오와 거친 대화를 나눈 이후 심란함을 떨치고자 일에만 매달렸던 그는 점심 저녁도 거른 채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처리해야 할 일도 없으니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두 손을 뻗어 기지개까지 켠 차준은 회사 서버에서 로그아웃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접속창을 켰다.
그러나 로그아웃 버튼보다 한발 앞서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 옆에 뜬 메일 도착 알림이었다.
미뤄 두었던 업무 메일까지 싹 읽고 답신한 게 겨우 십 분 전 일이건만, 그새 도착한 새로운 일거리는 그를 쉽사리 책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평소 같았으면 보고도 못 본 척 넘겨 버렸을 테지만 오늘의 차준은 집중할 거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미 정점을 찍은 피로감도 무시한 채 방금 전 도착한 따끈따끈한 메일을 여니.
[안녕하세요.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김민구 대리입니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첫 마디가 차준의 심기를 건드렸다.
애써 지워 낸 그의 존재감이 다시 짙어지자 온화하던 차준의 미간엔 살짝 구김이 갔다.
차준은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김 대리가 보낸 메일을 읽어 내려갔다.
[금주 수요일, 목요일 1박 2일에 걸쳐 진행되는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워크샵에 수정 사항이 있어 보고 드립니다. 추가 참여 인원과 사정상 변경된 일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짧게 적힌 내용은 단순한 워크숍 보고였고, 최종적으로 결정된 일정 계획표도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그건 모두 ‘Lily’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차준이 당연히 보고 받아야 하는 것들이었지만, 사실 차준이 큰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흥미 없는 눈빛으로 마지막 줄까지 쓰윽 훑어 내려 가는데.
[함께 ‘Lily’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한봄 도어락의 한나봄 팀장도 워크숍에 참여할 예정이니, 이 점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끝부분에 적힌 그 한마디가 차준의 온 신경을 사로잡았다.
“나봄이가……?”
그들이 어디로 가든, 누가 더 참여하든, 딱히 알 바는 아니지만 새롭게 추가된 인원이 그녀라면 얘기가 달랐다.
김 대리가 보낸 메일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차준은 달력으로 시선을 옮겼고, 수요일 저녁에 잡혀 있는 본가에서의 저녁 식사 스케줄을 확인했다.
더 가치 있는 쪽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구역질 나는 감옥이 아닌 간절한 그녀의 곁으로, 차준은 망설임 없이 떠날 생각이었다.
이번엔 피치 못할 사정조차 생길 일 없게, 예고도 않고 훌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