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다음엔 겁먹지 말고 다가와.
2017.06.12.
“하루에 맞선 두 개 보는 건 조금 예의가 아니다. 내가 애프터 신청하면 어쩌려고.”
맞선녀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전해들은 나봄이 떨리는 눈빛으로 차준을 바라보았다.
들은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그녀는 차준에게 해명을 바라는 중이었다.
하지만 차마 아니라고 할 수도, 그렇다고 해서 그렇다고 인정을 할 수도 없었던 차준은 싸늘한 시선을 맞선녀에게 고정시켰다.
“뭐하는 짓이야.”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나온 낮은 목소리에, 맞선녀의 입술 새로 노골적인 비웃음이 터졌다.
“어머, 무서워라. 차준 씨 제법 성깔 있는 남자였구나?”
“그 여자가 시켰어?”
“인사를 누가 시켜서 하나? 그냥 보이니까 하는 거지.”
여자의 눈동자가 차준에게서 떨어져 나봄을 향했다.
자신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시선에 당황한 나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맞선녀는 그 모습에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뼈 있는 한 마디를 툭 내던졌다.
“어디서 주제도 모르고…….”
날벼락처럼 떨어진 비난은 나봄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놓였는지 영문도 모르는 그녀는 혼란이 가득한 눈동자만 파르르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나봄을 확인한 맞선녀는 제 할 일을 끝마쳤다 생각했는지, 스포츠카에 시동을 걸고 부웅― 사라졌다.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던 나봄은 차준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오…… 빠?”
그녀의 떨리는 한 마디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차준은 마른침을 삼키며 목소리를 정리했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 냈다.
“아…….”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옅은 신음.
“미안해…….”
그리고 날벼락처럼 갑작스레 펼쳐진 전개를 모두 인정하는 듯한 사과 한 마디.
나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번엔 가슴이 설렘으로 물들어서가 아닌, 혼란스러운 감정을 어떻게든 가라앉혀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차준이 흘려보내는 해명은 유리 조각처럼 아픈 기억 하나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원래 정해져 있던 스케줄은 아니었어. 집안에서 강제적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그래, 바로 이 멘트. 10년 전에도 들었었다.
‘한국을 떠나야 할 것 같아, 나봄아.’
‘오빠…….’
‘미안해…….’
‘미안하면…… 정말 나한테 미안하면 안 떠나면 되잖아.’
영원할 거라 믿고 있던 첫사랑이 막을 내리던 순간, 용기를 내 인연을 붙잡으려 했던 내게 돌아온 당신의 한 마디가 오늘과 같았다.
‘집안에서 강제적으로 출국 날짜를 잡아 버렸어.’
‘…….’
‘내일 새벽 비행기야. 나한테는 어떻게 해 볼 시간도 없어…….’
감히 원망하기도 미안할 만큼 지쳐 있던 당신의 눈빛까지도 지금과 비슷하다.
“오빠.”
나봄은 보다 차분해진 음성으로 차준을 불렀다.
한순간에 달라진 그녀의 분위기는 차준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번에도…… 어떻게 해 볼 시간이 없었겠네요.”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차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말이었다.
무기력하게 그 한 마디를 내뱉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시시때때로 덮쳐 오는 지독한 죄책감과 후회 속에서 고통을 삼켜 왔으니까.
“나봄아, 난…….”
“저는 이만 가 볼게요. 회사에서 봬요.”
차준은 무슨 해명이라도 해보려 했지만 나봄은 그에게 어떤 시간도 주지 않고 등을 돌렸다.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은 감히 손을 뻗을 수도 없을 만큼 단호했다.
차준은 고개만 푹 떨군 채, 멀어지는 그녀의 발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이대로 놓치는 걸까.’
하지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 깨달았다.
긴 시간을 돌아 겨우 다시 잡은 인연의 끈은 여기에서 놓아 버리기엔 너무나도 절실하다는걸.
차준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멀어진 길을 따라 발걸음을 움직였다.
10년 전엔 너무 어리고 무기력해서 너의 손을 놓쳐 버렸을지 몰라도,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르다. 나는 너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낼 각오가 되어 있다.
차준은 필사적인 자신의 마음만큼 점점 더 걸음을 빨리했다.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그의 시선 끝에 걸려 들어온 나봄의 등은 작고 유약했다.
그는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그녀의 이름을 힘주어 불렀다.
“나봄……!”
그러나 끝까지 또렷한 목소리로 소리치지는 못했다.
“한나봄! 거기 서!”
차준보다 반 박자 먼저 그녀를 목 놓아 부른.
“빨간불이잖아! 멈추라고!”
“이거 놔……!”
“못 놔! 신호 바뀔 때까진!”
차준이 바라는 그 손을 망설임 없이 단번에 붙잡아 버린.
“단태오…… 팀장?”
뜻밖의 불청객, 단태오 때문에.
.
.
.
“정신 나갔냐! 눈 감고 다녀?!”
태오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겁이 많은 나봄은 자신이 큰 소리 칠 때마다 무서워한다는 걸 알지만, 너무 놀란 마음에 어쩔 수 없이 튀어나와 버린 버릇이었다.
나봄은 그런 그를 일렁이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꾸욱 눈을 감았다.
그건 주책맞게 나오려는 눈물을 참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태오의 눈엔 이미 엉엉 울고 있는 사람보다 더 서럽게 비칠 뿐이었다.
그제야 번뜩 이성이 돌아온 태오는 부서져라 붙잡고 있던 나봄의 손을 놓아주었다.
“아, 아파?”
“…….”
“그러니까 누가 신호도 안 보고 막 달려가래?”
항상 본의 아니게 나봄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태오는 이번에도 고의가 없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대뜸 그녀를 나무랐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는 단순히 손목 문제가 아닌 듯 보였다.
먼발치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태오는 얼핏 짐작이 가는 이유를 조심스럽게 입에 담았다.
“아까 갑자기 끼어든 그 여자가 뭐라고 하디?”
“…….”
“아니면 선우차준이 너한테 뭔 짓 했어?”
분명 이 중에는 정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봄의 고개는 힘없이 도리도리.
태오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더욱 짙어졌다.
자신과는 일상적인 대화도 꺼려 하는 나봄이 속 이야기를 꺼내 놓을 리는 만무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울먹이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태오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 보려 고개를 숙였다.
“한나봄…….”
순간 푹 떨구어져 있던 나봄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펑펑 울기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막상 마주한 그녀의 눈가는 그렁그렁하게 젖어 있을 뿐 용케 눈물을 떨어트리지는 않았다.
“……나 때문에 그래.”
“뭐?”
“너무 쉽게 그 사람이 돌아왔다고 믿어 버린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내용은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으나, 나봄이 서럽게 입에 담는 그 사람이 선우차준이라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돌아왔다’라는 단어로 짐작해 보건대, 그는 한때나마 나봄의 곁에 머물러 있던 사람인 모양이었다.
하긴, 선우차준이 ‘데이트’니 뭐니 해 가며 은근슬쩍 내비치던 나봄과의 관계도 꼭 연인이었던 것처럼 들리긴 했었지.
‘그렇게 나한테 있는 티 없는 티 다 내 놓고,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 놔?’
순간적으로 뒤틀리는 감정은 언젠가 선우차준에게는 꺼내 놓을 수 있어도, 나봄에게는 절대 꺼내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깊은 심호흡을 하며 원망을 잠재워 놓고, 나봄을 진정시키려던 찰나.
저벅―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성보다 본능으로 기척의 주인을 알아챈 태오의 눈동자에 한순간 날이 섰다.
태오는 나봄이 혹시나 고개를 들세라 서둘러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그 사람이었다.
멀어질 때는 그녀를 붙잡아 주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그녀 곁에 멈춰 서자마자 경고하듯 찾아온 선우차준.
평소의 웃음기를 잃어버린 차준의 눈동자가 태오를 응시했다. 태오는 그 시선을 마주하는 대신 싸늘하게 끌어 내린 차준의 입술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편, 차준은 그런 태오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녀부터 붙잡기로 했다.
그래서 짧은 고민 끝에 살며시 입술을 떼어 내자.
“나봄……”
“나봄아.”
흐리게 새어 나온 그의 목소리를 태오의 단호한 음성이 덮어 버렸다. 그리고 차준 앞에서 보란 듯이 나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가자.”
“어, 어? 어딜?”
“데이트.”
“뭐……?”
단태오의 도발적인 발언은 차준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나봄과의 사이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선까지 존재하면서 뒷일을 어떻게 수습하려고 저러는 건지.
차준은 질투에 눈이 멀어 폭주하는 태오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놀란 건 갑작스럽게 태오의 품에 붙잡혀 버린 나봄도 마찬가지였다.
“데이트라니! 내가 너랑 왜!”
아니나 다를까. 어깨를 감싼 태오의 팔을 뿌리치며 나봄이 힘주어 소리를 쳤다.
그건 차준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었다.
태오 앞에선 한순간도 편히 있었던 적 없는 그녀는 곧바로 억센 그의 품을 떠나 내가 서 있는 뒤편을 돌아볼 것이다.
하지만 나봄이 고개를 들어 차준의 존재를 확인하기도 전에.
“왜. 개나 소나 다 하는데 나만 못 하는 이유라도 있어?”
단호하게 이어진 태오의 말이 그녀를 멈춰 버리게 만들었다.
당혹스러움뿐이었던 나봄의 눈동자에 서서히 혼란이 물들기 시작했다.
“……뭐?”
“난 적어도 내 사람 버리고 어디 가진 않아.”
날카로운 태오의 그 한 마디는 저격하고 있는 상대가 너무나도 분명했다.
덕분에 등 뒤의 인기척을 느끼기 시작한 나봄의 눈빛이 눈에 띄게 일렁였다.
의식한 순간부터 더욱 짙게 스며드는 그 사람의 포근한 향기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녀의 눈시울을 뜨겁게 달구어 버린다.
나봄은 더 이상 차준의 앞에서 우스운 꼴이 되고 싶지 않아, 일부러 고개를 다시 푹 떨어트렸다.
하지만 그렇게 굳어 버린 그녀에게 태오는 또 한 번 손을 내밀었다.
“가자.”
나봄의 손목을 휘어 감는 낯선 온기.
그러나 나봄은 어쩐지 예전처럼 불편하거나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솜털처럼 부드럽던 그 사람의 숨소리보다도 상냥하게 다가올 뿐.
태오는 움츠러들어 있는 나봄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지금껏 그의 곁에 머무는 걸 지독히도 싫어했던 나봄이었으나, 이번만큼은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누굴 위한 고집인지. 무엇을 감춰 주기 위해서인지.
가장 잘 아는 건 그녀 자신이었다.
그러니 지금 단태오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간절하게 붙들어서라도, 혼자 힘으로는 뿌리치지 못할 그를 떠나올 수밖에.
* * *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적이는 강남역 근처.
“너 집이 어디야. 택시 잡아 줄게.”
데이트를 가자며, 나봄을 박력 있게 끌고 온 태오가 그녀를 놓아준 곳은 겨우 택시 승강장이었다.
안하무인인 태오의 성격을 잘 아는 만큼, 그에게 끌려다닐 각오를 하고 있던 나봄은 뜻밖의 깔끔한 마무리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 집?”
“당연히 너희 집이지, 우리 집으로 갈래?”
“아, 아니…… 그건 아니고…….”
분명 차준과 헤어지고 난 뒤에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는데.
태오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차준의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핀잔을 주거나 약을 올리는 일도 없었다.
그건 나봄이 알던 단태오와는 어울리지 않게 배려심 넘치는 모습이었으나, 그녀에게는 그의 이면을 곱씹을 여유가 부족했다.
“괜찮아, 나는 지하철 타고 가면 돼.”
그래서 늘 그렇듯 손사래까지 쳐 가며 태오의 호의를 거절하자,
“주말 지하철은 사람 많아서 앉을 자리도 없잖아.”
“아…… 그럼 서서 가면 되지!”
“그냥 택시 타고 가. 택시비는 내가 내줄 테니까.”
태오는 그녀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휴대폰을 꺼내 콜택시를 부를 준비를 했다.
역시나 제멋대로인 성격이 어디 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모습이 전처럼 불편하게 느껴지진 않았던 나봄은 짧은 망설임 끝에 자신의 사는 곳을 알려 주었다.
“나는…… 화곡역까지만 가면 돼.”
“내가 찾아갈까봐 그래? 역 말고 집 주소 불러.”
“그런 게 아니라 주택가라 택시 왔다 갔다 하기 힘들어서 그래.”
“알았어, 그럼.”
그러자 순순히 목적지를 입력하는 태오는 오늘도 미간을 잔뜩 구긴 상태였다.
나봄이 평소에 가장 많이 보는 사나운 표정은 이제 보니 딱히 심기가 불편해서 짓는 게 아니라, 뜻하지 않게 튀어나오는 버릇인 듯했다.
눈썹에 있는 흉터 때문일까. 아니면 매섭게 올라간 눈꼬리 때문일까.
조금만 표정이 안 좋아도 남들보다 몇 배는 험악해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목구비는 그래도 앳되게 생긴 편인데도.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어, 어?”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
나봄의 노골적인 시선이 어색했던 태오는 혹시나 얼굴이 빨개져 버릴까 싶어 일부로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자 나봄은 토끼처럼 동그란 눈동자를 서둘러 다른 곳으로 옮겨 두었고, 낯가리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너도 참 안 변했구나 싶어서.”
순간 태오의 신경이 바짝 예민해졌다.
5년 전, 나봄과 좋지 않은 마무리를 지었던 태오에겐 그때와 안 변했다는 소리가 어쩐지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왔다.
하지만 나봄은 그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뜻밖의 얘기를 이어 나갔다.
“잊고 있었어. 너한테 생각지도 못한 친절한 구석이 있었다는걸…….”
태오에게 칭찬을 건네는 나봄은 지금 아주 오랜만에 그와의 좋은 기억 하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건 바로 범접할 수 없는 포스 때문에 쉽게 가까워지지 못했던 단태오가 먼저 다가와 도움의 손길을 내어 주었던 순간이었다.
‘밤늦게 여기서 뭐해.’
‘어? 아…… 기말 과제. 서랍장 도안 만드는 거.’
‘너 혼자?’
‘그게…….’
‘다른 애들은 또 내뺐냐?’
눈 붙일 시간도 없이 바쁜 기말고사 기간.
각양각색의 이유를 대며 기말 과제를 내팽개쳐 둔 팀원들 탓에 홀로 추운 실기실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던 나봄에게 태오는 특유의 쌀쌀맞은 표정으로 관심을 보였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에 자릴 잡고 앉아, 혼자 끝내기엔 버거운 과제를 말없이 도와주기 시작했다.
‘치수 불러. 내가 표시할게.’
‘아니야, 너도 기말고사 공부하러 왔을 텐데 너 할 일 해.’
‘난 이거 진작 끝냈다. 한 놈도 못 도망가게 다 붙잡아 놓고 하면 넉넉잡아 일주일이면 끝나.’
그때도 태오는 괜찮다고 사양하는 나봄을 무시한 채 멋대로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닳을 대로 닳아 버린 나봄의 연필을 뺏어 들고, 넓은 도안에 스윽 스윽 선을 긋던 그의 모습은 제 일처럼 열심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나봄의 기억에 더욱 따스하게 자리 잡은 건, 잡담조차 하지 않고 도안 그리는 데 집중하던 그가 툭 내뱉은 한 마디였다.
‘여기 문고리 니가 디자인한 거야?’
‘어? 어, 왜? 이상해?’
‘아니, 예뻐서.’
애를 쓰고 만든 도안 위로 내려앉은 예쁘다는 짧은 칭찬.
그 말을 들었을 땐 차가운 실기실의 온도도, 서먹한 단태오와의 분위기도 아무 상관없을 만큼 기뻤었다.
그래서 그녀는 태오와 잡담을 나눌 만큼 친하지 않다는 사실도 잊은 채, 문고리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들을 늘어놓았던 것 같다.
다시 떠올려 봐도 단태오와의 인연을 통 틀어 그 순간이 가장 편안하고 즐거웠다.
지금까지도 그녀의 시시콜콜한 수다를 말없이 들어 주던 그때의 단태오에게 살짝 고마움이 남아 있을 만큼.
“택시 도착했다.”
나봄이 추억에 빠져 있는 동안, 차마 그녀의 칭찬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던 태오는 가까워지는 콜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를 집 근처까지 실어 줄 택시는 천천히 그들 앞에 멈춰 섰고, 태오는 아직 정리 안 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얼른 타고 가.”
짧은 인사를 내뱉는 표정은 살짝 구겨져 있었으나, 어쩐지 딱히 기분 나빠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나봄은 짧은 숨을 들이마신 뒤, 눈앞에 있는 불편한 남자 단태오에게 진심 어린 고마움을 표했다.
“오늘 붙잡아 줘서 고마워. 차에 치여 죽을 뻔했는데.”
“…….”
“이것저것 안 물어봐준 것도 고맙고…….”
이 순간, 태오의 눈에 비친 나봄은 그동안 보아 왔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처음으로 눈썹을 구기지 않고, 처음으로 어깨를 움츠리지도 않고. 그녀는 그저 웃음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고 있다.
아마 지금 너의 모습이 다시 만난 이후로 가장 따듯한 모습일 거야. 적어도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래.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던 태오는 그럴싸한 대답을 찾아 머릿속을 헤집었다.
하지만 집중하면 할수록 구겨지는 그의 미간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사나워 보였다.
그러나 어쩐지 그런 그의 표정도 무섭지 않아진 나봄은 택시에 오르기 전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잘 가, 회사에서 보자.”
드디어 그녀가 나에게도 또 보자고 말해 줬다. 다시는 안 볼 듯이 얼른 가라고 내쫓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이 평범한 인사를 간절히 원해 왔던 태오는 순간 목이 메어 와,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너도 잘 가. 그리고 다음번에 나한테 올 땐 겁먹지 말고 다가와.’
누군가에겐 평범할지 몰라도 그에게는 꿈만 같은 일.
오늘따라 이뤄질 수도 있을 것 같은 소망을 담아 보는 태오의 눈빛이 옅게 일렁였다.
어쩌면, 오늘 우리는 남남보다 멀었던 사이에서 남들만큼은 되는 사이까지 조금 더 가까워진 걸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