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위기와 기회의 차이
2017.06.09.
입소문과 달리 무섭지도 않고 기분만 더러운 영화였다. 쓸모없는 피 칠갑에 과장된 칼부림으로 얼룩진 B급 영화 중에 B급 공포 영화였다.
그래서 상영관을 빠져나왔을 때의 태오의 표정은 전보다 더 살벌해져 있었다.
역시 공포 영화는 찝찝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절대 앞자리 커플이 무서운 장면이 나올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자기야’를 외치며 껴안아서 화가 난 것이 아니다.
태오는 하나도 먹지 않은 팝콘을 쓰레기통에 던지듯 내버리고 영화관 로비로 빠져나왔다.
들어올 때도 북적이던 영화관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온 사람들로 더욱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태오는 오직 영화관 입구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느린 발걸음을 움직였다.
하지만 온 신경이 예민해져 있어서 그런지, 별 게 다 거슬리기 시작했다.
방금 최악의 경험을 선물해 준 영화 ‘죽음의 병원’ 포스터, 지나치게 짜기만 했던 팝콘 냄새, 눈치도 없이 하하호호 웃는 커플들.
그리고……
“하아, 두 시간도 더 지났는데 왜 안 오지…….”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난 한나봄.
제법 가까운 거리에 멍하니 앉아서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단태오의 닿지 못할 그녀.
태오의 걸음이 한순간에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쿵쿵 잘만 뛰던 심장도 단번에 내려앉아 버렸다.
“한나봄…….”
오늘도 여전히 내 목소리에는 반응을 하지 않지만.
“한나봄이 왜 여기…….”
너는 오늘도 여전히 내 시선 끝에 걸려 있구나. 애써 떨어트려 놓은 관심이 무색하게끔.
그녀를 발견한 태오는 자동적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곳은 그들의 데이트 장소이니만큼 나봄이 여기 있다는 건 차준도 근처에 있을 거라는 걸 뜻했다.
태오는 나봄이 앉아 있는 영화관 카페테리아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다행히 휴대폰에 집중하고 있던 나봄은 카운터 앞에 선 태오를 발견하지 못했다.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아무 거나 바로 나올 수 있는 거 주세요.”
“바로 나올 수 있는 음료라면 콜라, 아이스티……”
“콜라요, 콜라.”
오늘 대체 몇 잔째인 콜라인지.
그런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성질이 급한 태오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넨 뒤, 점원이 내미는 콜라를 그대로 낚아채 들고 왔다.
“손님, 여기 거스름돈이요!”
“쉬잇, 괜찮습니다.”
태오는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하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은밀하게 구석 자리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은밀한 시선으로 나봄을 살펴보았다.
누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입었는지 뻔히 알 것 같은 귀여운 원피스, 오늘따라 너무 예뻐서 더욱 질투 나는 화장, 그리고 가만히 앉아 있기가 지루한지 까딱까딱 흔들리는 발끝까지.
그녀는 오늘도 참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태오는 그 앞에 자신이 없다는 사실이 몹시 부아가 치밀었다.
태오는 재수 없는 선우차준 본부장이 앉았었을 그녀의 맞은편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의자는 한 번도 빼진 적 없던 것처럼 잘 정리되어 있었고, 그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봄의 테이블에 있는 음료수도 그녀가 홀짝이는 라떼 한 잔이 전부였다.
“그놈은 쟤 혼자 놔두고 어딜 간 거야…….”
태오는 의아한 눈빛으로 카페테리아 바깥쪽을 살폈다.
영화관을 빽빽이 메운 사람들 중 선우차준과는 닮은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봄도 밖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넋 놓고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는 화장실이나 흡연실 같은 가까운 곳으로 간 게 아닌 모양이었다.
상황이 거기까지 파악된 이상 계속 이렇게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는 태오는 멀찍이 떨어져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나봄에게로 다가갔다.
오직 차준의 연락을 기다리는 데 온 신경을 쏟아붓고 있던 나봄은 태오가 제법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왔을 때도 눈치를 못 채고 있다가.
“너 여기서 뭐하냐?”
까칠한 목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까만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엄마야!”
“아, 놀래라. 왜 사람을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고 그래.”
“단태오 니가 여긴 어쩐 일이야?”
나봄은 예상치 못한 태오의 등장이 당황스러웠는지, 살짝 미간을 구긴 채 물었다.
그 반응은 결코 환영하는 기색이 아니었으나, 그녀의 이런 대접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태오는 그녀의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으며 대답했다.
“영화관에 영화 보러 왔지, 뭐하러 왔겠어.”
“너희 집 여기 근처야?”
“그것까진 알려 주기 싫고. 너는 여기서 혼자 뭐하는데.”
어느새 품고 있던 마음은 흔적도 없이 감춰 버린 태오가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봄은 그런 그를 흘끗흘끗 바라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나는…… 선우차준 본부장님 기다려.”
“데이트?”
“나도 그것까진 알려 주기 싫거든?”
일단 발뺌부터 하고 보는 나봄은 누가 봐도 정곡을 찔린 표정이었다. 태오는 그런 그녀를 향해 픽, 비웃음을 흘렸다.
“꼴을 보니까 바람 맞았네.”
차준을 기다린 지 어언 두 시간 반째.
나봄도 그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으나 저 막돼먹은 단태오에게 그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넌 왜 내 자리에 앉아? 곧 차준 오빠 올 거니까 다른 데로 가.”
그래서 뾰족한 날을 세운 채 태오에게 말하니, 태오는 일어서긴커녕 캔 콜라를 따며 느긋이 대답했다.
“남의 영업장에 니 자리 내 자리가 어디 있어. 시간도 많은데 선우차준 오나 안 오나 확인하고 갈게.”
“뭐? 니가 왜?”
“그냥. 진짜 소박맞은 거면 혼자서 여기 나가기 창피할 거 아니냐.”
아, 정말. 단태오 진짜 짜증나.
순간적으로 울컥한 나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반응에 태오는 심히 머쓱해졌으나 애먼 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애써 외면했다.
나봄은 그런 그를 한동안 째려보다가 이내 화내기에도 지쳤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빤 금방 온다고 했어. 그러니까 빨리 그거 마시고 돌아가.”
이어지는 그녀의 대답엔 오기가 더 많이 섞여 있었다. 그건 오기만으로 이 자리에 붙어 있는 태오가 가장 잘 알았다.
태오는 별 대답을 하지 않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벌써 여덟시 반. 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진 한 시간 반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 열 시에 문 닫는다.”
태오는 여기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 별 악의 없이 말했다.
하지만 그 얘기가 곱게 들릴 리 없는 나봄의 눈빛은 다시 까칠해졌다.
역시나 단태오와는 전생에 철천지원수 사이라도 됐었나 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쉬는 날까지 찾아와서 내 심기를 들쑤셔 놓을 리가 없잖아.
* * *
“사업에는 별 흥미 없어요. 저는 자유로운 삶이 좋거든요.”
“…….”
“하지만 가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보고 싶기도 해요. 특히 전 학구열이 높은 편인데…….”
차준은 벌써 두 시간째 맞선녀의 수다를 들어 주고 있었다.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한 그녀 때문에 금방 돌아가겠다고 했던 나봄과의 약속을 본의 아니게 어겨 버린 지금.
차준은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지는 그녀의 말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매너 있는 마무리고 뭐고, 나는 당장 내 사람에게로 돌아가야겠다.
“아, 그리고 저는……”
“그만.”
“네?”
“그만하고 일어나죠. 우리.”
차준은 또 다른 화젯거리를 꺼내려던 그녀의 말을 멈춰 두고 지갑을 챙겨 들었다.
갑작스러운 마무리에 당황한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가시는 건가요?”
“네, 문제 있나요?”
“별로 기분 좋지 않은 마무리네요. 아직 한창 대화 중이었는데.”
빈정이 상한 여자는 불쾌한 기색을 표했다. 그러나 차준은 매정하리만큼 솔직한 대답을 했다.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연설이었죠. 저는 여기 앉은 이래로 계속 듣고만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사람이 말하는 중이었잖아요.”
“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말씀을 끝내실 기미가 안 보이길래.”
그 말끝에 싱긋, 따라오는 눈웃음은 상대방의 심기를 긁기에 충분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화했던 맞선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하지만 차준은 그걸 보고서도 못 본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저벅저벅 멀어지는 그의 발걸음엔 일말의 미련조차 없었다.
그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봐야 하는 여자는 황당하다 못해 분노가 치밀 지경이었다.
나봄이 보았다면 깜짝 놀랄 정도로 냉정한 태도였으나, 이것이 선우차준의 본성이었다.
한때는 그에게도 사람들 사이에서 즐겁게 웃고 떠들 만큼 여유로운 시기가 있었지만, 형을 대신해 우드레일 후계자로 지명된 이후로 삭막한 삶에 길들여져 버렸다.
그래서 쓸데없는 사람은 단칼에 쳐 내고, 구미가 당기지 않는 제안은 들은 적도 없던 것처럼 무시해 버리고.
그렇게 10년을 지내다 보니 인간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더라. 이제 어지간한 사람에게는 정을 주지도, 주는 정을 받지도 못하겠더라.
그런 차준이 제 품을 허락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한나봄이 유일했다.
그녀를 보면 예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 없던 여유도 생겨나는 듯했고, 잊고 지냈던 감정들도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차준은 메마른 세계에 떨어진 동아줄 같은 그녀에게 향하기 위해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어차피 서 대표와 약속한 시간은 채우고도 남았으니 이렇게 사라진다고 해서 문제는 되지 않을 터였다.
“하, 뭐 저런 새끼가…….”
하지만 홀로 남은 맞선녀는 수치스러움을 참을 수 없었다.
원래 선 자리라는 게 형식적이고 딱딱한 자리이긴 하지만 그녀 생에 저렇게 무례한 남자는 처음이었다.
여자는 인상을 잔뜩 쓴 채 무릎 위에 놓여 있던 토트백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냉수나 한 잔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어머, 저런 버릇없는 녀석을 봤나.”
뒤편에서부터 익숙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서미란 대표였다.
사실 그녀가 이곳에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맞선녀는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서 대표님, 아무리 원치 않았던 자리라고 해도 태도가 너무 불쾌하네요. 내가 어디에서 이런 대접 받을 위치는 아닌데.”
그러자 서 대표는 가식적인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인정해요. 아무리 제 아들이라지만 시종일관 딱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게 정말 무례하더군요.”
그녀가 직접 편을 들어준다고 해도 이미 다 늦어 버린 일이었다.
더 이상 차준과는 상종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한 여자는 긴 말 않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짜증 섞인 표정으로 의자에서 일어나던 순간.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난처하게 만들어 볼래요?”
서 대표가 웃으며 꺼내 놓은 제안은 뜻밖이었다. 출구 쪽으로 틀어졌던 여자의 눈동자가 다시 서 대표에게로 향했다.
“난처하게 만들다니요?”
“내가 그렇게나 부탁을 했는데, 어렵게 만든 자리를 이런 식으로 깽판 쳐 놓은 게 괘씸해서 말이에요.”
“…….”
“저 녀석이 지금 어디 가는지 알고 있어요. 가서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해 주지 않겠어요?”
서 대표의 눈빛에 서린 독한 기운은 이 제안이 단순한 혼내기용은 아니라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고작 집안에서 만들어 놓은 맞선 자리에 나온 것뿐인 여자는 딱히 서 대표의 꿍꿍이에 장단 맞춰 줄 필요가 없었으나.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연설이었죠.’
‘아무리 기다려도 말씀을 끝내실 기미가 안 보이길래.’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우월함 가득한 미소를 띤 선우차준이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것이 그녀가 대단한 집안에서 세뇌 당하다시피 교육받아 온 삶의 방식이었다.
“그럴 기회를 준다면야 거절할 이유가 없죠.”
여자의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서 대표는 빨간 립스틱이 선명한 입꼬리를 좀 더 비틀어 올렸다.
그리고 입고 있던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실장, 한나봄 위치 보고해.”
혹시나 차준이 그녀의 계획에서 벗어날 때를 대비에 심어 둔 덫.
―현재 오후에 갔던 영화관 카페테리아에 그대로 앉아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데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군요.
원하는 정보를 얻은 순간, 곧 덫에 걸려 옴짝달싹하지 못할 처지가 될 차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러니 평소에 엄마 말 잘 들으라고 했거늘.
언제나 괜한 반항은 더 큰 시련을 불러오기 마련이었다.
* * *
영화관 카페테리아 마감 30분 전.
[나봄아, 늦어서 미안해.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까 5분만 기다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지가 도착했다. 자그마치 세 시간 반 만에 온 그의 연락이었다.
휴대폰을 확인한 나봄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답장을 보냈다.
[제가 나갈게요! 건물 앞에서 만나요!]
그리고 나선 재빠른 손놀림으로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녀의 얼굴엔 순식간에 화색이 감돌았으나, 맞은편에 앉은 태오의 얼굴엔 순식간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왔냐?”
“왔냐, 라니. 회사 상사한테.”
“위대하신 선우차준 본부장님이 드디어 이쪽으로 행차하셨습니까.”
“그래, 왔어. 그러니까 비꼬지 말고 이제 얼른 가.”
나봄은 일그러진 태오의 시선을 보고도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건 태오 속을 제대로 뒤집어 놓는 태도였으나, 대놓고 불만을 드러낼 자격은 없었다. 사실 이 자리에 계속 앉아 있던 것도 태오로서는 주제 넘는 행동이었다.
“그래. 가지 마라고 해도 간다.”
태오는 불쑥 튀어나오려는 짜증을 애써 묻어 둔 채 나봄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 발자국 뒤에서 조용히 걸음을 옮기며 바라본 그녀의 모습은 지금까지 중에서도 가장 들떠 보였다.
속도 없는 가시나. 하염없이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던 시간이 화나지도 않나.
그 불만스러운 마음을 알 리 없는 나봄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가뿐히 몸을 돌렸다.
“그럼 우리 월요일 날 회사에서……”
“나도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거든.”
하지만 태오는 그녀가 인사를 끝마치기도 전에 삐딱하게 대꾸했다.
갑자기 뾰족해진 그의 가시는 나봄이 느끼기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 그래?”
“나가자마자 나는 내 갈 길 갈 거니까 지레 겁먹지 마.”
“아, 뭐…… 알았어.”
딱히 겁을 먹은 건 아니었지만, 단태오가 계속 따라다닐까 봐 걱정하긴 했던 나봄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띵―
때마침 종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무거운 문이 양 옆으로 열리며 내부를 드러내자, 태오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느리게 몸을 실었다.
나봄은 그런 태오를 따라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고, 태오와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에 자릴 잡고 멈춰 섰다.
오늘도 좁혀지지 못한 그녀와의 거리감.
그걸 육안으로 확인한 태오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원하던 대로 기어이 한나봄을 찾아내긴 했지만 별다른 수확도 없이 돌아가는 지금, 태오는 엉킬 대로 엉켜 버린 그녀와의 관계만 더욱 실감해 버린 참이었다.
태오는 어떤 인사를 해야 그나마 좋게 헤어질 수 있을까 열심히 고민했다.
허나 눈치 없는 엘리베이터는 왜 이리도 빠르게 1층에 도착하는지.
또 한 번 띵― 알람 벨이 울리고, 엘리베이터는 속절없이 불편해하는 그녀에게 출구를 드러냈다. 자연스러운 마무리 대화를 시도해 볼 시간도 없었다.
‘나가기 전에 인사를 또 해야 하나?’
어색한 태오와의 마무리를 고민하는 건 나봄도 마찬가지였다.
미련 없는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간 나봄은 비상구 앞에서 잠시 문을 열기를 망설였다.
이미 잘 가라는 인사는 몇 번이나 시도했던 것 같은데, 그때마다 돌아온 그의 반응은 별로 탐탁지 않았다.
‘그래도 월요일 날 또 봐야 하는 사람이니, 마무리는 잘 맺는 편이 좋겠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나봄은 비상구 문을 열기 전, 작별 인사를 위한 가식적인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크흠!”
순간 태오의 난데없는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엄마야!”
조용하던 공간에서 튀어나온 소음에 깜짝 놀란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만 비상구 문을 열고 도망치듯 빠져나와 버렸다.
그 모습은 마치 잠자는 늑대의 움찔거림에 혼비백산이 되어 달아나는 토끼가 따로 없었다.
왜 자꾸 단태오 근처에만 있으면 나도 모르게 경직되어 버리는 건지.
나봄은 태오를 상대로 지나치게 겁을 먹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이건 일하는 동안 두고두고 문제가 될 안건이었으나, 차차 시간을 들여 그에게 적응해 보기로 했다.
지금은 드디어 돌아온 차준에게 달려가기도 바쁜 시간이니까.
“나봄아!”
마침 영화관 건물 정문 근처에서 차준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벤츠 한 대가 그녀 눈에 띄었다.
나봄은 싱그러운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그에게 다가갔다.
“오빠!”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엔 미안함이 가득 어려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봄이 근처로 오기가 무섭게 운전석에서 내린 차준은 두 손까지 모아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다.
“나봄아, 내가 너무 늦었지? 정말 미안해. 업무 처리가 생각보다 늦어져서…….”
“아니에요! 별로 안 기다렸어요! 카페에서 재밌게 놀았는걸요!”
“그래도 혼자 심심했을 거 아니야.”
“아, 맞은편에서 단태……”
……오가 성질 긁어 준 덕분에 심심할 새도 없었어요.
라는 대답은 툭 내던져지기 전에 가까스로 막아 낼 수 있었다.
비록 차준이 잠시 떠났다고 해도 엄연히 그와 데이트 중이었는데, 단태오의 존재가 불쑥 등장하는 건 이상하게 들릴 것 같아서였다.
“맞은편?”
“마, 맞은편에 커플들이 싸우고 있어서 그거 보느라 지루할 새가 없었어요. 하하.”
나봄은 시작해 둔 말문을 거짓말로 대충 수습한 뒤 민망한 웃음을 흘려보냈다.
그녀의 구김살 없는 표정을 보고 있던 차준의 뺨에 홍조가 어렸다.
그에게 분명 화가 날 법도 한데, 다그치기는커녕 웃으며 반겨 주는 그녀의 존재는 역시 오늘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남은 시간 동안이라도 그녀를 즐겁게 해 주겠다고 결심한 차준은 특유의 장난기 어린 눈웃음을 지었다.
“우리 야경 보러 갈까? 한강 근처에 전망 좋은…….‘
그리고선 막 다음 계획을 꺼내 놓던 찰나.
빵빵―!
시끄러운 클랙슨 소리가 차준의 차 뒤쪽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놀란 두 사람의 눈동자가 향한 곳에 서 있는 건, 처음 보는 파란 스포츠 카 한 대였다.
나봄과 차준은 그저 놀라기만 한 눈동자로 스포츠카를 주시했다.
하지만 이윽고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고 한 여자의 얼굴이 등장하자.
“아.”
차준의 입술 새로 낮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를 보며 웃고 있는 그녀는 어떻게 이곳을 알고 따라왔는지도 모를 오늘의 맞선녀였으니까.
나봄은 차준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매끄러운 코랄빛 입술이 여유롭게 열리는 순간.
“차준 씨,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저녁 식사 끝나자마자 급한 약속이 생겼다면서 나가시더니, 그 약속이 또 다른 소개팅이었나 봐요?”
“…….”
“하루에 맞선 두 개 보는 건 조금 예의가 아니다. 내가 애프터 신청하면 어쩌려고.”
생각지도 못한 차준의 비밀스러운 스케줄 얘기에 나봄이 눈빛을 파르르 떨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차준의 얼굴에 절망과 난처함이 번졌다.
핑크빛이던 그들 사이에 한순간 드리워진 어둠.
그 딱딱하고 싸늘한 분위기는 몹시도 짙었다.
“저건 뭐야, 갑자기.”
저 먼발치에서 세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태오도 눈치챌 수 있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