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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남친이 내게 반했다-11화 (11/104)

11. 니 입술에서 꽃향기가 나

2017.06.05.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하던 순간, 분명 후회할 거라 생각했는데.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이렇게까지 후회할 줄은 몰랐다.

차준과 달콤한 시간을 보낼 욕심으로 공포 영화를 보게 된 나봄은 한 시간 전, 웃는 낯으로 이 상영관에 들어왔던 자신을 진심으로 원망하는 중이다.

“나봄아, 많이 무서워?”

차준은 약속대로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지만 나봄의 공포는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물론 초반엔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느껴지는 그의 온도가 온 신경을 빼앗아 가는 듯 했으나.

―내가 진짜 의사로 보이니……?

―끼야아아악!

“으아, 엄마야…….”

본격적으로 무서운 장면이 등장하기 시작하자 공포심이 모든 설렘을 잡아먹어 버렸다.

차준의 피부도, 귓가에 들려오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도 겁에 질린 나봄의 심장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그런 그녀를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차준은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서둘러 앞좌석에 걸려 있던 그녀의 가방을 챙겨 들었다.

“나봄아, 우리 나가자. 이런 거 말고 재밌는 걸로 다시 보자.”

그건 나봄에게도 굉장히 절실한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잔뜩 경직되어 있는 다리가 만석의 영화관을 재빨리 빠져나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대형 스크린 속 끔찍한 귀신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이상, 이 자리에서 꼼짝을 못 할 것 같았다.

“저…… 지금은 도저히 못 일어날 것 같아요.”

나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차준에게 대답했다.

생각보다 심각한 그녀의 상태는 차준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럴수록 분노하게 되는 상대는 나봄이 공포 영화를 좋아한다는 거짓말을 한 단태오 팀장이었다.

의도가 무엇인지는 이제 궁금하지도 않다.

질투심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알량한 감정으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사람은 공포에 떠는 나봄이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단태오에게 연락해 생각이 있는 거냐며 따져 묻고 싶지만, 두뇌 싸움이 특기인 선우차준은 알고 있다.

분노보다 효과적인 복수는 그 녀석이 원치 않는 상황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잠깐만 기다려. 내가 무섭지 않게 해 줄게.”

차준은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와 자신 사이에 놓여 있던 팔걸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떨어져 있던 그녀의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손길에 이끌려 나봄의 얼굴이 다다른 곳은 넓고 따듯한 차준의 가슴이었다.

“오, 오빠…….”

뜻밖의 포옹에 놀란 나봄은 떨리는 음성으로 차준을 불렀다.

“응, 나봄아.”

그러자 달콤한 대답을 건네며 두 팔로 나봄을 끌어안는 차준은 이 순간 그녀의 말초신경을 제대로 자극한다.

무서운 장면을 피해 다니기 바쁘던 시야는 그가 만들어 준 어둠에 가려지고, 소름 끼치는 비명만 들려왔던 귀는 쿵쿵대는 그의 심장박동을 가장 또렷이 담아낸다.

10년 만에 다시 느껴보는 그의 품은 여전히도 눈물 날 만큼 따듯했다. 그로 인해 또 다시 가슴 설레기 시작한 나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버릇이 나올 때가 되었다고 직감한 차준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나직이 속삭였다.

“너 또 입술 깨물고 있지.”

“네, 네?”

“그러지 마. 예쁜 입술 고생하잖아.”

사르르 녹는다는 느낌이란 이런 것일까.

아무래도 그의 음성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법이 걸려 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순간에 모든 공포심을 지워 내고, 선우차준의 존재감만으로 온 세상을 가득 차게 만들 수 없다.

이젠 다른 의미로 미칠 지경이 되어 버린 나봄은 붉어진 얼굴이 들키지 않도록 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걸 겁에 질려 파고드는 거라 생각한 차준은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직도 많이 무서워?”

“…….”

“재미있는 얘기라도 해 줄까?”

“…….”

이때 나봄이 대답을 하지 못한 건 순전히 목소리가 떨려 올까 봐서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차준은 조금 더 그녀의 이성을 뒤흔들 수 있는 말을 찾아 헤맸다.

“음, 어디 보자…… 무슨 얘길 해야 니가 좋아할까.”

귀신이 아니라 귀신 할아버지가 나타난다고 해도 신경 쓸 겨를 없는 한 마디.

대신 뻔뻔하기 짝이 없는 단태오는 그 어떤 귀신보다도 두려워 할 한 마디.

“아, 있잖아. 나봄아.”

고민을 마친 차준은 입술을 열었고, 나봄은 대꾸하는 대신 귀를 쫑긋 기울였다.

“내 마음은 아직도 그대로야.”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차준의 갑작스러운 고백.

“네……?”

꿈결 같은 이야기를 한 번에 받아들이지 못한 나봄은 서둘러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나 차준의 눈을 마주했다.

어두운 빛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는 평소의 장난기조차 없이 진지했다.

“나는 여전히 니가 좋아.”

한 번 더 확실히 꺼내지는 고백은 오늘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내용이었다.

이럴 때 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무슨 대답을 해 줘야 하나.

순식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나봄은 오히려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괜히 입술만 뻥끗거리다 살며시 닫아 버리자.

“응, 확실히 좋아하고 있어.”

차준은 제 마음에 쐐기를 박듯 한 번 더 읊조리며 그녀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기 시작했다.

점점 다가오는 그의 입술은 먹음직스러운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호, 혹시 이거 키스?’

낯부끄러운 그 단어가 뇌리를 스치자마자 나봄은 떨리던 숨을 멈췄다.

휘둥그레진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진 차준의 눈물점만 뚫어지게 응시하는 중이었다.

어쩌지. 어떡하면 좋지. 나는 지금 10년 만에 처음으로 하는 키스인데 너무 서툴게 해 버리면 어떡하지.

그렇게 온갖 걱정과 함께 옅은 호흡까지 멈추어 버린 그 순간.

“이젠 복숭아 향이 아니네.”

“……네?”

“이것도 좋다. 지금은 니 입술에서 꽃향기가 나.”

진지하던 차준의 눈엔 다시 평소의 장난기가 어리고, 맞부딪힐 뻔했던 입술은 도로 멀어진다.

애써 끝내 놓은 마음의 준비가 무색할 만큼 그의 표정엔 조금의 흑심도 없다.

민망해진 나봄은 설레발친 마음이 들킬까 싶어 서둘러 정면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차준은 싱긋 눈웃음을 건네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아까 잡아 주었던 것보다 힘을 실어 꽈악.

―난 널 용서하지 못해…… 죽여 버릴 거야!

참 이상하다.

스크린으로 향한 시선 끝엔 이 공포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잔혹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는데, 이상하게 하나도 무섭지가 않다.

―으아아악! 제발 살려 줘!

찢어질 듯한 비명엔 고통이 그대로 전해지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동요되지 않는다.

지금 나봄의 이성을 사로잡고 있는 건 오직 옆자리에 앉은 차준의 숨결뿐.

‘내 마음은 아직도 그대로야.’

‘나는 여전히 니가 좋아.’

‘응, 확실히 좋아하고 있어.’

꿈에서도 마음 아파 바라지 못했던 그의 고백을 받았다.

그는 딱히 나봄의 대답을 바라는 것 같지 않지만, 그녀는 지금이라도 벌떡 일어나서 대답해 줄 수 있다.

내 마음은 당신이 떠날 때부터 항상 그대로였다고.

미련하도록 그 시간을 떠나지 못해서, 변하고 싶어도 변하지를 못했다고.

그러니 다음번에 마음을 고백할 땐 나에게도 물어봐 줬으면 좋겠어요.

지치지도 않고 오랜 시간 품어 온 내 마음을 당신이 알아줬으면 정말 좋겠어요.

* * *

쭈우우욱―

질투의 화신 단태오는 지금 얼음이 다 녹은 콜라를 들이켜고 있다.

딱히 이렇다 할 계획도 없으면서 오붓한 두 남녀를 찾아 강남 쪽 영화관을 누빈 지 벌써 두 시간째.

첫 번째 영화관에 도착했을 땐 그냥 두 사람을 찾아내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두 번째 영화관에 도착했을 땐 슬슬 막상 마주치면 뭐하지,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여기. 세 번째 영화관에 도착했을 때쯤엔.

“다 부질없다…….”

이 모든 짓들이 전부 쓸데없는 삽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찾아낸다 한들, 차준이 자신을 신경 쓴다 한들, 나봄의 마음이 그에게 향하지 않은 이상 전부 혼자만의 고집일 뿐이었다.

“아, 여기 콜라 더럽게 맹맹하네.”

자신의 처지가 짜증스러워진 태오는 반도 비우지 않은 콜라를 신경질적으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젠 그들을 찾고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의 태오는 혹시라도 이곳에서 그들과 마주치진 않을까, 그래서 이 미련스러운 모습을 들키지는 않을까, 잔뜩 경계하는 중이었다.

머지않아 이 안엔 나봄과 닮은 사람조차 없다는 걸 깨달은 태오는 상영 시간표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제목은 오늘 나봄이 보았을지도 모를 ‘죽음의 병원’이었다.

마침 이번 타임이 막 끝난 그 영화는 다음 타임을 20분 앞두고 있었다.

“저거 많이 무서웠으려나…….”

다 늦어 버린 걱정이지만 태오는 뒤늦게 공포 영화를 못 보는 나봄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5년 전 첫 데이트 때 봤던 영화는 별로 무섭지 않았어도 기절하려고 하던데, 저거 보면서 놀라 죽은 건 아닐까 몰라.

인상을 쓴 채 상영 시간표를 노려보던 태오는 굳을 결심을 한 듯 걸음을 옮겼다.

그가 범상치 않은 포스를 풍기며 다다른 곳은 다름 아닌 매표소 앞이었다.

“죽음의 병원 20분 뒤에 시작하는 걸로 주세요. 가장 뒷자리로.”

태오는 영화의 공포 레벨을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 별로 즐겨 보지도 않는 공포 영화를 예매했다.

이런 것도 혼자 삽질하는 짓의 일종이지만, 씩씩거리며 들어온 영화관을 10분 만에 힘없이 털레털레 빠져나가고 싶진 않았다.

그냥 내가 홧김에 추천해 버린 이 삼류 고어물이나 보면서, 두 사람의 데이트가 얼마나 최악이었을지나 짐작해 봐야겠다.

“네, 여섯 시 죽음의 병원 J열 11번 좌석입니다. 상영관은 3관입니다. 10분 뒤부터 입장 가능하세요.”

“감사합니다.”

표를 받아 든 태오는 여전히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갑자기 잡힌 영화 스케줄에서 미련이 남는 건 아까 성질에 못 이겨서 버려 버린 콜라였다.

“아…… 또 사야 되잖아.”

짜증스레 머리를 흩뜨린 태오는 10분 전 들렀던 매점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끔찍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눈을 가릴 용도로 영화 포스터 몇 장을 챙겨 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드넓은 영화관 한편으로 자리를 옮긴 순간.

“와, 겨우 끝났네. 결말이 찝찝해서 기분 나빠.”

“그러게요. 베드 엔딩이었네요.”

영화관 반대쪽 구석에서부터 막 ‘죽음의 병원’을 보고 나온 차준과 나봄이 등장했다.

입장할 때처럼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나온 그들의 얼굴은 유달리 붉어진 채였다.

“나봄아. 영화 많이 무서웠지? 물어보지도 않고 예매해서 미안해.”

차준은 러닝타임 대부분을 패닉 상태로 보냈던 나봄에게 사과부터 건넸다.

비록 영화가 잔인하기는 했지만 차준 덕분에 그 시간조차 달콤하기만 했던 나봄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재미있었어요! 중간부터는 별로 무서운 것도 없고…….”

“응? 중간부터가 잔인한 장면 시작이었는데?”

“네?”

“혹시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해 줘서 그런 거 아니야?”

대답을 해 놓고 생각해 보니, 나봄의 말은 차준이 해석한 대로였다.

차준의 고백 이후로 영화에 집중을 못했던 나봄은 중간 부분부터는 아예 기억나지도 않았다.

새삼 부끄러워진 나봄은 일렁이는 눈동자를 애먼 곳으로 돌렸다.

“이, 이제 우리 어디로 가나요? 배고픈데 저녁을 먹을까나…….”

그 모습을 본 차준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감정이 다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은 항상 놀리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나봄이 왜 갑자기 나 안 봐?”

“아, 그게…….”

“오빠가 고백해서 싫어졌어?”

“예? 아니요! 아니요! 그건 아니고…….”

아아, 이 사랑스러운 여자를 어쩌면 좋아.

차준은 무방비한 미소를 입가에 퍼트린 채 나봄을 끌어안기 위해 팔을 뻗었다. 10년 전, 나봄이 사랑스러워 보일 때마다 포옹을 하던 버릇이 그대로 나와 버리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미처 손이 닿기도 전에.

지이이잉― 지이이잉―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기 시작했다.

주말에 오는 전화라면 그리 달갑지 않은 사람일 게 뻔했던 터라, 봄바람처럼 마냥 살랑이던 차준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나봄아, 미안. 통화 좀 할게.”

나봄에게 양해를 구한 차준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 그녀와 제법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걸어가며 흘끗 확인한 발신인은 역시 서 대표였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차준의 입술 새로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음 같아선 회피하고 싶었으나, 싫은 일일수록 빨리 끝내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한 그는 미루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건조한 목소리.

하지만 그런 태도가 익숙했던 서 대표는 충분히 예상했던 본론부터 꺼냈다.

―오늘 저녁 약속 잊은 건 아니지? 여섯 시 약속인데 지금부터 와서 안 기다리고 뭐해?

“저는 저녁 약속 같은 거 잡은 적 없습니다만.”

―너랑 실랑이할 시간 없어. 혹시 아직까지도 집에서 버티고 있는 거라면 내가 시간 좀 끌어 볼 테니까 지금부터 서둘러 준비하고 나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서 대표의 방식은 차준이 가장 질색하는 부분이었다.

이럴 때 실랑이는 아무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차준은 단칼에 그녀의 명령을 끊어 냈다.

“나갈 생각 없습니다.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그리고 곧바로 종료 버튼을 누르기 위해 휴대폰을 귓가에서 떼어 내려고 하는데.

―감당할 수 있겠어? 너의 선택이 고작 너의 인생만 판가름하는 게 아닐 텐데…….

의미심장한 서 대표의 말이 차준의 신경을 건드렸다.

고집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 협박을 하는 것 역시, 차준이 경멸하는 서 대표의 안하무인 방식이었다.

차준은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휴대폰만 들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대꾸 따윈 바라지도 않았던 그녀는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최태영 부장한테 보고를 받았는데, 우리 회사 ‘Lily 프로젝트’에서 한낱 삼류 공장이 도어락 파트를 맡았다 그러더구나.

“…….”

―니가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해서 믿고 전부 일임해 놨더니, 이런 식으로 격을 떨어트려 놓으면 안 되지.

얼핏 보이는 그녀의 검은 속내에, 온화하던 차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더 이상 그녀 입에서 나봄이 거론되는 꼴이 보기 싫었던 차준은 사나운 음성으로 본론을 물었다.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서 대표는 보다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회장님 깨어나시면 당장 그 네임벨류 떨어지는 회사부터 처리하려 하실 거야. 그동안 한봄 도어락에서 우리 물량 맞춰 준답시고 얼마나 투자를 했든지 간에 본전도 못 찾고 내버려지겠지.

“…….”

―하지만 오늘 니가 와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나서서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구나.

“하아…….”

―그렇게 한숨 쉬지 마. 딱 하루야. 한두 시간 정도만 밥 먹고 차 마시면 되는 건데, 그거 치고는 좋은 딜이잖아?

생색을 내며 건네는 제안조차 차준을 마음껏 주무르려는 서미란 대표의 계략일 게 분명했다. 그걸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는 차준은 그 장단에 맞춰 주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

현재는 갑작스럽게 높아진 혈압으로 인해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서 회장이 다시 복귀하는 순간.

그녀가 우려하는 일들은 차례차례 현실이 되어 버릴 게 분명했다.

“딱…… 한 시간만입니다.”

그때가 되면 서 회장이 유일하게 신뢰하는 친딸 서미란 대표의 입김이 절실할 것이었다.

차준은 오직 그날을 위해 서미란 대표의 시꺼먼 속내를 순순히 응해 주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그녀가 내건 조건은 단 한 시간, 그저 낯선 여자와 식사를 같이하고, 차 한잔 비워 내는 것뿐이니 귀찮은 업무 처리하고 온다고 생각하면 간단한 일이었다.

―옳지, 그래야 내 아들이지.

서 대표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 섞인 반응을 내비쳤다.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많은 호칭들 중에서 ‘아들’이라는 소리가 가장 듣기 싫었던 차준은 지극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도 없는 단어 갖다 붙이지 마세요. 외아들만 있는 것처럼 구실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감히 저한테 모자 관계를 바라십니까.”

그 말에 후후 웃기만 하는 서 대표는 오늘도 토기가 올라올 만큼 역겨웠다.

어쩜 저리도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지.

낯짝을 두껍게 뒤덮은 가식과 계산을 전부 벗겨 내리고 싶다. 그래서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사람인지를 알게 되길 바란다.

그녀가 가진 뻔뻔함이라면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테지만.

.

.

.

짧은 통화를 마친 차준이 다시 나봄의 곁으로 다가왔다.

영화관 한복판에 서서 그를 멍하니 기다리고 있던 나봄은 밝은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오빠!”

하지만 점점 가까워져 오는 그의 얼굴은 떠나던 때와 온도가 달랐다. 웃고 있어도 씁쓸함이 느껴지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함을 불러일으켰다.

“나봄아.”

“무슨 전화였는데 표정이 그렇게 안 좋아요?”

“어? 아, 미안한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럼 그렇지.

통화 끝에 차준이 전한 소식은 작별 인사와 다름없었다.

오늘의 데이트를 며칠째 잠도 못 자고 기대했던 나봄으로선 너무나도 아쉬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나봄은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회사 일이라면 얼른 가 보셔야죠!”

그 말을 들은 차준의 두 손이 나봄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나봄이 느끼기에 이건 떠나보내는 사람의 손길이 아닌, 그녀가 이 자리에 머물기를 바라는 간절한 붙잡음이었다.

나봄은 그런 차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지 눈짓으로 물었다.

“여기서 한 시간만 기다려 줄 수 있어?”

그러자 이내 조심스럽게 입술을 움직이는 그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다시 돌아올게. 그때까지만 기다려 줘. 부탁이야.”

한 시간의 기다림이라면 그리 길지도 않거늘, 왜 이리도 힘겹게 꺼내 놓는 건지.

지금 그가 짓는 표정은 10년 전 이별을 선고받을 때와 얼핏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봄은 오기를 섞어서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기다릴게요.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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