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질투는 나의 힘.
2017.06.02.
“아, 뭔가 이상한데…….”
거울 앞에 선 나봄의 표정에 찜찜함이 묻어 나왔다.
현재 그녀는 완벽하게 세팅된 헤어부터 잔뜩 신경 쓴 메이크업, 그리고 사랑스러운 원피스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꾸민 상태였지만 어쩐지 묘하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머리를 다시 하고, 몇 번이나 귀걸이를 바꿔 끼워 봤으나 딱히 나아지는 건 없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만 하염없이 줄어들 뿐.
“화장이 문제인가?”
나봄은 거울 속 제 얼굴을 보다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거울을 통해 흘끗 확인한 뒤편의 시계는 벌써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앗! 차준 오빠 도착할 때 됐는데!”
놀란 나봄은 상태 점검을 그만두고 서둘러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귀여운 리본이 포인트인 숄더백은 아주 중요한 날에만 드는 행운의 아이템이었다.
오늘 그녀는 그 어떤 날들보다 간절하게 행운을 바라는 중이었다.
비록 긴장할 때마다 실수하는 성격이지만, 그래도 오늘은 아무 사고 없이 잘 지나갔으면 좋겠다. 내가 가진 단점들은 흔적도 없이 잘 가려지고, 좋아할 만한 장점들이 더 많이 드러났으면 좋겠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무려 10년 만에 찾아온 그 사람과의 데이트 날이잖아.
“후우…….”
긴 한숨을 내쉬며 두근대는 가슴을 정리한 나봄은 비장한 걸음으로 제 방을 나섰다.
때마침 거실에 축 늘어져 있던 한 사장이 달라진 그녀를 발견하곤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너 어디 선 보러 가냐?”
“아뇨,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날이에요.”
“데이트?”
눈치 빠른 한 사장은 단번에 정답을 맞췄으나, 나봄은 딱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떠올리기만 해도 떨리는 ‘데이트’라는 단어는 제삼자의 입에서 들려오니 괜히 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다, 다녀오겠습니다.”
나봄은 서둘러 구두를 신고, 떨리는 목소리로 한 사장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한 사장은 노골적인 웃음을 흘려보내며 말했다.
“숨기긴 뭘 숨겨. 이미 니 남자 친구 차 골목에서 대기하고 있구만.”
“네?!”
“그때 그 흰색 외제 차 아니야?”
“그 차는 맞는데…….”
세상에, 벌써 도착했단 말이야?!
“아, 아직 남자 친구는 아니에요! 그럼 가 볼게요!”
나봄은 한층 더 바빠진 걸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좁은 마당과 이어진 3층짜리 계단을 한 번에 폴짝 뛰어내려, 대문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그녀의 걸음은 높은 구두굽이 무색할 정도로 재빨랐다.
나봄은 대문 잠금 걸쇠를 순식간에 풀었고, 온 힘을 다해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아, 깜짝이야.”
마침 대문 바로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차준이 짠하고 등장했다.
갑자기 열린 대문에 놀란 듯, 그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동그래져 있는 상태였다.
“오, 오빠…….”
“집에 불이라도 난 줄 알겠다.”
하지만 이내 사르르 휘어지는 그의 눈꼬리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름다웠다. 우리가 조금만 더 가까운 사이였다면 웃을 때마다 실룩이는 눈물점을 손끝으로 톡 건드려 보았을 것이다.
나봄은 버릇처럼 흐려지는 이성을 애써 붙잡고, 수줍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니…….”
“아니야, 안 늦었어. 내가 빨리 온 거야.”
그는 그 다정한 말과 함께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윽쓰윽 정돈해 주었다.
이럴 때마다 나봄은 일렁거리는 눈동자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 우리는 10년 전 그 달콤했던 사이가 아닌데, 그것도 잊은 채 나 혼자서만 사랑의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 것 같다.
터질 듯한 심장 때문에 그의 손길을 더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나봄은 차준의 팔목을 붙잡았다.
“응?”
“빨리……”
“…….”
“빨리 데이트하러 가요!”
지금의 감정을 숨기고 싶어 꺼낸 말인데, 모양새는 어쩐지 보채는 꼴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더욱 붉어져 버린 나봄의 얼굴을 보며 차준은 싱긋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움푹 팬 보조개엔 세상의 섹시함을 한데 모아 얹어 놓은 듯했다.
“그래, 데이트하러 가자.”
차준은 달콤하게 대답하며 자신에게 다가온 나봄의 손을 살며시 맞잡았다.
10년 만에 다시 느껴보는 차준의 온도는 아직도 변함없이 따듯했다.
마치 그녀에게는 길고 길었던 시간이 그에게는 찾아가지 않았었던 것처럼.
* * *
똑딱똑딱.
태오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아침 일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던 행동이었다.
딱히 의미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어젯밤부터 차준의 그 한 마디를 고문처럼 되새기고 있었다.
‘저는 나봄이랑 오랫동안 못 보고 지내서 그런가, 데이트를 하려고 해도 그 애 취향을 모르겠어서 어려워요.’
‘토요일 강남 쪽은 어딜 가나 번잡할 것 같아서 되도록 예약해 두고 싶은데, 식사는 분위기 좋은 데로 잡아 두면 된다고 해도 영화는 뭘 골라야 할지…….’
그 재수 없는 선우차준의 선전포고대로라면 나봄은 오늘 서울 어딘가에서 그를 만나고 있을 텐데.
그게 어딜까. 이놈들은 대체 어디서 무슨 짓거리들을 하고 있을까.
물론 혼자 분노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나봄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못한 태오는 서로 좋아서 만나는 두 사람을 질투할 명목도, 그럴 처지도 못 되었다.
게다가 어제는 그녀에게 한 번도 마음을 준 적이 없다고까지 말해 버렸으니, 나는 이 들끓어 오르는 감정을 표시할 수도 없는 상태.
나봄은 모르겠지만 그가 이런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학 시절 혼자 짝사랑을 할 때도, 그녀 곁에 낯선 남자가 딱 달라붙어 살갑게 굴고 있으면 남몰래 폭발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난 어떻게 이 거대한 질투심을 삭였더라.
‘나, 나봄아. 너 혹시 단태오랑 친해?’
‘아니. 왜?’
‘우리 회의하는 데마다 따라와서 저렇게 쳐다보고 있길래…….’
쫓아다녔구나. 그 남자애가 겁에 질려 떨어져 나갈 때까지 쫓아다니면서 눈치를 줬어.
하지만 지금의 태오는 그 어린 시절의 철부지와는 달랐다.
이성도, 마음도 지나간 세월만큼 자라났으니 좀 더 처연하게 대처할 것이다.
태오는 시계에서 억지로 시선을 떼어 냈고, 텔레비전 리모컨을 들었다. 헛된 망상으로 가득 찬 머리를 예능 프로나 보며 풀 생각이었다.
삐익―
태오는 감흥 없는 표정으로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마침 방영되고 있던 영화 소개 프로그램이 그의 이목을 끌었다.
―즐거운 토요일! 혹시 지루하게 보내고 계시진 않나요?
“…….”
―그런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오늘의 추천작 시리즈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레전드급 공포 영화들입니다!
아아, 공포 영화라면 나도 질색이지.
한나봄이랑 처음으로 데이트할 때, 내가 물어보지도 않고 공포 영화를 예매하는 바람에 데이트 다 망쳤었잖아.
무얼 보든 그녀부터 떠올리는 태오는 그런 자신을 향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좋아 짝사랑이지, 솔직히 이 정도면 상사병과 다름이 없었다.
순간 짜증이 솟구친 태오는 인상을 잔뜩 쓴 채 채널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때.
―다음으로 일본 현지에서 사상 초유의 관객 기절 사태까지 일으킨 ‘죽음의 병원’입니다. 무려 오늘 국내 첫 개봉을 한 따끈따끈한 신작이죠!
혼자서만 신이 난 내레이터의 목소리가 잠자고 있던 그의 기억 한 조각을 꺼내 주었다.
며칠 전. 직원들이 모두 떠난 회의실에서 차준이 나봄과의 데이트 일정을 자랑했을 때, 태오는 참을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였고.
‘딱 그날 개봉했다던 공포 영화로 예매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평이 꽤 좋던데.’
‘네, 나봄이는 예전부터 공포 영화에 환장했거든요.’
그래서 아예 그 데이트를 망쳐 버릴 작정으로 얼토당토않은 조언을 건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차준을 바라보며 남몰래 비웃음을 흘렸던 것 같다.
“영화관…… 영화관에 있겠네.”
두 사람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찾은 태오의 눈동자가 다시 번쩍였다. 강남 쪽 영화관이라면 오늘 안에 충분히 돌아볼 수 있을 터였다.
지루한 오후, 갑자기 하고 싶은 스케줄이 생겨난 태오는 늘어져 있던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순간에 의욕을 찾은 그의 불타는 눈빛.
한나봄이 날 어찌 생각하든 그건 상관없다. 하지만 적어도 선우차준만큼은 내 존재를 의식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것도 심기가 엄청 불편해져서 한나봄보다 내가 먼저 눈에 거슬릴 정도로.
* * *
강남 삼성동에 위치한 대형 영화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매점 앞에 선 차준이 나봄에게 물었다.
이 순간 그가 당연하다는 듯 잡고 있는 손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 나봄은 새빨개진 얼굴을 도리도리 저었다.
“괘, 괜찮아요.”
“왜? 팝콘 안 좋아해?”
“아, 좋아는 하는데…….”
좋은 모습만 보이려면 어떤 상황에서든 침착하게 굴어야 하거늘, 피부로 느껴지는 차준의 온도는 멀쩡하던 심장도 격해지게 만든다.
“그럼 같이 먹자. 나도 좋아하거든.”
게다가 웃으며 건네는 말들은 왜 별 뜻이 없는데도 설레는지. 그가 꺼내 놓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두 귀가 녹아 버릴 것만 같다.
이럴 걸 대비해서 나봄은 데이트 신청을 받았던 날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두었다.
하지만 전부 쓸모없는 짓이었나 보다.
선우차준이라는 남자는 존재 자체만으로 그녀에게 영광이라서, 나봄은 그가 내쉬는 숨소리에도 온 신경이 예민하게 달아오르는 듯하다.
“이리 와, 나봄아. 음료수 골라.”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이 난 차준은 나봄의 몸을 조심스레 제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가까워진 향기에 보다 경직된 나봄은 커다란 메뉴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음료를 불렀다.
“아…… 저는 콜라요.”
“그래? 옛날엔 너 사이다만 마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네?”
“하긴 그때는 너무 오래 전이긴 하지.”
그랬었던가?
그때의 취향은 그녀는 기억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걸 잊지 않은 차준은 어쩐지 나봄의 마음에 기대감이 자라게 만들었다.
꼭 10년 동안 나를 추억하며 살아온 것 같잖아.
“여기 콜라 두 잔, 그리고 팝콘 큰 사이즈 하나 주세요. 물티슈도 챙겨 주시고요.”
차준이 매점 직원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주문하는 동안, 나봄은 그의 매끄러운 턱선과 오뚝한 콧날에 시선을 빼앗겼다.
특유의 장난스러운 눈웃음이 그대로라서 10년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은 줄 알았더니, 자세히 들여다본 차준의 얼굴은 기억에 남아 있던 것보다 성숙한 느낌이었다.
눈빛이 좀 더 차분해져서 그런가. 아니면 그가 하는 제스처들이 어른스러워서 그런가.
“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점원으로부터 주문한 간식을 넘겨받은 차준이 빙글 몸을 돌렸다.
나봄은 그가 힘겹게 안고 있는 팝콘 통을 서둘러 넘겨받았고, 상영관을 안내해 주는 전광판을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 무슨 영화 보는데요?”
그러자 차준이 시원한 웃음과 함께 꺼내 놓는 대답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죽음의 병원!”
“……예?”
설렘으로 일렁이던 나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딱딱해졌다.
귀신 그림도 제대로 못 쳐다볼 만큼 겁이 많은 나봄은 공포 영화라면 딱 질색이었다.
그걸 몰랐던 단태오는 나봄에게 공포 영화를 보여 줬다가 상영 시간 내내 덜덜 떨며 우는 그녀를 달래 줬어야 했다.
다시 떠올려 봐도 그때 분위기는 정말 최악이었다. 아마 그와의 첫 데이트를 완전히 망쳐 버린 데에는 그 공포 영화가 큰 몫을 차지했을 거다.
눈치가 빠른 차준은 일순 달라진 나봄의 분위기를 읽어 냈다.
“왜 그래? 혹시 무서운 거 못 봐?”
그래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나봄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 대답을 들은 차준의 머릿속엔 지금 뻔뻔하게 거짓말을 쳤던 단태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지었던 웃음이 의미심장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차준의 데이트를 망칠 의도가 있는 줄은 몰랐다.
‘단태오 팀장이 왜…….’
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들긴 했으나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차준은 벌써부터 공포에 질린 나봄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도록, 다정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미안해. 요즘 가장 인기 있다고 해서 예매했는데, 니가 싫어할 줄은 몰랐어.”
“아니에요! 제가 미리 말씀 안 드린 게 잘못이죠!”
“잘못은 무슨. 그럼 나가서 다른 거 예매할까?”
그건 나봄에게 아주 반가운 질문이었다. 나봄은 당장에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하지만 미처 그러기도 전에.
“아니면 영화 보는 내내, 내 손 꼭 잡고 있어도 되고.”
거절하기엔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이 건네졌다.
최악의 상황을 앞두고 엄청난 기회.
그를 바라보는 나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