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나에게만 아픈 오해
2017.05.29.
안타깝게도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다.
삽시간에 표정을 굳힌 나봄이 서둘러 애꿎은 물컵 위로 시선을 내려 버리던 순간에도,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든 채로 쓸데없이 맛만 좋은 곱창전골을 먹던 때에도.
시간은 단 1분, 1초도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흘러갔다.
덕분에 정확히 40분간의 점심 식사가 끝나고 가게를 빠져나왔을 때쯤엔.
“잘, 잘 먹었습니다.”
“덕분에 우리도 잘 먹었어요. 후식으로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실래요?”
“아니요!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바로 갈게요!”
나봄의 상태는 태오와 함께 있어야 하는 상황 자체를 격렬하게 기피하는 지경에 이르러 버렸다.
태오의 얼굴에 드리운 어둠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대하기 어려운 여자인데, 저리 피하려고 드니까 진짜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태오는 심란한 한숨을 내쉬며 애써 정돈한 머리를 흩트렸다.
유리는 그런 태오를 의아한 눈으로 살폈다.
“왜 그래? 속 안 좋아?”
바로 그때.
“회사가 저 건물 너머에 있었던가요?!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출발해 보겠습니다!”
어느새 재빠른 걸음으로 큰 도로까지 진출한 나봄이 허둥지둥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도망치는 듯한 모습에, 유리와 태오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로 따라붙었다.
어느 순간부터 달라져 버린 나봄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있던 유리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갑자기 왜 저러지? 무슨 일 있나?”
그러자 태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원망 섞인 눈빛으로 유리를 노려보았고,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
“뭐가?”
“넌 천천히 따라와. 난 한나봄 붙잡고 할 얘기 있으니까.”
태오는 유리에게 자세한 정황도 설명해 주지 않고, 먼저 성급한 걸음을 떼어 냈다. 흘깃 확인한 그의 얼굴은 불안이 가득 어려 있었다.
두 사람만의 세계에서 동 떨어져 버린 유리는 홀로 남아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내 실마리 하나를 찾았는지 두 눈동자를 빛냈다.
“설마…… 한나봄이?”
확실한 심증을 잡아 버린 단태오의 첫사랑.
그녀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아 버린 유리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딱딱해졌다.
* * *
거의 달리다시피 와서 도착한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주차창.
“한나봄!”
나봄은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태오의 부름을 무시한 채, 분홍 마티즈에 몸을 실었다.
아직까지 얼굴에서 당혹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그녀는 그저 예상치도 못한 마음을 지니고 있던 단태오에게서 도망칠 생각뿐이었다.
물론 그와는 분명 사귀었던 적이 있었으나, 그가 나를 사랑했다고는 생각한 적 없었다.
얼굴만 겨우 아는 사이였던 그가 갑작스럽게 고백했을 때도, 이별의 말을 듣고 거칠게 분개했을 때도.
나봄은 얼핏 ‘이 남자가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나?’라는 의문을 품었지만, 오한이 들 정도로 싸늘한 그의 눈빛을 보며 곧바로 아닐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굳이 예전까지 찾아갈 필요도 없어. 최근에 나한테 한 행동들을 봐.
미운 7살 어린아이처럼 심술맞기 그지없었잖아.
‘대학교 때 첫사랑을 아직 못 잊었대요. 졸업한 지 벌써 4년이나 지났는데도 말이에요.’
‘2주 사귀면서 두 번째 데이트 때 대차게 차였던 거 맞지? 니 인생의 쌍년이라고 엄청 욕했었잖아.’
그런데 내가 첫사랑이라니. 심지어 아직까지 잊지 못한 단태오 인생의 쌍년이라니!
나봄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안전벨트를 맸다.
그리고는 서둘러 차키를 꽂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태오가 없는 곳으로 도망쳐서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동을 걸기도 전에.
벌컥―!
“한나봄, 내 말 좀 들으라고!”
“엄마야! 깜짝이야!”
고집스럽게 그녀를 따라온 태오가 조수석으로 들이닥쳤다. 놀란 나봄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차창에 딱 몸을 붙였다.
“왜, 왜 들어오는 거야! 나가 줘!”
버럭 소리를 지르는 나봄은 이때껏 그가 보아 온 모습 중 가장 격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태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수석 문을 닫았다.
허억, 허억.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는 그가 그녀를 쫓아 얼마나 열심히 달려온 건지 증명해 주고 있었다.
“나…… 나 그거 아니야.”
“뭐, 뭐?”
“너한테 관심 가졌던 적 한 번도 없어.”
그런 뒤 꺼내 놓는 얘기는 세상 둘도 없는 거짓이었다. 조금도 신뢰할 수 없다는 듯, 나봄의 눈썹이 노골적으로 구겨졌다.
“뭐?”
하지만 태오는 그걸 똑바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래서 가슴이 욱신거리는 걸 고스란히 느끼고 있으면서도.
“정말이야. 너랑 만나기 며칠 전에 딱 2주 사귀고 헤어진 사람이 있었어.”
스스로에게만 잔인한 거짓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나봄에게 닿은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필사적이었다.
“나랑도 2주 만났잖아.”
“그래, 하필 똑같은 기간이었지.”
“그리고 두 번째 데이트 때 헤어졌잖아.”
“알고 있어. 그래서 내가 너한테 필요 이상으로 화냈던 거고.”
차분히 꺼내지는 태오의 말은 나봄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분명 곧이곧대로 믿기엔 무리가 있는데, 의심을 갖자니 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너무나도 진지했다.
나봄은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그에게 물었다.
“그럼…… 허유리 씨가 얘기한 사람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란 소리야?”
“어. 생각을 해 봐. 진짜 좋아서 고백했을 리가 없잖아.”
“…….”
“너랑 난 모르는 사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래, 너와 난 모르는 사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나는 4년 동안 먼발치서 지켜만 봤을 뿐, 품고 있는 것도 버거운 마음을 너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처음 반했을 때부터 맴돌다, 맴돌다, 그저 하염없이 맴돌기만 하다,
‘한나봄, 남자친구 있어?’
‘아, 아니. 없는데…….’
‘그럼 나 시켜 줘.’
‘뭐?’
‘대신 이거 너 줄게.’
너에게 꺼내 놓은 고백은 용기 없던 내가 저지른 인생 최대의 도박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4년 동안이나 가슴 속에 묵혀 뒀던 말이 자연스럽게 꺼내진 건 기적에 가까웠다.
물론 그 4년 동안 수천 번, 수만 번을 연습하긴 했었지만.
“그러니까 허튼 생각하느라 업무에 지장 주지 마.”
태오는 평소처럼 무뚝뚝한 목소리로 나봄에게 말했다. 그 모습은 불친절했으나, 차라리 이 모습이 나봄에게는 더 익숙하고 편했다.
그는 점차 누그러지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흐린 숨을 들이마셨고, 한번 박히면 절대 뽑히지 않을 단단한 쐐기를 박아 넣었다.
“전부 다…… 오해니까.”
푹―
심장에 날카로운 고통이 일었다. 내가 뱉은 말인데도.
“아, 알았어. 오해는 안 할게…….”
경직되어 있던 나봄의 어깨가 느슨해졌다. 그제야 안도한 태오는 흐린 한숨을 내쉬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번져 버리기 전에 겨우 꺼진 불.
그의 마음은 까맣게 그을려 형체조차 찾을 수 없었으나,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어차피 상처 하나 없이 지니고 있었다 해도 꺼내 놓지 못할 마음이니.
* * *
[한나봄 씨. 내일 저녁 4시에 저랑 데이트 안 할래요?]
야심한 시각, 차준의 개인 사무실.
전송 버튼을 누른 차준의 입가에 아이 같은 미소가 번졌다.
다시는 건넬 일 없을 줄 알았던 멘트를 그녀에게 보낸 지금, 그의 가슴엔 아주 오랜만에 행복감이 스며들었다.
나봄이는 뭘 할 때 가장 즐거워했더라. 뭘 먹을 때 가장 맛있어 했더라. 또 가장 재미있어 하던 장소는 또 어디더라.
아직 그녀가 답신을 주기 전이지만, 차준은 열심히 10년도 더 된 기억들을 뒤졌다.
그때마다 실감나는 차준과 그녀 사이의 공백은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길었다.
‘예전엔 그 애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었는데…… 이젠 데이트조차 막막할 만큼 아는 게 하나도 없네.’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누가 끌고 갔든, 어디에 처박혔든. 떠나간 사람은 나였고, 버려지듯 남겨진 사람은 그 애였으니까.
차준은 자신이 만든 그녀와의 공백을 어떻게든 메꿔 볼 생각이었다.
그때를 위해 전망이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했고, 그녀와의 추억이 많은 한강 공원의 지름길을 알아 놓았다. 그리고 시설 좋은 영화관의 심야 영화 예매까지 완벽하게 끝마쳤다.
그가 고심해서 고른 작품은 최근 무섭다고 소문이 난 공포 영화의 신작.
그건 태오의 조언을 적극 반영한 선택이었다.
‘어제 개봉했다던 공포 영화로 예매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평이 꽤 좋던데.’
‘나봄이는 예전부터 공포 영화에 환장했거든요.’
‘본부장님께 드리는 정말 좋은 친구의 팁입니다. 공포 영화 아니면 별 흥미 없어 하니까.’
비록 그 순간의 태오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차준은 원래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런 사사로운 문제까지 신경 쓰는 편이 아니었다.
자, 이제 나봄이가 대답만 해 주면 되는데…….
지잉―
본격적인 기다림을 시작하기도 전에,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귀신같은 선우차준의 촉이 확신하건대, 발신자는 그녀임이 분명했다.
그건 꼭 나봄도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 같아서, 그의 심장이 버릇처럼 두근거렸다.
역시 날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 이라고 생각하며 차준은 스스럼없이 휴대폰을 들었다.
하지만 액정을 켜기도 전에.
똑똑―
누군가 사무실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갑작스러운 기척에 놀란 차준은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누구?”
“김형우 비서실장입니다.”
“아아…….”
김형우 비서실장. 차준과는 모자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악연으로 묶여 있는 서 대표의 직속 비서.
차준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얼마 전, 어머니 서미란 대표와 했던 불쾌한 통화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차준으로서는 김 실장의 용건이 너무나도 뻔했다.
“들어오세요.”
차준은 결코 달갑지 않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끼익― 유달리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은 차준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선우차준 이사님. 통 병원에 들러 주시질 않으니 만날 기회가 없네요.”
“할 말만 하고 나가시죠.”
그래서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삐딱한 태도로 그의 인사를 받아치니, 역시나 그는 차준의 예상대로 달갑지 않은 용건을 꺼내 놓았다.
“내일 저녁 7시, 서영 건설 회장님의 손녀분과 저녁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차준은 제 촉에 새삼스레 감탄하며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하, 큰 착오가 있으시네. 나는 그딴 스케줄 잡은 적이 없는데.”
“자리에 얼굴이라도 비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서 대표님 스타일은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실장님, 지금 저를 협박하는 겁니까?”
차준의 눈빛이 전에 없이 싸늘해졌다.
웃을 땐 장난기 많은 여우와 닮아 있는 그의 눈초리는 정색하는 순간 더할 나위 없이 매서워 보였다.
“BK 백화점 외동딸, 맥심 호텔 장녀, 그리고 내일 만날 서영 건설 손녀까지…….”
“…….”
“형이라면 이해타산 봐서라도 만났을 텐데. 그렇지?”
날카롭게 던져진 질문은 딱히 대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김 실장에게 차준은 공격적인 뒷말을 이었다.
“난 그렇게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야. 꼭두각시를 찾으려면 다른 데서 알아봐.”
“…….”
“아니면, 집에서 반송장으로 사는 새끼 고쳐서 쓰든지.”
차준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엔 거대한 적대감이 담겨 있었다.
올해로 딱 10년.
그동안 하루가 다르게 자라난 적의는 이제 감히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김 실장은 그의 말을 받아치는 대신, 불안하게 흔들리는 차준의 눈동자만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10년 전과는 확실히 다른 새까만 어둠이 그의 밝은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안 나가고 뭐해요?”
순간 언제 굳었었냐는 듯, 차준의 입꼬리가 다시 매끄럽게 휘어 올라갔다. 그가 시시때때로 지어 보이는 미소는 망가진 그를 감출 수 있는 가장 얄팍한 가림막이었다.
여기서 더 그를 건드려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김 실장은 곧바로 고갤 숙여 인사했다.
“그럼 일단 물러가 보겠습니다.”
지금 그는 후퇴하는 중이지만 완전히 물러선 것은 아닐 것이다.
상식조차 허용되지 않을 만큼 지독한 그녀는 더러운 수작이라도 부려 차준의 마음을 움직이려 할 게 분명하다.
탁―
잔뜩 날을 세우고 있던 차준은 김형우 비서실장이 완전히 문을 닫고 자라지자마자 고개를 떨구었다.
“후우…….”
그런 뒤 흘려보내는 한숨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한 번씩 이렇게 신경이 곤두서는 일이 생길 때면, 차준은 요동치는 분노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순간마다 원망하게 되는 사람은 이 자리를 버리고 달아난 비겁한 그 새끼.
‘차준아, 왔어?’
가끔 억지로 본가에 끌려갈 때마다 살가운 척 인사를 건네는 그 면상은 역겹기만 하다.
‘자주 내려오지 그랬어.’
묵묵부답인 내 곁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다 겨우 건네는 말은 듣고 있기에 끔찍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소름끼치게 혐오스러운 건.
끼릭― 끼릭―
귀에 거슬리도록 날카로운 그의 휠체어 소리.
‘형, 차라리 죽지 그랬어. 그렇게 살 바엔.’
차라리 다가오지도 않았으면 싶어, 잔인한 소리를 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잠깐 표정을 굳히다가 괜히 무릎을 덮은 담요 위로 시선을 떨어트렸고.
‘나중엔 형이 찾아갈게, 우리 같이 저녁이라도 먹자.’
이내 쓸데없는 대답만 겨우 꺼내 놓았다. 어차피 그 다리로는 누가 데려다주지 않는 한 저택도 벗어날 수 없으면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뇌리에 들어차자, 차준의 낯빛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제정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게 중요한데, 이대로라면 미쳐 버리고도 남겠다.
차준은 멍에와 같은 그를 덮어 두기 위해 다른 사람 생각을 하기로 했다.
그가 가장 행복했을 때, 그 행복을 함께 누려 준 사람.
‘맞다, 나봄이가 답장 보냈었는데.’
반가운 사실 하나를 깨달은 차준은 감정을 추스르고 휴대폰을 들었다. 액정을 켜자마자 떠오른 메시지는 역시나 기분 좋은 소식을 담고 있었다.
[그래요! 내일 봐요!]
아주 짧은 한 마디일 뿐인데, 칠흑같이 어둡던 차준의 마음에 밝은 빛이 찾아든다. 그녀는 아직도 그에게 동아줄 같은 사람이라, 온 힘을 다해 단단히 붙잡고 매달릴 수밖에 없다.
차준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은 욕심을 겨우 잠재워 두고 답장을 보냈다.
[그래♡]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니 끝에 붙은 하트가 살짝 부담스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뭐, 저걸 말로 풀어 내지 않은 게 어디야.
나는 사실 널 다시 본 그날부터 와락 끌어안아 버리고 싶은 걸 꾹꾹 참고 있었는걸.
.
.
.
우드레일 본사, 이사장실 앞 복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김 실장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인은 김 실장이 전담하여 모시는 서미란 대표였다.
차준에 관한 모든 일을 보고받는 그녀는 이번에도 역시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그래, 어떻게 됐어.
그리고 곧바로 본론부터 꺼내 물었다. 좋지 않은 결과를 전달해야 하는 김 실장의 얼굴에 착잡함이 드리워졌다.
“예상대로 격렬하게 거부하셨습니다. 순순히 따르실 기세는 절대 아니더군요.”
―그래?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잘 구슬려 보지 그랬냐고 핀잔을 주던 서 대표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되묻는 목소리엔 딱히 화난 기색도 없었다.
그게 더 불안하게 느껴졌던 김 실장은 휴대폰을 이사장실 쪽으로 고개를 틀며 물었다.
“다시 가서 설득해 볼까요?”
―됐어. 그런다고 해서 들을 애도 아니잖아.
“그럼 내일 서영 건설 외손녀분과의 저녁 약속은 일단 미뤄 두는 게…….”
―아니, 취소하지 마. 그럴 필요 없어.
이도 저도 아닌 대답을 하는 그녀는 다른 계획이 있는 게 분명했다. 눈치 빠른 김 실장은 그 뒤에 떨어질 명령을 잠자코 기다렸다.
―내일 선우차준 위치만 파악해서 알려 줘.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게.
그 말은 즉, 이번에도 어떻게든 밀어붙여 차준을 제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겠다는 뜻.
―아무리 발광을 해도 걘 내 손바닥 안이야. 어차피 내 아들이잖아.
이어지는 말은 차준이 들었다면 이성을 잃고 날뛰었을 말이었다.
내일이 지나면 한동안은 선우차준을 피해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며, 김 실장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위치는 주기적으로 보고 드리도록 하죠.”
이럴 줄 알고 순순히 말을 듣는 것이 좋을 거라 귀띔했거늘…….
선우차준은 제 형과 달리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제 엄마를 닮아 고집만 세서, 효과적으로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니 결국 철없는 아이처럼 악만 쓰다 끝날 것이다.
날개를 활짝 펼쳐 태양 근처까지 날아갔다가, 모두의 박수가 터져 나오는 순간 스스로 날개를 잘라 버렸던 선우태준과 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