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차라리 지구가 멸망해 버렸으면.
2017.05.26.
쪽―!
조용한 오피스를 채운 입술의 마찰음.
혀끝에 느껴지는 비릿함.
그리고.
“아…….”
조심스레 새어 나오는 그녀의 당황스러운 탄식.
그녀의 손가락 상처에 입을 맞춘 태오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긴 속눈썹만 파르르 떨었다.
차마 현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엄청난 일이 일어나 버린 지금.
태오는 차라리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릴까, 진심으로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마 그의 삶에 중대한 프로젝트 ‘Lily’가 없었더라면 기꺼이 그리했을 것이다.
“……뭐하는 거야?”
나봄은 일렁이는 눈빛을 띤 채 물었다.
태오는 그제야 입술 끝에 머금고 있던 그녀의 손을 살며시 떼어 냈고, 하얗게 비어 버린 머리를 굴려 얼토당토않는 대답을 내뱉었다.
“내가 뭐.”
그런 뒤 꼭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팩 떨궈 버린다. 머지않아 삐걱거리는 로봇처럼 돌아서는 그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내가 뭐냐니…….”
태오의 이런 행동은 패닉의 연장선이었으나, 그걸 알 리 없는 나봄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어 버렸다.
아무래도 초장에 기를 잡기 위해 사람을 당황시키는 모양인데, 이건 소위 말하는 갑질이 분명했다.
나봄은 그럴수록 그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당혹감을 뒤로한 채 심호흡으로 정신줄을 다잡으려 하자.
“심하게 다친 거 아니면 자리에 앉지?”
태오의 딱딱한 목소리가 곧바로 훼방을 놓았다. 하여간 저 녀석은 평정심 하나 찾을 시간도 주지 않는다.
심통이 난 나봄은 뾰족한 시선으로 그를 훑었다.
그리고는 태오의 맞은편 자리로 걸어가 드륵! 거친 소리를 내며 의자를 뒤로 당겼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란 태오의 시선이 곧장 나봄에게로 향했다.
잔뜩 얼어붙어 있는 그녀의 양 어깨는 어째 사무실에 들어서던 순간보다 더 경직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전 사건으로 인해 그녀의 경계심은 극에 달한 모양이었다.
그걸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던 태오는 변명하듯 말했다.
“잡동사니 집어넣을 용도로 대충 만들어 둔 거라 못이 튀어나와 있어.”
“그래서?”
곧바로 되묻는 나봄의 표정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따지는 듯했다.
하지만 태오는 수습할 수 없는 얘기를 두 번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아서 억지스러운 말을 이어 붙였다.
“말해 주려고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손부터 넣냐.”
의도는 그게 아니었으나 모양새는 명백한 시비였다.
나봄은 무언가를 얘기하려다 그냥 입술을 꾹 닫아 버렸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도 않다는 표시였다.
이로써 그녀와의 관계는 애써 꾸미고 온 옷차림이 무색할 정도로 어색하고 멀어져 버렸다.
오늘 나의 목표는 반갑게 인사하기, 무례하게 굴었던 지난날에 대해 사과하기, 나를 다시 볼 만큼 완벽하게 브리핑하기.
마지막으로 이 모든 걸 성공한 뒤 훨씬 편해진 분위기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 인데.
왜 난 순식간에 앞에 두 목표를 말아먹어 버린 걸까.
태오는 자신의 주제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애초부터 나봄에게는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친하다고 부를 수 있는 관계까지 못 되어도 좋으니, 적어도 다가갈 때마다 얼어붙지라도 않았으면 좋겠건만.
그렇게 바라는 이 순간조차도 태오를 바라보는 그녀의 온도는 쌀쌀하다. 그건 언제 느껴도 마음이 무너지는 광경이었다.
태오는 굳을 대로 굳어 버린 나봄에게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책상 위 브리핑 자료를 내밀며 딱딱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우린 업체 대 업체로 만난 거야. 둘이 있을 때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까지 사적인 감정 티내진 마.”
그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그 말은 나봄을 기가 차게 만들었다.
지금껏 업체 대 업체로 만났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막나갔던 건 단태오 본인이었는데, 뭘 모르는 것 같았다.
더는 억울함과 분함을 참을 수 없었던 나봄은 제법 단호한 말투로 받아쳤다.
“사적인 감정은 니가 조심해해야 할 것 같은데?”
“…….”
“다신 눈에 띄지 말라는 말 들어 놓고서도 이 자리에 나타나서 정말 미안한데, 악감정 너무 티내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어.”
그 말을 하는 나봄은 지금껏 단태오에게 보여 왔던 모습들 중 가장 프로페셔널하고 멋진 모습이었다. 덕분에 속이 조금 후련해진 그녀는 끝까지 도도한 표정을 유지한 채 브리핑 자료를 펼쳐 들었다.
그 순간.
“그래, 난 너한테 사적인 감정밖에 없어.”
여전히 자료에 시선을 고정시킨 태오가 나직이 말했다.
나봄의 말을 인정하는 사람의 말투치고는 딱딱하기 그지없는 톤이었다.
나봄은 그가 또 어떤 대꾸로 속을 뒤집어 놓으려나, 대기하며 두 눈을 태오에게 고정시켰다.
그러자 태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봄을 마주했고, 의아한 한 마디를 꺼내 놓았다.
“하지만 그게 악감정은 아니야.”
악감정이 아니면 뭔데?
나봄은 곧장 따져 물으려 했다. 하지만 입술을 움직이기도 전에 평소와는 조금 다른 그의 분위기를 읽어 버렸다.
단태오답지 않게 흐린 눈빛. 옅게 새어 나오는 숨소리.
이건 예전에 딱 한 번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연애라고 하지도 못할 짧은 관계를 끝내던 날, 그때도 태오는 이런 얼굴을 하고 나봄에게 말했다.
‘다시는, 내 눈 앞에 띄지 마.’
그러고 보면 지금의 이 표정은 폭발 직전에 내비치는 경고등 같은 건가.
어제 전화를 준 직원의 말대로 그와의 관계를 망치고 싶진 않았던 나봄은 이쯤에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태오를 향했던 시선을 자료 쪽으로 거둬 버리자, 아직 눈길을 돌리지 못한 태오는 이내 나봄을 향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뭘 했다고 저리도 지쳐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온갖 사고는 단태오가 일으키고 있는데, 어쩐지 내가 문제인 것 같아서 기분이 찜찜해진다.
* * *
‘완벽하게 브리핑하기.’
태오가 세워 둔 오늘의 목표들 중 그거 하나는 성공이었다.
비록 서먹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오프닝은 최악이었으나, 본론으로 들어가자 우드레일의 최연소 팀장다운 괴물 같은 업무 능력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오늘 전달받은 내용 중에 질문 있어?”
태오는 마지막 장에 다다른 브리핑 자료를 똑바로 덮어 두며 물었다. 그러자 내용에 집중하느라 경계하는 일도 잊고 있었던 나봄은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아니, 니가 워낙 설명을 잘해 줘서 전부 이해한 것 같아. 고마워.”
진심이긴 하지만 특별한 의미는 없는 멘트.
그걸 들은 태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의 말은 그녀에게서 처음으로 받아 보는 칭찬이었다.
‘그럼 지금 같이 점심 먹을래?’
이 여세를 몰아 건넬 제안은 혀끝에 장전되었다.
이제 최대한 무심한 목소리로, 들뜬 마음이 전혀 티나지 않게 툭 내뱉기만 하면 된다.
태오는 짧게 숨을 들이쉬었고,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그럼 난 가 볼게.”
하지만 첫 마디가 새어 나오기도 전에 나봄은 군더더기 없는 인사를 건넸다. 책상 위에 늘어져 있던 자료들은 어느새 야무지게 챙겨 가방에 넣은 후였다.
바삐 떠나는 사람을 붙잡아 다시 한 번 식사를 제안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바삐 떠나는 사람이, 건드리기만 해도 미모사처럼 움츠러드는 한나봄이라면 난이도가 상당했다.
지금껏 나봄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미련을 가져 본 적도, 아쉬운 소릴 해 본 적도 없었던 태오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 적당한 멘트를 생각했다.
‘시간 괜찮으면 점심 같이 먹을래?’
‘곱창전골 좋아해? 이 앞에 잘하는 집 있는데.’
‘점심 먹고 가. 내가 살게.’
그가 속으로 여러 가지 예시들을 나열하는 동안 나봄은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시간이 안 괜찮거나 곱창전골을 안 좋아할지도 모르니 세 번째가 낫겠다, 라고 결론지을 때쯤 나봄은 벌써 태오의 오피스 문 앞에 다다른 상태였다.
“크흠.”
태오가 헛기침을 할 때쯤 그녀는 문을 열었고.
“점심 먹고 가. 내가 살게.”
무심한 듯 자상하게 한 마디 툭 내던졌을 때쯤에는.
“안녕히 계세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아, 한봄 도어락에서 온 팀장님이시구나. 우리 쪽 팀장님 상대하는 건 어떠셨어요? 성격 참 까다롭죠?”
“아니에요, 도움 많이 받았어요. 워낙 설명을 잘해 주셔서.”
그녀는 아예 오피스를 빠져나가 유리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큰맘 먹고 내뱉은 권유는 듣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당황한 태오는 멀어지는 나봄의 뒷모습을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평소 직원들과도 식사를 잘 안 하는 태오는 그들이 모여 있는 작업장 한복판에서 나봄에게만 점심 식사를 요청하기가 민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둘만 있을 때 눈 딱 감고 말해 버릴걸.
그렇게 때늦은 후회만 거듭하며, 한 유명 노래의 가사처럼 이러지도 못하는데 저러지도 못하기를 몇 분.
“아까 팻말 부서트린 건 정말 죄송해요!”
“아아, 괜찮아요. 우리가 똑바로 안 세워 놔서 벌어진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요.”
“정말 친절하신 분이네요!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사이 나봄은 유리에게마저도 씩씩한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제야 정신줄을 붙잡은 태오는 자신이 또 한 번 기회를 놓쳐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미련 없이 멀어지는 나봄의 뒷모습을 보며 점심 식사 기회를 미뤄 놓던 그 순간.
“한나봄 씨!”
유리가 나봄의 이름을 불렀다. 앞으로 향하던 나봄의 두 발이 문득 멈춰 섰다.
“네?”
“시간 있으면 점심이나 먹고 가요. 이 앞에 괜찮은 곱창전골집 있는데, 아마 팀장님이 쏘실 거예요.”
태오가 준비했던 멘트 세 개를 전부 합쳐 버린 유리는 이 순간 그의 흑기사였다.
나봄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그녀의 제안을 곱씹었다.
그동안 태오는 숨까지 멈춘 채 이어질 대답을 기다렸고.
“좋아요!”
짧은 기다림 끝에 원하던 반응이 떨어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랑스럽다, 허유리 파트장.
당신이 오늘 아주 큰일을 해냈다.
* * *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근처 곱창전골 전문점.
단태오 팀장과 허유리 파트장이 인도해 온 이곳은 확실히 유명 맛집임이 분명했다. 한쪽 벽면에 붙은 연예인들의 사인만 봐도 얼마나 입소문을 탔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와아, 여기 Hi-No도 왔었네요. 진짜 유명한 곳인가 보다.”
나봄은 자신을 데리고 와 준 사람들을 위해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러자 유리는 입꼬리를 시원하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중요한 업체 분들 오시면 항상 대접하는 코스예요.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죠.”
“중요한…… 업체 분이요?”
“네, 한나봄 씨도 이제 우리한테 중요한 업체 분이잖아요. 그러니까 맛있게 먹어요.”
그리 말하며 생긋 웃는 유리는 중성적인 마스크가 무색할 만큼 사랑스러웠다. 아무래도 그녀는 선천적으로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비록 초면이지만 그녀를 의지하게 되어 버린 나봄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았으면 주문부터 해. 떠들고만 있지 말고.”
그때 태오가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불쑥 메뉴판을 내밀었다.
그토록 노리던 나봄과의 점심 식사인데 지금껏 그는 유리 때문에 그녀에게 단 한 마디도 걸지 못했다.
그래서 초조해진 만큼 퉁명스레 메뉴판을 내밀자, 유리는 옆에 앉은 태오를 툭 치며 핀잔을 놓았다. 함께한 시간만큼 단태오의 아이 같은 면엔 이골이 난 그녀였다.
“왜 손님한테 무례하게 반말을 하고 그래.”
“한나봄도 나한테 말 놔.”
“나봄 씨가?”
태오와 나봄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유리는 의아한 눈빛을 나봄에게 건넸다.
나봄은 혹시나 무슨 오해가 생길까 싶어,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단태오 팀장이랑 대학 동기거든요.”
“아, 원래 알던 사이였어요?”
“네. 졸업하고 처음 보는 거긴 하지만…….”
태오와의 관계를 말하는 나봄은 굉장히 어색해 보였다.
태오는 굳이 우리가 남보다 못한 사이라는 걸 티내는 그녀의 태도가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브리핑 전에 얘기했던 사적인 감정 문제를 한 번 더 언급하려던 그 순간.
“아! 그럼 단태오 첫사랑이 누군지 알겠다!”
주책맞은 허유리의 입이 괜한 소리를 꺼내 놓았다. 당황한 태오의 눈동자가 유리 쪽으로 홱 틀어졌다.
“단태오 첫사랑이요?”
나봄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유리에게 되물었다. 태오와는 겨우 2주밖에 사귀지 않았던 나봄은 그 첫사랑이 자신이라는 걸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을 알 길이 없는 태오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어느 날, 술을 엄청 많이 먹고 감성에 젖어 유리에게만 털어놓았던 미련이 이렇게 독이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 얘기 하기만 해 봐.”
태오는 서둘러 유리의 입을 막아 보려 했다. 하지만 유리는 사태의 심각성도 모르고 장난기 섞인 목소리를 기어이 이어 나갔다.
“단태오랑 저는 나름 오피스 절친이라서 이 얘기 저 얘기 다 하거든요. 그중에서 여자 얘기를 유독 안 하길래, 혹시 게이는 아닌가 의심했는데…….”
“하지 말라니까 진짜…….”
“대학교 때 첫사랑을 아직 못 잊었대요. 졸업한 지 벌써 4년이나 지났는데도 말이에요.”
“아, 허유리!”
결국 당사자 앞에서 첫사랑 얘기를 다 털려 버린 태오는 버럭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어색한 분위기를 푸는 것만 신경 쓰고 있던 유리는 ‘재밌는데 왜?’라는 뜻을 담아 어깨를 으쓱였다.
태오는 이 순간 그녀에게 진심을 다해 화내고 싶었지만.
“대학교 때 첫사랑이라…….”
유리의 얘길 들은 나봄이 조용히 흘려보내는 혼잣말을 듣자마자 입술을 꾹 다물어 버렸다. 이 이상 격하게 반응했다가는 분위기만 이상해질 게 뻔했다.
‘제발…… 제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으면.’
태오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빌고 빌었다.
어차피 지병처럼 품고 가기로 결심한 첫사랑, 들키지 않는 쪽이 살기에는 더 편했다.
허나 그 마음 하나도 몰라주는 나봄은 태오가 가장 두려워하는 맑은 눈동자를 그에게로 고정시켰다.
“니가…… 그런 사람이 있었어?”
그리고 정말 진심으로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맞이한 태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 왔다.
“뭐?”
“아니, 난 그냥…….”
“…….”
“너한테 그런 연애사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서…….”
그건 언제나 태오의 딱딱한 면만 보아 왔던 나봄으로선 충분히 가질 법한 오해였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만나긴 했어도, 그사이 겪은 단태오라는 남자는 연애와는 거리가 참 멀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함께 길을 걸어도 나봄보다 몇 발자국 빨리 가고, 무서운 영화를 못 보는 나봄에게 공포 영화를 보여 주면서도 딱히 챙겨 주지 않고.
심지어는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아무런 대화도 시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봄은 그와 딱 한 번 데이트해 본 뒤, 다음번에 만나면 바로 이별을 고해야겠단 결심을 했었다. 차마 남자 친구로 받아들이지도 못할 만큼 그는 정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아, 그러면 혹시 그때도 첫사랑을 못 잊고 있어서 나한테 쌀쌀맞게 굴었나!’
나름대로 태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나봄은 다시 유리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빛나는 그녀의 두 눈엔 순수한 호기심이 묻어 있었다.
“단 팀장님이랑은 너무 안 어울리는 얘기라서 궁금하긴 하네요.”
“그래요?”
“네, 연애랑 안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건 나봄이 생각하는 태오가 결코 좋은 이미지가 아니라는 걸 뜻했다.
하지만 태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저 오랜 시간 감춰 온 마음이 그녀 앞에서 강제로 까발려지지 않은 걸 다행스러워 하고 있을 뿐.
유리는 나봄에게 공감한다는 듯 크게 소리 내어 웃었고, 손까지 휙휙 저어 가며 너스레를 떨었다.
“푸핫! 연애라고 할 수도 없죠! 꼴랑 2주 사귄 모양이던데!”
그리고 저주 받은 주둥이를 또 한 번 거침없이 움직였다.
“네……?”
“그치? 2주 사귀면서 두 번째 데이트 때 대차게 차였던 거 맞지? 니 인생의 쌍년이라고 엄청 욕했었잖아.”
안도의 한숨을 내쉴 만큼 무방비하게 풀어져 있던 태오의 가슴에 떨어진 지구 멸망급 핵폭탄.
이보다 더 절망스러울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 태오가 숨까지 멈춘 채 나봄을 바라보았다.
‘2주’라는 엄청난 기한은 물론, ‘쌍년’이라는 험악한 욕설까지 들어 버린 그녀는 그저 놀란 얼굴로 얼어붙어 있었다.
아, 정말 간절히 바라건대.
차라리 지구가 당장 멸망해 버렸으면 좋겠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