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친한 친구의 조언을 조심하라.
2017.05.19.
“미쳤어! 미쳤어! 내가 아는 그 선우차준 선배?!”
나봄의 집 근처 고기집.
고등학교 때부터 쭉 인연을 이어 온 절친 채소라의 눈동자가 크게 휘둥그레졌다. 방금 전 나봄이 들려준 차준과의 드라마틱한 재회 소식 때문이었다.
그녀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머쓱해진 나봄은 방금 전 올려놓은 고기를 괜히 뒤집으며 대답했다.
“그래, 니가 아는 그 차준 오빠.”
“얼굴에서 자체 발광으로 빛이 뿜어져 나왔던 전설의 스포트라이트!”
“응, 맞아.”
“너의 순정을 홀라당 훔쳐 가 버린 천년의 첫사랑!”
“후, 훔쳐 가 버리다니…….”
“세상에나. 가끔씩 지금 뭐하고 사나 궁금했던 사람이었는데 본부장이었구나. 그것도 대기업 우드레일!”
소라는 오랜만에 들려온 차준의 소식을 심히 반가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선우차준을 잊지 못해 끙끙 앓던 나봄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두 눈동자에 호기심을 가득 채운 소라는 맥주잔을 들며 물었다.
“그 오빠가 너 알아는 봤어?”
“응. 알아보긴 하더라.”
“너 보고 뭐래? 반갑다, 보고 싶었다, 언제 밥 한번 먹자, 그런 소린 안 해?”
“아, 뭐…….”
그 질문에 굳이 대답하자면 ‘반가워했고, 보고 싶어 했고, 언제 밥 한번 먹고 싶어 했다’였다.
그러나 나봄은 곧이곧대로 털어놓진 않기로 했다. 자칫 괜한 기대를 하게 될까 봐서였다.
물론 차준이 데이트 신청을 하긴 했지만 그건 실없는 농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봄이 기억하고 있는 차준은 원래 별 뜻 없이도 가슴 설레는 말을 곧잘 꺼내 놓던 사람이었다.
언제나 곁에 있겠다는 말. 결혼은 꼭 나랑 하고 싶다는 말. 첫사랑이 이뤄지는 기적을 보여 주겠다는 말.
그 모든 말들을 전부 철석같이 믿어 버린 대가로 받은 건 미련밖에 없었다. 나봄은 과거의 일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어쩌다 보니 업체 대 업체로 다시 만난 것뿐이야. 의미 둘 건 없어.”
나봄은 소라의 앞 접시에 고기 몇 점을 올려 주며 말했다. 그러자 소라는 맥주잔을 시원하게 비운 뒤 테이블 위해 탕! 내려놓고는 소리쳤다.
“의미 둘 게 없다니! 첫사랑이랑 재회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닌데!”
“그래도…….”
“게다가 완전 벤츠 돼서 나타났잖아! 이건 잡아야 하지 않냐?! 너 그동안 그 오빠 때문에 연애도 제대로 못 했으면서!”
소라는 쉽게 얘기했지만 나봄은 도저히 동조할 수가 없었다.
다시 만난 차준은 분명 10년 전보다 성숙한 매력을 띠고 있었으나, 오히려 예전의 앳된 모습이 사라져서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으니 소라는 혀를 끌끌 차며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
“너 몇 달 전에도 술 취해서 그 선배 이름 불렀다.”
“그 얘기는 왜 또…….”
“그러니까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혹시라도 여지가 보이거든 잘해 봐. 그렇게나 못 잊고 살던 선우차준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뭐라도 해 봐야지.”
그녀의 말을 들은 나봄은 잠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그저 새하얄 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꿈속에서도 차준을 찾아 헤매던 나봄은 정말로 눈앞에 나타난 그를 아직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도 그리워해서 생겨나 버린 신기루는 아닐까 의심해 보기도 여러 차례였다.
“나는 못 잊었지만 그 사람은 아닐 수도 있잖아. 사람 인연이라는 게 나 혼자 어떻게 이어 본다고 해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나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작아질 대로 작아진 자신감만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소라는 그런 나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가벼운 헛웃음을 쳤다.
“하, 선우차준 마음은 니가 제일 잘 알지.”
“나?”
“한때 죽도록 사랑받아 봤으니까 알아차릴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리고서 툭 꺼내 놓은 한 마디는 나봄의 뇌리를 야무지게 치고 지나갔다. 휘둥그레진 나봄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내며 소라에게 향했다.
“무슨 뜻이야?”
“내 말은 미련 없는 사람 붙들고 늘어지라는 얘기가 아니라 혹시라도 여지가 보일 때 놓치지 말고 잘해 보라는 얘기야.”
“아, 어…….”
“그렇게 어버버거리지 말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살펴봐!”
소라가 힘주어 건넨 신신당부는 요 며칠 동안의 차준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봄만 보면 시종일관 햇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던 그는 바로 어제도 설레는 말만 골라 했었다.
‘주말에 다시 데이트하자.’
‘그땐 우리 둘이서만…….’
‘또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 모습과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해 주던 10년 전 모습을 비교해 보자면 솔직히 차이점을 찾지는 못하겠다.
그래서 그 사람이 건네는 눈빛 한 번, 목소리 한 번에 사정없이 휘둘렸던 나봄은 저도 모르게 들뜨고 만다. 꼭 첫사랑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처럼.
“볼 빨개지는 거 봐라. 하여간 못 말려.”
소라는 잔뜩 동요한 나봄을 흘겨보면서도 피식 실웃음을 흘려보냈다.
그간 남자에게 벽을 쌓고 살아왔던 나봄만 지켜봐 왔던 소라는 얼굴까지 붉히며 수줍어하는 지금의 나봄이 신기하면서도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쯤 되면 한나봄은 ‘선우차준’에게만 반응하는 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내 첫사랑은 다시 만나면 콱 물어뜯어 버리고 싶은데…… 한나봄 넌 좋겠다. 그렇게 근사한 남자가 첫사랑이라서.”
소라는 반쯤 진심이 섞인 농담을 흘려보내며 맥주잔을 들었다. 나봄은 더 이상 부인하지 않고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못 잊었지. 10년이 다 되도록.”
그리 말하는 나봄의 눈빛엔 여전히 첫사랑에 대한 미련이 담겨져 있었으나, 적어도 예전처럼 슬퍼 보이진 않았다.
오랜만에 눈물 없이 차준 얘기를 실컷 꺼내 놓은 지금.
나봄은 꼭 10년 전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앞으로 다가올 나날들이 너무도 기대돼서 가슴이 벅차 온다.
* * *
늦은 밤, 도곡동 타워펠리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차준은 유독 지쳐 있었다. 오늘 점심시간 직후부터 해가 다 저물도록 진행되었던 회의 때문이었다.
최근 우드레일에서 집중 투자 중인 ‘Lily’라인은 모든 부서가 전력으로 매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가구 시장에서의 주목도가 높아서 한 부분이라도 차지해 보려는 외주 업체들 간의 경쟁이 치열한데.
‘저는 이번 프로젝트를 한봄 도어락과 작업해 볼까 합니다.’
오늘 회의 시간에 차준이 선전포고한 내용은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한봄 도어락은 이 업계에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던 업체였기 때문이었다.
‘본부장님, 검증되지 않은 업체와 협약을 맺는 건 위험합니다.’
‘우리와 저번 프로젝트를 함께했던 케이 도어락과 계약을 이어 나가는 건 어떠십니까.’
모든 업체 사람들은 차준의 선택을 뜯어말렸으나, 그는 완강했다.
‘아니요, 한봄 도어락 제품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현장검증 결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할 정도의 규모가 된다는 것은 확인했고요.’
‘그래도 본부장님의 결정은 위험성이……’
‘게다가 저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케이 도어락과 손잡은 뒤로 불량품 신고가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그것만 봐도 그 업체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차준은 몇 시간 동안 쏟아진 반박들을 차분히 받아쳤다.
덕분에 낙하산이니 뭐니 하는 의혹들로 나빠진 이미지는 더욱 더 나락으로 떨어졌으나, 어차피 그에게 그딴 문제들은 별 상관도 없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최태영 부장은 차준에게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저로선 좀 의아하군요. 본부장님이 한봄 도어락에 집착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 겁니까?’
반드시 한봄 도어락이어야만 하는 이유.
가장 큰 이유는 대외적으로 말하기 힘든 사항이었다. 그래서 차준은 나머지 자잘한 이유들을 대며 사람들을 설득했다.
‘디자인이 마음에 드네요. 내구도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리하여 결국 아이처럼 고집을 부려 겨우 얻어 낸 한봄 도어락과의 협약 체결.
차준은 내일 그녀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생각에 마냥 기분이 들떴다. 한계까지 찬 스트레스도,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감도 그녀가 내비칠 밝은 미소 한 번에 말끔히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시간은 10년이나 흘렀는데 어째서 너는 아직까지도 예전 그대로인지 모르겠다.
성숙해진 이목구비가 무색할 만큼 너는 여전히 탐스럽고 사랑스럽다.
“하아…….”
차준은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미소가 스며드는 입술 새로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지친 몸을 거실 소파에 몸을 앉혀 놓았다.
“……전화하고 싶다.”
예전처럼 아무런 용건 없이 그냥 편하게.
“전화해서 뭐하고 있냐고 물어보고 싶다…….”
남몰래 드러내 보는 욕심은 아직 그녀에게 내비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직 차준의 앞에서 시종일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는 상태였다.
잃어버린 시간만큼 멀어진 것이 서럽기는 하지만 차준은 더 이상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기적적으로 우린 다시 만났으니, 10년 전 그날들을 되찾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때, 재킷 안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폰이 무섭게 울렸다.
차준은 혹시 그녀일까 싶어 휴대폰을 꺼내 들었으나, 이윽고 액정에 떠오른 발신자는 조금도 달갑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나봄을 회상할 때와 달리 차갑게 굳은 얼굴로 느리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한봄 도어락이 대체 어디니.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도 아랑곳 않고 본론부터 꺼내 놓는 건, 그의 어머니 서미란 대표의 몹쓸 특징이었다. 차준은 계속 두 눈을 감은 채 싸늘한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회사 업무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하지 않으셨나요? 그게 더럽게 바쁜 서울 본사를 맡은 조건이었는데…….”
―알아보니 한봄 도어락의 총괄 팀장이 한나봄이더구나. 혹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애니?
“멀쩡한 사람 멋대로 유부녀 만들어 놓고, 참 뻔뻔하게 그 이름을 입에 담으시네요.”
그리 말하는 차준의 목소리는 유달리 매서웠다.
그도 그럴 것이, 귀국하자마자 미친 듯이 나봄부터 찾아 헤맸던 그는 어머니가 건넨 청첩장 하나에 모든 걸 포기해야만 했었다.
그 덕에 멀어져 버린 그녀와의 시간이 자그마치 5년.
차준은 지금부터라도 온 힘을 다해 수습하고 싶었다. 그러니 사사로운 것까지 간섭하려 드는 서 대표는 제 선에서 멀리 치워 둘 생각이다.
“어머니, 기쁜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요.”
―뭐?
“먼저 기쁜 소식은 저 이제 독신주의 아니에요. 어머니가 원하던 대로 저도 결혼이라는 걸 해 보려구요.”
차준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동안 결혼만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버텨 오던 차준에게선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희소식이었다.
―드디어 너의 위치를 깨달은 모양이구나. 그래, 할아버지가 깨어나시면 널 정말 대견하게 여기실 거야.
차준의 결혼 문제로 골머리를 썩혀 왔던 서 대표는 그의 결심을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특히 이번 주에 억지로 끌고 가려고 했던 선 자리는 놓치기 아까울 만큼 좋은 자리였는데,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그녀는 드디어 제 뜻을 이해해 준 차준에게 들뜬 화답을 건네기 위해 입술을 떼어 냈다.
―그래서 말인데, 차준아.
“자, 그리고 이번엔 나쁜 소식.”
그러나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이어진 차준의 불길한 뒷말은.
“결혼할 여자는 제가 정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주말에 쓸데없는 약속 잡아 놓지 마세요.”
서 대표의 심기를 다시 한 번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오늘 회의에서 억지스럽게 한봄 도어락을 고집했다더니, 역시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서 대표는 차준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살벌한 협박을 내뱉었다.
―혹시 철없을 적 연애사를 이어 보고 싶은 생각이라면 관둬라. 할아버지가 깨어나시면 그 여자애부터 처리하려 드실 테니.
하지만 되돌아오는 건 차준의 비웃음뿐이었다.
“아하, 그럼 할아버지가 그렇게나 아끼시는 우드레일은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넘기셔야겠네요.”
―뭐, 뭐?
“또 한 번 헛된 일 벌리셨다간 다 때려치울 겁니다. 형 대타 역할 전부.”
그리 받아치는 차준은 서 대표를 피 말리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서 대표는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으나, 곧바로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럼 끊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차준은 일방적인 작별 인사를 마지막으로 망설임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핸드폰을 저 멀리 던져두었다. 그녀를 상대할 때마다 뻐근해져 오는 관자놀이는 오늘도 어김없이 욱신거렸다.
이럴수록 간절해지는 사람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 뜻에 따라 마음을 주었던 사람.
겨우 억눌러 놓은 욕심이 다시금 차올랐다. 차준은 지금 당장 그녀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그를 받아들이지 못해 겁먹은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10년 전 감정을 이어 나가고 싶다고 강요할 수는 없으니.
그녀 스스로 내게 다가올 때까지 등대처럼 버티고 서서 기다려 줄 생각이다. 두 번 다시는 서로가 서로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단 팀장님이 벌써부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시계를 잘못 봤습니다.’
갑자기 며칠 전, 서툰 거짓말을 하던 단태오 현장 팀장이 떠올랐다.
‘팀장님은 나봄이랑 계속 연락하고 지내셨나요?’
‘저희도 어제 오랜만에 만났어요.’
‘아, 그래? 반가웠겠네.’
‘어…… 하하, 네. 반가웠죠.’
딱딱하기 그지없던 나봄의 반응을 보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사람인 듯한데, 어째서 머릿속에 남아 버렸는지 모르겠다.
얼핏 익숙한 감정이 내비쳐져서였을까.
묘하게 의식이 된다. 대놓고 경계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 * *
우드레일 본사 15층 대규모 회의실.
최종적으로 선정된 ‘Lily’라인 외주 업체에 대한 브리핑이 끝났다. ‘한봄 도어락’에 대한 논란은 아직 말끔히 해결된 게 아니었지만, 결국엔 차준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는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드러내지 못하는 불만을 눈빛으로 교환하는 직원들 사이에서, 태오는 단연 돋보일 만큼 인상을 쓰고 있었다.
다른 이들처럼 차준의 결정이 불만스러운 건 아니었다. 그는 앞으로 수개월 간 나봄을 마주하고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염려스러울 뿐이다.
“단 팀장님은 계속 회의실에 남아계실 건가요?”
“아.”
심란함에 빠져 있느라 맨 마지막까지 회의실 한 구석을 지키고 있던 태오에게 차준이 다가왔다.
태오는 그에게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나가려고 했습니다.”
“아하, 현장으로 돌아가시나요?”
“네, 오늘까지 끝내야 할 작업이 있어서.”
“본사 직원들 살짝 어색하죠?”
“별로요.”
차준은 시종일관 건조하게 대답하는 태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노골적인 눈빛이 거슬렸던 태오는 떼어 내려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차준을 마주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아니요, 딱히 할 말은 없고.”
“그럼 이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차준은 형식적인 질문을 던지는 태오에게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반적인 업무 관련 얘기라고 생각한 태오는 별생각이 없었으나.
“나봄이랑 어떤 사이였어요?”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급격히 눈빛을 일렁였다. 쿡 찌르면 바로 반응이 오는 속도는 거의 무조건 반사 수준이었다.
“갑자기 한나봄 얘기는 왜 꺼내시는 겁니까.”
지나치게 날이 선 대꾸는 차준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차준은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그냥, 얼마나 친했나 궁금해서.”
“…….”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됐잖아.”
언뜻 듣기엔 별 뜻 없어 보이는 말이었지만 그건 차준이 태오에게 던져 놓은 미끼와 같았다.
어차피 단태오는 시시콜콜 제 얘기를 털어놓는 성격이 아니니 솔직한 대답을 들려주진 않겠지만, 적어도 찰나에 비치는 감정만큼은 숨기지 못할 터였다.
태오는 그런 차준의 눈앞에서 옅은 한숨을 흘려보냈고,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을 벌어 목을 가다듬은 그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둘도 없는 사이었습니다.”
“아하…….”
“죽고 못 살았어요.”
어차피 나봄에게 물어보면 금방 들켜 버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잠깐 동안이라도 믿게 하고 싶었다.
평소엔 타인에 대해 신경 쓰지도 않는 태오였으나, 이상하게 차준은 그의 신경을 꾹꾹 자극한다.
일단 눈 밑에 난 저 재수 없는 눈물점부터가 마음에 안 들어.
차준은 태오의 말에 잠시 당황하는가 싶었지만 이내 해맑게 웃어 보였다.
“두 사람, 정말 좋은 친구였구나.”
‘좋은 친구’라는 단어에 묘하게 힘이 들어간 것 같다면 기분 탓일까.
태오의 기분이 다시 한 번 바닥을 쳤다.
그의 저기압은 사납게 번뜩이는 눈빛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을 텐데, 차준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여유로운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그럼 나봄이에 대해서 잘 알겠네요. 저는 나봄이랑 오랫동안 못 보고 지내서 그런가, 데이트를 하려고 해도 그 애 취향을 모르겠어서 어려워요.”
“…….”
“토요일 강남 쪽은 어딜 가나 번잡할 것 같아서 되도록 예약해 두고 싶은데, 식사는 분위기 좋은 데로 잡아 두면 된다고 해도 영화는 뭘 골라야 할지…….”
차준의 입꼬리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힌다.
“아, 미안해요. 단 팀장님 스케줄도 바쁜데 너무 잡담이 길었죠?”
수줍게 웃어 보이며 넉살을 부리는 모습조차 태오의 눈엔 그저 자신의 존재감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꼴을 더는 봐 줄 수 없었던 태오는 서둘러 제 백팩을 한쪽 어깨에 멨다. 데이트하겠다는 얘기를 저리 빙빙 돌려 말하는 것도 어쩐지 재수 털린다.
“네, 바쁩니다. 그러니까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마음 같아선 뛰쳐나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도망치는 것 같아 보일까 싶어 선택한 느린 걸음.
차준과의 거리가 점차 멀어졌다. 덕분에 코를 얼얼하게 만들었던 그의 향수 냄새도 함께 흐려졌다.
그러나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이상하리만큼 선명해지는 게 있다.
‘한국대 나왔다고 했지? 거기 봄 되면 벚꽃이 정말 예쁘다고 하던데.’
‘네, 예뻐요. 향기도 정말 좋고.’
‘가장 날씨 좋을 때 보러 가고 싶어. 시간 되면 같이 가서 캠퍼스 구경 시켜 줘.’
‘캠퍼스라…… 벚꽃 말고는 볼 게 없기는 한데.’
‘학교 근처에는 맛집도 많지 않아?’
‘아, 있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김치찌개집!’
‘응응. 그럼 거기도 가자.’
‘그래요, 벚꽃 보고, 점심 먹고 근처에 자주 가던 카페에 들러서 오랜만에 라떼도 마셔야겠다.’
바로 차준의 곁에 있을 때만 새어 나왔던 나봄의 밝은 미소.
회의실 문을 빠져나가려던 태오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문고리를 잡은 채 가만히 굳어 있던 그는 천천히, 하지만 아주 처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도 차준은 회의실 책상에 가볍게 걸터앉아 지그시 태오를 바라보고 있던 중이었다.
넌지시 태오는 끓어넘치는 울화통만큼이나 시원스러운 웃음기를 입가에 머금었고, 하고 싶은 많은 말 대신 완벽하게 짜여진 대사들을 읊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제 개봉했다던 공포 영화로 예매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평이 꽤 좋던데.”
“공포 영화요?”
“네, 나봄이는 예전부터 공포 영화에 환장했거든요.”
나봄과의 데이트는 태오도 두 번이나 겪어 본 적이 있었다. 그중 한 번은 단둘이 영화관에서 영화도 보았다.
물론 나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태오는 인터넷에서 긁어 온 한 엉터리 연애 조언 글만 읽고.
“본부장님께 드리는 정말 좋은 친구의 팁입니다. 공포 영화 아니면 별 흥미 없어 하니까.”
나봄이 가장 싫어하는 공포 영화로 예매했다가 분위기 다 망쳐 버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