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숨결이 닿는 거리
2017.05.15.
“……나봄아.”
이름은 왜 성도 빼고 불렀는지 모르겠다.
“아…….”
왜 그녀 입에서 흐린 신음이 터질 만큼 꽉 안아 버렸는지 모르겠다.
나봄의 체온을 품안에 가득 담은 태오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느껴본 적은 2주간의 연인기간 중에도 없었다.
일렁이는 태오의 눈빛이 제 아래쪽으로 향했다.
늘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했었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드디어 손닿는 거리까지 들어와 있었다.
‘조금 더 만지고 싶어.’
마음속에서 휘몰아치는 본능을 느낀 순간, 태오는 곧바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이 두 개가 똑같다는 것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슬픈 일이었다.
“하아…….”
태오는 그녀에게 맥없이 휘둘리는 이성을 가다듬기 위한 한숨을 뱉어냈다.
“뭐하냐, 너.”
그리고 그녀를 감싸 안았던 두 손으로 매정히 어깨를 붙잡아 떼어냈다. 똑바로 마주본 나봄의 얼굴엔 당황감이 가득했다.
“아, 아…….”
나봄은 곧바로 태오에게서 두 발자국정도 뒷걸음질을 쳤다.
늘 어렵기만 했던 태오에게 폭 안긴 건 그녀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원래는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던 상대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란스러워졌다.
등을 옭아맸던 그의 감촉은 아직도 생생했다. 그리고 이름을 불러 주던 목소리는 아직 귓가에 묻어있다.
‘나봄아…….’
날 그렇게 부를 줄도 아는구나. 저 입에서 나오던 내 이름은 매번 딱딱하고 사납기만 했는데.
“나봄아, 괜찮아? 발목 삔 거 아니야?”
순간 부드러운 차준의 손길이 그녀의 몸을 돌려세웠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봄은 손사래를 치며 걱정하는 그를 달랬다.
“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한 발자국 걸어 봐. 혹시 아픈 데 있을 지도 몰라.”
“정말 괜찮아요. 다행히도 단태오가…… 아니, 단 팀장님이 붙잡아주셔서.”
그 말을 할 때쯤 나봄의 시선은 흘깃 태오에게로 향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향해있던 눈동자는 애먼 곳으로 어긋난 채였다.
나봄은 사과를 할까 했지만 입을 닫아두었다. 안 그래도 민망해진 상황이 더 어색해지면 곤란했다.
태오는 그런 나봄에게서 완전히 몸을 돌리고는 짧은 한 마디를 꺼내놓았다.
“발 밑 똑바로 보고 다녀라.”
사납게 느껴지는 목소리에는 아까 전의 온기가 전혀 없었다.
역시 대하기 어려운 성격이네, 라고 생각하며 나봄은 아까보다 조심스러운 걸음을 움직였다.
건물 밖까지 향하는 동안 태오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차준은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내지 않았다.
다가가기 어려운 뒷모습도,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길도 모두 신경이 쓰여서 나봄은 오늘 먹은 음식들이 모두 얹히는 기분이었다.
피 말린다는 표현이 어떤 기분인지, 제대로 알 것만 같다.
.
.
.
차준의 차를 타고 돌아온 한 사장의 공장.
차를 주차 시켜놓은 차준이 가장 먼저 차문을 열고 내렸다. 그리고선 곧바로 나봄이 앉아있던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내리시죠, 한 팀장님.”
다정한 손길과 함께 건네지는 목소리는 오늘도 여전히 부드러웠다.
나봄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어진 얼굴을 살짝 내리며 그의 에스코트를 따라 몸을 빼냈다.
뒤이어 차에서 내린 태오는 밝게 내리쬐는 햇살에 인상부터 찡그렸다.
“눈 아파.”
그 모습이 또 너무나 신경 쓰여서 흘깃 태오에게로 시선을 두었더니.
“아.”
나봄의 겁먹은 시선 끝에 단추가 떨어진 남방 소매 끝이 보였다. 원래는 굳게 잠겨 있었던 걸 떠올려보면 아까 그녀가 붙잡고 넘어졌을 때 떨어져 나간 모양이었다.
“저, 저기…… 태오, 아니. 단 팀장님.”
“뭐.”
나봄은 이 사실을 일러주기 위해 그를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굉장히 삐딱한 태도였다.
이해심 넓은 차준의 단추를 뜯어 먹었더라면 좋았을 걸. 어쩌다 저런 맹수 같은 놈에게 민폐를 끼쳐 버린 건지.
나봄은 떨리는 마음으로 넌지시 그의 소매 끝을 가리켰다.
“그거 나 때문에 떨어진 것 같은데.”
“…….”
“거기, 소매 단추 말이야.”
“아.”
태오의 입술 새로 짧게 터진 외마디는 탄식인지 한숨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괜히 입술만 깨물거리고 있자 태오는 나봄에게로 무심한 시선을 두었다.
“신경 꺼.”
“어?”
“아니…… 신경 쓰지 말라고. 괜찮으니까.”
다시 고쳐 말할 거면서 왜 항상 못된 말투부터 쓰는 건지.
나봄은 예전부터 태오에게 의아한 점이 참 많았다.
나를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모를 애매모호한 태도부터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까지.
그런 그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을 때면 왜 그렇게 불편하리만큼 경직되어 있는 거냐고 묻고 싶어졌다.
그래봤자 순순히 대답해 주거나 느슨해질 사람은 아니었지만.
“너그럽네요, 단 팀장님. 그럼 우리 이제 들어가서 내부 좀 살펴볼까요?”
언제나 여유로운 차준이 어색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제안했다.
덕분에 잠시 태오에게 어긋났던 나봄의 눈동자는 도로 차준에게로 옮겨 붙었다.
“네, 제가 사장님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이젠 속 좀 괜찮아지셨을지 모르겠어요.”
“괜찮으실 거예요. 조금만 안정을 취하면 금세 멀쩡해지시니까.”
할 일이 생긴 나봄은 자리를 떠나 서둘러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두 남자의 시선은 총총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따라갔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나 봐요.”
그러다 먼저 입술을 연 건 차준 쪽이었다. 순간 태오의 눈빛에 예리한 날이 섰다.
“그런 건 왜 묻습니까.”
“그냥, 뭐…… 분위기가 이상해서.”
차준은 싱긋 웃는 낯으로 태오를 마주보았다. 그가 워낙 촉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는 태오는 최대한 딱딱한 대답을 꺼내놓았다.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얼굴만 아는 정도였으니까.”
“아아, 난 또.”
“…….”
“단 팀장님 휘둘리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서 예전에 꼭 무슨 사이라도 됐었던 줄 알았어요.”
차준이 가볍게 던진 한 마디는 언뜻 듣기엔 실없는 농담 같았다.
하지만 태오에게는 와 닿는 의미가 컸다.
다른 사람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구나. 맥없이 휘둘리는 것처럼.
혹시 그녀에게도 다 티가 나고 있는 걸까.
“그럼 안에 들어가 있을까요? 오늘 단 팀장님도 이곳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착잡해진 태오를 두고 차준은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그의 모습은 늘 그렇듯 유유자적하기만 했다.
그러나 태오는 그를 따르지 않고 한동안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후우…….”
마른세수를 하며 긴 한숨을 내쉬는 태오는 벌써부터 심신이 지치는 기분이었다.
이젠 진짜 그만할 때도 됐는데. 나도 저렇게 그녀 앞에서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데.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추스르고 있던 그때.
“저기…….”
착잡한 그의 귀에 가는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존재감을 지워내려 할 때마다 귀신같이 나타나 다가오는 나봄의 목소리였다.
태오는 버릇처럼 미간을 좁히고 그녀에게로 시선을 내려두었다.
“왜.”
감정을 숨기려다보니 꺼내지는 말투는 유독 딱딱했다. 그때마다 흠칫하는 나봄의 반응을 보는 것도 참 착잡했다.
“니 거랑 비슷한 단추가 있어서 달아 주려고…….”
“…….”
“벗을 필요는 없고 잠깐만 손 줘봐.”
그의 앞에 나봄의 작은 손이 건네졌다. 뜻밖에 상황에 당황한 태오는 불안한 사람처럼 눈빛을 떨었다.
“손은 왜…….”
“단추 달아 준다니까.”
주고 싶지 않은데.
그녀가 재촉하듯 손을 흔들자 태오는 저도 모르게 단추가 떨어진 쪽 팔을 움찔했다.
그걸 허락이라고 생각한 나봄은 스스럼없이 그의 팔을 붙잡아 들었다.
“자, 원래 어디 붙어있었나…….”
나봄은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소매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시선은 분명 아무런 감촉이 없을 텐데 닿는 부분마다 간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머릿속을 비우고 있으려 했는데, 속도 모르는 나봄은 그 예쁜 목소리로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본부장님은 어디 계셔?”
“…….”
“아, 벌써 들어가셨나? 우리 아빠는 옷만 다시 갈아입고 오신다는데.”
“…….”
하나도 대답하지 못했다. 혹시나 그녀가 싫어하는 냄새가 스며있을지 모를 숨을 참기 위해.
“됐다.”
그 사이 바느질을 끝낸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태오의 손을 놓아 주었다.
다시 그에게로 향한 그녀의 얼굴엔 좀처럼 보여 주지 않던 살가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어때. 다른 단추인 거 하나도 모르겠지?”
“어…… 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하던 태오는 그녀가 실을 끊어내기 무섭게 손을 되가져왔다. 반쯤 나간 이성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아, 혹시 담배 피우려면 흡연실에서 피우고 와. 뒤쪽에 있어.”
나봄은 홀로 가만히 서있던 태오에게 넌지시 일러주었다.
그러자 태오는 일렁이는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나 담배 안 피워.”
본인조차 이해하지 못할 거짓말을 했다.
휘둘리지 않겠다고. 더 이상 그녀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으면서.
나봄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맺혔다. 가까이 다가섰을 때 알싸한 향기를 맡았던 그녀는 태오가 분명 흡연자일 거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하지만 대충 ‘다른 사람한테서 담배냄새가 배어들었나 보다’ 이해하며 그녀는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아, 그렇구나. 그럼 안으로 같이 들어가자.”
나봄은 사무실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태오는 아주 오랜만에 그녀의 곁에 섰다.
단 두 번의 데이트에서 그녀와 함께 걸을 수 있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보다 더 긴 시간동안 그녀를 지켜봐 왔던 태오는 보폭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한 뼘 반 정도 짧은 보폭으로 반 박자 느리게 걷는다.
“앗, 리본이 삐뚤어졌네.”
이제 차준 앞에 서서 이것저것 안내해야 하는 나봄은 서둘러 옷매무새를 고쳤다.
태오는 그런 그녀에게 온 신경을 쏟아 붓고 있다가 그녀의 시선이 닿는 쪽 머리를 쓱쓱 매만졌다.
아, 이제 정말로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난 다시 그녀에게 잡아먹힌 모양이다.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걸이, 박자에 맞춰 움직이는 두 팔, 그리고 어색하게 흘러나오는 숨결에서까지.
감춰둔 마음이 수습하지 못할 만큼 삐져나오고 있다.
* * *
두 시간 가량에 거쳐 진행된 현장검증이 끝났을 때.
“아아아! 자네가 그놈인가! 대문 앞에서 우리 딸이랑 뽀뽀하다가 들켰던 놈!”
뒤늦게 10년 전 나봄의 남자친구 차준을 알아본 한 사장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아빠!”
차준을 스스럼없이 ‘그놈’이라 칭한 한 사장이 당황스러웠던 나봄은 버럭 성질을 내듯 그를 불렀으나, 정작 차준은 넉살 좋게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네,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냈지. 그때 맞은 등짝은 무사한가!”
“비 오는 날 가끔 욱신욱신 해요.”
“푸하핫, 그 넉살은 여전하구만.”
비록 첫 만남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한 사장은 그 뒤에도 스스럼없이 집 앞으로 찾아와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건네던 차준이 제법 마음에 들었었다.
떠오르는 옛 추억을 잠시 회상하고 있었던 그는 나봄과 미묘하게 닮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번듯하게 자라서 내 기분이 다 좋네.”
“만족스럽게 여겨주시니 다행입니다.”
“아참, 아무리 내 딸 전 남자친구라도 업체 본부장님인데 이렇게 편하게 대하는 건 실례지!”
“아빠, 쉿. 사적인 자리도 아닌데 그만 얘기해요.”
나봄은 자꾸만 과거 관계를 들먹이는 한 사장의 입을 서둘러 막았다. 공장 내부 사진을 몇 장 찍고 돌아오는 태오 때문이었다.
그냥 선후배 사이었다고 해도 그렇게나 탐탁지 않아했는데, 전에 사귀었다는 사실까지 알면 분명 연줄로 어떻게 해 보려한다고 뭐라 그럴 거야.
“검증도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행히 태오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는지 돌아오자마자 딱딱하게 작별인사부터 건넸다.
한 사장은 차준을 대할 때와 달리 한층 경직된 태도로 정중히 묵례를 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현장팀장님.”
태오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이 어려운 분위기가 풀어질까 고민했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또 뵈어요, 아버님.”
하지만 그 사이, 곁에 있던 차준이 인사를 하는 바람에 화답할 타이밍이 사라졌다. 결국엔 한 사장의 인사를 개무시한 꼴이 되자 태오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이 안 되려고 작정했나 보다.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더 이상 일을 망치고 싶지 않았던 태오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준은 한 템포 늦게 몸을 돌려 손 인사를 하며 멀어졌다.
“안녕히 가세요, 본부장님.”
그런 그에게 나봄이 공손히 인사하자 한 사장이 그녀의 어깨를 툭툭 밀었다.
“왜, 왜 그래요.”
“가서 더 얘기 좀 나누다 와.”
“예?”
“너 한동안 쟤 못 잊지 않았었냐? 이런 기회가 왔으면 붙잡아야지.”
나봄은 딱히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한 사장이 떠민 탓에 어정쩡하게 한 발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이 어색한 자세로 서 있는 것도 이상했기에 그녀는 막 운전석 문이 닫힌 차준의 차로 다가갔다.
지이이잉―
운전석 창문 앞에 멈춰 서기가 무섭게 창문이 열렸다.
아까보다 살짝 풀어진 넥타이를 하고 그녀를 바라보는 차준의 얼굴은 오늘도 여전히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녀는 습관처럼 떨려오는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보자는 한 마디를 꺼내려는데.
“귀 가까이 대볼래요?”
차준이 손짓을 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자극적인 부탁에 당황한 나봄은 선뜻 고개를 들이밀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네……?”
그러자 차창 밖으로 뻗어 나온 차준의 손은 그녀의 블라우스 리본 끈을 살짝 끌어당긴다.
가까워진 차준의 눈물점은 오늘도 세상의 모든 매력을 끌어모아 찍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인력처럼 이끌려 간 차준의 입술 옆에선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덕분에 온몸이 아찔하게 달아오를 때쯤, 차준은 그녀의 귓가에 부드러운 음성을 흘려보냈다.
“주말에 다시 데이트하자.”
“…….”
“그땐 우리 둘이서만…….”
다시…… 데이트?
우주를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정신이 멍해진다. 차준은 그 말을 끝으로 순순히 리본 끈을 놓아주었지만 나봄은 좀처럼 똑바로 서질 못했다.
그래서 그 상태 그대로 살짝 고개를 틀어 그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더니,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차준의 옅은 살구빛 입술이 움직였다.
“또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뭐라고 하는지는 하나도 안 들린다.
그저 눈앞에 차려진 이 남자의 입술을 확 머금고 싶다는 욕심만 그녀를 뒤흔들 뿐.